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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연산 보경사 원문보기 글쓴이: whitelotus
보경사 안내판
바닥에 물을 빼는 구멍이 보인다.
보경사의 소위 비사리구시??? 사실은 종이 펄프를 물에 풀어두는 지통(紙桶)!!!
안내문:
<부처님의 공양을 마련하는 절간 주방의 '구시'로,
이 구시는 조선후기 보경사에서 나라 제사 때마다 많은 손님들의
밥을 퍼 담는 그릇으로 사용되었다.
쌀 7가마(약 4,000명분)의 밥을 담았던 통으로
보경사의 명물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왜 절간이라고 표현하였는지 모르겠다.
'중', '중놈', '절간', '이 화상아!,' '목탁같은 놈아! ' 등등
이런 표현은 성리학 유교를 국가와 사회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 양반들이 불교를 비하하면서 썼던 말인데...
문맥을 잘못 읽으면 부처님께 올리는 마지 공양밥을 퍼 담기도 했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절에서는 부엌, 주방이라 하지 않고
전통적으로 '후원'이라고 하고 주방장이라고 하지 않고 '원주'라고 하는데...
아래 사료들은 보경사에서 얼마나 종이를 많이 만들었던가를 잘 보여준다.
종이는 기본적으로 책 인쇄나 문서 작성에 쓰인다.
<절의 곁에 풀이라곤 등나무(-닥나무와 같이 종이의 원료)이고 나무라곤 닥나무인데 거주하는 승려들의 생업 밑천이었다.
......
노승이 짚신을 바치며 말하기를 ‘절에서 서쪽으로 구름문과 돌길이 험악하고 깎아지른듯하니 이 아니 어려운 걸음이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동행할 사람들을 뽑았는데, 이야기를 나눌 승려(談僧)는 학연(學衍), 시문을 챙기는 시해(詩奚)는 덕룡(德龍), 벼루를 드는 사람(硯者)은 홍원(洪源), 술시중할 사람(酒者)은 매운(梅雲), 옷과 양식을 들고 갈 사람은 억동(億童)이었다. 또한 한 명의 백족(白足-淸淨僧)으로 하여금 날 저물 시간을 헤아리게 하여 아무 암자에 이르러 잠자리로 삼도록 하였다.
......
숙부가 바위 사이의 녹색 수풀을 가리키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화살대가 아닌가?’하였다. 학연이 답하기를 ‘관아의 아전에게 공물 바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였다.
......
내가 그 승려가 없음을 힐난하자. 학연이 말하기를 ‘불교가 쇠퇴한 것입니다. 관아의 부역 때문입니다.’고 하였다.
......
스님들은 가마꾼이 되고 절은 밥을 지어 나르는 여관이 되었습니다. 이 산이 이름을 가지면 우리 스님들이 심하게 해를 입었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여일, 유내영산록, 1587(임진왜란 발발 5년 전)
二十日小有雨徵。飮白粥酒一廵而發。余委見光胤于其家。親親之義厚矣。朝飯申光村。午過淸河縣。諧甫入見主倅。諸君幷歇馬于松羅驛溪邊。余入酌一盃而行。諧甫追到于寶鏡寺。寺乃鉅琳宮。幾至二百餘間。而但無所奇觀。此與村店相隣。左右楮田。瀰滿一洞。可知寺僧皆重利者也。法堂前有牧丹一叢。只爲野僧之賤看可惜
음력 (9월) 20일 조금 빗방울이 떨어졌다. 백죽주(-쌀로 누룩을 만들고 배꽃 필 무렵에 쌀가루로 술을 빚는데, 요구르트처럼 숟가락으로 떠먹기도 하고, 물에 희석시키면 쌀 막걸리 탁주가 되는 이화주를 말하는 것 같다. 이화주는 고려시대부터 마시던 최고급 탁주로 소화력이 약한 어린이나 병약자, 여행객이 휴대하여 마셨다. )를 한 잔 마시고 출발하였다. 내가 광윤을 그 집에서 보았는데 친척을 친하게 여기는 의리가 두터웠다. 아침밥을 신광촌(神光)에서 먹고 정오 무렵에 청하현을 지났는데 해보가 읍성으로 들어가 원님을 만났다. 제군이 송라역 냇가에서 말에게 물을 먹였고 나는 (주막으로) 들어가 술 한 잔을 마시고 갔다. 해보가 보경사로 뒤쫒아 왔다. 절은 거찰이라서 거의 200여 칸의 건물들이 있었다. 다만, 특별히 볼 만한 경관은 없었다. 이곳은 촌주막(송라역 아래쪽 '여인의 숲'이 있는 곳?)과 서로 이웃하였다. 절의 좌우에는 닥나무밭인데 골짜기에 가득하였다. 절의 승려들이 모두 (제지 생산과 판매의) 이익을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법당 앞에는 모란 한 떨기가 있었는데, 다만 야승의 천박을 보여주니 안타까웠다.
