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 289(운명(運命)이란?)-11
웅중산을 내려오는 초희의 마음이 한없이 무거웠다. 백도의 지낭(智囊-지혜(智慧)가 많은 사람)이라 불리는 제갈세가답게 역시나 만만한 가문이 아니었다. 팔마(八魔)가 지휘하던 배화교 무사들은 전멸(全滅)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자신들도 조금만 잘못 생각했으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다행이 사전에 함정이라는 것을 알고 강시들만 대동했기에 이정도 피해로 끝내고 빠져나올 수는 있었으나, 아무런 소득도 없이 그냥 물러나 빙궁의 명예(名譽)에 먹칠을 했다. 하지만 초희을 괴롭히는 것은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자꾸만 풍운에게 빨려 들어가는 자신의 마음이 괴로웠던 것이다.
풍운은 천려빙백강시가 되어 이제는 과거를 잊어버린 여인들을 지금도 끔찍하게 사랑하고 있다. 풍운이 그녀들에게 연연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의 주위에는 여인들도 많지 않는가? 사사천교의 교주인 하후소하도 있고, 천마마련주의 손녀인 초벽하도 있으며 장강수로십팔채의 조옥선도 있다. 아라와 수혜가 요물(妖物)들처럼 아름답지만 하후소하나 초벽하 등도 결코 빠지지 않은 미모를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몸뚱이가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아라나 수혜와는 달리 다른 여인들은 막강한 부와 권력까지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풍운은 그녀들을 잊지 못하고 변민하고 있다.
예전에 다정화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수혜와 아라는 사랑하는 이의 겉을 떠날 수 없어 천려빙백강시가 되는 고난의 길을 선택했고, 풍운은 그녀들을 반드시 구해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풍운이 집착하는 이유가 약속 때문일까? 아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풍운은 그녀들을 사랑하고 있다.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그녀들을 잊지 못하고 연연하는 것이다.
빙궁은 세상으로부터 상처받고 버림받은 여인들의 한이 서린 문파다. 또한 자신은 궁도들의 염원을 짊어지고 있는 궁주다. 하지만 초희는 한 번도 남자에게 상처받은 경험은 없다. 부모님이 누군지도 모르는 고아로 어릴 적에 빙궁에 거두어져 오직 궁에서만 살았으니 남자를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세상에 나와 처음 만난 남자가 풍운이었다.
천인(天人) 같은 외모와 기상(氣象)을 가진 남자.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받칠 수 있는 남자.
“이게 무슨 해괴한 망상(妄想)이란 말인가?”
초희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린다. 사부와 궁도들의 기대가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데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번 흔들리기 시작한 방심(芳心)은 쉽게 진정되지 않을 것이다. 얼음처럼 차가운 가슴속에 누구보다 뜨거울 열정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 초희이기 때문이다.
“궁주님. 정말 이대로 돌아가실 겁니까?”
산을 내려오자 장로들이 다시 물어본다.
“우리가 물려가기 전까지 저들도 방심하지 않을 겁니다.”
“칼을 뽑았으면 썩은 무라도 베어야하지 않습니까?”
“저들의 공격해서 얻을 것이 없어요.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가 선택을 잘못했어요.”
“체면이 말이 아니군요.”
“한번 실패했을 뿐입니다. 제자들에게 철수 준비하라고 하세요.”
“악양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이대로 좌충우돌(左衝右突)했다가는 오늘과 같이 실패만 되풀이 됩니다. 배화교의 정확한 의도와 중원 무림의 움직임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악양으로 돌아가시겠다는 말씀이죠.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빙궁의 제자들이 철수준비를 서두른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다시 악양으로 돌아가려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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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은 여전히 두발자국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다. 손을 뻗으면 곧이라도 닫을 것 같은 거리지만 너무나 멀게만 느껴진다. 란은 세가가 가까워지자 작은 뿔피리를 불었다.
“뿌우~”
뿔피리의 독특한 음향이 메아리치자 망루(望樓)위에 있던 무사들이 란을 발견하고 종을 친다.
