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스와 마이너스
<수필> -문하 정영인-
플러스와 마이너스는 서로 보완의 상생관계이다. 수학의 연산에서 덧셈의 역연산(逆演算)이 뺄셈이고, 뺄셈의 역연산이 덧셈이다. 전기도 플러스 전기(+)에서 마이너스 전기(-)로 흐른다. 자석도 N극과 S극이 있듯이 모든 사물은 음양(+ -)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 남녀의 결혼이 음양의 조화이듯이……. 교류 전기가 플러스 전기와 마이너스 전기가 번갈이 바뀌어 흐르듯이 모든 사물은 +와 –의 변화와 조화이기도 하다. 심장도 미세한 전기가 흐르지 않으면 박동이 멈춘다. 위가 있으면 아래가 있고, 좌가 있으면 우가 있게 마련이다. 새도 좌우익의 날개가 있어야 날 수 있다.
살다보면 플러스에서 마이너스가 될 때가 있다. 베토벤은 청력을 잃고, 헬렌켈러는 시력을 잃었듯이 말이다.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신체기관에 결함이 생기면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보상을 해준다고 한다. 시력에 손상을 입으면 보통사람보다 청각과 후각이 예민해진다고 한다. 없어진 부분의 재능으로 채우기 위해 다른 부분의 재능이 발달한다는 것이다. 두 손을 잃으면 두 발의 기능이 대신하듯이 말이다. 나의 부족함을 다른 무엇이 채워준다는 것이다.
마이너스(-)를 수직으로 세우고 수평으로 겹치면 플러스(+)가 된다. 플러스(+)와 마이너스(-)는 서로 상생 보완의 관계인 것이다. 서로 기대며 사는 존재이다. 한자 ‘사람 인(人)자’를 보더라도 ‘⼃ ’획과 ‘⼂’획이 서로 기대며 ‘사람 인(人)자’를 이룬다. 한 쪽 획이 없어지면 다른 쪽 획은 쓰러질 것이다. 모든 사물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한글 ‘가’도 ‘ㄱ과 ㅏ’가 모여 ‘가’가 된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다. 좀 모자라면 그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기 마련이다. 배우 신애라는 ‘교육은 과잉보다는 결핍이 낫다’ 라고 말한다. 우리 교육은 과잉 천지다. 거기다 부모의 과잉이 넘쳐 난다. 대학생 자식 강의까지 신청해줄 정도로…. 과잉에 게을러지고 자립심이 적어진다. 수포자(數抛者), 과포자(科抛者)가 늘고 일하지 않고 편안하게 노력의 대가를 바란다. 자기 줏대대로 인생을 선택하지 못한다. 갈수록 형그리 정신이 부족하다고 한다. 너무 풍족해서 그런가?
세상은, 세계는 비우고 채우고의 연속이다. 달이 차면 기울고, 썰물과 밀물도 교대로 비우고 채운다. 우리가 먹은 물은(+) 소변으로(-) 나간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 항아리의 본질은 비움에 있다. 그래야 담을 수 있다. 갈릴리호수는 물이 들어온 만큼 내보낸다. 그래서 살아있는 바다가 된다. 사해는 물이 들어와도 내보내지 않는다. 그래서 죽은 바다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몸에 들어온 만큼 어떤 방법으로도 내 보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쌓여 비만이 된다. 우리가 먹은 탄수화물을 내보내지 못하면 우리 몸에 중성지방으로 변하여 축적된다. 화분에 물이 고이면 식물의 뿌리는 썩어서 죽게 마련이다.
생각이 많으면 고민하게 된다. 불경에서 입은 말을 줄이고, 밥통은 밥을 줄이고, 마음은 일을 줄이면 신선(神仙)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비움(-)과 채움(+), N극과 S극, 음과 양, 플러스와 마이너스는 영원한한 알파(Α)요, 오메가(Ω)다. 우리 인생은 결국 +, -, ×, ÷ 의 집합체이다. 더할 때는 더하고, 뺄 때는 빼고, 곱할 떼는 곱하고, 나눌 때는 나누자. 그래야 합이 되고 차가 되고 곱이 되고 몫 된다. 가감승제(加減乘除)는 합·차·곱·몫이다. 성공이 플러스(+)고 실패는 마이너스(-)라면, 실패(-)가 성공으로 에둘러 가는 길이 될 확률이 높다고 한다. 고진감래(苦盡甘來)가 그런 것이 아닌지. 고(苦)라는 마이너스(-) 다음에 감(甘)이라는 플러스(+)가 온다는 심오한 뜻이 아닌지?
결국 인생은 덧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다가 가는 나그네길이리라!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