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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설교(30)
-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 주기도(6) -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태복음 6장 9-13절 / 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인 ‘주기도’에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는 ‘주기도’에서 가장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기도를 가지고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하루에 필요할 양식을 구하게 하신 것으로 이해하고서 이것을 확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영적 축복과 함께 물적 축복도 구하게 하셨다고 말하며 이를 구하도록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일용할 양식에는 영적 양식과 육적 양식 두 가지가 있는데 영적 양식은 하늘에 속한 복으로 영생하는 구원과 관련이 있고 육적 양식은 땅의 복에 해당된다며 날마다 하루에 필요한 양식이 있어야 생명이 유지되듯이 영생하는 구원에 있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날마다 먹는 것으로 영적 양식을 하나님께서 날마다 제공한다며 이 양식을 날마다 구하고 먹을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날마다 구하고 먹을 영적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니 하루 세끼 밥을 거르지 않고 먹듯이 영적 양식 또한 거르지 말고 날마다 먹을 것을, 그래서 날마다 성경을 읽을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하는 이야기가 이처럼 영의 양식에 풍부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는 육의 양식도 넘치게 주신다는 것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하나님께서는 육의 양식을 날마다 제공하여 축복하신다는 것이 관점입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게 하신 것으로 그 이해를 잘못하고 있는 이 두 가지의 경우에서 첫 번째의 경우인 일용할 양식을 영적 축복과 함께 물적 축복으로 말하는 자들의 교훈은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가르침이 아닌 것을 단번에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이러한 교훈을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인양 알고 있는 눈 먼 소경에 있고 귀 먼 귀머거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소경과 귀머거리를 따름으로써 또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늘로부터 오는 가르침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여 함께 멸망의 길에 있는 형편입니다.
한편, 두 번째의 경우인 일용할 양식을 하늘의 복인 영적 양식과 땅의 복인 육적 양식으로 구분하면서 사람은 육적 양식이 필요하듯이 또한 영적 양식이 필요하다며, 예수께서는 구원받은 신자들이 날마다 먹을 영적 양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주셨으니 성경을 날마다 읽는 것에서 영적 양식을 날마다 먹는 생활을 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 믿는 신자들에게 얼마나 필요하고도 좋은 말씀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지요. 다른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영적 양식이라며 이 양식을 날마다 구하여 먹게 하셨다니 말입니다. 성경을 영적 양식으로 먹으라고 하는데, 그래서 성경을 읽으라고 하는데 이것을 마다할 신자가 누가 있겠는지요.
그러나 말입니다. 이 또한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이 의도하고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교훈으로서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있게 하신 기도인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에서 ‘일용할 양식’은 그와 같이 날마다 성경을 읽어 많이 읽는 것에 본문의 뜻인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일 년에 10독을 하며, 수 년 만에 100독을 하는 다독을 하였을지라도 이 성경에서 증거해 주시고 있는 그리스도와 이 그리스도에 대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와 그 믿음에 있지 않고서는 성경은 그야말로 많은 사람이 애독하여 읽고 이것이 주는 유익에 있는 것에서 일용할 양식을 먹는 것이 될지언정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하시며 말씀하신 본의로서의 일용할 양식을 먹는 것에 있지는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며,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기도하게 하신 것이 어떤 의도에서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는 원문이 “오늘<지금> 우리에게 우리들의 필요한<생존을 위한>양식을 주옵시고”입니다.1) 우리들의 생존을 위하여 필요한 양식이기에 이 양식은 날마다 필요한 것이며, 그래서 날마다 제공되어져야 할 필요한 양식이기에 이 양식은 ‘오늘’, 곧 ‘지금’ 필요한 양식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양식을 날마다 구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 양식을 내일 미루지 말고, 그래도 되는 양식이기에 내일 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곧 ‘지금’ 구하게 했습니다.
