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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Hawkins 스크랩 영적교사와 가르침 의식수준 400 ~/ David R. Hawkins
텅빈충만 추천 0 조회 412 17.10.27 18:3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Apocrypha(외경, 위경)

유대인들로 이루어진 에세네파 공동체의 매우 중요한 책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들의 문서보관소의 일부가 1947년 팔레스타인 사해 근처 쿰란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제1동굴에서 발견된 일곱 두루마리들 가운데 마지막 것인 이 두루마리는 보존상태가 가장 나쁘다. 이 두루마리 전체를 검토해보면 〈창세기〉에 등장하는 주요인물들에 관한 미심쩍은 과장된 이야기 모음이지, 애초에 추정한 것처럼 오래전에 상실된 〈라멕 묵시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내용은 라멕 이야기(1~5), 노아 이야기(6~15), 인류의 계보(16~17), 아브라함 이야기(18~22) 등 4개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이 작품은 에세네파의 성서해석법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며, 많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창세기〉를 각색한 위경인 〈요벨서〉와 매우 비슷하다. 이 두 책은 계산법이 각각 다르기는 하나 모두 달력에 관심을 보인다. 이 두루마리는 〈에녹 1서〉와 관련된 자료들도 갖고 있기 때문에, 아마 〈요벨서〉와 〈에녹 1서〉의 대본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팔레스타인에서 아람어로 씌어진 이 두루마리는 아람어로 쓴 위경들 가운데 첫 저서이며, 아람어 발전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저작연대는 BC 1세기 또는 AD 1세기로 거슬러올라간다. 그러나 원본의 저작 연대는 이 두루마리가 히브리어 원본의 번역본이나 아람어 원본의 변형본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판단하기 어렵다.

영지주의(Gnosticism)는 고대에 존재하였던 혼합주의적인 종교 운동 중 하나이다.[1][2][3] 그리스어로 '신비주의적이고 계시적인 지식, 깨달음'을 가리키는 그노시스(γν?σι?)로부터 따와 그노시스파, 또는 그노시즘이라고도 하며, 이러한 낱말은 주로 이 운동의 반대 세력에 의해서 붙여졌다.[4] 이 종교 운동의 분파들 중 기독교 계통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단순히 기독교인이라 불렀다.[4][5] 영지주의 운동은 특정한 한 형태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1][5][6] 영지주의는 다양한 신앙 체계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우주데미우르고스라고 불리는 불완전한 신이 창조했으며, 이 때 데미우르고스는 최고신프뉴마를 일부 사용하였다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분파와 무관하게 대체로 일치하는 견해를 보였다.[7] 이 교리에서, 데미우르고스는 종종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과 동일한 신으로 생각되며, 플레로마(Pleroma)나 신성과 같은 상위의 세계 또는 존재와 대비된다.(다음백과)

영적교사

의식

수준

영적(이론서)가르침

의식

수준

윌러스 블랙엘크

499

양자역학

499

간테 뚤쿠 린포체

499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카프라)

460

에릭 버터워스

499

성과 속 /엘리아데

420

잠양 칸챠

495

우리는 신이다(페테르 베르베)

410

나낙

495

Apocrypha(외경, 위경)

400

드룩센 린포체

495

Gnostic gospels(그노시스 영지주의 복음서)

400

아레오파고스의

디오니시우스

490

사해문서

260

어네스트 홈스

485

채널링

195

쉬르디 사이바바

485

구약

190

올더스 헉슬리

485

여신운동

190

루드비히 폰 버타란피

485

보름달 회합

180

에마 커티스 홉킨스

485

천국의 문 컬트

160

로버트 먼로

485

star children

160

G.맨리 홀

485

유란시아서

150

앨런 워츠

485

STAR PEOPLE (이데올로기)

145

스와미 붓다난다

485

5세계의 도래 (이데올로기)

130

충량 알 황

485

라엘리안 (이데올로기)

130

루돌프 오토

485

마야종교

95

C.W.리드비터

485

우파 근본주의기독교 이데올로기

95

엠마누엘 스웨덴보그

480

탄트라 (현대의)

95

폴 틸리히

480

아즈텍 종교

85

조엘 골드스미스

480

옴 진리교

85

아차리아

480

잉카종교

85

쿠숨 린파

475

신약성경(킹 제임스판 요한계시록을 뺄 경우 계시록)

70

강가지

475

이스터 석상

70

리드 하카말 무케르지

475

UFO는 사실?

