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하얼빈 소피아 성당
우리는 하얼빈 역 반대편으로 건너왔다. 방향감각이 전혀 없는 우리는 길을 건너오기까지도 여러 번의 excuse를 해야 했다. 여러 번의 중국여행길에서 내가 느낀 것은 중국 사람들은 대부분 영어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갈 목적지 이름만 쏙 뽑아서 눈치 살피며 묻는 것인데 그들은 절대 피하지를 않는다. 뭐라 하는지는 통 모르겠지만 알아서 들으라는 듯 그것도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 통에 기가 죽고 만다. 마치 중국에 왔으면 중국말을 해야 할 것 아니냐 하는 투로 들린다. 그런데 그럴 때 그들의 약점인 영어로 대꾸를 하면 대개 찔끔한다.
같은 피부 얼굴형태로 얕잡아 본 면이 있는 것도 같다. 매번 경험하는 것인데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배운 사람으로 인식을 해서가 아닐까 싶다. 나는 그래서 되지도 않는 영어를 일부러 지껄일 때가 많다. 그러면 그때서야 손에 입을 대고 수줍은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어차피 물어도 모르는 길 누구든 야코죽지 말고 이 방법을 써보기 바란다. 그들은 영어도 제 마음대로 자기 식 해석의 한자를 부쳐놓고는 영 다른 발음으로 변모를 해서 아무리 원어대로 말하여도 답답할 수밖에는 없다. 성소피아 성당 (哈爾濱聖素菲亞敎堂: 성쑤페이야자오탕)도 마찬가지였다.
성소피아를 아무리 입을 구부려 부드럽게 말해도 전혀 알아듣지를 못했다. 하얼빈의 대표적 명소를 모르다니 말도 안 되는 노릇인데 아마 쑤페이야 하면 대번 알아차렸을 것인데 내가 무지하다고 할 것인지 그들의 주관이 뚜렷한 것인지 아리송하다. 중국에 가면 내걸린 외래어 간판이 주목을 받는다. KFC 肯德基, 맥도날드 麦当劳, 롯데리아 乐天利, 미스터피자 米斯特比萨, 스타벅스 星巴克. 중국어의 외래어 표현은 거의 소리 나는 대로 발음한다. 그래서 가끔 말도 안 되게 우스운 것들이 많다.
중국 상해를 갔을 때, 거리에 붙은 광고 중에 상해교통대학교(上海交通大學校)란 문구를 보고 내심 나는 의아함으로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도대체 중국에 무슨 자동차나 기차가 그리 많다고 저런 교통을 연구하는 대학이 다 있어?’ 하면서 나는 그 교통이라는 것이 ‘트래픽’이란 의미인 줄 알았다가 나중에야 중국에서의 교통이란 바로 소통을 의미하는 것이고 Communication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북경대, 칭화대와 함께 중국 3대 명문대학 명칭의 뜻도 몰랐다니 .
하긴 어디 그뿐이랴, 중국여행 초기 때다. 起亞氣車, 現代氣車라는 중국판매장 간판을 보고 ‘현대와 기아에서 언제 기차를 생산했지?’ 하며 들여다보았더니 자동차만 전시되어 의아했던 일이며 나중에 자동차는 내연기관이니 기차고 정작 기차는 화차(火車)라는 것을 알았으니 이 정도면 중국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나 몰랐던 시절이었다. 무슨 반점이며 주점이란 간판은 ‘쥬티엔’, ‘판티엔’이라고 부르는 호텔을 칭하는 말이었는데 주점을 술집으로 알고 택시기사가 <호텔>이라는 말을 설마 못 알아들을까 하고 나는 호텔만 강조하여 말을 한 적도 있다.
아무튼 어렵게 알아낸 버스 108번, 우리는 상지대가로 향했다. 알고 보니 하얼빈도 강남이라 칭하는 일대는 부촌으로 번화가이고 송화강 건너는 강북으로 이제 막 번창을 모색 중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하얼빈 서역에서 하얼빈 역으로 향할 때 강을 낀 다리를 건넜던 것 같다. 하얼빈이란 지명은 여진족어로는 '명예'라는 뜻이라는 데 고구려 시절 남부여 출신(추정하건데 장춘과 길림)인 주몽 피를 이은 광개토대왕이 이 동네를 훤히 꿰뚫고 있었을 것이다.
