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어컨은 사람을 위해 만든것이 아니었어요 ◈
폭염과 열대야가 유별났던 이번 여름도 끝이 보일 듯 하면서
추석 연휴에도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어요
이 지겨운 더위를 이겨내게 한 일등 공신은 누가 뭐래도 에어컨이지요
그러나 며칠 있으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하지요
8월 전기료 고지서에 담길 ‘냉방비 폭탄’이 바로 그것이지요
그나마 다행(?)은 정치권이 ‘전기 요금 포퓰리즘’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지요
전력산업의 구조적 문제는 외면한 채 역대 모든 정부가
전기료를 싸게 묶어둔 결과라 할수 있어요
한국갤럽 조사에 의하면 국내 가구당 에어컨 보급률은
2023년 현재 98%로 전기밥솥보다 더 많아요
가구당 몇 대씩인 경우가 많아 실제로는 그보다 조금 더 많을수도 있지요
아무튼 ‘보유율’ 대신 ‘보급률’이라는 말이 통용될 정도로
에어컨은 더 이상 사치품이 아닌 생필품이 되었어요
일반 가정은 물론, 공장, 오피스, 학교, 호텔, 식당, 상가, 문화시설,
자동차, 심지어 공중화장실과 엘리베이터에서도 에어컨 냉기가 돌고 있지요
번화가에서는 ‘개문 냉방’이 예사이지요
템플스테이나 고택스테이도 에어컨 없이는 인기가 없어요
물론 이는 세계적 추세이지요
짧은 여름과 낮은 습도, 신기술에 비협조적인 고(古)건축물들,
도시 미관을 위한 실외기 규제, 높은 전기 요금 등을 이유로
오랫동안 에어컨을 외면해 왔던 유럽 국가들도 지구온난화 이후
사정이 달라졌어요
‘노 에어컨’ 올림픽을 표방했던 프랑스도 결국 휴대용 에어컨의
자비 반입을 허용했지요
중국이나 인도, 동남아, 중동에서도 에어컨 열풍이 거세고 있어요
현재 전 세계에 10억 대가 설치되어 인구 7명당 1대라는 통계도 있지요
공기의 온도와 순환, 순도, 습도를 제어하는 현대식 에어컨은
본래 인간을 위해 탄생한 것이 아니 없어요
20세기 초, 미국 뉴욕의 어느 인쇄 공장이 고온다습한 기후 탓에
제품 관리에 애를 먹던 과정에서 개발되었어요
초기에는 인공 냉방에 대한 거부감이 컸지요
하지만 창시자인 윌리스 캐리어는
자신의 이름을 딴 에어컨 회사를 차렸고,
용처를 산업 현장을 넘어 생활 세계 전반으로 확대하였어요
머지않아 인류 문명은 에어컨 이전과 이후로 나뉠 정도가 되었지요
1998년 타임지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명 중 하나로
캐리어를 선정했어요
열대우림에서 선진국을 창조해 낸 리콴유 싱가포르 초대 총리는
에어컨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 극찬했지요
그런데 에어컨에는 미덕이 많아요
온열 질환 예방을 위시하여 산업 발전과 기술 혁신,
거주 가능 면적 확대, 의료·보건 증진 등에 이바지한 측면이 엄청나지요
하지만 부작용도 만만찮아요
각종 냉방병이 대표적이지만 친환경 건축 정신을 저하하고
도시 과밀 및 난개발을 촉진한다는 점에서도 해악이 크지요
무엇보다 더위 퇴치에 관련하여 에어컨은 자기모순적이지요
기후 위기 시대의 생존 필수품이라고 하지만
쓰면 쓸수록 그것을 가속화하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단점들은 기술 진보에 따라 언젠가 바로잡힐지 모르지요
문제는 오히려 사회문화적 차원에 있어요
에어컨은 인류 보편적 숙원을 해결한 것이 아니라
특정 시·공간의 사회적 필요에 따라 ‘역사적으로’ 등장했을 뿐이지요
에어컨에 의해 우리는 부지불식간 바깥 기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순종적 신체로 개조되어 왔어요
그러다가 마침내 우리 스스로 에어컨 중독을 향유하고
소비하기에 이르렀지요
이른바 ‘냉방 자본주의’는 쾌적한 노동 및 생활환경을 제공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효율성과 성과주의를 강박하는 사회 시스템이 되었어요
에어컨이 궁극적으로 조절하는 것은 공기가 아니라 사람인 것이지요
어찌보면 에어컨 시대에 들어와 우리는 여름 특유의 계절감을 잊은 채
자연을 추상적으로 경험하게 되었어요
예전에는 너무 더울 때 낮잠을 자거나 일찍 퇴근하거나 며칠 일을 쉬었지요
땀 흘리는 것도 삶의 소중한 일부였어요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더위를 이겨내는 심리적 및 생물학적 내성을
잃어가고 있지요
더욱이 에어컨은 사회적 관계를 단절하고 있어요
과거의 여름날은 바깥을 향해 있었지요
사람들은 그늘이나 마당, 옥상, 골목에 모여 더위를 함께 쫓았어요
하지만 에어컨 천국의 ‘집콕’·'방콕’ 문화는 사람들을 섬처럼 분리하지요
1995년 시카고에 기록적인 폭염이 덮쳤을 때
생사는 에어컨 소유 여부가 가르지 않았어요
관건은 사회적 고립과 지리적 단절이었지요
이젠 에어컨 없던 시절로 돌아가긴 어려워요
에어컨 없는 여름은 상상하기 어렵지요
하지만 적어도 이런 현상들을 알고나 쓰면 좋겠어요
그러면서 에어컨의 고마움도 잊지 말어야 하지요
-* 언제나 변함없는 조동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