100

루돌프 슈타이너

475

컬트

50-

160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475

히말라야에서 만난 성자

부정적

가덴 샤르체

470

우주심과 정신물리학

부정적

에메트 팍스

470

클로디오 나란조

465

람첸 갈포 린포체

460

에벌린 언더힐

460

데미우르고스에 대한 견해는 분파들 사이에 큰 차이를 보였다. 어떤 분파는 데미우르고스가 악의 물질적 화신이라고 주장한 반면, 다른 어떤 분파는 최고신에 비해 불완전한 선한 신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영지주의 운동은 헬레니즘 철학, 유대교, 기독교와 영향을 주고받았다.[5][8] 영지주의는 이원론적인 종교 운동이었으나[8], 발렌티누스주의와 같은 후대의 영지주의 운동은 일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졌다.[9] 데미우르고스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함께 이러한 세계관의 다양성은 영지주의 운동에 여러가지 다양한 입장들이 서로 공존하였다는 것을 나타내는 지표로 간주되기도 한다.

영지주의 운동가들은 그노시스를 통해 인간의 참된 기원이 지고한 신성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 깨달음을 통해 인간의 성품 중 영적 요소는 물질계를 벗어나서 자유롭게 된다고 주장한다.[5][10][11] 따라서, 영지주의 운동에서는 그노시스를 인간이 물질계로부터 해방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필수적인 요인이자 구원의 수단으로 여겼다.[10]

영지주의 운동가들은 인간을 영적인 인간, 정신적인 인간, 물질적인 인간의 세 부류로 구분하였으며[4][12], 이들 세 부류의 사람들 중 영적인 인간과 정신적인 인간만이 그노시스를 가질 수 있으며[12], 물질적인 인간들은 그노시스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이들은 물질적인 인간들이 물질에 너무 몰입해 있으며, 따라서 더 수준 높은 실체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12][13]

일부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를 지상의 인류를 구원할 수단인 그노시스를 인류에게 가져다 주기 위하여[4], 지복(至福)의 플레로마를 떠나 고통이 가득 찬 물질계에 탄생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는 희생을 한 존재로, 지고한 존재의 물질적 화신이라 여겼다.[6][14] 노쯔림만다야교 등의 다른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를 "거짓 메시아"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예수가 세례자 요한이 위탁하여 맡긴 가르침들을 타락시켰다고 생각하였다.[15] 어떤 가르침에서는 예수가 아니라 마니와, 아담하와의 셋째 아들인 을 구세주라고 생각하기도 한다.[16]

오랫동안 많은 학자들이 영지주의 운동은 기독교의 한 분파로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 탄생 이전, 즉 서력기원의 몇 세기 전에도 영지주의 체계의 자취가 남아 있다는 다른 학설이 제기되었다.[3][17] 영지주의 운동은 3세기에 이르기까지 로마 제국고트족의 점령지, 또 사산 조 페르시아의 영토 등, 지중해 세계와 중동으로 전파되고 발전하였다. 그러나 니케아 공의회와 여타 다른 칙령들을 통해 로마 가톨릭교회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파괴되는 등의 일이 있었던 4세기에는 가톨릭교회의 탄압으로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 시기에 영지주의 문헌들의 거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사라졌으며, 영지주의 반대자들이 영지주의를 논박하기 위한 문헌의 근거 자료로 소수의 단편들만이 살아남았다. 나그함마디 문서가 발견된 1945년까지 영지주의 연구자들은 이러한 자료들을 토대로 추론에 근거한 연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5][17] 4세기 이후에는 많은 수의 영지주의자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였으며, 남아 있는 유럽의 영지주의자들도 알비 십자군의 활동으로 인해 그 수가 크게 감소하였다. 그러나 소수의 만다야교 공동체들이 현대에도 남아 있다.[5] 영지주의 사상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유럽북아메리카에서 있었던 많은 신비주의적 운동의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4][5] 이들 중 일부는 자신들을 이전에 있었던 영지주의 운동의 부활 또는 연속이라고 생각한다위키백과

 

베티 이디(Betty J. Eadie)