장춘에는 고구려 성이 아직 남아 있으며 굳이 겨울 영하 32도가 넘는 곳에 기지를 두기는 그러하였을 터, 대흥안령산맥을 넘어 말을 가지러 지두우를 가는 길에 이곳을 오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몽고에도 고구려 유적이 남아 있으니 북부여였던 이곳은 두말할 것도 없다. 장춘 어디쯤에서 북상을 하다가 티라무렌강을 건너며 이곳을 힐끗 쳐다보았을지도 모른다. 알다시피 고구려는 무산이나 안산의 철과 금으로 부자가 되어서는 그 돈으로 지두우를 찾아 가 말과 바꾸었다. 요동(요양) 옆에 조양이라는 곳이 그 당시는 국제시장이었다. 내몽고에 고구려 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요즘 역사학자들이 밝혀 낸 것 중에 그럴 듯한 가설 하나, 온달장군이 우즈백 사람이라는 것이다. 신라의 원성왕이나 흥덕왕 무덤을 지키는 코쟁이들을 학자들은 우즈백 사람들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고구려 고분에서 나온 그림에 씨름 선수들 역시 그들이라고 보고 있다. 우즈백 사람들은 원래 상술이 뛰어난 상인들이다. 지금도 그들은 세공기술이 뛰어나며 터키나 이란 등의 박물관에 전시된 세공품들은 대개 우즈백 사람들이 전해준 물건들로 실크 뿐 아니라 동양적인 물건을 재가공 하여 비싸게 파는 중개교역을 했었다. 그러니까 온씨 성을 가진 왕족(당시 우즈백은 온씨 성이 왕족이었다고 한다)이 고구려에 와 씨를 뿌렸는데 그러다 보니 허 멀건 하게 생긴 아이가 말이 어눌하다보니 바보 취급을 받은 것이 아닐까 학자들은 보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뿐 아니라 신라의 김춘추의 호위무사 온군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상지대로 한 복판에 내렸다. 소피아야 말로 하얼빈의 랜드마크라 할 것인데 우리들 눈에 선뜻 들어오지 않았다. 묻고 또 묻는다. 지나치고 만 것이다. 하얼빈은 중국 동북지방의 철도 부설권을 획득한 러시아가 이곳을 철도 건설의 기지로 삼아 근대적인 도시로 개발된 것이다. 1903년 러시아의 보병사단이 하얼빈에 입성하였고, 러시아는 고향을 떠난 사병들을 위해서 예배당을 건축한 것이라는 데 나무구조로 지어진 성당은 이후 1923년 재건축을 통하여 지금의 멋진 모습의 성소피아 성당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스 정교회 성당으로 유럽에 비하면 큰 규모는 아닌데 서구식 취향으로 우뚝 서 이질적인 느낌으로서 역사를 스스로 품고 서있다.
나중 찾을 사람들을 위해서 몇 마디 덧붙이자면 성소피아는 러시아정교 교당으로 1907년에 건축되었다. 종탑 꼭대기에서 이어지는 십자가까지의 높이가 53m에 이르는 대형 예배당이다. 전형적인 비잔틴 양식을 띄고 있는 이곳은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100년 이상의 시간을 느끼게 하는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하얼빈 시는 당초 이 건축물을 철거할 계획까지 세웠었지만 건축의 가치를 알고 난 뒤부터는 오히려 그 가치를 지속적으로 높이기 위해 보수 및 확장 공사를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어서 언제 마무리가 될지 누구도 알 수 없다고 한다. 중앙대가의 다운타운 구간 끝 우측 편 도로인 상지대가 건너편에 있으며 하얼빈 기차역에서 버스를 이용, 하이바이라는 데에서 내리면 쉽게 만날 수 있다.
성당 구경을 마치니 11시 30분, 시간이 애매했다. 하얼빈 서역에서 버스를 한 시간쯤 타고 온 것을 감안하면 1시 10분 기차를 타기위해서는 그쯤 되돌아가야 할 것도 같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하얼빈 제일 번화가 중앙대로에서 아이스크림을 못 먹는 것은 북경에서 자금성을 못 보는 것이나 똑 같다고 말했다. 그들은 영하 30도에도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길거리에서 먹는다고 했다. 그러나 길도 모르는데, 돌아가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못내 아쉬웠다. 중국어를 못하는 나는 유심히 영어를 할 만한 사람들을 살폈다. 젊은 층 중에서도 세련된 친구를 잘 만나면 오히려 더 편하고 문제가 쉬이 해결된다는 것을 나는 북경에서 또 상해에서 이미 터득한 바 있다.
(성소피아 성당, 크지는 않는데 건물의 조화가 주변과 대비되며 아름답다.)
마침 핸섬한 젊은 연인들을 발견했다. 영어를 불쑥 들이밀었다. 그런데 웬걸, 젊은 청년은 뒤로 주춤한다. 아니다 싶어 돌아서는 순간 유창한 영어가 귓전에 들린다. 그 청년의 여자 친구로 키가 큰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찬찬히 설명을 했다.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설명을 하다 자기네들도 그쪽으로 향하니 따라오라는 것이었다. 기차 시간을 이야기 하니 15분 정도 걸으면 중앙대가를 보고 또 송화강도 볼 수 있으니 그렇게 하고, 그곳에 버스는 없으니 택시를 타면 30분 안쪽으로 하얼빈 서역에 당도할 수 있다 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만난 세 번째 귀인이다. 돌파구를 찾은 우리는 감사의 마음으로 가져간 인삼사탕을 듬뿍 건넸다. 나는 고마움을 안겨준 사람들에게는 인삼사탕을 선물한다. 이름 하여 사탕외교다.
