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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서원(龜巖書院)
현종6년(1665년) 지방유림의 공의로 연구산(連龜山) 기슭에 창건되었는데,1675년(숙종 1)에 서침(徐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위패를 모셨다.
1718년에 동산동 229번지로 이건하고 서거정(徐居正)을 추가배향하였으며, 1741년에 서성(徐渻), 1757년에 서해(徐嶰)를 추가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24년 유림에 의해 복원되었으며, 1943년에 숭현사(崇賢祠)와 강당을 중수하고 1974년에 보수하였고,1995년 산격동으로 이건하기 시작하여 2003년 완료되었으며,2008년 대구 유림의 발의로 낙재 서사원선생을 추향하였다
사우인 숭현사와 강당인 초현당, 동재인 경례재(耕禮齋:밭갈이 하듯 잘 닦는 것을 표현한 것)와 서재인 누학재(耨學齋:논밭에 김을 매듯이 학문에는 나쁜 것을 덜어 없애고 제거하는 것)
정문인 연비루(鳶飛樓)와 관리사인 백인당으로 구성되어져 있으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된다. 매년 9월 1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경비는 자손들에 의해 충당되고 있다.
①서침(徐沉)
자는 성묵(聖默), 호는 구계(龜溪). 아버지는 정당문학(政堂文學) 서균형(徐均衡)이며, 어머니는 승동정(承同正) 이영유(李永儒)의 딸이다. 정몽주(鄭夢周)를 따라 학문을 배웠고, 고려 말 조선 초의 변혁기에 향리에서 은거하여 학문연구에 노력하였다.
세종대에 서씨일문(徐氏一門)의 근거지였던 달성이 경상도지역의 요새가 되므로 다른 땅과 바꾸게 하자, 이에 협조하여 포상을 받게 되었으나, 그는 포상 대신에 환자[還上]의 모곡(耗穀: 세곡을 되돌려 받을 때 운반이나 동물의 해로 손실되는 양을 추가한 양)을 감하여줄 것을 건의하여 허락받았다.
이로 인하여 인근주민의 추앙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국가로부터 남산의 옛 역(驛)터와 연신지(蓮信池)와 신지(新池) 등이 하사되었고, 관료로 탁용되게 되었다. 그 결과 1433년(세종 15) 첨지중추원사가 되었고, 전의소감(典醫少監)을 거쳐, 다음 해에 전라도처치사가 되었다. 대구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②서거정(徐居正:1420 ~ 1488)
자,강중(剛中), 호 사가정(四佳亭), 시호 문충(文忠)이다.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에 급제,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을 지냈다. 1451년(문종 1) 사가독서(賜暇讀書) 후 집현전박사(集賢殿博士) 등을 거쳐 1456년(세조 2)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1457년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 공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1460년 이조참의 때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에 올랐으며, 1464년 조선시대 최초로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다. 1466년 다시 발영시(拔英試)에 장원한 후 육조(六曹)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1470년(성종 1)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고 달성군(達城君)에 책봉되었다.
45년간 여섯 왕을 섬겼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편찬에 참여했으며, 또 왕명을 받고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국역(國譯)했다. 성리학(性理學)을 비롯, 천문·지리·의약 등에 정통했다.
문집에 《사가집(四佳集)》 저서에 《동인시화(東人詩話)》 《동문선(東文選)》 《역대연표(歷代年表)》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필원잡기(筆苑雜記)》 가 있으며 글씨에는 《화산군권근신도비(花山君權近神道碑)》(忠州)가 있다. 대구(大邱)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③서해(徐嶰:1537 ~ 1559)
자는 정지(挺之)이고 호는 함재(涵齋)이다. 예조참의 서고(徐固)의 아들이다. 경상도 안동(安東)에서 태어났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류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과 동문수학하였다. 1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며 가난하게 살았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20세가 되어서는 문장과 학문이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20세에 청풍군수를 지낸 바 있는 세도가 이고(李股)의 사위가 되었다. 부인 이씨는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이고는 사위와 딸을 위하여 현재 보물 제475호로 지정되어 있는 소호헌(蘇湖軒)을 지어 주었다. 서해는 사림의 중망을 받았으나 2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대구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 《함재집》이 있다.