“끼이이익~”
안에서 꼭꼭 잠겨있던 육중한 정문이 열리더니 가주인 만통선생과 무사들이 달려왔다. 웅중산에서 거대한 폭발이 있었기에 걱정하던 차에 란을 보자 달려오는 것이다.
“어서 와라.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만통선생의 질문에 란은 한발 옆으로 물려났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먼저 인사부터 하시죠.”
만통선생은 의아한 눈으로 란을 따라온 풍운을 보고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한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도 있었단 말인가? 경국지색(傾國之色)이니 월궁항아(月宮姮娥)니 미인들을 표현하는 말들이 많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도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만큼은 못할 것이다.
“인사하세요. 이쪽은 가주님이시고, 이쪽은 마수마랑 풍운님입니다.”
“마, 마수마랑? 그럼 이 친구가 무경이의 남편?”
“안녕하세요. 풍운입니다. 진작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하는데 이제야 인사드리게 되어 송구합니다.”
풍운이 정중하게 인사하자 만통선생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도 인사한다.
“바, 반갑네. 그런데 자네가 어떻게 여길..........혹시 무경도 함께 온 건가?”
“무경은 군산에 있습니다. 다음에 함께 와서 인사드리겠습니다.”
“그, 그런가? 란이야.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어떻게 만난 거야.”
“본가가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오셨다고 합니다. 빙궁을 막는데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이거야 원. 밖에서 이럴 일이 아니지. 일단 들어가세.”
풍운 일행이 안으로 들어오자 무사들이 다시 정문을 닫고 주위를 경계한다. 아직 배화교나 빙궁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니 경계를 늦추지 않은 것이다. 만통선생은 풍운과 란을 자신의 집무실로 안내했고, 일행이 탁자에 둘려 앉자 란이 먼저 웅중산에서 있었던 일을 간락하게 설명했다.
“배화교는 전멸(全滅)했고, 빙궁은 물려갔다는 말이지. 수고 했다. 정말 수고했어.”
“빙궁은 다시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완전히 물려갈 때까지 안심할 단계는 아닙니다.”
“하여튼 수고 많았다. 그리고 자네에게도 고맙다고 해야겠군.”
“당연히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그래 무경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아픈데는 없고, 잘 지내고 있겠지.”
“칠음절맥을 완전히 털어내고 이제는 건강합니다.”
무경이 건강하다는 말에 만통선생은 만감(萬感)이 교차했다. 죽어가는 딸을 치료하기 위해 세가의 모든 것을 걸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모든 것이 허사로 끝났다. 하늘을 가리는 학문도, 무림의 현자(賢者)라는 명예도 딸의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덧없었다. 죽어가는 딸도 살리지 못하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한심했던가? 그런데 풍운은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포기했던 무경을 치료하고 새로운 삶을 주었다. 남들이 풍운을 무림공적이라고 욕해도 자신에게는 딸을 살려준 은인인 것이다. 풍운은 만통선생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숙이고 있다. 몇 번의 경험이 있으나 장인 앞에서는 향상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만통선생은 풍운의 위아래를 살펴보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그동안 많은 놈들을 만났기에 웬만큼 생긴 놈은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으나 풍운이라는 놈은 생겨도 너무 잘생겼다. 더구나 태산 같은 기상(起床)와 만인(萬人)을 압도하는 무공까지 지니고 있으니 무경이 남자 하나는 재대로 고른 것이다. 다만 놈에게 무경 외에 많은 여인들이 있다는 것이 아쉽지만, 좀 한다는 놈들은 삼처사첩(三妻四妾)을 거느리는 것이 다반사인 세상이니 큰 흉이 되는 것도 아니다. 란은 풍운과 만통선생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 바늘방석 같았다. 자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지 않는가? 란이 헛기침을 하며 일어났다.
“저는 이만 나가볼게요.”
“어디 가려고.........?”
“빙궁의 움직임을 감시해야죠.”
“그건 천천히 해도 늦지 않아. 앉아라.”
