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 지역에 정확히 언제부터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뮈텔 주교 일기”를 보면 1900년 12월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홍천에 사는 신학생 김 바오로의 형을 만났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1903년 풍수원 본당 교세 보고서에 송정(현 홍천군 화촌면) 공소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공소 설립 시기는 1902-1903년 사이로 추정된다. 현 홍천 성당에서 12㎞ 떨어진 송정리는 박해시대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들어와 터를 일구고 산 옹기촌으로 유명했다.
풍수원 본당의 관할이었던 송정 공소는 1920년 춘천 곰실(현 죽림동) 본당이 설립되자 소속이 변경되었다가, 1923년 6월 본당으로 승격되어 초대 주임으로 황정수(黃貞秀) 요셉 신부가 부임하였다. 2대 주임 김경민(金慶旻) 루도비코 신부는 송정리가 홍천 읍내와 멀리 떨어져 있어 이후 교세 확장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현 성당 터인 홍천군 희망리 부지를 매입하여 성당을 신축하였다. 하지만 실제 본당의 이전은 3대 주임 심재덕(沈載德) 마르코 신부 재임기인 1936년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1939년 강원도 지역 사목이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로 위임되면서 골롬반회 소속 신부들이 본당 사목을 담당하였다. 한국 전쟁이 종료될 즈음 9대 주임으로 부임한 최동오(崔東五) 아타나시오 신부는 1953년 9월 전쟁으로 파괴된 목조 성당을 재건하였으며, 이듬해부터는 여러 가지 재정적 · 물질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현 성당의 신축 공사를 시작하였다.
한편 한국 전쟁 중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죽음의 행진’을 경험하고 본국인 오스트레일리아로 추방되었던 8대 주임 크로스비(P. Crosbie, 조선희) 필립보 신부는 1954년 8월 입국하여 10대 주임으로 재부임하여 성당 신축 공사를 이어 나갔으며 사제관 신축 공사도 실시하였다. 크로스비 신부는 한국으로 오기 전 프랑스에 들러 큰 종을 사서 화물선에 부치고 돌아왔는데, 현재 그 종이 종탑에 걸려 있다.
홍천 성당 건축과 강원도 내륙 지방 복음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크로스비 신부이다. 그는 홍천을 중심으로 인근 리(里) 단위 마을까지 걸어 들어가 3개였던 공소(결운 · 송정 · 물걸리)를 15개로 늘리고 12동의 공소 강당을 신축하는 등 교세 확장에 크게 힘썼으며 성모회 및 레지오 마리애를 창단하였다. 그런 가운데 신축 성당과 사제관이 1955년 4월 완공되었고, 1957년 8월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분원이 마련되었다.
1955년 석조 성당이 완공된 뒤 옛 목조 성당은 강당으로 사용하면서 신자들의 행사 장소 뿐 아니라 홍천 주민들에게 유일한 문화 공간 역할까지 했다. 볼거리가 없던 시절이라 신자들이 예수 성탄 대축일 전야에 성탄 연극을 공연하면 주민들이 모두 몰려와 관람했다고 한다. 그 시절의 빛바랜 공연 사진들이 교육관 내 유물 전시관에 걸려 있다. 신자와 읍내 주민들에게 크리스마스 겨울밤의 추억을 남겨준 목조 건물은 1978년에 철거되었다.
11대 주임 킨(M. Keane, 張) 마티아 신부는 1962년 7월 예수 성심회를 창립하였으며 본당 단독으로 아치에스 행사를 실시하였다. 13대 주임 머피(C. Murphy, 전) 고르넬리오 신부는 1968년 서석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켰고, 1970년 8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분원을 철수시켰다. 14대 주임 김정식(金晶植) 토마스 신부는 1975년 포항 예수 성심 시녀회(현 예수 성심 시녀회) 분원을 마련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성산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 · 분리시켰다.