어머니가 수(Souix)족 인디언이었던 베티 이디(Betty J. Eadie)는 미국 네브라스카 주의 시골 마을과 사우스다코다 주에 있는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자랐다. 1973년 11월, 당시 31세로 일곱 아이의 엄마였던 베티 이디는 부분 자궁절제 수술을 받으러 병원에 입원하게 되는데 그녀는 수술을 받은 날 밤 합병증으로 잠시 동안 의학적으로 사망하게 된다. 그녀는 죽어 있는 동안 육체를 벗어나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게 되고 빛의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그 존재의 빛에 감싸여 인생의 의미, 창조 등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 대답을 듣고 난 그녀는 다른 영들의 인도로 영계의 여러 곳을 방문한 후 다시 육체로 돌아와 살아나게 된다. 베티 이디는 살아난 이후 황홀한 빛의 존재들과 헤어져서 다시 지상에 돌아왔다는 사실에 상당기간 우울 증세에 시달렸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담을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에게만 이야기하고 대외적으로 공포하지는 않았으나, 그녀의 아름다운 경험담을 다른 사람과도 나누어야 한다는 주위의 권유에 따라 20년 후인 1992년 그녀는 자신의 경험담을 책으로 쓰게 된다. 1992년 네바다 주의 조그마한 출판사를 통해 출판된 그녀의 책 “그 빛에 감싸여(Embraced by the Light)”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며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1위를 일년 이상 지키는 화제의 책이 된다. 현존하는 임사체험기 중 최고로 꼽히는 이 책은 조그마한 부피의 책 속에 어떻게 그토록 많은 내용이 담길 수 있을까하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혹시 읽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일독을 권한다. 이하에서 그녀의 책 “그 빛에 감싸여” 중 일부분을 발췌하여 소개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일찍이 겪어 보지 못한 깊디깊은 암흑이었다. ....... 이 암흑 덩어리 내부에서 나는 말할 수 없는 안락함과 평온함을 느꼈다. .....  나는 빛의 속도로도 측량할 수 없는 엄청난 속도로 그 깊은 어둠 속을 지나갔다.

 ...............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한 줄기 아주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나를 감싸고 있는 흑암의 덩어리는 점차 터널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고, 내가 한층 빠른 속도로 그것을 통과하여 그 빛을 향하여 돌진하고 있음을 느꼈다. ......  그것(빛)에 접근하면서 나는 그 빛 속에 누군가가 서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를 둘러싼 사방에서는 온통 빛이 발산되고 있었다. 내가 더 가까이 가자 빛은 찬란히,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태양보다도 훨씬 더 찬란한 빛을 냈고, 자연 상태에 있는 어느 인간의 눈도 이 빛을 보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오직 영적인 눈만이 감당해 낼 수 있고 그것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의 빛이 정말 나의 빛과 섞이는 것을 느꼈고, 나의 빛이 그의 빛으로 끌려가고 있음을 느꼈다.

어디서 한 빛이 끝나 다른 빛이 시작되는지 분간하기 힘든 상황에서 두 빛은 바로 하나의 빛이 되었다. 비록 그의 빛이 내 것보다 훨씬 더 밝았지만 나의 빛도 우리를 비추고 있음을 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빛이 합쳐지자 내가 마치 그의 면전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며 절대적인 사랑의 폭발을 느꼈다.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느껴본 적이 없는 가장 무조건적인 사랑이었으며, 그가 두 팔을 벌려 나를 맞으려 하자 난 그에게로 가서 완전한 포옹을 받고 난 후, 몇 번이고 “저는 집에 왔습니다. 저는 집에 왔습니다. 마침내 집에 왔습니다.”라고 되뇌었다.』


『나는 세상에 왜 그렇게 교회가 많은지 알고 싶었다. 어째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유일한 교회, 하나의 순수한 종교를 주시지 않았을까? 그 해답은 가장 순수한 이해의 형태로 다가왔다. 우리들 각자는 서로 다른 영적발전과 이해 수준에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수준의 영적 지식이 필요한 것이다. ...... 한 개인이 하나님과 그 자신의 영적 발달에 대한 이해수준이 높아지면, 그는 현재 교회의 가르침에 불만을 느끼고, 그 공백을 메울 다른 종교나 철학을 찾을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됨에 따라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교회나 종교를 비판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저마다의 시각에서 그들은 모두 귀하고 중요하다.』


『나는 무엇보다도 사랑이 최고임을 배웠다. 정말로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서로 돕고, 보살펴 주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서로서로를 섬기려고 이 세상에 있는 것이다. .......  미소, 격려의 한마디, 작은 희생 등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그 보람이 있음을 나는 알았다. 이 같은 행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성장한다.』