연암의 열하일기에서 보면 인삼은 중국으로 방출을 금할 정도로 아주 중요한 조선의 자산이었으며 금과 같이 취급했다고 하며 알다시피 의주 만상 임상옥은 북경에서 거래 장난을 하는 중국 상인들을 혼내준다. 인삼하면 고려라 하는 의식은 지금도 여전하다. 한자로 인삼이라 쓰인 사탕을 건네주면 확인을 하는 모습으로부터 나는 그런 뿌듯함을 느낀다. 어느 날인가 제기동 경동 약령시장을 들른 적이 있다. 태국사람들이 무더기로 잔뜩 사는 것이 우리네 도라지와 인삼이었다. 그들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의외로 삼계탕이었다. 작은 사탕 하나지만 이것도 하나의 요령이고 우리나라 알리기가 아닐까.
(건물이 중국 물이 안들었다)
차 없는 거리, 사람 물결이 넘쳐난다. 하얼빈이 850만 인구라더니 토요일 휴일을 맞아 젊은 친구들이 모두 이곳으로 몰려든 것만 같다. 하얼빈 중앙대가(中央大街)에 들리면 꼭 먹어봐야 한다는 마디얼(马迭尔) 아이스크림! 걸으며 나는 아이스크림 가게만 쳐다보았다. 곳곳에 马迭尔冰淇淋 , 马迭尔冰棍 라고 써 있다. 대부분 하드로 생긴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는데 개중에는 퍼먹는 형식의 마디얼 아이스크림을 먹는 아이들도 많았다. 사먹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에 쫓기는 마당에 줄이 너무 길어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린 아이스크림 먹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대리만족을 느끼기로 했다.
젊은 친구들과 헤어져 우리는 계속 걸었다. 방금 무슨 행사가 있었는지 저 멀리 보이는 탑 쪽에서 드레스와 행사차림의 여인들이 떼 지어 몰려왔다. 잠시 생각했다. 태양이 작열하는 이곳이 영하 30도가 맞아? 하는 생각도 들고 이곳이 중국이 맞아? 중국 냄새가 전혀 안 나는 이국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이 지역은 제정러시아에서 ‘둥칭철도’(東淸)를 건설하면서 조성한 거리라고 했다. 그만큼 러시아와 중앙아시아풍의 건축물과 더 나아가 르네상스 시대를 풍미했던 건축물들이 즐비해 여행자들의 발길을 끌어당기고 있다.
(호리호리한 여인을 이번 여행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는 순간이다.)
이윽고 송화강이 눈앞에 보인다. 탑 앞에 섰다. 중앙대가 도심 구산에서 강까지 이어지는 약 1.5km의 보행자 전용도로는 걷고 구경하고 먹고 쇼핑하기에 적당한 하얼빈 최대의 대로라고 한다. 나는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보았다. 화창한 초여름, 인산인해를 이루는 사람물결, 영하 30도 넘는 혹독한 겨울을 지낸 사람들이니 이를 더위로 말해서는 안 된다. 따스한 봄날의 여흥으로서 축복이며 계절이 주는 낭만이 아닐까. 인터넷으로 송화강에서 얼음을 지치는 풍경을 보았는데 황토 빛 물결이 넘실대며 유람선이 날개 짓을 한다. 바로 건너서면 빙등 축제를 하는 ‘태양도’라는 유흥지가 있고 호랑이를 수백 마리 모아둔 동물원이 있다고 했다.
빙등축제를 하는 시기에는 오줌을 누면 바로 고드름으로 변한다는 데 그 추운 때 아이스크림도 있고 길에는 포장마차가 있으니 그렇다면 축제장까지는 굳이 유람선 필요 없이 발을 지치며 가는 것은 아닐까 궁금하기도 하다. 우리는 뭔 상징인지도 모르면서 남모를 탑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나중 알고 보니 이 기념탑은 방홍승리기념탑(防洪胜利纪念塔)이다. 이 기념탑은 1957년 대홍수가 일어나 쑹화강이 넘쳐 하얼빈시 전체가 물에 잠길 위기를 시민 모두가 힘을 합하여 막아낸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모래자루로 송화강의 물을 감당하지 못하자 시민들은 자신들의 양식인 밀가루 포대까지 동원하여 둑을 쌓았다고 한다. 이 탑은 제방을 건설하기 전에 홍수로 사망한 사람들의 넋을 기리는 의미도 함께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의미도 모르고 그냥 찍은 탑)
아쉽지만 이제는 돌아서야 한다. 우리는 서둘러 택시를 잡아탔다. 12시가 방금 넘었으니 30분 쯤 걸린다면 안정권이다. 새벽부터 일어나 배가 많이 고팠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어쩔 수없이 점심은 장춘에서 해야 할 모양이다.
(송화강, 물이 누렇다. 겨울엔 이 물이 다 동원된다. 빙등축제 소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