란이 어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는다. 만통선생이라고 어찌 란의 심정을 모르겠는가? 무경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만큼 미워하고 증오했을 것이다. 무경은 란과 풍운이 천생(天生)의 연(緣)으로 맺어져 있다고 했다. 천기(天氣)를 헤아리는 무경의 말이니 틀린 말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란에게 풍운은 아끼고 존경하는 무경을 뺏어간 남자였을 뿐이다.
만통선생은 측은(惻隱)한 눈으로 란을 바라본다. 나은 정보다 키운 정이 크다는 말도 있다. 만통선생은 핏덩어리 같던 란을 거두어 오늘까지 키워왔기에 남이 아니라 무경처럼 친딸로 생각한다.
“경황(驚惶)이 없어서 내 이야기만 했군.”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편안하게 말씀 하세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한가해지면 이야기하고, 자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네.”
“말씀하세요.”
“무경을 잘 돌봐주게나. 영특한 아이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여린 아이라네.”
“..........”
“그리고 그동안 란과의 있었던 이야기를 들었네. 자네가 란을 이해해 주게.”
“예? 그건 무슨 말씀인지?”
“그동안 란이는 자네와 무경 때문에 고민을 많았네. 무경은 란에게 전부였거든.”
란은 갑자기 만통선생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몸 둘 바를 몰라 고개만 숙이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일어나고 싶지만 만통선생이 붙잡고 있으니 일어나지도 못하는 모양이다.
“저도 대충은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부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어느 정도 란님을 이해하고 있어요.”
“고맙네. 자네와 란은 무림을 구원할 구성(求星)이네. 또한 천생(天生)의 연(緣)으로 연결되어 있어. 네게 무경도 소중하지만 란도 소중한 딸이라네. 무경을 살려준 것은 고맙지만 란을 아프게 하면 용서하지 않겠네.”
“명심하겠습니다.”
만통선생의 협박(?)에 대답은 했지만 마음은 편치 않다. 란을 이해하고 노력했지만 란은 그런 자신을 죽이려 했다. 자신이 다가가려 해도 란이 거부한 것이다. 풍운은 운명(運命)을 믿지 않는다. 하늘이 자신의 짝을 정해주었다고 해도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상대가 마음의 문을 닫고 거부하는데 혼자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란에 대한 일이 아니라고 해도 복잡한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수혜와 아라 일만해도 머리가 터질 지경인데, 란의 문제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다.
“가주님. 풍운님과의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란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만통선생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젊은 사람들이 알아서 해라. 그건 그렇고 자네에게 또 하나 부탁을 해야겠군.”
“말씀하세요.”
“란과 함께 빙궁을 염탐해 주게나. 우리는 세가를 지켜야 하기에 사람을 빼내기가 힘들군.”
“알겠습니다.”
풍운이 일어나자 란도 조용히 일어났다. 만통선생은 밖으로 나가는 두 사람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본다. 무경만 아니었다면 벌써 한 쌍의 원앙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자신과 무경에게는 잘된 일이지만 란에게 미안한 것이 사실이다.
면사에 가려져 볼 수 없지만 란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왜 하필이면 풍운인가? 왜 하필이면 무경의 남자란 말인가? 풍운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아프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경을 빼앗아간 남자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원망하며 미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젠 자신이 다가가려 해도 풍운이 거부할 것이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여자를 누가 이해하고 사랑해주겠는가?
이젠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늘이 원망스럽다. 운명(運命)이니 천생(天生)의 연(緣)이니 하는 말은 모두 부질없는 말이다. 마음이 아닌데 그런 말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 이 찢어지는 아픔은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도 여전히 풍운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란은 답답한 가슴을 털어버리기라도 하듯 속도를 높였다.
아직도 매캐한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숲을 지나 웅중산을 내려간다. 풍운은 멍하니 란을 따르고 있다. 산을 내려갈수록 아라와 수혜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란이 높은 나무위로 솟구쳤다. 풍운도 란을 따라 솟구친다. 란이 어린 가지를 밟고 올라서자 풍운은 천상제 신법으로 란의 옆에 멈추었다. 빙궁의 여인들이 군막(軍幕)을 정리하는 모습이 보인다. 궁주가 약속대로 철수준비를 하는 모양이다.
“힘들지 않으세요.”
