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12.11:43 최자섭(崔自涉) . 최자척(崔自滌) 의 차이점을 찾아내어 추기하다.
최자척(崔自滌. 초명 최자섭 崔自涉) 은 1457년 영월군수 . 순흥 부사 이보흠(李甫欽)의 사위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 정조실록 32권, 정조 15년 2월 21일 병인 2번째기사 1791년
장릉 배식단에 배향할 사람의 명단에 최자척(崔自滌)으로 명기되어 있고,
장릉 장판옥 위판에도 崔自陟(최자척)으로 새김되어 있다.
고전번역서 > 도곡집 제1권 / 시(詩)마흔세 번째〔其四十三〕:에서는 최자섭(崔自涉)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록 : 최자척(崔自滌) * 滌 씻을 척, 씻을 적, 물 이름 조
위판 : 최자척(崔自陟) * 陟 오를 척, 얻을 득
도곡집 : 최자섭(崔自涉) * 涉 건널 섭, 피 흐를 첩, 피 흐르는 모양 첩
永川崔氏 月洲公派 德谷 宗中 일반 자료실 영천 최씨(永川 崔氏) : 최자섭(崔自涉)
디지털성주문화대전 : 최자척 (崔自滌). 이칭/별칭 최자섭(崔自涉)
디지털성주문화대전
최자척 (崔自滌). 이칭/별칭 최자섭(崔自涉)
[정의] 조선 전기 단종 복위 운동에 동참한 성주 출신의 충신.
[가계]
본관은 영천(永川).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 법산 마을의 입향조(入鄕祖)인 최항경(崔恒慶)[1560~1638]의 종선조(從先祖)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 최일(崔壹)이다. 할아버지는 직제학(直提學) 최흥효(崔興孝)이고, 아버지는 최계성(崔繼性)이다.
[활동 사항]
최자척(崔自滌)[?~1457]의 처음 이름은 최자섭(崔自涉)이었다.
1457년(세조 3) 순흥부(順興府)에 안치(安置)되어 있던 금성 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1426~1457]가 순흥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1457]과 함께 단종의 복위(復位)를 도모할 때, 이보흠의 사위로서 격문(檄文)의 초고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공(功)을 바라던 관노(官奴)가 그것을 몰래 빼돌려 고변(告變)함으로써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 결과 금성 대군은 사사(賜死)되고 최자척도 이보흠과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상훈과 추모]
1458년(세조 4)에 세조가 계유정난(癸酉靖難) 및 단종 복위 운동 때 처형된 280명의 명단을 비단에 써서 동학사(東鶴寺)에 내려 주며 초혼제를 지내게 하였는데, 이때 금성 대군 이유, 정종(鄭悰)[?~1461], 송현수(宋玹壽)[?~1457] 등과 함께 이름이 기재되었다.
1791년(정조 15)에는 의춘군(宜春君) 이우직(李友直)[1439~1454], 덕양군(德陽君) 이우량(李友諒)[?~1452], 참판(參判) 황보석(皇甫錫)[?~1453] 등 198명과 함께 장릉 배식단(莊陵配食壇)의 별단(別壇)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정조실록(正祖實錄)』, 『척암선생문집(拓菴先生文集)』, 『성주군지』(성주군·성주문화원, 2012)
단종실록13권, 단종 3년 2월 27일 계묘 3번째기사 1455년 명 경태(景泰) 6년. 의금부(義禁府)에 전지(傳旨)하기를, ~최자척(崔自陟)은 고신(告身)을 거두고 먼 변방(邊方)에 충군(充軍)하고,~
세조실록3권, 세조 2년 3월 18일 정해 5번째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최자척(崔自陟)의 양주(楊州) 집과 전토는 좌참찬 강맹경(姜孟卿)에게 내려 주고,~
고전번역서 > 도곡집 제1권 / 시(詩) 63번 내가 남쪽에 와서 한 해를 보냈는데~아래 마흔세 번째〔其四十三〕 여러 최씨 주의 명족이란 말 듣지 못했는데 / 諸崔未見稱州望 태수는 어찌 법망에 옭아 넣었는가 / 太守何曾罥法科 ~에 대한 각주[주-D095] 여러 …… 넣었는가 : 세조 때에 영천 최씨(永川崔氏)인 최자섭(崔自涉)이 영월 현감으로 있었는데, 장인인 순흥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금성대군(錦城大君)을 도와 단종 복위에 가담하였다가 장인과 사위가 동시에 순절하였고, 강릉 최씨인 최시창(崔始昌)도 삼군도진무사(三軍都鎭撫使)로 있으면서 아들 면(沔)과 함께 참여하였다가 거사하기 전에 누설되어 아들과 함께 화를 당하였는데, 본문의 ‘여러 최씨’는 이들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모두 한미한 집안이었는데, 이곳의 태수가 어찌하여 이들을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시켰느냐고 반문한 듯하나 자세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해동경사연구소 | 성백효 (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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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世 최계성(崔繼性)은 직제학(直提學) 최흥효(崔興孝)의 맏아들로 부사에, 최계성의 맏아들 최자섭(崔自涉)은 영월현감을 지냈는데 순흥부사 빙부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금성대군을 도와 단종복위(端宗復位)에 가담하여 옹서(翁壻)가 동시에 순절(殉節)하고 매년 한식절에는 영월 단종전 충신각에서 사육신과 같이 향사 지낸다. 최자섭의 동생 최자허는 절충장군 동관진 병마절제사에 올랐다. 후손(後孫)은 고령 연봉파·영동 황간파로 하여 그곳에 취락하고 있다.*https://cafe.daum.net/YCchoiWJparty/2YAA/3?q=%EC%B5%9C%EC%9E%90%EC%84%AD%28%E5%B4%94%E8%87%AA%E6%B6%89%29&re=1
야촌 이재훈■ 보학/성씨별관향/영천최씨(永川崔氏) 편
11世 최계성(崔繼性)은 직제학(直提學) 최흥효(崔興孝)의 맏아들로 부사에, 최계성의 맏아들 최자섭(崔自涉)은 영월현감을 지냈는데 순흥부사 빙부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금성대군을 도와 단종복위(端宗復位)에 가담하여 옹서가 동시에 순절하고 매년 한식절에는 영월 단종전 충신각에서 사육신과 같이 향사 지낸다.*https://009448.tistory.com/13146039
성씨뉴스닷컴/영천최씨(永川崔氏),영천최씨시조,최한,영천최씨조상인물
최자섭(崔自涉) 정선현감(旌善縣監)으로 있으면서 외구인 순흥부사와 뜻을 같이 하여 금성대군(錦城大君)을 도와 단종복위(端宗復位)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옹서(翁婿)와 함께 순절(殉節)하였다.
*
檄文격문
빙부와 긴밀히 연락을 주고 받던 군수(최자척)은 묘안을 생각해 내었다.
관아 내에 있는 객사(객관)으로 모시는 것이 시급한 일이었다.
추론(이야기. 스토리텔링)
얼싸좋다면서 관풍헌으로 모셔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