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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 제목이 무엇입니까? 해피엔딩입니다. 해핑엔딩이 무엇입니까? 너무나 뻔한 것을 물어 봅니까? 끝이 잘 되는 것이 해피엔딩입니까?
삶이란 뿌린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뿌리지 않고 거두는 것을 사기라고 합니다. 내가 심지 않고, 내가 돈으로 주고 산 과수원의 나무의 열매를 내가 딴다면 그것은 도둑이겠지요. 사과나무를 심으면 사과를 따는 것이고, 배나무를 심으면 배를 따는 것이지요. 사랑의 나무를 심으면 사랑을 따는 것이고, 믿음의 나무를 심으면 믿음을 따는 것이지요. 콩 심은 곳에 팥이 날이 없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삶의 진리 아니겠습니까?
아름다운 삶은 그 열매도 아름답게 되어 있습니다. 과정이 좋았다면 그 아름다운 열매를 누리는 분들의 마음이 더욱 기쁘겠지요. 해피엔딩이란 아름다움을 심어서 아름다운을 거두는 것을 말합니다. 내 손이 수고한 노력의 댓가를 얻는 것이 해피엔딩입니다.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왔던 나오미와 룻, 그리고 그들과 인생의 같은 배를 탈 수 밖에 없었던 보아스는 그 열매를 얻고 기쁨을 누립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해피엔딩이 아니라면 이상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해피엔딩으로 끝이 납니다. 우리의 믿음의 사람의 삶은 해피엔딩입니다. 성경의 제일 마지막은 하나님께서 고생하고 수고한 우리를 기쁘게 맞이하시고, 고생한 우리의 눈에 눈물을 씻겨주시고,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심으로 끝이 납니다. 해피엔딩입니다.
우리는 오늘 그 열매를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같이 나누어 보겠습니다.
손해가 있을까 하여
보아스는 룻의 시아버지와 더 가까운 사람과 담판을 하기 위하여 성문에 올라가 앉습니다. 1절입니다. 같이 볼까요?
[1]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라고 말씀합니다. 성문에 올라가 앉는 것은 무엇인가 해결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기다리던 사람이 지나갑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야할 사람이 지나갑니다. 보아스는 정중하게 그 분을 모십니다. 보아스의 청함을 받은 사람도 이런 상황이면 깨달았을 것입니다. 보아스가 무엇인가 할 이야기가 있구나! 보아스와 두 사람이 만납니다. 무엇인가 해결 하고자 할 때에 꼭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증인입니다. 보아스는 증인을 초청합니다. 2절입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2]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
장로 10명을 청하여 증인으로 삼고 보아스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를 풀어 갑니다. 안건은 “엘리멜렉의 가정의 기업을 무르 건”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나오미와 룻의 삶과 생활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나와 관계없는 사람의 삶을 책임진다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럽겠습니까?
그것이 부담이었는지 모르지만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6절입니다.
[6]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그는 왜 기업을 무르지 못했습니까?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라”손해를 생각하여 기업 무르는 모든 권한을 보아스에게 일임한 것입니다.
자신에게 있을 손해를 생각합니다. 이런 손해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상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거지같은 삶을 살아가는 그 사람들의 삶을 책임 진다는 것이 억울하겠지요. 당연히 물질로는 손해가 나겠지요. 왜 손해가 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자신을 방어합니다. 그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라고 말입니다.
인생은 나를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부지만 부부와 싸우는 것은 나를 위하기 때문 아닙니까? 그러기에 내 것을 지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재산을 지켜야합니다. 명예를 지켜야 합니다. 우리 자녀를 지켜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업 무르기를 거부한 이 사람은 현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것을 돈이나 물질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 본 룻, 참 좋은 여인이었습니다. 헌신의 여인이었고, 희생의 여인이었고,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향하여 이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여인입니다. “당신은 현숙한 여인입니다.”