『우리 생각에는 힘이 있다. 우리는 생각에 의해 자신의 환경을 창조한다. 물리적으로 보면 일정한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영적으로는 그것이 순식간이다. 우리 생각이 지닌 힘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그 생각을 좀 더 단단히 지키려 할 것이다. 또 우리가 하는 말에 얼마나 두려운 힘이 존재하는가를 알게 된다면, 부정적인 것이라면 거의 어느 것이든 입을 다물어 버리는 쪽을 선호하게 될 것이다.』 (베티 이디(Betty J. Eadie), "그 빛에 감싸여(Embraced By The Light)", 정신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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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컬트화학의 탄생



[애니 베산트 여사와 찰스 웹스터 리드비터]




아일랜드의 자유사상가


애니 베산트는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그 자신은 늘 아일랜드 여인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실제로 그의 어머니는 아일랜드 여인이었으며, 아버지도 절반은 아일랜드 혈통이었습니다. 애니 베산트는 매우 뛰어난 직관력과 즉문즉답의 재치를 지니고 있었는데, 이러한 그녀의 매력은 혈통과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애니 베산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지만, 신앙을 넘어 이해를 구하고자 했던 그녀의 영적인 열망은 교회를 떠나 자유사상가가 되도록 이끌었습니다. 스무 살에 이미 성직자와 결혼을 한 베산트는 아들과 딸을 각각 하나씩 두고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매우 끔찍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며 순교의 영광스러운 순간을 꿈꾸기도 했던 베산트는 남편의 물리적인 학대와 결혼생활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결심합니다. 그런데 독약을 들이키려는 순간 허공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목소리는 “아, 짧은 불행의 기간을 견디지 못하고 순교나 꿈꾸는 소심하고 비겁한 이여”라며 단호하게 꾸짖었는데, 그 목소리가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불쾌하거나 몰인정하게 들리지는 않았습니다. 베산트는 그 즉시 독약이 든 병을 창 밖으로 내던졌으며, 결코 그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베산트는 어린 딸을 데리고 남편으로부터 떠났으며, 곧 자유사상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녀는 뛰어난 웅변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지만 종교적 편협함에 대한 비난은 보수적인 그 당시에 많은 반대자를 만들어냅니다. 첫 번째 시련은 피임에 관한 팜플렛을 출판했을 때 찾아왔는데, 피임은 이미 그 당시 다른 출판물에서 아무런 문제없이 거론되었던 주제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대자들이 압력을 넣어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팜플렛을 판매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베산트는 이 일을 출판의 자유에 대한 억압으로 보고 출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웠습니다. 그녀는 당시 함께 일하던 브래드래프와의 공동 명의로 팜플렛을 재인쇄하고, 법정에 기소되었을 때도 직접 나서서 변론을 했습니다. 그들은 초심에선 패했지만 항소 끝에 승리하였고, 목표를 달성하자 팜플렛의 유통은 정지시켰습니다. 팜플렛을 그녀의 명의로 재출판했던 일은 사람들이 그녀를 ‘피임 운동’과 동일시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첫 번째 소송사건이 끝나자마자 두 번째 소송사건이 일어났는데, 그녀의 남편이 그녀의 사상을 문제삼으면서 어린 딸의 양육권을 박탈해 가려 한 것입니다. 이번에도 베산트는 모든 법적인 문제와 장애물들에 대처해 가면서 직접 변호에 나섰지만 판결에서는 패했으며, 양육권의 박탈로 큰 비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아이들은 나중에 성년이 되어 어머니의 열렬한 성원자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목소리


그 뒤 애니 베산트는 런던대학에서 과학을 공부하였고,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강의도 하였습니다. 페이비언(점진주의자들)협회와도 교류하였으며, 1885년에는 성냥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파업을 이끌어 승리하는 등 여성권익의 향상을 위해서도 끊임없이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애니 베산트는 자유사상가로서 품게되는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들에 뭔가 불만족스러운 것이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당시에 유행하던 강신술이라든가 최면 같은 것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비록 그 현상들이 흥미롭기는 했지만 애니 베산트는 그 속에서 사후세계에 대한 명확한 증거나 논리적인 설명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애니 베산트는 두 번째의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데, 런던의 한 사무실에 앉아 진리를 찾는 것에 대해 실망하고 있을 때 또 한 번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입니다. 그 목소리는 이렇게 묻고 있었습니다. “너는 진리를 배우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겠느냐?” 베산트는 머뭇거리지 않고 즉각적으로 “예, 주님(Yes, Lord)”하고 대답했는데, 그 목소리는 그녀가 자살을 하려던 순간에 들려왔던 목소리와 똑같은 목소리였습니다.

