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서정시학》신인상 _ 김유섭, 이언주
심사위원 : 본심 최동호(시인, 문학평론가), 이경수(문학평론가)
예심 전형철(시인), 신철규(시인)
나의 권투 체험기 (외 2편)
김유섭
쥐어지지 않는 주먹으로 하는 권투였다
들을 수 없는 음역으로 울리는 하늘의 소리를 쫓는 귀처럼
감겨버린 눈에 대해
누구도 다가와 귀띔해주지 않아도
날마다 총탄 자국처럼 돋아나던 피멍이 알려주었다
아래로 위로 좌로 우로 어느 방향으로든
주먹이 닿기 전에 휘청휘청
나를 먼저 흔들어야만 하는 날들이었다
늦은 밤 불어터진 국수를 건져 먹던
가슴마저 중심을 잃고 바닥에 처박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끝끝내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바닥,
번쩍이는 주먹에 부릅뜬 눈이
하루도 빗나간 적 없이 날아들었다
쥐어지지 않는 주먹으로 허우적거리는
내 급소를 하품하며 찾아내었다
무릎 꿇기 위해서 차례를 기다리는 굽은 어깨 위로
무너져 내리는 하루해는
눈에 빗장을 거는 무거운 눈꺼풀이었다
승자만이 주먹을 쥘 수 있는 링,
필사적으로 움츠리고 좌로 우로
위로 아래로 비틀거릴지라도 우아해야 한다는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꿈을 잊은 적 없다
쓰러져 널브러질 때까지
작은 비바람에도
나는 어두운 허공에 대고 중얼거리곤 했다
피도 눈물도 없이
청춘이었지만, 아닌 척 태연해야 했던 공장 뒤편
야트막한 산자락 작은 쉼터에
들국화가 피어 있었다.
간단히 먹는 도시락 같은 생
짧은 점심시간은 남아 마땅히 할 일도 없고
나는 천천히 들국화에게로 다가가서
바람에 흔들리는 들국화 꽃을 꺾었다.
그 옆 나무의자에 앉아
꺾은 들국화 꽃의 줄기를 잡고 뱅글뱅글 돌렸다.
물기 같은 것이 손가락에 묻는 듯싶었다.
피라는 생각도, 비명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웃었다.
비명은 점점 커졌고 뿜어져 솟아오른 피가 쉼터를 메웠다.
꺾여 죽은 꽃들이 쏟아져 나와 둥둥 떠다녔다.
팔이 떨어져 나간 꽃,
다리가 떨어져 나간 꽃,
모가지뿐인 꽃이 울부짖으며 소용돌이를 만드는 동안
세상이 피와 비명 속에 잠기고 있었다.
나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척했다.
화창한 가을 날 낭만적이던 기분이 시들해졌다.
뱅글뱅글 돌리던 들국화 꽃을 던져버렸다.
마땅히 할 일도 없고
나무의자에 앉은 채 바람에 이리저리 자세나 바꾸면서
나는 짧은 점심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렸었다.
한없이 구부정하게
그의 그림자가 내 그림자를 덮쳐오는 동안
구부정하다는 것은 의자에 앉을 수 없다는 것이지
햄버거가게 간이천막 아래에서
어떤 생은 햄버거 속이 되려고 익어가기도 하고
그 앞에 줄을 서서 그림자만이라도 꿋꿋하리라
꿈을 꾸는 동안
어느새 쇠발자국 소리를 울리며 그의 그림자는
내 그림자를 삼켜댄다는 것이지
바닥에서마저 먹이가 되어버린
내 그림자를 발로 툭툭 차거나
빨리 꺼져버리라는 듯
나는 몸을 더 작게 웅크린다는 것이지
도시의 절벽 같은 콘크리트 빌딩들
내 그림자를 다 먹어치워 버렸을 때에도 나는
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싸구려 햄버거로
포장지에 싸이고 있다는 것이지
이제 그림자마저 가지지 못한
내가 까닭 모를 진동으로 흔들리는 세상을 두리번거리면서
햄버거를 씹어 먹는 동안
햄버거가 나를 씹어 먹는 동안
언젠가는 이 거리에 햄버거만 남고
나는 사라지고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드는 동안
그의 그림자 속에
구부정하게 포로로 갇힌 채
나는 가라앉으며 입을 우물거리고 있다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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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섭 / 경남 남해 출생.