④서사원(徐思遠:1550 ~ 1615년)
자는 행보(行甫), 호는 미락재(彌樂齋)·악재(樂齋). 필(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응기(應期)이고, 아버지는 전교 흡(洽)이며, 큰아버지 형(泂)에게 입양되었다. 이천 출신이며,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주자학 및 이황(李滉)의 문집을 깊이 연구하고 중년 이후는 후진을 가르쳤다. 선조 때 학행으로 감역·찰방을 지내고, 1595년(선조 28) 청안현감(淸安縣監)에 부임하여 학문의 진흥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뒤 1597년 옥과현감(玉果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이듬해 사임하였다.
1602년에도 연기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 형조·호조 정랑, 역학교정 등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모두 응하지 않았다. 대구의 이강서원(伊江書院), 청안(菁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악재집』이 있다.
⑤서성(徐渻:1558 ~ 1631)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 언양현감(彦陽縣監) 서거광(徐居廣)의 현손이며,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서팽소(徐彭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참의 서고(徐固)이고, 아버지는 서해(徐嶰)이다. 어머니는 청풍군수(淸風郡守) 이고(李股)의 딸이다. 이이(李珥)·송익필(宋翼弼)의 문인이다.
1586년(선조 19)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권지성균학유(權知成均學諭)가 되었다. 이어 인천부교수(仁川府敎授), 예문관의 검열·대교(待敎)·봉교(奉敎), 홍문관의 전적(典籍)을 거쳐, 감찰과 예조좌랑을 지냈다.
병조좌랑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다가 호소사(號召使) 황정욱(黃廷彧)의 요청으로 그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함경도로 길을 바꾸었다가 국경인(鞠景仁)에 의해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황정욱 등과 함께 결박되어 가토(加藤淸正)에게 가게 되었으나 탈출하였다.
왕의 명령으로 행재소에 이르러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병조정랑·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을 역임하고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을 접대하였다. 다시 지평과 직강을 거쳐 삼남지역(三南地域)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피고 돌아온 뒤 전수(戰守)의 계책을 아뢰었다. 이로 인해 제용감정(濟用監正)으로 승진하고, 경상감사에 발탁되었으나 대간의 반대로 내섬시정(內贍寺正)으로 바뀌었다.
그 뒤 경상우도감사로 내려가 삼가(三嘉) 악견산성(嶽堅山城)을 수리하고 민심을 진정시켰다. 이어 동부승지·병조참의·비변사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겸하였다. 다시 병조참의·도승지·황해감사·함경감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있다가 평안감사로 나아가 평양 아전들의 환심을 얻었다.
이어 도승지가 되어 경연에서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을 신구(伸救)하고, 성혼(成渾)과 정철(鄭澈)을 헐뜯는 정인홍(鄭仁弘) 일파를 배척하다가 왕의 미움을 받았다. 이어 판윤(判尹)으로 비변사와 훈련도감의 제조를 겸하고, 형조판서·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거쳐 함경감사로 나갔다.
