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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주의와 생태주의 환경론
오늘날에 와서는 환경 문제의 중요성과 심각함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나 사회 이론이 없을 정도로 환경에 대한 인식이 일반화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환경 문제가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것은 환경 문제를 이해하는 데에서, 특히 ‘성장과 환경의 관계’를 바라보는 데에서 사람마다 다양한 주장이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환경 문제라고 하면 환경이 오염되는 원인과 피해 양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오염 행위를 잘 단속하면 끝나는 기술적인 문제쯤으로 간단하게 생각해 버리기 일쑤이다. 그러나 인간의 환경 파괴가 오랜 역사에 걸쳐 이루어져 왔지만, 그것이 사람들의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킬 만큼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른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따라서 현재의 환경 위기는 근대 산업 사회의 사회 구조와 문화, 가치관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촉구하고 있는 문제임이 분명하다.
게다가 환경 문제는 직접적인 인간관계에서 나타나기보다 사회 조직과 환경 사이에서 나타나는 특성 때문에 놓치기 쉽지만, 다른 어떤 문제 못지않게 사회 문제로서의 성격을 잘 지니고 있다. 환경 문제는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질에 관한 문제이며, 또한 특정한 사회에서 여러 가지 사회적 원인 때문에 나타난 사회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환경오염의 피해에서는 사회적 불평등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환경오염의 피해는 주로 생물학적 약자와 사회적 약자에게 먼저 나타나고 있다. 환경이 오염되면 저항력이 약한 어린이나 노인, 환자들이 먼저 피해를 입으며, 대체로 환경오염에 더 큰 책임이 있게 마련인 경제력 있는 계층들은 오염 지역을 피해서 살 곳을 마련할 수 있으므로 오염의 피해를 덜 받지만 가난하고 힘없는 사회적 약자들은 대부분 공단 지역 주변과 같이 환경이 나쁜 지역에서 살기 때문에 그 피해를 더욱 많이 받는다. 이러한 환경 피해의 불평등은 경제 불평등과 더불어 사회의 불평등을 더욱 깊게 한다. 그리고 오염물 배출자와 피해자가 다른 경우가 많은 환경 문제의 특성은 문제 해결을 위한 비용을 누가 부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이처럼 환경 문제는 인간 사회를 이끌어 온 가치관이나 세계관과 관련된 문제이며, 사회 안에서의 인간의 삶을 둘러싼 사회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지구적 차원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그 특성상, 환경 문제는 국제 사회의 권력 관계를 반영하는 국제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환경 문제는 인간 사회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전망과 관련된 중요한 사상적 논쟁을 포함하고 있으며, 크게 기술주의와 생태주의가 그와 관련된 두 가지 시각을 대표한다.
근대적 세계관을 계승하고 있는 기술주의 환경론은 환경 문제가 일어나는 원인을 전통적 자연관이나 경제 성장 그 자체로 보기보다는 그것의 이용 과정에서 나타난 부차적인 문제로 이해하고, 환경 문제는 과학 기술을 더욱 발전시킴으로서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곧 환경 문제는 경제 성장 과정에서 나타난 어쩔 수 없는 부작용이며, 인간은 이 부작용도 얼마든지 기술적으로 잘 처리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과학 기술의 발전이 가져다 준 성과 곧 생활수준의 향상과 통신과 교통 시설의 발전과 이를 통한 경제 성장이야말로 자원 부족과 환경 문제 등 인류가 맞이하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근대주의에 대한 근본적 반성에 기초한 생태주의적 환경론은 환경 문제는 근대 이후 인간 사회를 이끌어 온 물질주의 가치관과 자연을 인간의 이익을 위해 이용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자연에 대한 잘못된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며, 따라서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물질주의적 가치관을 버려야 하고, 경제 성장 또한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곧 인간도 자연의 한 구성 부분일 뿐이라며 인간과 자연간의 유기적 연결성을 강조하고, 따라서 인간의 환경 파괴를 막으려면 인간과 대자연의 조화를 위한 의식의 대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술주의 환경론
