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십계명 특강(4)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 다음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이 나왔다.
하나님의 안식일이니까 안식일은 하나님의 문제다. 창조하신 모든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아서 안식하셨다고 하였다. 안식일은 사람의 안식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하셨는데 우리가 참여하지 못하면 그것이 불행이다. 창조는 내 뜻대로가 아니라 그분의 뜻대로 된 것이므로 절대적이다.
내가 소가 되고 싶다고 소가 된 것도 아니고 개가 되고 싶어서 개가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택 안에서 사람이 된 것이니까 이것은 내 문제가 아니다. 사람의 문제는 사실은 하나님의 문제다. 이것을 확실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 문제로 이러니 저러니, 좋으니 나쁘니, 잘되니 못되니 하지만 사실은 그런 것과 관계가 없다. 하나님이 자기 필요에 의해 만든 것이니까 이것에 대해 아멘이 되고 감사가 되면 그것이 행복이다. 그러나 불만이면 그것이 불행이다. 이것은 우리의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것을 우리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지기를 원하지 않겠는가. 혹시 인간에게 싫증이 난 사람은 갈매기로 태어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면 인생 문제도 없어지고 어디든 내 마음대로 다닐 수 있고……, 세상에 이런 자유가 있겠는가. 자기가 선택한다면 사람들은 각자 좋아하는 것이 되고 싶을 것이나 그렇게 된다면 괴상하게 될 것이다.
창조는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문제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 자신을 위해 나를 창조하신 것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좋고 나쁜 문제가 아니다. 거기서 만족하는 것이 안식이고 안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여자로 태어나서 행복하다고 해야 되지 ‘나는 왜 여자로 태어났는가.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라며 원망하면 되겠는가. 행복은 아주 간단하다. 있는 대로 ‘그것이 내 눈에 보기에 참 좋다.’ 이렇게 되면 행복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기준으로 보면 어느 때는 좋다가 어느 때는 나쁘다. 내 마음대로 살려고 하면 불행한 것이다. 왜 인생은 기복이 심한가? 그것은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대로 살면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내 마음대로 하면 불행해지는 것이 인생이다.
도를 통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없다. 이것을 확실히 알면 도를 통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앞에 간 사람들을 보는 이유는 ‘그들이 어째서 행복한가?’ 이것을 보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간의 문제가 끝나면 안식이 온다.
하나님은 혼자 안식하실 수 없다. 자기가 지은 만물이 함께 참여해야 참된 안식이 되는 것이다. 부모가 낳은 자식이 부모에게 “참 감사합니다.”라며 감사해야 안식이 오지, 자식이 “왜 나를 이렇게 낳아놓았습니까.”라고 하면 부모가 편안하겠는가. 아무리 돈이 많고 별 것이 다 있다 해도 불행이다.
부모가 듣고 싶은 제일 중요한 말은 “나를 사람으로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잘 모르고 자기 기준으로 좋으면 부모가 감사하고 안좋으면 불만이다. 잘되면 자기 탓이고 못되면 조상 탓이라고 한다. 안식이 이렇게 중요하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아하셨다. 그래서 창조하신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고 그 날을 복주어 거룩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 날이 불행해져 버리면 복을 못받는다. 다른 것이 아무리 있어도 안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남이 볼 때는 모든 것을 가졌는데 본인은 행복하지 않다고 한다. 복을 거절해 버렸으니 행복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행복하겠는가. 초가 삼간이라도 받아들이면 행복하지만 고대광실이라도 그것이 싫으면 불행이다. 사람들은 겉만 보고 이러면 행복하고 저러면 불행하겠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전혀 다른 문제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예수를 사모하던 여인들은 그를 사모하고 연모하는 마음 때문에 무덤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런데 시체를 보지 못했다.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는 천사의 말을 들었다고 했다. 이것이 달라진 문제다. 그들은 연민 때문에 시체를 보고 싶었으나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여기는 어딘가? 무덤이다. 죽음이 있는 곳, 끝난 곳,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 그래도 여인들은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찾아갔던 것이다. 끝난 줄 알지만 미련을 못버린다고 하는데 그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안식 후에는 새사람으로 살아나신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가셨다. 자기를 버리고 간 제자들을 찾아가신 것이다. 새 사람이기 때문에, 새 사람으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세계가 바뀐 것이다.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내 세계는 바뀐다. 하나님을 찾아다니면 될 줄 알지만 찾아다닌다고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 있는 줄 알고 어떻게 생긴 줄 알아야 찾지 어떻게 찾겠는가.