이 양식을 오늘<지금> 먹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존하는 것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양식이 날마다 제공되는 것에서 우리의 생명이 날마다 보전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있는 자라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양식이 제공되어서 생명이 보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양식이 어떻게 날마다 제공되는지를 떡을 먹이시는 것으로 알게 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빈들에서 자신을 따라 온 무리들을 음식 먹을 자세로 앉게 하신 후에 오병이어의 이적으로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건을 가지고 그들이 참으로 먹어야 할 참된 양식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살리는 떡, 곧 생명을 주는 떡이다. 내 살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 너희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지만 내가 주는 떡을 먹는 자는 영생할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는 떡인 생명의 떡을 주시는 제공자이십니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얻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에게서가 아니면 그 누구에게서도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생명은 오직 자신을 살리는 떡으로 제공하시는 예수님을 취함으로써 얻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양식으로 날마다 취하여 그 양식을 먹고 마시는 자가 됨으로써 산 자로 있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산 자’로 있다는 것은 ‘오늘’ 생명의 양식을 제공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제도 그렇게 예수님의 살과 피로 제공된 양식을 먹고 마시는 자로 있음으로써 생명이 보전되어 왔으며, 오늘도 또한 예수님의 살과 피로 제공된 양식을 먹고 마시는 자로 있음으로써 생명이 보전되고 있습니다. 이는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는 말이죠. 예수님은 영생하는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따르는 믿음에 있는 모든 자를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있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살과 피를 단번에 희생제물로 드려 생명의 영원한 근원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 결코 둘째 사망의 해인 죽음을 보지 않습니다.
해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었습니다.“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그들에게 떡을 내려 준 것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이시다. 이제 아버지께서는 하늘로부터 참된 떡을 너희에게 내려 주신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떡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준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가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할 수 없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 내가 그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모두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안에 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능력으로 내가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내 능력으로 살 것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참된 떡이다. 너희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고도 죽은 그런 떡이 아니다. 이 떡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지 육이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생명에 관한 것이었다.”(요 6:35-35, 52-58, 63). 예수님은 이 영생하는 생명의 양식으로 자신을 제공해 주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오셨으며,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드리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여 자신을 따르는 모든 자들의 첫 번째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명을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이방인 모두의 것이 되도록 제공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이 되시며, 예수님에 의해서 자신들에게 제공된 생명이 보전되는 것을 아는 자는 “말씀으로 영생을 주시는 분은 주님뿐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을 떠나 누구에게로 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이심을 믿습니다”(요 6:68-69) 하는 믿음에 있습니다. 말씀으로 영생을 주시는 분은 하늘에서 온 예수님 뿐이시며, 예수님이 하시는 영생의 말씀을 듣고 생명이신 주님께로 나오는 자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는 귀가 있는 자만입니다. 그들만 듣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하는 자는 하늘에서 주시는 음성을 듣지 못하는 자이니, 그들은 그것을 들을 귀가 없기 때문인데, 그들에게 있는 귀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듣는데 익숙합니다. 그런 그들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이 들어간 떡, 곧 누룩이 들어간 떡을 먹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사상과 그 교훈에는 주님과 그분의 나라가 없습니다. 그러니 사람을 살리는 떡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교훈을 삼가야 합니다(마 16:12). 그런가 하면 헤롯왕의 누룩도 있습니다(막 8:15). 권력의 탐욕에 익숙한 것입니다. 이처럼 누룩이 들어간 떡은 아무리 먹어도 주와 그분의 나라가 없고, 잘못된 교훈과 권력의 탐욕만이 가득하므로 생명이 없습니다. 누룩이 들어간 떡을 먹는 자는 적은 누룩이 온 떡덩어리에 퍼져 있어 이 떡 전체를 발효케 하여 크게 부풀립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에 있는 자는 이러한 것이 들어가지 않은 누룩 없는 자입니다(고전 5:6-8). 그러므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이 들어간 떡으로도 말고 헤롯왕의 탐욕적인 권력이 들어간 떡으로도 말고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없는 떡으로 먹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고전 5:8).