근대 이후 인간은 인간의 의지대로 능력에 따라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이를 위한 기술의 진보와 인류의 진보는 조화를 이룰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신념을 갖고 있었다. 기술주의 환경론은 이러한 신념에 바탕을 두고 환경 문제의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물론 기술주의 환경론이라고 해서 환경 문제를 무시하거나 환경오염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도 마찬가지로 환경이라는 인간의 보금자리를 망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다만 환경 문제는 경제 성장의 과정에서 환경 문제를 적절하게 고려하지 않은 까닭에 이러한 분야의 과학·기술이 상대적으로 발달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기술주의 환경론은 과학·기술의 발달이 오늘날의 환경 문제를 낳았다고 해도, 그것은 과학·기술의 포기가 아니라 과학·기술을 더욱 발전시키고, 폭넓게 사용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며, 환경 문제의 해결에 낙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곧 과학·기술 그 자체는 환경 파괴와 아무런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인간은 환경오염을 기술의 발달을 통해 얼마든지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화석 연료 대신 태양 에너지와 같은 새로운 에너지원을 개발하면 대기 오염을 줄일 수 있고, 방사성 폐기물 등 산업 폐기물의 처리는 우주 산업이 발달하면 지구 밖으로 실어 보냄으로써 해결할 수 있으며, 유전 공학의 발달로 미생물을 개발하면 오염 물질을 화학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환경오염을 근본적으로 일으키지 않는 과학·기술, 그리고 이미 발생한 오염 물질을 처리할 수 있는 과학·기술을 더욱 발달시키기만 한다면 인간은 자신의 목적에 따라 자연을 적절히 조절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주의 환경론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경제 성장은 인류가 포기할 수 없는 지향이라는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곧 경제 성장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할 뿐 아니라, 환경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도 계속해서 경제 성장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 고갈이 문제가 될 때, 자원을 절약할 수 있는 기술이나 폐자원을 재활용하는 기술을 발달시켜 문제를 해결해 왔듯이, 환경 문제 또한 과학·기술의 발달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경제 성장이 환경을 오염시킨다는 측면만을 강조하는 것은 일면적이며, 오히려 이러한 경제 성장을 통해 환경을 개선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주의 환경론은 과학·기술의 미래를 지나치게 낙관하고 있으며, 오늘날 인류가 맞이하고 있는 환경 문제의 심각함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 비판의 내용을 살펴보면, 과학·기술의 발달로 지금까지 나타난 환경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예상하지 못했던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염된 하천을 정화하기 위해 염소(cl)가 쓰이는데, 염소로 소독한 물에는 발암 물질인 유기염소 화합물 트리할로메탄(THM)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또 오존층 파괴의 주원인인 프레온 가스를 다른 물질로 대체한다고 해서 새로운 물질이 예상치 못한 또 다른 환경의 오염원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기술이 가치중립적이며 초월적이라는 주장은 ‘누가 왜, 무슨 목적을 가지고 과학·기술을 쓰는가’라는 문제가 매우 중요하게 나타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다. 곧 과학·기술을 소유하고, 그 내용을 규정하고 있는 사회 체제의 문제를 빠뜨리고는 환경 문제의 해결책을 제대로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아무리 오염 방지 시설이 완벽하다 하더라도, 이윤의 극대화를 목표로 하는 기업들은 오염 방지 비용의 부담을 피하려 할 것이고, 많은 기업들은 오염 물질을 배출해도 처벌보다 이익이 많으면 차라리 처벌을 무릅쓸 것이라는 지적이다. 또한 새로운 기술 개발이 또 다른 환경오염을 불러일으켜도 그것이 법으로 규제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얼마든지 환경을 오염시키도록 유혹 받게 될 것이며, 따라서 환경 문제는 결코 기술적인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생태주의 환경론
하지만 기술주의적 환경론과는 반대로 현재의 환경 문제가 전적으로 과학·기술의 전개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가령 생태계의 입장에서 볼 때, 과학·기술은 그 이용 방식 및 발전 방향은 물론이고 그 내용까지도 파괴적이고 따라서 반생태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생태주의라고 한다.