다시 호조판서로 지의금부사를 겸하다가 경기감사가 되고, 그 뒤 우참찬을 거쳐 개성유수가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단양에 유배되었다. 그 후 다시 영해와 원주 등지로 옮겨지는 등 11년 간이나 귀양살이를 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방환되었다. 이어 형조판서·대사헌·경연성균관사를 겸하고, 1624년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호종하고 판중추부사·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도 왕을 강화도까지 호종했고,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격하였다. 학문을 즐겨 이인기(李麟奇)·이호민(李好閔)·이귀(李貴) 등과 남지기로회(南池耆老會)를 조직하여 역학(易學)을 토론했고, 서화(書畫)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대구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약봉집 藥峯集≫이 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이튼날
대구옻골마을
보본당에서 실학정신을 되새기다
백불암 최흥원선생의 효행과 학행을 배우다
백불암고택
대구시 동구 둔산동에 잇는 옻골마을은 마을이 자리잡고 있는 곳의 지형이 남쪽을 제외한 3면이 산으로 둘러쌓여 오목하다고 옻골이라고 불리웠다는 이야기와 주변 산과 들에 옻나무가 많아서 옻골이라고 불리웠다는 두가지 유래를 가지고 있다. '옻칠'자 '시내계'자를 쓰는 '칠계'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후자가 맞을 듯 하다. 1616년(광해 8년) 조선 중기의 학자 대암 최동집이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경주최씨의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마을로 향하는 길에서 제일 먼저 보게 되는 350년 수령의 느티나무이다.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으며, 마을터가 주변보다 높아 금호강 지류가 훤히 보이므로 나쁜 기운이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마을 앞에 숲을 조성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거의 흔적만 남아 있는듯 하다. 연못과, 나무그늘아래 꾸며진 쉼터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마을의 시작이다. 마을어귀에 들어서면 역시 350년 수령의 거대한 회화나무 두 그루가 방문객을 맞이 한다.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면서 심었다고 하는데 높이가 무려 12m에 이른다. 회화나무 뒤쪽으로는 옻골나무를 알리는 입간판이 서있다.
대구 도심에서 가까운 탓에 일부 주택들은 현대식으로 개축되었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고택과, 옛길, 전통 양식의 돌담은 옛 양반가의 생활상을 가까이에서 둘러 보기에 손색이 없는 듯 하다.
경주 최씨 종가인 백불고택은 마을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입향조인 최동집의 손자 최경향이 1694년에 지은 고택으로 대구지역 가옥중 가장 오래된 주택 건물이다. '백불'은 조선 정조때 학자인 백불암 최흥원의 호이다. 현재 대구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안채가 남향으로 세워져 있는것이 보인다. 건축할 당시에 사랑채는 촤로 지었었으나, 1918년 중건을 하면서 사랑채도 안채와 같은 와가로 변경 하였다고 한다.
고택의 오른쪽으로는 보본당이 서있다. 경주최씨 종가의 제사를 위해 1753년 지어진 건물로, 사당과 재실, 음식을 장만하기 위한 포사로 구성 되어 있다. 보본당은 한국전쟁 당시에는 임시 학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토담을 따라 가다 보면 정려각이 있는데, 백불암 최흥원의 효심을 기려 1789년에 세워졌다고 한며, 정려각안에는 정조가 하사한 홍패가 걸려 있다.
옻골마을은 약 2.5㎞에 이르는 토담길과, 돌담이 남아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돌담이 지날 곳에 나무가 있으면 나무를 베기 보다는 나무밑에서 담장의 높이를 낮추는 것이 순리로 알았던 조상들의 지혜를 바라 볼 수 있다. 백불고택에는 정조가 백불암 최흥원의 업적을 칭송해 하사한 문서를 비롯해, 종가에 전해 내려오는 고서와 호패, 퇴계 선생의 성학십도로 만든 성학십도 병풍, 제기 등 다양한 유산이 남아 있고, 인근에 천연기념물 1호인 '달성측백수림'이 있고, 불로동 고분군, 팔공산도립공원 등이 있다.
더 많은 사진은 구암서원 블로그에
http://blog.naver.com/779navy/220406396001
첫댓글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
옻골 회화나무 집 옻닭엔 산삼이 들어가는군요....( 꼴깍 )
대단한 문중의 행사를 진행 하였군요.
조상의 빛난 행적으로 후손들이 가슴뿌듯 합니다
자세히 보니 백불 종택 안채의 마루까지 진출 하셨네요...ㅎㅎ
저기까지는 아무나 출입시키지 않는데요........최고의 손님으로 대우 받으신겁니다. ^^
훌륭한 글과 사진 잘 보았습니다. 무궁한 발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