말씀으로 영생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며,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보내신 뜻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이 예수님은 곧 그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로부터 이 떡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요 6:32)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줍니다(요 6:33).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므로 예수께 나아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며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요 6:34-35). 구약에서는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 먹여 주시는 것을 통해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그들로 알게 하려 하셨습니다”(신 8:7). 그럼으로써 매일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만나를 먹음으로써 하나님에 의해서 자신들의 생명이 보전되고 있는 것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고 계신 사실만으로도 생명에 있는 복 있는 자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며 과연 그 믿음에 있는지를 드러내시는 시험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다만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사는 하나님의 권능을 힘 입어 살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언약적 말씀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죽음의 심판에 있는 악한 죄인들임을 드러내는 시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열조도 모르는 만나를 먹이신 것은 그들이 “주리게 하시며 낮추셔서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게 하려고”(신 8:3) 하신 것입니다. 이 목적 때문에 만나를 먹이셨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은 흙에서 취해지는 떡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은 말입니다. 그 생명이 떡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떡으로 살지 않습니다. 사람이 생명에 있는 것은 떡이 아닌 다른 것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우리는 떡을 먹으면서도 이것이 내게 생명을 준다거나 내 생명을 보전시킨다는 생각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죄 아래 있는 사람은 부귀와 권세와 명예를 늘 탐하며 삽니다. 사람의 죄악된 본성에서는 늘 탐심이 발휘가 됩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믿음에 있지 않는 자는 자신이 사는 날까지 부귀와 권세와 명예를 붙잡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사는 날까지 있어야 할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자신이 사는 날까지 생명을 안전히 지켜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아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는 믿음에 있는 자는 부귀와 권세와 명예의 유무와 적고 많음에서 생명을 보고 그 안전을 염려하며 그래서 그것들에서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는 일 따위를 하지 않습니다. 거기에서는 전혀 생명을 보지도 않고 그것으로 생명을 보전하고자 하는 어떤 생각에도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명을 보고 그 생명의 안전과 보전을 구하는 것은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 이십니다.
그러므로 떡이 있고 없음에서, 곧 주리기도 하고 먹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하고 높아지기도 하고, 그 어떤 형편에 있든지 간에 만족하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진 것이 많든 적든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자신이 사는 것은 자신과 함께 하시는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즐김으로 삽니다. 그리스도의 힘으로 사는 것의 즐김에 있는 것입니다(빌 4:11-13). 그러므로 사도 바울을 통해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이 늘 성취됩니다. 우리들이 인천대공원에 가서 벚꽃축제를 보면, 거기서 우리가 하는 일은 피어난 벚꽃을 즐김에 있는 것입니다. 그 기쁨에 있는 것입니다. 벚꽃나무를 심고, 자라게 하고, 단장하고, 사람을 초청하여 구경하게 하는 것은 벚꽃잔치에 참여하는 구경꾼이 아닙니다. 인천대공원을 조성하신 국가나 시와 그곳을 관리하도록 세워 놓은 분이시죠.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안에 우리를 불러 놓고는 그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생명의 구원을 어떻게 해서 그것이 자신들에게 있게 되었는지를 알고 그것을 즐김에 있게 해주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사는 것은 흙에서 나온 떡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의 주가 되신 사실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우리를 있게 해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날마다 하나님의 생명을 힘입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힘입어 사는 공급이 어떻게 있게 되는지를 알려 줍니다. 우리는 성찬을 갖는 것을 통해서 주님의 식탁에서 포도주를 마심으로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의 축복을 함께 받으며, 한 덩어리의 떡을 떼어 함께 먹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다 같이 받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고전 10:16) 주님의 식탁에서의 포도주와 떡은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 섬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포도주를 나누어 함께 마시는 것에서 모두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의 축복을 함께 나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한 덩어리의 떡을 나누어 함께 먹는 것에서 모두 그리스도의 몸을 다같이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식탁에서의 포도주와 떡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의 축복을 그리스도인 모두가 함께 나누어 받음으로써 그들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같은 떡을 먹고 그리스도의 몸과 동일한 한 몸인 지체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식탁에서의 포도주와 떡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누어주시는 피의 축복에 다 같이 있게 하시는 것이며,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과 동일한 몸에 있게 하시는 떡의 나누어주심에 다 같이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한 부분인 지체가 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가 되어 다같이 하나님이 주신 기업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는 다음의 사실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식탁에서 포도주와 떡이 제공되어지는 ‘나눔’에 참여합니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전 10:17). 여기서 한 떡의 ‘나눔’에 ‘참여함’은 함께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동일한 아들이 된다는 ‘상속자’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같은 한 떡을 먹고 그리스도의 한 지체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들이 얼마의 수이든지 간에, 그래서 그 수가 아무리 많든지 간에 그것은 전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 모두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와 살을 나누어 주셔서 그 피를 마시고 그 살을 먹는 자가 되게 그 나눔에 참여한 자가 됨으로써 그리스도의 한 지체가 되어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구속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날마다 공급받는 자가 되어 이 생명에 주린 자가 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나라를 영원히 상속 받습니다. 그래서 주와 함께 주의 나라에서 영원히 왕 노릇합니다.