생태주의는 인간을 생태계의 일부로서 생태계의 법칙에 종속된 존재로 보는 사고방식을 가리키다. 이에 따르면 인간이 자연에 필수적인 존재가 아님에 반해 자연은 인간에게 필수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서의 위치를 잊고 자연의 지배자로 군림하려 한다면 인간은 자연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므로 그 과정에서 자연에 입힌 상처 때문에 인간도 상처를 입게 된다는 것이다.
곧 ‘인간이 자연 생태계에 직·간접으로 미친 영향은 반드시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의 편리함을 위해서 자연을 학대해서는 안 되며,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자연을 돌보는 하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태주의에 입각한 환경론자들은 과학·기술의 선사한 경제 성장과 물질 풍요를 신뢰하지 않으며 오히려 과학·기술이 오늘날 환경 파괴의 주범이며 결국은 인간의 소외와 정신적 빈곤을 불러일으킨다고 보고 있다. 곧 과도한 기술 성장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생활환경을 만들어 냈고, 오염된 대기와 자극적인 소음, 교통 혼잡 등 수많은 육체적 심리적 스트레스를 우리의 일상생활에 불러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환경 문제가 기술 진보의 우연한 부산물이 아니라 생산성을 늘리기 이해 고도 기술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는 성장과 확대에 사로잡힌 경제 조직의 본연의 양태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생태주의적 환경론은 철저히 반기술주의적 성격을 갖는다.
그래서 생태주의적 환경론은 기술주의적 환경론하고 달리 성장의 제한, 곧 생산력 발전의 생태학적 한계를 부각시키면서 생태학적 탈산업화를 주장하고 있다. 곧 생태주의자들은 오늘날의 환경 문제는 산업화와 과학·기술 그 자체에 원인이 있다고 보고 있다. 지금까지 과학·기술의 발전을 바탕으로 이룩한 경제 개발은 환경을 지속적으로 악화시킨 반생태적 성장이었으며, 그것은 물질 만능주의를 조장하면서 환경을 더욱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태주의자들은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 성장보다는 자연 생태계의 보존과 회복에 중점을 두어야 하고, 이를 위해 물질주의적 가치관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 성장은 우리에게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지만,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물질 이외의 대다수는 꼭 필요해서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인위적으로 조장된 쓸데없는 욕망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며, 경제 성장은 이 같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으로 엄청난 환경 파괴로 오히려 인간에게 더 큰 고통을 주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태주의는 1960년대 서구에서 기술주의 환경론의 한계가 뚜렷해지자 1970년대 초에 생태 문제 이론가 및 철학자들이 그러한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을 통해 생겨났다. 그리고 이러한 생태주의적 환경론은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 ‘녹색당’과 같은 정당에 의해 강력히 제기되고 있는데, 이들은 환경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산업 경제 체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성장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산업 경제 체제는 자연 환경과 인간 노동력의 무한한 착취, 자원과 에너지의 낭비, 제3세계에 대한 선진국의 착취로 인해 파국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녹색당이란 환경 운동에 참여하던 사람들이 생태의 균형, 사회 정의. 풀뿌리 민주주의, 비폭력 등을 강령으로 내세우며 세운 독일의 정당을 말한다. 이들은 지방과 연방 수준의 각종 선거에 참여, 1993년 연방의회까지 진출하였다) 이처럼 생태주의는 자원 고갈이나 환경 오염과 같은 문제뿐 아니라, 지배와 불평등의 문제, 자유와 참여의 원리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진 근본적인 변화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태주의적 환경론은 생태계의 조화와 질서를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큰 의의가 있지만, 과학·기술에 대한 지나친 혐오감에 근거한 나머지 신비주의와 이상주의에 빠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과학·기술이 환경 문제와 관련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해도, 거기에서 곧바로 현대의 과학·기술 자체를 폐기하고 탈산업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는 주장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곧 과학·기술이 환경 파괴의 주요인이라는 점을 인정한다고 해도 과학·기술이 환경 문제의 해결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현실적 가능성을 찾아 개발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미 자연 과학의 눈부신 발달을 이루어 기술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까지의 생활 방식을 바꾸도록 요구한다는 점에서 현실성이 희박한 이상적인 대안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더구나 이 지구상에는 아직도 굶주림 때문에 죽어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며, 산업화를 제일의 과제로 삼아야만 할 가난한 나라들도 많이 있다. 이렇게 경제가 뒤떨어진 개발도상국들은 환경 보존보다는 빈곤의 척결이 더욱 절실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환경 정책의 이념