-서사원, 동유일록, 1603(임진왜란 종료 5년 뒤)
山水之佳 美則美矣 班豹之皮 反自爲禍 水明之害 困於紙役 山佳之患 苦於賓客 然 天生山水 人如之何
산수의 아름다움은 아름다우면 아름다운 것일 뿐이다. 표범 가죽의 아름다운 무늬가 오히려 목숨을 빼앗기는 화가 되고, 물이 밝은 것의 해로움은 (관아에 공물로 바치는) 종이를 만드는 잡역을 부담하는 곤란을 준다. 산이 아름다운 것의 근심은 빈객을 (대접하고 가마 태우고 산을 오르내려야 하는) 고통이 된다. 하늘(자연)이 산수를 낳았으니 사람이 어찌하겠는가.
-동봉회관 스님, 보경사사적기, 1792.
어릴 적 마굿간(외양간)에서 소에게 쇠죽을 퍼 담아주던 여물통(구유) 처럼 생겼다.
안내판에는 이름을 비사리구시라 하였고,
구시라고 한다고 하였다.
조선후기에 절에서 나라의 제사 때마다 많은 손님들의
밥을 퍼 담는 그릇으로 부엌에서 사용하였다고 하였다.
7가마의 쌀(약 4,000명 분)의 밥을 퍼 담았던 통으로
보경사의 명물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항상 의문은 남았다. 과연 밥을 저렇게 투박한 나무 그릇에 퍼 담았을까?
용도가 늘 궁금하였다.
그런데, 오늘에야 의문이 풀렸다.
방학이라 방 청소를 하다가 구석에 쌓여 있는 책자들을 정리하다가
안동의 국학연구원에서 발간한 책자의 고서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부분에서
통도사의 판석과 지통 사진을 보고서야 비사리구시가 아니라
지통임을 알게 된 것이다.
딸 아이가 대학생이 되어 삼월이면 서울로 올라가버리기에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지난 일요일에 보경사와 내연산 등산을 같이 하였다.
보경사를 안내하며 이 지통을 유심히 보았다.
그리고 딸 아이와 아내에게 안내판대로 밥 퍼 담는 비사리구시라고 설명을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엔 고서를 소재로 하는 수필을 한 편 쓰면서
고서에 관한 상식 공부를 하였다.
이 유물은 닥나무 껍질을 삶아서 돌(판석)에 두들겨 그 닥죽(펄프)을 물에 풀어두던 지통이다.
이 지통에서 닥나무 펄프를 촘촘한 키로 퍼 올려서 말리면 곧 종이가 된다.
대찰인 통도사, 송광사에도 보경사의 지통과 같이 생긴 것이 두 점씩 있다.
이 지통은
보경사와 통도사 , 송광사 등의 전국의 사찰들이 사원경제 지탱을 위하여
얼마나 종이를 많이 생산하였으며
국가에 종이를 만들어 납부하였던가를 보여준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국가와 지방 관청들이 재정 악화로
사찰들에 종이를 비롯하여 여러가지 잡물들을 공납하게 하는
경제적 수탈을 하였던가를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동학의 해월 선생은 청년시절 신광면 마북리 옴금당 조지소에서 종이를 만들고
또 흥해, 영덕 등지로 종이를 팔고 수금하러 다니기도 하였다.
지금도 영덕에는 한지 생산 마을이 남아 있다.
보경사의 이른바 비사리구시 예전 안내문
송광사의 소위 비사리구시 안내문
1724년 태풍으로 쓰러진 남원의 싸리나무를 가져와 만들었고, 송광사의 3대 명물의 이름,
약 4,000명 분, 송광사 안내문은 '~ 통 이라 함'이라고 하여 확언을 하지 않았다.