불과 며칠 후 한 평론지의 편집자가 베산트에게 어떤 책에 대한 논평을 부탁했는데, 그것은 바로 블라바츠키 여사의 『씨크릿 독트린』이었습니다. 그 편집자는 그의 젊은 스탭들 누구도 두 권으로 된 방대한 분량의 책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베산트만큼은 여기에서 뭔가 끌어낼 수 있을 만큼 이 주제에 빠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베산트는 그 책을 읽는 순간 마치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진리의 통합체가 갑자기 가슴속으로 번쩍이며 파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베산트는 저자와의 인터뷰를 요청했고, 블라바츠키 여사를 보는 첫 순간부터 애니 베산트의 전 생애는 완전히 바뀌고 말았습니다. 세속의 친구들과도 그녀 스스로 멀어졌고, 그 동안 힘을 기울여왔던 사회운동으로부터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녀가 접한 새로운 진리의 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확고하게 세상에 봉사를 하는데 영감을 주었는데, 그것은 과거처럼 세상의 다양한 부조리들에 어설프게 땜질하는 식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지배하는 법칙을 근본에서 다룸으로써 세상의 악을 소거할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베산트는 블라바츠키 여사의 제자가 된 후 곧 모리아 대사와 직접적인 관련을 갖게 되는데, 그가 바로 베산트가 처음 자살을 생각했을 때, 그리고 나중에 사무실에 앉아 실의에 빠져있을 때 그녀에게 말을 걸었던 목소리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애니 베산트]




인도의 어머니


블라바츠키 여사가 사망한 후 2년 뒤에 애니 베산트는 인도로 갑니다. 인도에 도착하기 전부터 베산트는 인도를 ‘어머니 조국’으로 부르곤 했는데, 신지학과 블라바츠키 여사를 알기 전부터 인도를 옹호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베산트는 블라바츠키 여사와 마찬가지로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는 위대한 여행가였지만 주로 인도에 살면서 신지학 활동을 하였는데, 단지 인도인과 함께 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인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삶을 살았습니다.