‘개발과 환경’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서로 다른 시각들의 차이를 잘 나타내고 있는 말이 바로 ‘지속 가능한 개발’과 ‘성장의 한계’ 또는 ‘지속 가능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지속 가능한 개발’(Sustainable Development)이라는 개념은 ‘자연과 자원의 보전을 위한 국제연맹’(IUCN)이 발간한 ‘세계보전전략’에서 맨 처음 나타났으나, 이 개념이 현대의 새로운 발전을 위한 핵심적인 의제로 떠오른 것은 1987년에 세계환경발전위원회가 펴낸 ‘우리 공동의 미래’라는 보고서에서 이 개념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의견을 접근시키려는 목적에서 쓰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부른트란트 보고서’라고도 불리는 이 보고서는 “지속 가능한 개발을 경제 성장과 환경 보전을 조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개념으로 제시하고, 현 세대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개발은 미래의 세대들이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에 손상을 주지 않는 범위와 방법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빈곤과 평등의 문제를 특히 강조하여, 빈곤과 환경 문제의 밀접한 관련성, 개발에 대한 긍정적 시각과 미래에 대한 낙관적 견해 등을 제시하였다.
그 뒤 이 개념은 1992년 6월에 열린 리우환경회의에서도 중심 테마가 되어, 이 회의에서는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 개발’(ESSD)을 추구해야 한다는 결의문이 채택되기도 했다.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 개발’이란 “우리들의 후손인 장래의 세대가 이룩해야 할 개발 욕구를 저해함이 없이 오늘을 사는 현 세대가 지니는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개발”을 뜻하며, 환경과 개발은 둘 다 중요한 것으로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하지만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 개발’이란 개념은 ‘성장과 환경의 조화’라는 건전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성장에 대한 근원적인 반성이 없어, 기술 낙관론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현실적으로는 개발 논리를 은폐하는 구실을 할 수도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지속 가능한 사회’(Sustainable Society)라는 개념은 이탈리아 로마에 본부를 둔 미래학자들의 국제단체인 로마 클럽이 1972년에 발표한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에서 비롯된 말로, 기술주의와 산업주의·발전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앞으로 세계적인 중요성을 갖는 경향으로서 ‘지속적인 산업화, 급속한 인구 성장, 광범위한 영양실조, 재생 불가능한 자원의 소모, 환경오염’ 등 다섯 가지를 꼽고 있는데, 여기서 나타난 ‘성장의 한계’라는 개념은 기술적 해결책들은 유한한 체계에서의 무한한 성장이라는 불가능한 꿈을 실현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곧 성장의 기하급수적인 성격은 성장의 지속 불가능성의 근거가 되며, 또한 성장의 한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빨리 나타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장의 한계’라는 개념은 환경 위기의 원인이 급속한 인구 성장과 산업화 자체에 있다고 보는 생태주의의 시각을 나타내고 있다. 곧 인구 성장과 산업화는 자원고갈과 환경오염을 심화시키며 궁극적으로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성장의 한계’라는 개념을 지지하는 생태주의자들은 이를 근거로 ‘지속 가능한 사회’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이 ‘지속 가능한 사회’라는 개념은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개념하고는 근본부터 다르다.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개념은 성장에 대한 현실적인 요구를 인정하고 있지만, ‘지속 가능한 사회’는 성장과 산업주의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바탕으로 ‘자연적 순환’에 기반하는 사회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속 가능한 사회’에 관한 사상은 “만약 우리가 계속해서 현재의 속도로 지구의 재생 불가능한 자원들(석유·석탄·광물)을 소비하고, 현재의 속도로 지구의 재생 가능한 자원들(기름진 땅, 깨끗한 물, 숲)을 오용한다면 미래의 어느 단계에서 전체 체계는 파멸될 것이라는 점”을 그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개발과 환경의 조화?