그러므로 찾아오셔야 한다. 어떤 신학자는 ‘찾아오시는 하나님’이라고 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인데 나를 찾아오셔야 하고 나를 만나야 되지 오시면 뭐하는가. 그런데 새 사람으로 찾아가셨다. 예수님은 찾아가시는 분이다.
그전에도 사실은 바닷가로, 고기잡는 데로 찾아가셨다. 알고 보면 사람을 지으신 것도 찾아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람을 택하신 것은 하나님이 찾아가신 것이다. 우리가 온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무슨 이유로 하나님이 찾아가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끌려온 것이지 나 스스로는 하나님께 갈 수 없다. 알아야 가지 어떻게 가겠는가. 그런데 그것도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정말로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분이 아니다. 그러니 내가 찾아갈 리가 없다.
다섯째 계명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이다. 이것은 꼭 지켜야 한다. 무슨 이유를 붙이면 안된다. 그러면 그때부터 손상이 생긴다. 이것은 꼭 지켜야 한다.
여섯째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다. 갑자기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이 나왔다.
그 위로는 하나님과의 문제이고 아래로는 사람과의 문제다. 위엣 문제가 해결되어야 사람의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지 위엣 문제가 해결이 안되면 아무리 해도 사람 문제가 해결이 안된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할 수 없다. 물이 흘러와야 남에게 줄 수 있지 물이 없는데 주겠는가. 오늘 비가 상당히 많이 왔는데 이러면 금방 물이 넉넉해진다. 그런데 가뭄 때는 물이 아쉽다. 종일 물을 퍼놓아도 아침에 가면 다 말라버리고 없다. 또 퍼올려도 그 다음에 보면 또 말라버리고 없다.
그래서 가뭄이 들면 물 때문에 논에서 싸움이 난다. 남의 논 물꼬를 터서 자기 논으로 돌려버리면 삽으로 치다가 살인이 나기도 한다. 농사짓는 사람은 가뭄이 들어서 땅이 갈라지면 환장한다. 논이 갈라지면 애가 탄다. 한참 벼가 익어야 할 때 논에 물이 없으면 벼가 익지 못한다. 수도작(水稻作)이라고 벼는 물이 없으면 안되는 작물이다. 제주에는 물이 고이지 않기 때문에 물이 없어서 벼를 심지 못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밭에 벼를 심었다. 밭에서도 자라는데 밥맛도 없고 수확도 적다. 벼는 물이 많은 곳이라야 잘 자라고 맛도 좋다.
비는 하늘에서 내린다. 물이 하늘에서 오고 은혜는 하늘에서 온다. 모든 것의 근본은 하늘에 있다. 밑에서부터 찾아올라가면 근원을 못찾는다. 신학도 두 가지가 있다. 밑에서부터 올라가는 신학이 있고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신학이다.
틸리히 같은 사람은 처음에는 밑에서부터 올라가는 신학을 했는데 하다 보니 농사를 아무리 지어도 비가 안오면 안되는 것처럼 한계에 부딪쳤다. 그래서 다시 위로부터 오는 신학을 했다. 그래서 중간지대에 머무는 신학자가 되었다. 그래서 뭔지 모르지만 제 삼의 것, 위엣 것과 아랫 것이 만나는 제 삼의 신학이 있다고 생각했다. 제 삼의 것, 새 사람, 참 사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까지 문을 열어놓았다.
인간관계의 첫째는 뿌리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첫 번째 문제다. 여섯째 계명부터 끝까지는 인간관계에 대한 계명인데 맨 처음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다. 근원의 문제니까 부모를 공경하라고 한 것이다.
모든 것은 근원이 있다. 생명은 근원이 없이 있는 것이 없다. 기독교가 왜 갈 곳이 없는가? 그것은 근원이 희미하기 때문이다.