보경사의 이른바 비사리구시 안내문은 송광사의 것과 거의 동일하다.
보경사 안내문의 이 유물이 보경사 명물의 하나라는 것도
물론 송광사 안내문에서 가져온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과연 4,000명분의 밥을 퍼 담을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송광사의 것은 쓰러진 싸리나무를 남원에서 가져와 만들었다고 하지만,
보경사의 것은 무슨 나무인지 모르겠으나 송광사의 정보를 보고 싸리나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싸리나무는 떨기나무(관목)로 느티나무나 소나무처럼 키가 크는 교목이 아닌데 기둥으로 자랄 수가 없다.
비석 테두리의 연화당초무늬를 보라!
고려 불교 문명의 국제적이고 화려하고 섬세한 미감을 잘 보여준다.
비문 첫 머리의 '一心'이라는 말에 특히 유의할 것.
원효 스님이 화쟁론의 근간으로 삼기도 하였던
대승기신론에 등장한다. 원효 스님은 대승기신론 소 별기를 남겼다.
원진국사는 한국불교사에서 능엄경의 중요성을 천명하였다.
보경사의 보물은 원진국사 승탑, 탑비, 사인 스님이 주조한 서운암의 범종이다.
보경사 최고의 성보 미술품은 적광전 비로자나불 후불도이다.
이 후불도는 통도사 성보박물관에서 발간한
한국의 불화 40권에서 명품만을 따로 모아 낸
한국의 불화 명품 선집의 표지화이다.
그리고 금당탑과 승탑의 자물통과 문고리 부조를 보라!
아니면 천왕문에 걸려 있는 현판들을 보라 얼마나 아름다운 글씨인가?
또한 보경사에는 월포 오두촌에서 태어나서 보경사로 출가한
명승, 시승이었던 오암 스님이 머무셨다.
이 지통이 어찌 보경사의 명물 중에 하나가 될까?
그리고,
나라의 제사를 과연 보경사 절에서 꼬박꼬박 지냈을까?
적광전 후불도의 화기에 국왕,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패가 그려져 있긴 하지만,
보경사가 능침 사찰도 아니고 나랏님의 제사를 지낼 이유가 없다.
왕가의 안녕과 명복과 장수를 기원하는 원당으로서 관청과 양반의 침탈을 막기 위해
재를 한동안 지냈을 가능성은 배제하지 못하겠지만.
숙종 때 전국적으로 왕실은 사찰 중수를 크게 일으켰던 것 같다.
보경사도 숙종 연간인 1677-1678년에 현재의 가람 모습을 갖춘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송광사, 통도사, 보경사 등의 대찰에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초파일이나
수륙재, 영산재 등의 큰 재를 설행하고
몰려드는 민중들에게 음식을 베풀 때
일시적으로 지통에다 밥을 퍼 담았을 수 있고,
물통으로도 사용했을 것이다.
밥통을 말하는 구유의 사투리로 구시라고 하였을 수도 있다.
어느 시인은 보경사에 이른바 비사리구시 안내문을 보고서는
아래와 같은 아름다운 시를 창작하였다.
그러나 상상력의 원천인 사실이 잘못되었기에
그 문학적인 가치는 반감할 수 밖에 없다.
차라리 사찰에서 종이를 만들어
관아에 납부하는 부역에 시달리고
억불숭유의 조선 사회에서 사찰들이 얼마나 경제적 어려움에 허덕였던가를
정확히 알고
그에 부합하는 시를 썼더라면 기록성, 사회 고발, 사회 참여, 삶의 재구성, 위안이라고 하는
진실을 담보하는 문학의 힘과 가치와 아름다움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문화 유산의 정확한 안내가 가지는 중요성과 가치를 재삼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은 비사리라는 말에서 사리를 연상하고 있기도 하다.
적광적 후불도의 아름다움을 시인이 인식하고 갔더라면
얼마나 더 아름다운 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원진국사가 호랑이에게 몸을 던져 두타행을 하였다는
보경사에 전해오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국사의 승탑에서 들려주었다면
한편의 아름다운 단편소설이 창작되었을 지도 모른다.
해방 이후
포항에서 살다가 작고하고 문학비가 보경사 경내에 있는
한흑구 선생은 보경사의 노거수 회나무를 보고,
또 보경사의 목련꽃을 보고 아름다운 수필을 썼다.