란이 용기를 내어 질문하지만 풍운은 대답도 없이 누군가를 열심히 찾고 있다. 그는 누굴 찾는 것일까? 조금 전에 만났던 요물(妖物)들을 찾는 것일까? 대체 풍운과 요물(妖物)들은 무슨 관계일까? 그는 요물(妖物)들을 아가씨와 누님이라고 불렀다. 그는 자신처럼 하늘에서 내려왔다. 가족이 있을 리가 없다는 말이다.
란은 풍운의 과거를 더듬어 보았다. 풍운은 벽궁세가의 하인으로 지내다가 벽궁세가의 멸문(滅門)과 함께 중원전역을 떠돌다가 잠마동에 들어가 십이사(十二死)가 되었다. 그때 풍운과 함께 그가 모시던 아가씨도 함께 잠마동에 들어갔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잠마동을 출관하고 칠사(七死)인 혈지화호(血指花狐)와 함께 배화교의 사냥개로 살았다. 란은 이제야 개별적으로 알고 있던 사실들이 하나의 줄거리로 묶여졌다. 아가씨는 풍운이 모시던 마검요호(魔劍妖狐) 벽궁수혜이며, 누님은 혈지화호(血指花狐) 궁아라일 것이다. 그녀들은 영창평원의 전투에서 죽었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들이 요물(妖物)들로 변해 돌아왔다.
란이 보기에 그녀들의 영혼(靈魂)은 맑고 깨끗했으나 어딘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그리고 빙궁주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고 있었다. 더욱 황당한 것은 그녀들이 풍운이 누군지 모른다는 것이다. 대체 어떻게 된 사연인지 모르겠다. 술술 풀려가던 줄거리가 벽을 만나 답답해서 미칠 것 같다.
“풍운님. 풍운님.”
란이 큰소리로 부르자 풍운은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란을 바라본다.
“말씀하세요.”
“찾으시는 분이라도 있으세요.”
풍운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만 끄덕거린다.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누군지 여쭈어 보아도 될까요?”
지금까지의 란과는 다르다. 독살스럽고 차가운 말투는 온데간데없고 한없이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다.
“아가씨와 누님을 찾고 있어요.”
란과는 대조적으로 풍운의 말투는 여전히 건조하다.
“아가씨와 누님이라는 분이 좀 전에 만나신 그분들인가요?”
“맞아요.”
“그분들 혹시 삼사님과 칠사님·······아닌가요.”
“맞아요. 무림에는 마검요호(血指花狐) 벽궁수혜, 혈지화호(血指花狐) 궁아라라고 알려진 분들이죠.”
“조금 전에 보니까 그분들은 풍운님을 모르시던데········그건 어떻게 된 거죠?”
“그건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대답하시기 싫으시면 안하셔도 돼요. 다만 제가 도움이 될 일이 없을까하고 여쭈어 보는 겁니다.”
풍운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트집이나 잡지 않으면 다행인데 무슨 도움을 주겠다는 말인가? 하지만 란이 정말로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누님이나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겠다고 맹세하지 않았던가? 란이 이번 일을 가지고 또 다시 무시하고 경멸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에게 약간의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그런 것쯤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영창평원의 전투에서 누님과 아가씨는 흑풍대의 독화살에 맞아 온몸에 독(毒)에 퍼지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마령단의 독과 독화살의 독이 엉켜서 치료가 불가능하여 죽음 눈앞에 두게 된 거죠.
“..............”
“당신에 그녀들이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천려빙백강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빙궁으로 가서 생강시가 되는 거죠.”
“잠깐만! 당신과 빙궁은 무슨 사이죠.”
“아라 누님이 빙궁의 사군자였어요. 모두가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있을 때에도 유일하게 빙궁만은 우릴 도움을 주었습니다. 물론 누님 때문이었죠.
“알았어요. 계속 하세요.”
“보통의 강시들과는 달리 천려빙백강시는 살아있는 사람을 강시처럼 만드는 겁니다. 물론 단점도 있어요. 지능(知能)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리는 거죠. 그리고 영혼의 주인에게 절대 복종하게 됩니다.”
