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에서 ‘친구 요청’을 받기만 하다가 ‘친구 요청’을 해 이틀 동안에 십여 분의 새 친구가 생겼다.
늙은(만 65세가 되면 모두 늙은이다) 시골 농부인데도 불구하고, 내겐 친구 요청이 많이 들어 온다.
열 분이 요청하면 수락은 두세 분 정도로 친구 받아들이는 데 인색하다.
‘수락과 거절’, ‘요청’에 신중을 기한 결과일 것이다.
프로필과 게시물을 꼼꼼히 보고 난 후에 수락이나 거절 여부를 결정하고, 요청을 한다.
고향에서 농부로 사니 만나는 친구는 모두가 혈연, 지연, 학연으로 이미 연이 맺어진 사이다. 이곳에서는 좋고 싫고가 없고, 취향과 소통 같은 것은 별로 역할을 못 한다.
나처럼 게으르고 성의가 부족한 사람은 직접 만나지 않는 옛 친구는 가깝게 지냈다 해도 모두 두절 상태다.
나의 친구는 SNS에 존재한다.
친구는 주관적인 자기 생각이다.
사랑과 행복, 친구 등 고귀한 것은 모두 주관적이다.
SNS 친구 사이에 의견 대립이나 기분을 거슬리게 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
페이스북에 가입한 지 이제 3년이 조금 지났는데, 약 2년 동안에는 그런 일들이 간혹 있었지만, 2년이 지나면서 없어졌다.
나는 친구들의 게시물에 우호적인 공감의 표시와 댓글만 달고 비판은 하지 않는다.
내 게시물에 비우호적인 댓글을 다는 사람은 보자마자 친구 끊기나 차단을 한다.
친구를 위한 책선(責善)과 비판의 중요성을 내가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나는 이미 사고가 굳어질 대로 굳어진 꼰대다.
쉰이 넘으면 사고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하는데, 하물며 내일 모래 고희가 되는 사람에게 사고가 바뀌길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논쟁하는 사람보다 이야기하는 사람이 더 함량이 크다.
이야기하는 사람보다 시를 읊는 사람의 함량이 크다.
시를 읊는 사람보다 소리를 다루는 사람이 함량이 크다.
소리를 다루는 사람보다 몸을 다루어서 춤을 추는 사람이 함량이 크다.”
윗글은 철학자 최진석 교수의 유튜브에 나오는 말씀으로 ‘함량’은 덕(德)이고, 시선의 높이를 가리킨다.
내가 생각하기에 페이스북의 경우 ‘논쟁’은 정치에 관한 글이다.
나도 이런 ‘논쟁’의 글을 간혹 쓰지만, 되도록 삼가하려고 노력한다.
‘이야기’는 진솔한 자기 서사(敍事), 스토리(Story)일 것이다.
최진석 교수의 윗글에 따르면, 허구한 날 정치성 글을 올리는 사람은 함량이 가장 낮은 부류에 속한다.
대학교수든 언론인이든 정치인이든 일반인이든 모두 그렇다.
함량이 가장 높은 사람은 무용가가 될 터인데, SNS에서 춤추는 모습은 희귀하다.
최진석 교수가 말하는 춤은 예술성을 가진 품격이 높은 무용을 의미하는 것 같다.
나는 이야기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이야기를 잘하고 못하고는 따지지 않는다.
자기 이야기라면 내용이 빈약하고, 표현이 다소 어설퍼도 좋다.
그리고 시든, 소리든, 사진이든, 그림이든, 무엇이든,
자기 이야기를 곁들인 것이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