보경사와 내연산을 정확하고 아름답고 깊이있게 소개하는
책을 어서 집필하고 싶다.
지금 나름대로 준비 중이긴 하다.
비사리구시
김종제(국어교사, 시인)
배 타고 한참을 물 건너가
팔면의 거울을 비로소 얻었으니
내연산 땅속 깊이 묻어놓고
일조대사가 보경사를 세웠다
큰 바람 부는 날
싸리나무 하나 쓰러져
비사리 구시를 만들었는데
해태나 삼존불보다 명물이라고,
잔칫날 공양을 마련하려고
몇 천 명 먹을 수 있는
밥 퍼 담아놓는 그릇이다
쌀로 만든 저 두둑한 흰밥이
부처의 사리였으니
모락모락 김 오르는 밥 담아놓은
저 구시가 사리함 아니겠는가
다비로 방금 지어낸 밥이란
생의 숨구멍에서 얻어낸
한 톨의 정수精髓 아닌가
저것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서
산 아래 노숙의 곁으로 던져놓고
밥그릇마다 비로자나불의 말씀을
고봉으로 담아서 드리겠다
저 가난이 남김없이 드신 다음에는
좌우에 계신 문수와 보현의 미소로
세상 깨끗이 씻어놓겠다
내일 또, 저 비사리 구시에
사리 같은 밥 담아 놓으려고
(통도사의 지통-사람들은 비사리구시라고 부르며, 밥을 퍼 담는 용도로 쓰였다고 인식한다.
물론, 일시적으로 후원에서 밥이나 물을 담는 용도로 쓰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지통이다.
통도사에는 삶아낸 닥나무 껍질을 잘게 부수는 돌판, 곧 판석도 현전한다.)
경남 옥천사의 지통으로 종각에 보관하고 있다. 역시 사람들은 밥을 퍼 담는 비사리구시로 인식한다.
케이비에스 역사스페셜, <<역사스페셜7>>(효형, 2004) 238-240쪽.
통도사와 가까운 울산 원적산 운흥사는 지금은 폐사가 되고 말았지만
종이를 만들고 경전을 인쇄한 사찰로 이름 높았다.
절터에는 수조 2개와 판석이 있다.
종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원료인 닥나무(등나무도 혼합한다)를 재배하여야 하고,
물이 좋아야 한다.
불교가 국교였던 신라 고려시대부터
사찰은 많은 불경을 인쇄하였다.
현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인 백운화상초록직지심체요절도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하였다.
사찰은 제지와 인쇄 기술의 집결처로
조선시대에도 기 기술과 능력이 고스란히 이어졌다.
조선국가는 유교를 국가와 사회의 지도이념으로 삼고
불교를
제도권 밖으로 밀어내고
사회적으로 승려를 천인 신분으로 삼았으며
경제적으로 사찰의 노동력인 노비와 토지를 몰수하여
수 많은 사찰, 암자들이 쇠락하고 폐사가 되었다.
승려가 살지 않으니 절에는 빈대가 들끓을 수 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빈대 때문에 스님들이 절을 비운 것이 아니라 국가의 온갖 공물과 잡역에
견디지 못하고 스님들이 절을 떠나고, 절은 빈절이 되고 만 것이다.
승려들을 놀고먹는 유휴인력으로 여기고 남한산성 축성 등의 잡역에 동원하였다.
사찰과 암자는 양반 유생들의 휴양처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또한 국가는 끊임없이 사찰에 화살대, 짚신, 종이 등등 온갖 공물을 납부하게 하였다.
사원 경제의 지탱을 위하여 승려들은 속가로부터 재산을 받기도 하고
상업 행위도 하였다. 안용복의 꾀임에 빠져
울릉도, 독도로 들어간 여수 흥국사의 뇌헌 등의
승려들은 배를 타고 울산에 까지 와서 해산물을
교역하기도 하였다.
또 조선후기에 승속이 참여하는 불량계, 등촉계 등의 사찰계가 널리 결성되어
식리로 사원경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제지업은 사찰의 주요한 수입원이 되기도 하였다.
사찰에는 건축이나 제지, 인쇄, 제책, 조와 등의
기술을 가진 각종 장인 승려들도 많이 존재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국가 관청이 재정의 악화로 사찰들이 더욱 더 심하게 수탈을 당하였다.
재산을 기부하면 승려들에게도 통정 등의 공명첩이 주어지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