보이저 1호 (외 2편)
이언주
덜컹거리며 33년을 달렸습니다
보이죠, 은빛 반짝이는 보이저 1호
은하는 이제 막 범람하기 시작하였고
마음 밖 문을 열던 바람 방향이 바뀌었는지
별의 빛들은 일제히 눈을 감았습니다
돌아오라, 는 손짓 기다리며 여기까지 달렸습니다
종일 장대비가 내려 길은 아득하였고
유탄처럼 날리는 낙뢰를 피해 불 꺼진 행성
처마 밑이라도 잠시 서 있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싸준 가슴뼈 한 조각을 꺼내
편지를 썼지만 떠나온 별의 주소가 비에 번져
부칠 수 없었습니다
귓가에 심어둔 음악이 뭉그러지고
달아올랐던 눈이 말라 돌아갈 길은 보이지도 않고
자꾸만 더 먼 길을 재촉하는 보이저 1호
정거장도 없는 깜깜한 밤길에
보이죠? 징검다리처럼 뛰어 건너는 별들이
관성으로만 떠돌다 낯선 중력에라도 걸리면
거기가 시원의 푸른 별이라 말하면서
안녕, 그래도 연료가 바닥나는 순간까지
당신 기억의 속도로 흘러가겠습니다
* 보이저 1호는 태양계 바깥쪽 거대 행성을 탐사하기 위해 1977년 발사되었다. 처음부터 돌아오지 않도록 설계된 보이저 1호는 태양계를 벗어난 뒤 외계의 지적 생명체와 조우할 경우를 대비해 베토벤 음악 등 외계인들에게 보내는 지구인의 메시지도 싣고 있다.
바위의 마음
비밀을 말하기 위해 너는 거기 서 있고 너를 들여다보기 위해 나는 여기 서 있다 달처럼 부푼 배를 가진 너는 올 때마다 품에서 꺼낸 방울이 되지 못한 눈물을 심었다 숨구멍마다 들어 찬 너를 천천히 삼켰다 아무 말도 새어나오지 않도록
무엇이 사라진 줄 모르고 있는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늘 먼 구름 속에서 느린 속도로 자란 비가 걸어왔다 후텁지근한 바람이 불고 빗방울은 새의 부리처럼 재잘거렸다 젖은 발자국 소리에 깨어난 알몸들이 기어다녔다 어둠 속 구멍 근질거리던 눈먼 벌레 때문에 고약처럼 붙인 욕망을 하나씩 떼어보고 싶었다 재채기하는 순간 공기 속으로 뛰어나간 애벌레가 소문이 될까 두려워 발을 모두 잘랐다 틈이라고는 없는 내 속에 몸을 불리는 너의 기억들
너는 벽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내 가슴에 귀를 한번 기울여보라 했다 그러나 나는 태초에 바위여서 아무런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고 벽처럼 서 있던 소문의 발목이 허물어졌다
구멍 없는 내게로 너는 이제 오지 않았고
나는 빗소리로 운다
황포강*에서
마토우(碼頭)에서
그를 기다린다
내일을 건설하러 오겠다던 김산,
뒷머리 짧게 깎아 올린 아나키스트인
그는 끝내 오지 않았다
약속한 사람이 오지 않을 때에는
오지 못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스스로 위로하는
기다림이란,
잊혀진 기억에 대한
치명적 자기 연민
체의 시대는 가고 배가 들어오자
줄이 무너진다
밟힌 물고기 배를 튀어나오는 알처럼
수많은 게바라들이 갑판 위로 쏟아진다
100년이 지나도 뱃삯은 5마오
중국인과 개는 출입을 금한다는
팻말 뽑아 던지는 사이
혁명은 끝이 났다
동방명주 도서관에서 대출기한 넘긴
실패한 꼬뮨의 자술서 읽던 네온 불빛
썩은 강물 위로 피곤한 몸을 누인다
윤곽 흐린 달이 주춤거리고
불길한 앞날을 생각하며 포옹하는 연인들
물비린내 나는 짐수레에 밀려
선창 구석으로 비켜선 야윈 청년과
그의 염소를 바라다본다
염소 목줄 자투 잡은
더벅머리 청년의 검은 눈망울 속에서
쓸쓸한 혁명의 노후를 읽는다
마천루 빌딩들이 멀미 게워내는
그들이 발 디딘 곳이 절벽이다
사람들은 다시 혁명을
만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짜이지엔(再見), 젖은 손을 꺼내 흔든다
* 중국의 상하이 시가지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강. 아편전쟁 후 서양의 조차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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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언주 / 대구 출생. 서울디지털대학교사이버문학상 수상.
—《서정시학》2011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