신학자들이 엄청난 연구를 해놓았다. 우리에게 알려진 신학자는 1세기에 하나 날까말까한 천재다. 언어의 장벽 때문에 한국에서는 그런 신학자가 나오기 불가능하다. 틸리히는 22살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칼빈은 26세에 세계적인 대작인 기독교 강요를 썼다. 이것은 동양 사람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근원이 없다. 그러니까 해답이 없는 것이다. 엄청나게 문제는 제시해 놓았지만 답이 없다.
나는 공부를 많이 못해서 몰랐는데 이번에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말하다 보니까 이 문제를 알아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어디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근거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이 분명한 사실이 아무 데도 없다. 예수가 죽었는데 좋은 것만 다 가지고 가 버렸고 죽은 사실, 죽어 있는 그 사실은 없다.
왜 없는가? 다 싫어서 버렸기 때문이다. 여자들만 시체를 찾아갔지 아무도 시체를 찾아가지 않았다. 누가 시체를 찾아가겠는가. 시체가 뭐 필요하겠는가. 찾아갔다는 것 자체가 낭비다. 시체를 찾아가서 뭐하겠는가. 그런데도 여자들은 찾아갔다.
정말로 이해관계가 있고 목적이 있는 사람들은 이 사람 저 사람 할 것 없이 다 달아나 버렸다. 심지어는 그렇게 사랑하던 제자들도 다 달아났다. 필요없으니까 떠난 것이다. 그런데 필요없는 그것이 새로난 사람의 근본이 된 것이다. 거기서 나지 않으면 새로난 것이 안된다.
니고데모가 왔을 때 무슨 선한 일에 대해 의논하려고 밤에 몰래 왔다. 유대인의 지도자니까 ‘혹시 이 사람과 이야기해 보면 더 좋은 길이 있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다. 너무나 놀라운 말이다. 니고데모가 누군가! 그런 사람을 보고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했던 것이다.
울산의 황경연 형제는 교회도 안다녀보고 성경도 모르는 사람이다. 울진에서 집회할 때 뭔가 빛을 보고 나서 여기저기 좇아다니다 이영식, 정진호 같은 열성분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현대중공업에서 ‘사랑의 형제단’이라는 선교단체를 만들어 놓고 지하실에서 맨날 기도하던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황경연 형제가 찾아가서 “당신은 어두움이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자기는 빛을 보았기 때문에 한 말인데 그런 열성분자에게 그런 말을 했으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런데 이영식 형제는 순수한 사람이어서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것이 정진호에게 전염되어 두 사람이 우리 교회에 왔다. 울산 형제들은 그 끄나풀에 따라온 사람들이다. 나도 이해가 안되는 일이다. 황경연 형제는 단순하게 자기가 본 그대로 말한 것인데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전도라는 것이 말을 잘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설명 잘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특이한 것이다. CCC에서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니까 무조건 사영리만 읽어주라고 교육시킨다. 전도하러 나가면 무슨 말을 해야될지 모른다. 하고 싶어도 못한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사영리를 읽어주기만 하면 성령께서 그 사람을 감화시킨다고 훈련을 시킨다. 그리고 전도실습을 나가서 사영리를 읽어주면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고 교회 나가겠다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용기가 나서 전도를 하게 된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인데 아무리 해도 안되는 사람도 있지만 준비된 사람이 있다.
그렇다고 다 그렇게만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전도하러 가는 사람은 무엇을 가지고 가는지, 무엇 때문에 가는지 알아야 한다.
예수는 어떤 사람이기에 그 근원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인가?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가신 분이고 아담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바벨로 가버린 사람이다. 비교해 보면 간단하다.
아담과 그리스도가 무엇이 다른가? 씨를 뿌리면 열매는 주인에게 가는 것이 당연하듯이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가신 분이다. 그런데 아담은 다른 씨를 받아먹고 바벨로 가 버렸다. 다른 것이 아니라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하나님께로 왔으니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아담은 엉뚱한 데로 가 버렸다. 화살이 과녁을 빗나간 것이다.