룻을 알 수 없는 시기라면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룻에 대한 소문이 났습니다 어떤 여인인지 압니다. 그런 여인을 자기 집에 드리는 것 자체가 복 아닐까요? 물질은 조금 손해를 보겠지만 또 다른 면에서 본다면 이 여인이 집에 들어옴으로 인하여 집안 분위기가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더 많은 기쁨을 얻게 되고, 즐거움을 누리게 되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이사를 합니다. 방과 거실을 아름다운 색으로 칠합니다. 부족하면 벽지를 바릅니다. 그곳에 액자를 놓습니다. 돈이 좀 들어가지만 그렇게 합니다. 왜 돈을 들여서 이렇게 합니까?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하면 더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서 돈을 쓰기를 아까워 하면서 벽에 칠도 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진정 나를 위한 일일까요?
나를 위해서 돈을 벌고, 그 돈을 쌓아두고, 딱딱한 침대에서 잔다면 그것이 진정 나를 위한 일입니까? 진정으로 행복한 일이 무엇입니까?
진정 나를 위한 일이 무엇일까요? 행복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돈을 벌어도 행복해 지기 윈하여 돈을 버는 것 아니겠습니까?
보아스는 재산을 조금 잃을 것입니다. 조금의 재산을 잃는다고 보아스가 손해를 보는 것일까요? 진정 손해 인지 앞으로 우리가 살펴 볼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물질만으로 손익을 계산합니다. 과연 세상 모든 것을 현찰화 해서 계산할 수 있는 것일까요? 돈으로 살 수 없는 더 좋은 것들이 세상이 더 많은데 말입니다. “나를 위하여” 여러분들은 진정 나를 위한 일을 하십니까? 나를 위한 다고 엉뚱한 일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보아스가
보아스가 기업을 무르고 룻을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13절입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삶의 덤을 짊어져야합니다. 분명히 부담이 갑니다. 그러나 즐겁게 감당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 부부에게 바로 임신의 은혜를 주시고,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기업을 무르자 그를 축복하는 사람들의 말이 재미있습니다. 우리 12절을 같이 볼까요?
[12]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축복대로 보아스는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는데 그를 통하여 대를 이어 나갑니다. 17절을 볼까요?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기업 무름으로 인하여 현숙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잠언 31장 10절을 보면 현숙한 여인의 축복을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
그렇다면 기업 무르기를 거부한 사람은 가치 판단을 잘 못한 것이지요.
본문 13절을 보니깐 “여호와께서”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을 받는 것이지요. 대를 이을 아들도 얻었습니다. 주변의 사랑과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하여 그 이름을 알리셨습니다.
만일 기업을 무르지 않았다면 보아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에 어떤 선택이 더 가치 있고, 좋은 선택이었을까요? 나를 위한 것이 진정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 가치 있는 선택이 무엇인지를 잘 생각하십시오. 진정 유익한 선택이 무엇인지를 잘 생각하십시오. 혼자 똑똑한 척하고 영양가 없는 것을 선택하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복이 함께 하는 길이 가장 바른 선택 아니겠습니까?
룻을 맞이하여 아내를 삼고
룻의 입장에서 볼까요? 룻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3장까지에서 그녀가 할 일을 다했습니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감탄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았습니다. 사랑하며, 인애를 베풀고 살았습니다. 먹기 위하지만 얼굴에 철판을 깔고, 구걸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보다도 자신의 시어머니를 위하여 살았습니다. 작은 일이지만 구걸하는 일이지만 열심히 이삭을 주웠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녀가 결정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와 함께 살아야 할 사람은 그녀가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룻의 경우를 보니깐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용서하는 것도 내가 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베푸는 것도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 받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기다림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하여 기다리듯이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녀가 할 수 없는 것을 주셨습니다. 해피엔딩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룻에게 남편을 주셨습니다. 그것도 아주 좋은 남편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책임감 있는 남편입니다. 성실한 남편입니다. 결혼하자마자 아들도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여자로 태어나서 가장 가치 있는 이름은 이런 것일 것입니다. “남편에서 듣는 여보”라는 아름, 아이들에게서 듣는 “엄마”라는 이름, 이런 것들은 여인의 삶의 가치요, 존재입니다. 여인으로서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 바로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룻은 이제 여자로써, 아내로써, 어머니로써 그 모든 이름을 다 얻게 되는 것이지요.