신지학의 역사에서 애니 베산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큽니다. 블라바츠키 여사 사후 가장 뛰어난 연사와 저자로서 신지학을 대표하였으며, 1907년 올코트 대령이 사망한 후에는 제2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193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신지학 협회를 크게 확장시키는 등 많은 일을 합니다. 그녀가 저술한 신지학 서적만도 50권이 넘습니다. 그러나 많은 인도인들이 베산트 여사를 신지학자가 아닌 정치가, 또는 사회개혁가로서 기억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여사가 인도를 진정으로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인도 근대사에 여러 현저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베산트 여사는 사라져 간 인도의 위대성을 안타까워했으며, 추락한 식민지 인도의 국가적 지위에 대해서 분개하고 인도의 자유를 위해서 투쟁하였습니다. 그녀는 또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성의 권익 신장을 위해서 노력하였으며, 여성의 참정권을 끊임없이 주장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영적인 사람들 중 하나라고 믿었던 인도 여성들의 자질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한 적은 결코 없었는데, 인도인들은 인도가 다시 되찾아야 할 영광된 모습에 대해 그녀가 연설하는 것을 듣고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베산트 여사는 성의 없는 정부에 대항에 인도의 젊은이들이 점점 폭력과 무정부주의에 이끌리는 것을 보고 1913년에 정치에 뛰어들어 귀중한 시간과 젊은이들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새로운 신문을 발행하고, 정치활동을 시작한지 불과 몇 개월만에 10년 가까이 분열되어 있던 국회를 화합하도록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발표된 두 당파간의 공통 강령은 인도의 자유와 자주를 크게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베산트는 또 인도 언론들에게 정부를 비판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1917년에는 마드라스 식민정부의 탄압을 받기도 했지만, 대중의 강력한 반발로 억압에서 풀려났을 뿐 아니라 그 해 12월에 인도 국민회의의 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습니다.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어서도, 그전까지는 단지 4일의 회의기간만 주재하고 마는 의장의 역할에 안주하지 않고 의장실을 1년 내내 가장 활동적인 곳의 하나로 바꾸어 나가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베산트의 대중적 인기가 언제까지나 지속되지는 않았는데, 그녀는 언제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를 내다보고 일을 했으며, 대중적 인기를 잃을지라도 정부의 정책이 옳은 것이면 정부를 지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또 그 대상이 정부가 되었건,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는 민중이 되었건 간에 부조리를 비난하는데 있어서 냉정하였습니다. 어쨌든 정부와 대중의 오해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정책은 늘 ‘인도를 위한’ 것이었으며, 대중적인 인기를 잃은 뒤에도 인도를 위한 개혁 운동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정치뿐 아니라 베산트 여사는 1898년 베나레스에 중앙 힌두대학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해서 교육 분야에서도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영국과 미국 등지의 신지학도들이 그 일을 돕기 위해 몰려들었는데, 그 중에는 베산트 여사의 뒤를 이어 후에 신지학협회 3대 회장이 된 아룬데일이 있었으며, 그의 숙모인 프란체스카 아룬데일은 후에 베나레스의 여자대학이 된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이들 학교와 베산트가 설립한 또 다른 교육조직은 인도 교육의 커다란 밑거름이 됩니다. 베산트는 또한 ‘인도의 아들과 딸들’이란 운동과 어린이들을 위한 ‘황금사슬’ 운동을 창시하였으며, 1918년에는 인도 보이스카웃 운동을 창립하였습니다. 단원들은 스카우트의 규칙을 따르면서도 인도의 터번을 두르고 인도 노래를 불렀는데, 후에 베산트 여사는 스카우트의 가장 높은 영예인 ‘은여우’ 작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현재 인도인들은 블라바츠키 여사는 잘 몰라도 베산트 여사는 비교적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의 인도인들은 애니 베산트 여사를 ‘어머니’라고 즐겨 불렀습니다. 때때로 인도의 여자와 남자들이 여사에게 보석과 돈을 가져와서 건네주었는데, 그것은 이 ‘어머니’가 완전한 식별력과 자비 속에서 그들보다 훨씬 더 잘 사용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사는 정부의 탄압을 받을 때 조국 인도의 살아있는 상징이 되었으며, 많은 힌두 여성들은 그녀를 반신(半神)으로까지 추앙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인도를 조국으로 여기고 헌신했던 애니 베산트 여사가 인도의 생활방식이 그녀에게 자연스러웠던 한 가지 이유를 설명한 적이 있는데, 그녀는 전생의 최근 몇 생을 인도에서 살았으며, 특히 그 마지막 생애는 현생과 불과 3년의 간격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베산트는 그 마지막 생의 기억들을 되살려냈는데, 놀랍게도 그녀의 스승인 마하트마의 손녀였다고 합니다.


에소테릭 스쿨


겉으로 드러난 삶이 아무리 파란만장하고 인도인들의 기억 속에 인상을 남기는 것이었다고 해도, 베산트 여사의 진정한 가치는 대중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그녀의 오컬트적인 삶을 언급하지 않고는 완성될 수 없습니다. 베산트 여사는 블라바츠키 여사가 사망한 후 2년 뒤에 ‘에소테릭 스쿨’로 알려진 비의 조직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이 조직은 지혜의 마스터들을 따르는 제자도를 실천하였으며, 그때부터 베산트는 수천 명에 이르는 전 세계 신지학협회 회원들의 영적인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베산트 여사는 1902년에 프랑스의 스코틀랜드파 프리메이슨단에 합류하여 최고 등급에 해당하는 33등급을 받았으며, 영연방을 위한 최고회의의 대표자이기도 했습니다. 베산트는 또 신지학회가 ‘세계교사’로 지목했던 크리슈나무르티의 양육과도 직접 관련됩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1909년에 열 네 살의 나이로 발탁되어 쿠트후미 대사의 제자가 되었으며, 1910년에는 『대사의 발밑에 엎으려』라는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후에 신지학회와 결별하지만, 죽을 때까지 세상 사람들에게 강연을 하며 많은 영향을 미치는 영적 지도자로 남았습니다.