“................”
“그걸 알면서도 아가씨와 누님은 강시가 되는 길을 선택했고, 저는 아가씨와 누님께 반드시 구해주겠다고 약속했어요.”
풍운의 간략한 설명이 끝났다. 똑같은 사건이라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지금까지 란은 풍운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거나 무슨 짓을 해도 부정적인 시각 때문에 모든 것이 나쁘게만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바뀌었다.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풍운에게 그녀들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들을 잊지 않고 지금도 그녀들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들이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풍운님을 못 알아보는 건가요.”
풍운은 복받치는 슬픔을 참는 모양인지 입술을 다물고 고개만 끄덕거린다.
“그녀들의 치료 방법은 있나요?”
“찾아야죠. 반드시 찾을 겁니다.”
“사랑했던 분들인가 봐요?”
“사랑하는 분들입니다.”
‘했다’와 ‘있다’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했다’는 과거형으로 지금은 아니라는 의미도 담고 있지만 ‘있다’는 현재진행형으로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라와 수혜는 빙궁주의 명령에 뒤따라오는 풍운을 공격했지만 풍운은 반격조차 하지 않았다. 이건 무엇을 말하는가? 풍운은 과거를 잃어버리고 다른 사람의 꼭두각시가 되어 자신을 죽이려는 그녀들을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는 말이다.
“사랑하고 있다고 하셨나요. 혹시 사랑이 아니라 집작은 아닐까요?”
“집착이라고 해도 좋아요. 중요한 것은 아가씨와 누님을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해야 한다는 겁니다.”
“참 특이한 분이네요. 다른 남자들 같으면 벌써 포기했을 거예요.”
“저를 믿고 천려빙백강시가 되는 고난의 길을 선택한 분들입니다. 어떻게 포기합니까? 란님이 제 입장이라면 포기하시겠어요?”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녀들 때문에 다른 여인들을 힘들게 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예?”
“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는 말입니다. 조금 전에 현재는 그녀들을 구할 방법이 없다고 하셨죠.”
“천려실의 열매를 찾고 있어요.”
“천려실이 뭐고 어떤 작용을 하는지 알고는 있어요. 하지만 독(毒)을 정화(淨化)하다고 정상으로 돌아올 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빙궁이 바보가 아닌 이상 배신할 수 없도록 어떤 금제를 해 놓았겠죠.”
“알고 있어요.”
“풍운님! 이런 방법은 생각해 보셨나요. 그녀들은 영혼의 주인에게 복종한다고 하셨죠. 풍운님께서 주인이 되는 겁니다.”
“물론 그런 생각도 해봤어요. 하지만 그녀들의 주인은 궁주에요. 제가 될 수가 없어요.”
“궁주를 죽이면 되잖아요?.”
“그, 그건········궁주가 죽으면········”
“그녀들도 함께 죽나요? 아닙니다. 제가 만일 궁주라면 자기가 죽는다고 천려빙백강시들까지 죽게 정하지는 않을 겁니다.”
“어떻게 확신하시죠.”
“기분 나쁘시겠지만 냉정하게 말할게요. 천려빙백강시는 궁주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빙궁의 자산이자 비밀무기일 겁니다. 빙궁의 목적이 뭐죠? 중원 무림정복입니다. 앞으로 끊임없는 싸움이 계속되겠죠. 만일 이 과정에서 궁주가 죽는다면 어떻게 되죠? 천려빙백강시들도 함께 죽나요? 그렇게 되면 빙궁으로써는 엄청난 타격일 겁니다. 빙궁이 바보가 아닌 이상 어느 개인을 천려빙백강시들의 주인으로 정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천려빙백강시의 주인은 궁주가 아닙니다.”
“그럼 누가 주인이죠?”
“잘 생각해 보세요. 강시들에게는 수명이란 것이 없어요. 평소에 가사상태로 보관하다가 필요할 때만 깨우죠. 천려빙백강시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겁니다.”
“그게, 지금 이야기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영원히 죽지 않는 강시의 주인으로 수명이 있는 인간으로 정하지는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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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보고있습니다
즐독
잘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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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