15대 주임 오상철(吳相喆)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는 부임 직후 성당 및 각종 부속 건물들이 노화되었음을 보고 본당 보수 공사를 전면적으로 실시하였으며 1979년에는 처음으로 본당 주보를 발행하였다. 같은 해 10월에 포항 예수 성심 시녀회 분원을 철수하고 수녀원 및 강당을 새로 신축하여 이듬해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분원을 재설립하였다. 16대 주임 이정행(李正行) 요한 신부는 안나회 · 성모회 등 본당에 여러 사도직 단체들을 마련하여 신자들이 활발한 본당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1985년 10월에는 교육관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17대 주임 맹석철(孟石鐵) 바오로 신부는 1989년 4월 본당 묘지 확장 작업 공사를 실시하였고 이듬해 4월에는 본당 주임을 세 차례 역임했던 크로스비 신부의 금경축 행사를 진행하였다. 맹 신부는 사제관(60평) 신축 공사를 시작하여 1992년 12월 축복식을 거행하였으며, 노인 복지 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 1994년 5월과 11월 양로원인 ‘안나의 집’과 ‘요아킴의 집’을 각각 개원하였다. 19대 주임 임헌규(林憲圭) 안셀모 신부는 1996년 5월 전체적인 성당 보수 공사를 진행하였으며 9월에는 강당 증축 공사를 시작하여 12월에 완료하였다.
요셉회 · 빈첸시오회 · 전례단 등의 사도직 단체 창립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임 신부는 1997년 3월 본당을 분리하기 위해 신축 부지를 매입하였다. 부지가 마련되자 ‘신설 본당 설립 추진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999년 7월부터 성당 신축 공사가 시작되어 8월에 연봉 본당이 분리되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춘천교구 설립 60주년 주부 지역 신앙 대회’가 본당 마당에서 개최되어 성직자와 평신도 16,000여 명이 참가하였다.
20대 주임 김재복(金載福) 모세 신부는 부임 직후 본당 신자들의 교적을 정리하여 효율적인 본당 사목을 위한 행정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21대 주임 허동선(許東善) 마태오 신부는 2002년 9월 본당 내에 연도실과 안치실을 마련하여 축복식을 가졌으며 이듬해 6월에는 본당 설립 8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허 신부는 낙후된 본당 시설물의 개선 및 증설, 지역민들을 위한 문화 프로그램 마련 등을 중심으로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미군 공병대의 도움과 최동오 신부와 크로스비 신부 그리고 신자들의 헌신으로 건립된 홍천 성당은 삼마치 고개에서 채석해 온 돌에 홈을 파서 끼워 넣는 식으로 외벽을 축조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성당 바닥 나왕마루는 50년 세월이 흘렀는데도 멀쩡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군데군데 ‘삐꺽’거리는 소리가 나기는 해도 비교적 양호하다. 그 비결은 마루 아래 공간이 유난히 넓은 데다, 습기를 방지하려고 그 안에 새끼줄 타래를 깔아 놓은 데 있다.
홍천 성당은 1950년대 석조 성당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축물로 보존 및 연구 가치가 높아 2005년 4월 15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62호로 지정되었다. 그 후 지방자치단체 지원을 받아 한 차례 보수작업을 벌였다. 정면과 측면 강화유리 문을 동판으로 교체하고, 창문에 부착된 스티커도 떼어 내고 스테인드글라스를 입혔다. 그대로 놔뒀던 제단 벽면 바로 아래 제대(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사제가 벽을 바라보고 미사를 봉헌한 제대)를 철거하고 제단도 석조물로 새로 꾸몄다. 또한 안나의 집 증개축과 기도실을 신축하여 2006년 12월 17일 춘천교구 장익 주교의 주례로 중창(重創) 축복식을 가졌다. [출처 : 홍연주,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2권과 평화신문, 2007년 12월 16일, 김원철 기자의 기사를 중심으로 편집(최종수정 2011년 11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