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7:6~7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요 위까지 바울이 무슨 이야기를 했냐하면, ‘아 율법 지켜서 구원받으려고 하는 건 전부 죄다.’ 아예 난도질을 했거든요.
그래놓고 갑자기 ’율법이 죄냐?’ 그런단 말예요. 다소 모순되는 듯한 자기의 진술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듯 한 진술을 또 한단 말예요.
그러면서,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선악과, 그 모형, <호 코스모스>가 아니었으면, 내가 죄가 뭔지 몰랐을 거야’ 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바울도 선악과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을 이해를 해요. 제 얘기가 아니라, 그렇잖아요? 율법이 죄냐? 아니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그걸로 진짜 생명이 뭔지, 진리가 뭔지 깨달았으므로. 바울이 <모노게네스>, 하나를 가진 자가 된 거예요. ‘아! 그게 죄 아냐’ 이렇게.
그리고는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이 죄라는 걸 알지 못했을 거야.’ 그래요.
여기서 탐심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오늘 본문의 ‘몸의 소욕’과 같은 단어예요. <에피뚜미아>, ‘희생제사. ’희생 제사 계속 반복하여 드리는 거,익숙한 어떤 걸 하는 거
‘, 이게 <에피뚜미아>란 말예요. 그게 간음하는 거고, 살인하는 거고, 그게 우상 섬기는 거라고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자기가 목숨 걸고 지켜내던 율법 아닙니까? 그게…목숨 걸고 지켜내던 율법 아녜요? 그런데 율법의 진의를 알고 나니까, ‘아, 그게 전부 탐내지 마!’라고 했던, 그 하나님의 가르침 속에 들어 있던 것들이라는 거예요. 아니 그럼 내가 목숨 걸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했던 이 모든 게 다 <에피뚜미아>, 탐심’이었단 말이야? 알게 됐다는 거예요.
자기는 지금까지, 성령이 그 진의를 알게 해 주시기까지, 그게 ‘선’이고, ‘의’인 줄 알고, 죽으라고 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율법의 진의를 알고 나니까, 그게 죄라고 말하더라는 거요. 그 율법이 나의 죄, 진짜 죄를, 탐심, <에피뚜미아>가 뭔지를 알게 해 주었으므로, 그게 어떻게 악한 거며, 그게 어떻게 죄냐?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에게 꼭 필요한 거였어.’
구약성경에서 그 탐심이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찾아보니까, 이사야서에 그 단어가 나와요. 이사야서 57장 17절 보세요.
이사야서 57:17
17 그의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우고 노하였으나 그가 오히려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도다
여기 하나님의 노를 격발시키는 인간의 탐심이 나와요. 그 탐심이 뭐냐 하면, ‘인간이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는 거’래요. 선악과 따먹은 인간의, 아담의 마음은, 항상 두 갈래입니다. 선과 악이라는 두 갈래 마음, 그 마음을 새 마음인, 한 마음으로 바꾸어야 ‘영생’이에요.
그런데 선악과 따먹은 아담들의 두 마음은, 늘 자기의 열심을 근거로, 자기의 ’하나님처럼의 삶’을 추구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열심히 율법도 지키고, 희생제사도 힘닿는 데로 해보는 거예요. 귀찮았을 거예요. 그런데 자기의 자존심 지키기 위해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에 노하시는 거예요.
여기에 쓰인 ‘탐심’이라는 단어, 그 히브리어 <배짜>가, ‘탐욕스럽게 얻다, 획득하다, 손을 뻗어 부정하게 획득하다.’라는 의미예요. <배짜>가. 이걸 ‘탐심’이라 그래요. 그걸 히브리 어구로 옮기면, <솨라흐 야드 라카르>예요. 그걸 해석하면, ‘자기의 힘으로, 자기의 손을 뻗어, 열매를 취하는 것!’ 이걸 탐심이라 그래요.
창세기 3장 22절에 나옵니다.
창세기 3:22
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고, 제일 먼저 하려고 했던 일이 뭐예요? 선악과 따먹자마자, 손을 뻗어, 생명나무 실과를 먹으려는 시도를 하더라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은 자들의 모든 시도가, 바로 그거라는 거예요. 내 힘으로 생명, 행복, 구원, 거기에 도달해 보겠다는 시도...모든 시도가 그거라는 거요.
하나님이 그거 막겠다는 거에요. 왜? 그렇게는 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 얻었다고 하는 자들의 그 생명이, 바로 사망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손을 뻗어, 그가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고’가 바로 그 단어예요. <솨라흐 야드 라카흐>예요. <야드> 손을, 뻗어 <솨라흐>, 열매를 획득하다. 부정하게 획득하다 <라카흐>’라는…
정식으로 생명이 우리에게 오려면 하나님이 생기를, 말씀을, 진리를 ‘후’하고 불어 넣어줘야 되는 건데, 선악과 먹은 자들은 손을 뻗어 부정하게 획득하려고 하더라는 거요. 이걸 <에피뚜미아>, 희생제사 반복하여 드리기, 익숙한 거 행하기’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요. 그거 하지 마! 그거 하지 마! 율법은, 그거 하면 안 돼! 선악과는, 그것 먹으면 안 돼! 이거 가르쳐 주려고, 우리에게 준 거라는 거예요.
그걸 아는 걸 ‘의’라 그러고, 그걸 ‘율법을 완성했다’라고 하는 거지, 그거 하나하나 다 지켜내는 게 아니란 말예요.
바울이 율법의 진의를 알고 보니까, 지금까지 자기가 행한 모든 율법적 선한 행위들이, 전부 ‘탐심’이었다는 것을 안 거예요. 그 ‘부정하게 취득하다!’ 그 <솨라흐>를 헬라어로 바꾸면 <오레고마이>예요. ‘손을 뻗다. 자기의 힘으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다’거든요. 좋은 말인 거 같죠? 거기에서 나온 단어가 지난 주에 우리가 공부한 <올기조>예요. ‘노하다’예요. 그게.
(중간 생략)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하여 하나님께 뭘 해드리려 하는 것, 그 시도 자체가, <에피뚜미아>고, 그게 <솨라흐>인 거고, 그걸 ‘<오리고마이>라고 하고, 거기서 나온 게 <올기조>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고, 하나님께 화내는 거란 말예요. 왜? ‘하나님, 내가 이렇게 한다는데, 왜 하나님은 자꾸 은혜로, 선물로 받으라고 그래요?’ 이게 노하다는 거예요. <올기조>라니까요. 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