올림픽 양궁 경기에서 과녁 한 가운데를 맞춰야 되는데 엉뚱한 데를 맞춘 것과 같다. 1mm 차이가 당락을 좌우하는 판에 엉뚱한 데 맞추면 허망하지 않겠는가. 양궁이 그래서 어렵다고 한다. 바람과 기후에 따라 화살 방향이 바뀌니까 바람을 잘못타면 화살이 엉뚱한 데 떨어진다. 아담은 엉뚱한 데로 가 버린 것이다. 과녁을 벗어난 것이다. 갈 데로 가지 않고 안갈 데로 간 것, 이것을 죄라고 한다.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니까 하나님께로 가야 한다. 하나님의 목적으로 지어졌으니까 하나님의 목적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는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씨를 뿌리는 것은 열매를 얻기 위한 것이다. 씨를 뿌렸으면 당연히 열매가 나와야 한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와야 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와야 한다. 콩을 심었는데 팥이 나와도 안되고 콩보다 더 좋은 것이 나와도 안된다. 꼭 콩이 나와야 한다.
금년에 콩값보다 팥값이 비싸다고 ‘농부가 잘못했네. 콩을 괜히 심었네.’ 하고 흙이 스스로 팥을 내면 되겠는가. 그런 흙은 폐기처분되어야 한다. 영리한 것 같지만 벽돌이나 구워야 되지 농사 짓는 데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런 흙을 주인이 흙을 칭찬하겠는가. 도저히 안되겠어서 벽돌공장으로 보내지 않겠는가. 그곳이 지옥이다. 그러면 흙으로서는 영 끝나는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바벨로 가버렸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다른 점이다. 바벨이 더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갈 곳으로 가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문제다. 결과만 보고 바벨론이 더 좋다고 갈 수도 있다. 그러면 쓸모가 없다. 내 좋을 대로 가 버리면 쓸모가 없어져 버린다. 옛날에 신앙생활을 보면 어이없는 것이 그것이다. 자기 목표를 세워놓고 기도한다는 것이다. “바벨이 좋으니 바벨로 보내주십시요.”라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이었다.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셨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기도를 안하면 이상하다. 교회에 가면 당연히 기도하는 것부터 배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몰랐던 것처럼 “그래? 그러면 이렇게 기도하라.” 하셨다.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한 번도 기도를 안했다. 성경에는 제자들이 기도했다는 말이 없다. 왜냐하면 자기가 하고 싶은 기도가 아니니까 자연히 안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도를 안할 줄 알고 가르쳐 주신 것이다. 제자들이 하도 기도하려고 하니까 “기왕 하려면 이렇게 하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가 받아서 염불하듯이 외울 줄 알고 가르쳐 주신 것이다.
만물은 다 지으신 이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사람만 아니라 만물이 다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답이다. 이것이 진실이며, 천명이고 잘 사는 것이다. 콩이 콩 되는 것이 제일 잘되는 것이지 콩이 팥이 되면 멸망이다.
이번에 누가 어느 청년을 데려왔는데 교회에 가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어려서 가 보고 안가봤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예수 믿는 것이 별것 아니라 아주 간단한 것이다. 사람이 사람 되기 위해서 믿는 것이다.”라고 했더니 눈이 번쩍 띄는 모양이었다. 사람이니까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아주 좋아하면서 꼭 교회에 오겠다고 하고 갔다.
사람은 사람되는 것이 제일 잘되는 것이다. 더 이상 되려고 하니까 신성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데 그러면 인간 버리는 것이다. 사람 속에 신성이 있어서 무당처럼 되면 안된다. 옛날에 나는 그것이 굉장히 좋은 것인지 알고 몇년 동안 찾아다녔다. 그러나 아무리 달라고 해도 안주셨다. 구하면 주신다고 했는데 안주셨다. 딴 사람들은 다 받는데 나는 안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이 야속하다. 내가 정성이 부족한가.’ 이런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하니까 그때 만일 나에게 그것 비슷한 것이라도 주셨으면 내 운명을 어찌 되었겠는가. 그것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라며 그런 짓이나 하고 돌아다녔을 것 아닌가.