우리는 오늘<지금> 우리들의 필요한 양식을 주님의 피와 살로써 공급받고 있는 것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나누어지는 것을 받아 그리스도의 한 지체가 되고 있는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 라고 말하여서 우리가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것이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에서 주님이 나누어 주시는 잔과 떡에 참여하는<받는> 축복은 날마다 제공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우리들의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구하는 기도에 있게 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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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에서의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에서 '일용할'은 헬라어 원문이‘에피우시온’(ejpiouvsion)으로서 형용사‘에피우시오스’(ejpiouvsio")의 목적격으로 사용된 것이다. 에피우시오스는‘에피’(ejpi)와‘우시아’(oujsi;a)가 합성된 것으로서 그 뜻은‘생존을 위한’,‘필요한’이다. (1) 교부들은‘일용할’을 ‘생존을 위한’,‘필요한’에 의해서 이해하여 왔다. (2) '일용할'은 '당일을 위한'(ejpi; th;n ouj'san hJmeran)을 뜻하기도 한다. (3) 교부들 중에는‘일용할’을‘오는 날’에서 파생한 형용사인‘헤 에피우사’(hJ ejpiou'sa), 곧 ‘오는 날의’로 이해하는 견해도 가졌다. (4)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일용할’을‘오는 날의’로 이해하는 견해를 지지한다. 양용의, "주기도문 이해(마 6:9-13)-산상설교의 성취 종말론에 비추어",「성경과 교회」제12권 1호(2014), 123. ; 필자는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는 다음의 견해를 갖는다. (1) 우선 원문의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 살려지고 있는 것은 (1)번의 견해이다. (2) 그러나 (2)번과 (3)번에서 보는 의미가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생존을 위한', '필요한' 양식은 '당일을 위한' 양식으로서 당면한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3) 하지만 예수께서 주기도를 가르치시는 것에서 말씀하시고 있는'일용할' 양식은 '생존을 위한', '필요한', '당일을 위한' 중에서 어떤 뜻으로 해석하고 이를 지지하든 그 어떤 경우에서든지 간에 일상적인 육체의 필요와 관련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주기도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신 '일용할 양식'이 지니는 본의는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시는 것을 통해서 주기도에서 나타내시고 있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뚯이 땅에서 이루어짐에 있는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전체 사상과 가장 잘 부합하여야 하는 기독론적인 의미에서 말씀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주기도를 말씀하시는 것에서의 '일용할 양식'과 같은 것으로 오병이어에 의해서 나타내신 이적에서는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말씀하시는 표현적 묘사를 사용하셨다.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떡'에서 의도하고자 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에 있는 것으로 예수님 자기 계시적 표현이었다. 그와 같이 주기도에서의 '일용할'것에서 말씀되고 있는 '양식'은 당시 제자들에게서 그들의 생존을 위해 매일 먹게 되는 양식을 가지고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심이 갖는 성격을 알게 해주시는데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하늘의 참생명에 있게 하기 위하여 날마다 공급되고 있는 하늘로부터 오는 '일용할 양식' 그 자체이시다. (3) 더욱이 '일용할' 양식을 육체의 필요를 위하여 공급되는 것으로 이해할 경우 '오는 날의'의 관점에서 구하게 하신 것으로 본다면, 이는 주기도 문맥에서 부자연스럽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구함에 있게 하시는 것에서 '오늘'(this day)이란 '지금'을 뜻하기도 하는 것으로서 오늘, 곧 지금 구함에 있게 하시고 있는 것에 있는 '일용할 양식'인데, 오늘 구함에 있는 것이 '오는 날의' 양식을 구함에 있게 하여 그 '오는 날'이 오늘 저녁일지 내일 아침일지 불특정한 시간에 의한 날 개념에 있는 것에의 양식을 구함에 있게 하는 것에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곧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오는 날의) 양식을 주옵시고"는 잘 부합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주기도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을 구하게 하시는 것에서 그 구함이 지극히 기독론적인 것인데, 일용할 양식(빵)에서 매일의 생존을 의존하게 하신 것이라거나, 그래서 당면한 하루의 양식을 요청하는 것에 있게 하신 것이라고 보는 견해를 갖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다. 대개 일용할 양식(빵)을 구약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겪은 만나 사건과 견주며 매일 생존에 필요한 당면한 양식을 주실 것을 구하게 하시는 것으로 이해하며 설명하여 나가나, 광야에서의 만나 사건은 만나에 이스라엘에게 생존에 필요한 당면한 양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구하게 하신 것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은 다만 여호와이신 하나님 한 분만으로 산다는 것에 그들의 믿음이 있어야 할 것을 알게 하시는 것으로, 그들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드러내시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