특별히 자신의 아이를 통하여 남편의 대를 잇게 됩니다. 이 또한 얼마나 큰 축복이겠습니까?
룻에게 있어서 이 보다 더 좋은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아름답게 살면 아름다운 일들을 얻게 됩니다. 내가 가질 수 없지만, 내가 선택할 수 없지만 좋은 일들이 따라 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는 것만 가진다면, 그래서 너무 뻔한 것이 인생이라면, 인생 얼마나 재미없습니까? 예측하지 못했던 경험도 하고, 기대하지 못했던 더 좋은 것을 얻기도 하고,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룻의 삶의 열매가 우리에게 이러한 아름다운을 보여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글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내가 살아 보니까”라는 글입니다.
내가 살아보니까
사람들은 남의 삶에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다.
그래서 남을 쳐다볼 때는 부러워서든, 불쌍해서든
그저 호기심이나 구경 차원을 넘지 않더라
내가 살아보니까
정말이지 명품 핸드백을 들고 다니든,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든
중요한 것은 그 내용물이더라
내가 살아 보니까
남들의 가치 기준에 따라 내 목표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나를 남과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시간 낭비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 가치를 깎아내리는 바보 같은 짓인 줄 알겠더라
내가 살아보니까
결국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니고 알맹이더라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이더라
예쁘고 잘 생긴 사람은 TV에서 보거나 거리에서 구경하면 되고
내 실속 차리는 것이 더 중요하더라
재미있게 공부해서 실력 쌓고
진지하게 놀아서 경험 쌓고
진정으로 남에 대해 덕을 쌓는 것이
결국 내 실속이더라
내가 살아보니까
내가 주는 친절과 사랑은 밑지는 적이 없더라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한 시간이 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루가 걸리지만
그를 잊어버리는 것은 일생이 걸린다는 말이더라
내가 살아보니까
남의 마음속에 좋은 추억으로 남는 것만큼
보장된 투자는 없더라
서강대 영문과 교수 였지요. 지금은 고인이 되신 장영희 교수의 산문집, “살아 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란 책 속에 “내가 살다 보니까”라는 제목으로 쓰인 글 중의 일부입니다.
“내가 주는 친절과 사랑은 밑지는 적이 없더라.”,
“남의 마음속에 좋은 추억으로 남는 것만큼 보장된 투자는 없더라.”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나오미를 볼까요? 돌아올 때에 그녀는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룻기 1장 19절을 같이 볼까요?
이에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조롱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은혜의 징표가 되었습니다. 그 은혜를 사람들은 찬양하고 있습니다. 14절을 같이 볼까요?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룻이 낳은 아들로 인하여 그녀의 삶에 생명이 회복되었습니다. 이 날을 어찌 기쁨의 눈물 없이 지낼 수 있겠습니까? 나오미는 이 아이를 품에 안고 양육자가 됩니다. 16절입니다. 같이 볼까요?
[16]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얼마나 아름다운 결말입니까?
말씀을 맺겠습니다.
아름다운 삶이 만들어 내는 열매는 이렇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은 해피엔딩임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우리가 누릴 아름다운 끝을 위하여 노력해 가시지 않겠습니까?
세상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세상이 우리를 노엽게 할지라도......,
아름다운 끝을 믿으며, 오늘도 그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아름다운을 심으며, 살아가시지 않겠습니까? 사랑을 심으며, 인애를 뿌리며, 서로에 대한 믿음을 뿌리며, 살아감으로 우리 이런 아름다움 열매를 같이 누려보시지 않겠습니까?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해피엔딩을 위하여 이번 주 한주도 선한 것으로 심으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