그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우리나라에서 한참 그런 것이 유행하던 때였다. 전도사로 나오니까 당장 앞에 그것이 숙제로 놓였다. 당장 눈앞에 ‘이래 돼야지 안되고는 아무것도 안되겠구나.’라고 보였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사람은 사람되는 것이 진실이지 방언을 잘한다고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신적인 능력을 가졌다고 사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이유가 아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겠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낸 이유가 아니다. 겨우 그것 하자고 십자가에 죽으셨겠는가. 어디 가니까 방언을 하려면 혀를 하나님께 맡기라고 했다. 내 혀가 꼬부라지지 않으니까 맡기라는 것이었다. 그거 하려고 예수님이 죽었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방언을 말하라고 했으니까 방언을 말하면 된다고 가르쳤다. 서울 정한성 형제가 그런 데 있다 왔다. 방언을 하라고 했으니까 방언을 하면 되고 귀신을 내쫓으라 했으니까 눈을 똑바로 뜨고 귀신을 내쫓으면 된다는 것이다. 해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려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겠는가.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것이다.
근본을 찾은 사람은 근본으로 돌아간다. 근본을 알면 근본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콩인지 팥인지 모르니까 그렇지 내가 콩인 줄 알면 콩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단순하다. 복잡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로서 왔다가 그와 함께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다.
왜 예수가 필요한가? 나는 길을 잃었기 때문에 길을 아는 그와 함께 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와 함께 가야 한다. 그러려면 그와 연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와 함께 갈 방법이 없다. 같은 생명, 같은 운명이라야 같이 가게 된다. 그래서 예수를 그 자리에서 만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분과 우리가 연합이 되는 그 자리에서 만나야 한다.
다른 데서는 예수를 만나봐야 같이 갈 수 없다. 운명이 다르고 길이 다른데 어떻게 같이 가겠는가. 개는 훈련 시키면 주인과 비슷하게 가지만 사람은 아무리 같이 가려고 노력해도 안된다. 개는 자기 혼자 멋대로 가지 않는다. 한참 가다가도 뒤돌아보고 기다린다. 그러다 주인이 다른 데로 가며 뛰어온다. 그런데 하나님과 사람 사이는 그렇게 안되기 때문에 그와 연합하지 않으면 그와 함께 갈 수 없다. 생명의 문제다.
배진아 자매, 조미정 자매는 옛날에 많이 해 보았을 것이다. 기도하고 하나님을 모시고 살려고 노력을 많이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분과 같이 가지지 않았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나는 나, 그는 그로 갈라져 버렸다. 아무 일이 없이 기도원에서 기도나 하고 있으면 같이 있는 것 같지만 막상 내가 가고 싶을 때는 딴 데로 가게 된다.
그렇다고 항상 자기를 포기하고 사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다. 죽기 보다 어려운 것이 그것이다. “자기를 포기하라. 버려라. 내려놓으라.” 하지만 그것이 되면 뭐하러 예수님이 죽으셨겠는가. 우리가 그 말을 듣고 내 스스로를 포기하고 내려놓을 수 있으면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겠는가. 쉽게 될 것 같으면 뭐하러 십자가까지 가셨겠는가. “내려놓아라. 다 껍데기니까 벗어라.” 이렇게 말로 가르쳐 주면 되지 뭐하러 십자가까지 갈 필요가 있겠는가.
절에 가면 “벗어라. 내려놓아라. 아무것도 아니다. 제행무상이다.” 이런 말을 귀가 닳도록 듣는다. 안죽어도 될 것 같다. 매일 그 소리를 듣다 보면 비슷하게 될 것 아닌가. 새벽에 일어나서 예불을 하고 기도하고 목탁치고……, 아무것도 안하고 그 짓만 하면 뭐가 조금 된 것 같다. 그런데 서문시장에 나가 보면, 백화점에 가 보면 잘되는가. 안된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가 그동안 얼마나 그런 짓을 많이 했는지 모른다. 그짓을 안하려고 종교개혁을 했지만 도로 마찬가지가 되었다.
같이 간다고 같이 가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길을 잃었기 때문에 그와 함께 가야 한다. 기도한다고 함께 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기도만 하면 함께 갈 줄 알았는데 해보니 안된다. 잘하는 사람도 있고 나보다 나은 사람도 있겠지만 잘하거나 낫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가면 틀어져 버린다. “예수님, 잠깐만요…….” 이렇게 되고 만다. 사실은 “잠깐만…….”도 안된다. 나도 모르게 가 버린다. 다 버렸다는 사람이 있다. 옛날에는 그런 사람이 존경스러웠는데 지금은 우습다. 다 버렸다는데 무엇을 버렸는가?