이처럼 환경 문제를 둘러싼 논란과 고민은 20세기 말의 가장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서 생태주의자 또는 녹색주의자(greens)들은 ‘성장의 한계’라는 개념에 근거하여 산업주의에 근본적으로 반대하지만, 기술주의 환경론자들은 성장과 환경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으며, 특히 과학기술의 발달이 그러한 조화를 가능하게 만들 것으로 믿고 있다. 곧 이들은 성장의 자연적 한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비록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 문제에 대한 이해의 차이는 그 해결책에서도 큰 차이를 가져오고 있다. 먼저 기술주의 환경론은 ‘경제 성장’이라는 목표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지 않으며, 현재의 생산과 소비 양식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도 환경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생산이 아니라 소비 과정 속에서 환경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곧 자원과 에너지의 소비 자체를 줄이는 생산 방식이나 생활양식 자체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자원의 재순환과 재활용으로 환경 문제의 해결책을 찾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생태주의자들은 생산과 소비 자체를 줄이는 것에서 환경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곧 생태주의자들은 산업주의와 성장에 따른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필요를 넘어서는 새로운 욕구의 생산 등이 모두 자원과 에너지의 소비 증대 및 환경오염 확산의 원인이라고 보고, 경제 성장의 원리에 기반한 모든 사회적 정치적 생활양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두 주장은 각각 나름의 의의와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환경 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에서 출발하지 않는 기술주의적인 해결책은 총체적이기보다는 부분적이기 쉬우며, 원인에 대한 사전 예방보다는 결과에 대한 사후 처리에 머무르기 쉽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생태주의적 환경론 역시 생태계의 조화와 질서를 강조하고, 경제 성장의 자연적 한계를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큰 의의가 있지만, 환경 문제의 사회적 원인과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현실성이 희박한 이상적인 대안에 머물러 있게 된다는 한계를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인류 사회에 빈곤 문제가 중요한 사회 문제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는 한 앞으로도 경제 개발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오히려 현실에서의 문제는 그렇게 지속될 경제 개발의 과정에서 어떻게 해야 환경의 파괴를 최소화하고 생태적으로 건강한 사회를 유지할 것인가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오늘날 경제 성장과 환경 보존을 조화시키는 것은 불필요한 사회적 지출을 감수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경제 성장 자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까지 떠오르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개발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생태적으로 건강한 사회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첫째, 사회 전체에 경제 성장과 환경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세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생태계의 수용 능력을 고려하는 통합적인 환경 정책을 세워야 하며, 자원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파괴적인 경제 성장으로부터 여가와 서비스, 삶의 질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 체제로 경제의 질을 바꿔야만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기술적 노력뿐 아니라,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 전체의 노력이 필요하다. 성장과 개발 위주의 환경 문제 인식은 문제의 성격을 좁게 인식하기 때문에, 사회 차원의 공동 노력을 모아내, 성장지상주의와 개발지상주의를 환경의 유지와 보호라는 방향에서 통제해야만 한다. 따라서 성장과 개발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지만, 환경 위기의 극복을 위한 노력이 우선되어야 하며, 그 속에 성장과 개발을 알맞게 배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윤 창출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기업가들이나 선거만을 의식하는 정치가들이 이런 일을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국민들이 환경을 지키고, 환경을 되살리는 운동을 전개하면서, 동시에 환경을 파괴하는 개발 활동을 저지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해야만 한다. 곧 모든 국민이 참여하는 국민운동, 대중 운동의 형태로 환경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야 한다.