베산트는 또 한편으로 위대한 요기였습니다. 그녀는 초물리적인 영역의 본질을 탐사하기 위해 요가의 능력들을 사용하였으며, 많은 그녀의 저서들도 이런 탐사의 결과 얻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 상당량이 동료였던 찰스 리드비터와의 공동연구로 진행된 것으로, 우리는 또 한 명의 중요한 신지학회 초기 멤버였던 찰스 리드비터에 대해 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애니 베산트]




찰스 리드비터


애니 베산트와 인연이 깊었던 리드비터는 기이하게도 여사와 같은 해에 태어나서 죽을 때도 단 6개월 사이를 두고 죽었습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영국의 노산파란트라는 곳이었습니다. 리드비터가 신지학회를 알게 된 것은 베산트 여사보다 5년 정도 앞선 시기였는데, 서른여섯에 한 교회의 목사보로 있을 때 씨네트의 저작들을 통해서 신지학을 접하게 됩니다. 런던 롯지에 입회한 그는, 같은 회원이었던 영매 에쿨던을 통해서 쿠트후미 대사에게 입문을 요청하는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당시 런던에 들린 블라바츠키 여사를 만난 리드비터는 이듬해 쿠트후미 대사의 제자로 인정되어 블라바츠키 여사와 함께 인도로 가게 되는데, 대사들의 지도를 받아 영능력자가 된 리드비터는 그 후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활동을 합니다.

리드비터는 오라를 보는 그의 능력과 직관으로 어린 인재들을 많이 발굴했는데, 아디아르 해변에서 놀고 있는 크리슈나무르티를 발견하여 신지학과 인연을 맺게 한 장본인도 다름 아닌 리드비터였습니다. 1889년에는 그가 ‘불교도 아난타 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던 실론(스리랑카)에서 지나라자다사라는 어린 소년을 데리고 런던에 가는데, 지나라자다사는 나중에 애니 베산트 여사와 아룬데일의 뒤를 이어 제4대 국제신지학협회 회장에 오르게 되며, 『신지학의 제1원리』를 비롯한 다수의 책들도 집필합니다. 바로 애니 베산트와 리드비터가 공동연구로 화학원소들을 조사하여 『오컬트화학』이라는 작품을 완성하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이 지나라자다사였습니다.

이후 리드비터는 17년간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 각지에 강연을 하면서 청소년 지도와 저작활동에 몰두하는데, 한때 청소년 지도 중 성(性)처리 문제로 비난받으면서 사람들의 의혹과 반발을 사기도 합니다. 그러나 1907년에 베산트 여사가 신지학국제협회 회장으로 선출되면서 국제본부에 다시 합류하게 되었으며, 이후 여사와 함께 많은 오컬트 탐구를 정열적으로 행하였습니다. 베산트 여사와 공저로 된 주요 저작들을 발표한 것이나, 크리슈나무르티를 발굴한 것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리드비터는 베산트 여사가 정치에 입문한 다음 해인 1914년에 호주에 들렀는데, 그만 그 곳을 사랑하게 되어 약 10여 년간을 호주에서 머무릅니다. 1915년에는 프리메이슨에 가입하였으며, 그다음 해에는 자유카톨릭교회의 주교가 되기도 했습니다. 1929년에는 호주를 떠나 국제본부로 돌아왔다가 1934년 다시 호주로 강연을 가는 도중 병을 얻어 호주에서 사망하는데, 그때 그의 나이 여든 일곱이었습니다.

리드비터의 저작은 총 30권 정도가 되는데, 『아스트랄계』, 『차크라』, 『투시』, 『데바찬계』, 『꿈』, 『인간, 그 보이는 면과 보이지 않는 면』, 『죽음후의 삶』, 『모나드』, 『상념체』 등 신지학협회 내에서도 비교적 비중 있는 서적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싯디 아니마


리드비터의 저작에서도 나타나듯이, 몇몇 신지학자들은 물질계의 장벽을 넘어 초자연계의 현상을 관찰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오라는 물론 이른바 에텔계, 아스트랄계, 멘탈계와 같이 물질계의 상위 차원에 해당하는 영역을 투시했는데, 리드비터에 따르면 투시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애니 베산트와 찰스 리드비터가 화학원소를 조사하는데 사용한 투시능력은 현미경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물질을 크게 확대해서 보는 특이한 것이었는데, 이것을 산스크리트어로 ‘아니마’라 합니다.

아니마는 요가의 문헌들 속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기원전 400년경에 쓰여진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에는 요가 수련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비범한 능력(싯디)들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3.26절에 요가 수행자는 “초물질적인 능력을 사용하여 작고 숨겨진 것, 또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3.46절에도 “물질 원소에 대한 지배력을 갖게되면 몸을 원자처럼 작게 응축시키거나, 더 이상 물질 요소들의 지배를 받지 않는 완전한 몸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몸을 원자처럼 작게 응축시킨다는 이야기는 실제로 몸의 크기가 축소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의식의 측면’에서 자신에 대한 개념을 매우 극소화하여 정상적으로는 작은 대상이 관찰자에게는 커다란 시각적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인식력은 마치 공간적으로 관찰자 자신이 관찰 대상과 같은 규모의 크기로 축소되었다는 착각을 줍니다.