우리는 길 잃은 사람들이다. 아담이 길을 잃었는데 우리가 길을 알겠는가. 바벨로 가는 길은 다 안다. 네피림을 말하면면 ‘아, 그렇게 하면 네피림이 되겠네. 그렇게 하면 성을 높이 쌓겠네. 그렇게 하면 우리 자신을 견고하게 방어할 수 있겠네.’라고 안다. 우리 조상이 알았는데 우리가 모르겠는가. 아담이 안 것은 우리도 다 알 수 있다. 아담도 아니까 했지 모르게 했겠는가. 자기 혼자 특별한 것을 한 것이 아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까 그 안에 들어가면 “성공하려면 이렇게 하면 된다.”는 것이 상식이다.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똑같다. 들어도 안되니까 문제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다 그렇게 해 보고 싶어한다.
가나안 농군학교는 김용기 장로가 경기도 광주에서 시작한 것인데 만 평을 개간해서 여러가지 농사를 지었다. 그의 조상 안동 김씨들이 너무 잘못되었다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죄 값을 치르기 위해서 농군학교를 시작했다고 한다. 가 보니 흙으로 벽을 두껍게 쌓고 초가를 이어서 추운 지방인데도 한겨울에 5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랑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거기서 자라고 하는데 5도에 잠을 자겠는가. 5도면 얼음장이나 마찬가지다. 5도 물에는 손도 못넣는다. 그런데도 나무를 때면 산이 황폐해진다고 산모들이 자는 방에만 불을 때주었다. 비누를 사용해도 낭비하지 말라고 세 번만 문지르게 했다. 여러 가지 좋은 것을 가르쳐 주고 경각심을 주니까 거기서는 다 그래야 되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오면 도루묵이다. 박정희가 좋아해서 고위 공직자를 보냈고 학교 선생님들도 가고……, 이대 나온 며느리가 거기서 리어카를 끌고 같이 일하는 것을 보면 감동이 된다. 사람이 그렇게 실천하기 쉬운 것이 아니다. 단양에서 백광석회를 하던 분이 이북 사람인데 좋은 일을 할 수 없는가 하고 고민하는 사람인데 김용기 장로에게 감동을 받아서 원주 신림에 가나안 농군학교를 크게 지었다. CCC에 있을 때 그분과 접촉해 보았는데 CCC에서 전도만 한다니까 관심이 없더니 백광석회를 넣어서 그런 일을 했던 것이다. 좋은 일 한다면 그렇게 할 사람은 많다.
예수께서는 안식후 첫날 이른 아침에 제자들을 찾아가셨다. 알고 보면 제자들을 데리러 가신 것이다. “나와 같이 가자.” 하실 때 제자들은 뭐가 되는 줄 알았겠지만 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이 아버지께로 가자.”고 데리러 가셨다.
나를 따르라 하시지 않았던가! 처음에도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무엇을 하자고 하지 않고 새 나라를 만들어 보자고 하시지 않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마지막도 마찬가지다. 그는 우리를 데리러 오신 것이다. 왜 데리러 오셨겠는가. 근원에서 이탈하여 다른 데로, 바벨로 가고 있으니 데리러 오신 것이다.
근원으로, 아버지께로……. 근원으로 가는 것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다. 아버지는 우리 육신의 근원이다.
사도행전은 제자들이 예수를 따라서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다. 사도들은 예수를 따라서 어디로 가는가? 아버지께로 갔다. 우리도 예수를 따라가면 아버지께로 간다. 근본으로 돌아간다. 예수를 따라갔는데 바벨로 가 버리면 되겠는가. 그것은 예수를 따른 것이 아니다.