둘째, 환경 정의와 환경 민주주의를 세워야 한다. 환경의 불평등 문제는 우리 나라에서도 여전히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사회의 지배 계층은 자원과 에너지를 남용함으로써 생태계를 오염시키고, 그 피해는 피지배 계층들에게 대기 오염, 수질 오염, 쓰레기 매립장과 같은 형태로 다가온다.
부유한 계층은 이러한 환경 문제를 공기 정화기나 생수를 사거나, 아니면 아예 이사를 가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지만, 가난한 계층은 그러한 자원을 갖고 있지 못한다. 따라서 정부의 환경 정책은 모든 국민에게 환경의 평등을 보장할 수 있도록 환경의 질을 전반적으로 개선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환경 위기에서 모든 국민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일이 국가의 최고 정책 목표가 되어야 한다.
셋째, 자원과 에너지를 고르게 분배할 수 있도록 국제 사회가 협력해야만 한다. 오늘날 나타나는 지구의 환경 문제는 어느 한 나라의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 기후 변화나 오존층 파괴 문제, 산성비 문제와 같은 지구 전체의 환경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임 승차자 없이 모든 나라들의 협조와 연대가 이루어져야만 한다. 따라서 선진국은 환경 보호를 위한 자국의 희생 없이 개발도상국의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선진국은 지구의 자원을 보호하는 개발 도상국들에게 외채를 탕감함으로써 자원 보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고, 자원과 에너지의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기술을 개도국에 보급해야만 한다.
넷째, 모든 나라들은 군비를 줄여 군사 안보 체제에서 환경 안보 체제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인류는 원시 시대에 비해 엄청나게 파괴적인 기술을 갖고 있으나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지혜는 조금도 발달하지 않았다. 전쟁은 직접적으로 환경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무기 제조 및 실험 과정에서도 엄청난 환경 오염을 일으키고 있다. 핵무기는 사용되든 안 되든 간에 그 자체로 엄청난 방사능을 배출하고 핵실험은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무기들은 궁극적으로 자살 무기인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군비를 단지 몇 퍼센트만 줄이고 환경 보호 기금으로 사용해도 눈에 드러나는 성과를 금방 얻을 수 있다. 실제 세계환경발전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1985년에 세계의 나라들이 군사적 목적에 쓴 돈은 모두 9천억 달러가 넘었다고 하는데, 이는 하루에 25억 달러를 지출한 셈이라고 한다. 이러한 비용으로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보면, ‘UN의 사막화 방지를 위한 행동 계획’을 실천하려면 이틀간의 군비 지출이면 가능하고, UN의 ‘식수와 위생 시설 10년 계획’을 수행하는 데는 10일간의 군비 지출액만 있으면 된다. 또한 모든 여성에게 피임 기구를 제공하는 데 들어가는 추가 비용은 군비 지출을 l0시간만 멈추면 충당할 수 있다.
문> 다음 글의 ‘환경 근본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생활양식에서 현대 기술 문명사회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요소를 구체적으로 서술해 보시오. (1996학년도 연세대학교 자연계 논술 문제)
현대 문명사회가 생태계의 위기를 불러 왔다는 분석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직면한 생태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대 문명의 이기를 전면적으로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 동기야 어떻든 현대의 문명 생활을 외면한 채 산업 혁명 이전의 전형적인 농경 사회생활을 고집하는 지리산 청학동이나 미국의 ‘아미쉬’라는 집단의 삶에서 대안 사회의 한 가능성을 본다. 물론 이들이 제시하는 대안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우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예전의 농경 사회에 비해 매우 다른 생활수준과 복잡한 경제 구조를 지니고 있기에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또한 기술 문명을 전적으로 거부한다면 우리는 다시금 미몽과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 십 년간 아미쉬 집단과 같은 새로운 대안 사회를 만들어 보려는 노력이 세계 곳곳에서 있어 온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노력은 어쩌면 현대 문명사회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바람직한 개선 방향이나 적어도 우리의 현 생태를 비판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시각은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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