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문화
황허의 상류, 중국지도로는 서쪽 지역인 서안-난주를 중심으로 앙소문화가 나타나서 미술사에 채도를 남겼다. 황허의 하류 지역이고, 지도상으로는 동쪽에 해당하는, 태산을 중심으로 하는 산동성 일대에 용산-대문구 문화가 나타났다.
용산문화는 앙소문화보다는 약간의 후대에 나타났다고 일반적으로 말하지만 최근에 와서는 그렇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지역도 동쪽과 서쪽으로 구분하기 보다는 서로 겹치는 부분이 많다. 그렇더라도 앞에서 앙소문화를 공부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용산-대문구 문화를 공부하기로 하겠다.
중국의 전설 시대에 동방에는 태호씨(太昊氏-씨는 일반적으로 씨족, 부족을 나타내는 말이다.)가 있었다. 그들의 지도자는 용맹무쌍한 치우였다. 서쪽 지방의 맹주인 황제와 대판 싸움이 붙었지만 패배하고 사라졌다. 태호씨의 치우가 이룬 문화가 대문구 문화라는 것이다.
용산-대문구 문화는 5500년 전부터 하남성 중부, 안휘성 북부, 동해안, 요동반도까지 세력권을 넓혀 나갔다. 앙소 문화권과 용산 문화권이 확장하면서 전쟁은 일어 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중국의 전설시대를 요약해주는 역사이다. 일반적으로 도자기는 제사와 관계있고, 제사에 사용하는 제기는 술과 관계가 있는 그릇이 많다. 제사에서 술은 필수물이었다.
그렇다면 미술사에서는 용산-대문구 문화가 어떤 특징을 가졌을까?
농경사회였고, 주 농산물은 밭 작물인 ‘조’였다. 무덤에 돼지와 개를 같이 묻은 것으로 보아서 돼지는 주요 가축이었다. 개도 일찍부터 집에서 길렀다.
용산문화를 특징짓는 것 중에는 ‘흑도’라는 검은 색 도자기가 있다. 우리나라에도 흔히 발굴되는 홍도가 신석기의 주요 도자기였으나 용산문화에서는 홍도가 사라지고 흑도가 많아졌다. 흑도는 두께가 아주 얇았으므로 한 단계 높은 기술이 필요했다. 이 정도의 도자기라면 전문 직업인이 필요하다. 즉 직업 분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말해준다. 강채 마을과 비교해보면 전쟁의 희생자로 보이는 유골도 발굴되었다. 전쟁이란 능력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부족장(chiefdom-君長)으로서, 국가의 바로 전 단계라고 본다.
첫댓글 중국에서 신회 또는 전설이라고 하는 황제-복희-우-순 등의 인물이 용산문화 시대의 보족장이 아닌가 합니다.
이들은 모두 남성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부계사회의 가부장적인 인물들입니다. 그래서 용산문화는 중국문화의 형성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