육신으로는 아버지로부터 낳았기에 사람은 아버지를 따라서 사는 것이다. 아버지는 선생이고 아들은 판사라 해서 다른 길로 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직업일뿐이다. 어떤 사람도, 아무리 불효자라도 아버지를 따라서 사는 것이다. 아버지가 장가가서 나를 낳았으니까 나도 똑같이 장가가서 아들을 낳는다. 아버지를 좋아하든 아니든 상관이 없다. 어차피 아버지를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장가가서 나를 낳으셨는데 내가 장가가지 않고 아들을 낳을 수 있겠는가. 육신으로 아버지로부터 낳았기에 어차피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다. 아버지를 따라 사는 것이 당연하다. 생명의 세계에는 다른 것이 없다. 생명의 세계에서 어떤 사람도 자기 아버지를 따라 살지 않는 사람은 없다.
알고 보면 효자가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 효자다. 아버지가 어떻게 시켜서 그렇게 다 똑같이 하겠는가. 아들을 놓고 교육을 하겠는가. “내가 결혼해서 낳았으니까 너도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거라.”라고 가르치는 아버지는 없다. 하나님이 묘하게 만들어 놓으셨다. 아무리 불효자라도 아버지대로 살아야 되지 할 수 없다. 아무리 아버지를 미워해도 아버지를 따라 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생명의 세계는 신기하다.
그리고 영으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왔기에 당연히 주님(맏아들)을 따라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다.
주님은 누군가? 맏아들이다. 맏아들을 따라서 우리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다. 맏아들은 왔다 가셨기 때문에 길을 잘 알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데 아버지 집에 가면 거할 곳이 많다. 그러니까 내가 가서 처소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에 데려가겠다.”고 하셨다. 간단하지 않은가!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으니까 걱정하지 말라. 내가 가서 집을 마련하면 나 있는 곳에 너희를 데려가겠다.” 하셨다. 그래서 맏아들이 되가지고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안에 있으면 자동적으로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다.
효자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아주 쉽다. 아버지가 한대로 꼭 그대로 하니까 다 효자다. 혹시 부모에게 찝찝한 사람이 있으면 해방받기 바란다. 여러분은 아주 부모에게 효도를 잘하는 사람들이다. 다 아버지가 한 그대로 하지 않는가.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다.
근본을 떠나면 곧 죽음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근본을 존중하는 것이다. 근본을 공경하는 사람은 다른 길로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다른 길로 가는 것이다. 어딜 가는지 모르고 그냥 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부모 공경을 가르쳤던 것이다.
정미자가 졸고 있는데 이 중요한 시간에 졸고 있으면 되겠는가. 엄마를 원망해도 정미자 자매는 엄마 노릇을 하고 있다. 엄마를 원망하며 엄마가 자기를 핍박했다고 해쌓는데 그래도 아들 하나 딸 하나 낳고 아주 효도를 잘하고 있다. 그러니까 잠자면 안된다. 이럴 때 잠자면 못알아듣는다.
근본을 아는 사람은 딴데 안간다. 효도를 일부러 가르칠 필요가 없다. 근본만 확실하게 알려 주면 저절로 효도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우리 조상들은 무조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첫째라고 했다. 거기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말이라고 깨달았으면 대박이었을 텐데 그때는 하나님을 몰랐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무조건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고 인륜도덕의 근본이라 했다. 삼강오륜이란 근본에 매달린 사람으로서 사람들과의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삼강오륜을 배웠을 것이다.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이고, 오륜은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장유유서(長幼有序), 부부유별(夫婦有別), 붕우유신(朋友有信)이다.
삼강의 강(綱)은 벼리 강이다. 벼리는 그물을 버티는 줄이다. 그물을 보면 그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위에 그물을 버티는 줄이 있다. 그 줄에 그물이 달려 있다. 그 줄이 강이다. 삼강은 아들은 부모의 줄에 매달려 있다는 뜻이고 신하는 임금에게, 여자는 남편에게 매달려 있다는 뜻이다. 오륜은 그 다음이다. 삼강이 제대로 되면 오륜은 저절로 따라온다.
옛날에는 그런 것을 가르쳤다. 하나님이 없으니까, 눈에 안보이는 하나님은 모르니까 눈에 보이는 것을 그렇게 제대로 잘 가르친 것이다. 삼강은 사람들의 생활을 그렇게 근본이 있게 하라는 것이다. 강이 있어야 그물을 쳐도 고기가 걸리지 이 줄이 없으면 그물로서의 가치가 없다.