서두에 언급한대로 처음 리드비터에게 이런 독특한 능력을 사용하여 화학원소들을 조사해보라고 권유한 것은 씨네트였습니다. 리드비터가 씨네트의 집에 머물며 동료들에게 투시능력을 시험해 보일 때 씨네트는 리드비터의 능력이 극히 미세한 사물을 확대해 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물질의 원소(분자)를 볼 수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이것이 1895년의 일인데, 리드비터는 애니 베산트와 함께 원소들을 조사하여 그해 11월에 수소와 질소, 산소원자의 그림을 신지학 잡지인 『루시퍼』지에 발표하였습니다. 이후 원자의 구조를 관찰하는 그들의 연구는 38년간이나 계속되었는데, 두 사람 모두 엄청난 활동가였으므로 이 한 작업에만 꾸준하게 매달리지 못하고 한동안 중단되었다가 다시 재개되곤 하는 식으로 이어졌습니다.


오컬트화학


1909년에는 그 동안 『루시퍼』와 『신지학자』 같은 잡지에 발표했던 연구성과들을 한데 모아 『오컬트화학』이라는 단행본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에는 모두 60여종의 원소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이 오늘날 『오컬트화학』 제1판으로 알려져 있는 판본입니다. 1919년에는 『오컬트화학』 두 번째 판이 런던에서 출판되었는데, 달라진 것은 거의 없고 발행자인 씨네트의 서문만 추가되었을 뿐입니다. 심지어 그 동안에 다른 잡지들을 통해서 발표되었던 연구결과들도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리드비터와 애니 베산트가 죽고 20년 가까이 지났을 때, 신지학협회 회장으로 있던 지나라자다사가 과거 모든 연구결과들을 집대성하여 『오컬트화학』 제3판을 출판하였습니다. 현재 그나마 『오컬트화학』 제3판을 복사본으로 구할 수 있을 뿐이고, 제1판과 제2판을 구하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하지만 제3판은 제2판에 비해서 3배 정도 되는 분량인데다 앞선 판들의 내용이 거의 모두 포함되어 있으므로, 전문적으로 『오컬트화학』을 연구하실 분이 아니라면 굳이 초기 판본들을 구하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오컬트화학은 분명 그 연구방법에서 정통과학과 궤를 달리하는 것입니다. 만약 두 연구방법의 결과가 동일하다면, 비록 방법상의 논란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결과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결과가 크게 상이하게 나타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즉 우리는 두 가지 결과 중에 어느 한 가지만이 옳다고 선택을 하고 다른 하나는 배척해야 할 것입니다. 오컬트화학은 어느 쪽일까요? 여기 하나의 예로 수소원자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일반적인 수소원자 모델과 오컬트화학의 수소원자]



왼쪽의 (a)는 정통과학의 수소원자 모델을 나타낸 것이고, 오른쪽의 (b)는 오컬트화학의 수소원자를 나타낸 것입니다. 물론 왼쪽의 원자모델에서 원형의 궤도로 표현된 전자는 좀 더 정확히 묘사하면 중앙의 원자핵을 둘러싸고 있는 구형의 구름형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동일한 결과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적어도 동일한 결과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거의 모든 분들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실 겁니다. 과학자들에게 물어보면 어떨까요? 아마 여러 흥미로운 답변들이 나올 것 같습니다만, 어쨌든 이 두 원자모델은 서로 같지 않은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오컬트화학과 정통과학을 대하는 두 가지 자세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방금 언급했듯이 두 가지 결과 중 하나를 옳은 것으로 보고 다른 하나는 배척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자세는 오컬트화학과 정통과학 모두 진실을 찾아가는 탐구과정의 중간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비록 지금은 서로 다른 길을 통해 목적지에 가고 있기 때문에 풍경이 달라 보이지만, 언젠가는 두 길이 만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아래 공통점을 찾아나가는 것입니다. --출처: White Rose http://cowhiterose.net/tt/board/ttboard.cgi?act=read&db=s_theosophy&page=3&idx=67

* 블라바츠키* 신지학의 창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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