그물을 어디 걸어놓아야 되지 그물만 던져 놓는다고 고기가 걸리겠는가. 그 줄이 강이다. 근본을 떠나서는 사람답게 살지 못한다. 그물이 줄에 걸려 있지 않으면 아무 용맹이 없다. 쓸모가 없다. 사람은 그 줄에 걸려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줄인 셈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줄이다. 이것이 근본이다. 여기 걸려 있는 사람이라야 제대로 사람 노릇을 하고 산다.
이것을 빼 버리면 그물은 아무 소용없게 된다. 잘못하면 사고만 친다. 벼리없는 그물이 바다에 떠다니다 스크류에 걸려 버리면 배가 못간다. 사고만 치는 것이다. 줄이 있으면 고기가 걸리는데 그 줄을 떠나면 사람답게 살 수 없다.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그 줄이 우리에게 생기니까 우리가 사람답게 살아지는 것이다
그 줄만 딱 걸려 있으면 그물 역할을 한다. 좌우간 그 줄에 매달아 놓으면 피래미 새끼가 걸려도 걸린다. 우리 살던 지방에서 숭어잡이를 할 때가 있다. 숭어는 뻘을 좋아해서 만조가 되었을 때 그물을 쳐 놓으면 물이 빠질 때 숭어가 그물에 걸린다. 안걸린 놈은 놀라서 반사적으로 튀는데 그때 온 동네 사람들이 삿갓처럼 만든 어구를 들고 나와서 숭어를 잡느라고 난리다. 아주 재미있는 행사다. 그물을 쳐 놓으니 그렇게 잡을 수 있는 것이지 그물이 없으면 잡겠는가. 그물을 보면 피해가지 고기가 그물로 저절로 가겠는가. 그런데 그물을 쳐 놓아서 막으니까 할 수 없이 걸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것은 모든 것이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것을 빗나가서 다른 일을 하려고 하니 망하는 것이지 그대로 살면 다 잘살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인간 생활의 원천이고 기초고 근본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근본을 알고 섬겨야 되지 근본을 모르고 열심만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자기 열심만 내지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
바울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6).” 하였다. 달음박질해서 먼저 간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신 이로, 정하신 이로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이미 정해 놓았다는 것이다. 내가 달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정해져 있는 것이다.
트랙을 따라 달려야 되지 트랙을 벗어나면 아무리 달려도 헛일이다. 인생도 똑같다. 이 길을 알고 나면 사람이 안정이 된다. 자기 길이 있으니 안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찾으려니 어려운 것이다. 가시덤불이고 이마에 땀이 흘러야 하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인간생활의 근본이다. 거기서부터 근원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부모가 사는 대로 살고 있으니까 여러분은 다 효자다. 우리는 어쩔 수 없어서라도 부모를 따라 살게 되어 있다. 어차피 부모를 따라 사는 것이지 개를 따라 살겠는가 소를 따라 살겠는가. 그러니까 효도를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니까 혹시 찝찝한 분이 있으면 부모에게 가서 “그동안 생각해 보니까 엄마 아빠에게 충실히 살아왔습니다.”라고 하면 된다. 그러면 깜짝 놀라지 않겠는가. “엄마 아빠가 결혼한 대로 나도 결혼을 했고 엄마 아빠가 자식을 낳은 대로 나도 자식을 낳았고……, 그러니 잘했지요?”라고 자신있게 내놓으면 된다.
공부를 안하거나 일을 잘못한 것은 있겠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다 부모가 한대로 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의 문제다. 가장 중요한 것을 했으면 되지 않았는가. 부모에게 가서 “공부를 못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엄마 뜻대로, 생명대로 따라갔습니다. 그러니 이제 미워하지 마세요.”라고 하면 된다. 정미자 자매가 항상 엄마를 원망하는데 “엄마 말대로 잘 준행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면 된다. 그러면 당당하지 않은가.
인간 사회의 시작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다. 그것이 근본이다. 그렇지 않고 다른 것을 해봤자 근본이 없는데 되겠는가. 노력만 하지 안된다. 노력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다 노력해 보지만 안되니까 못하는 것이지 일부러 안하는 사람은 없다. 자기 방식대로 하다 보니까 해도 안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