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도의 동부산권 매장문화재 지표조사 장산지역 조사는 왜 하지 않았을까? 다음의 석장승과 분묘의 사진을 살펴보자!
1. 이 분묘의 상석 길이가 150cm를 넘고 넓이도 80cm의 크기다. 장산에 존재하고 있으며 발견사실 신고한지도 5년이 지났다.
2. 2기의 모양 다른 석장승 홀대 움켜 쥔 모습을 보면 문인석으로 확신되며, 여말선초의 매장문화재로 짐작하고있다.
3. 2번째 마지막 석장승 몸체와 분리된 두부의 3개혈(穴)은 무엇을 의미할까? 과연 매장문화재로 조사할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4. 4번째 청동기시대 석장승으로 추정되는 2기의 반송지역 석물과 여말선초 여성의 자연비석 석문은 해석이 필요한 유물이다.
5. 5번째 분묘는 고려시대 분묘로서 석축과 돌담이 특징이다. 좌동. 우동, 반여동 지역에 상당히 많은 숫자의 분묘를 볼 수 있다.
6. 해발100m의 구릉지에 위치한다. 2023.2월 부산시 문화유산과에서도 다녀갔지만 매장문화재 지표조사도 아직 하지 않았다.
7. 동변산 물망골 계곡에서 2022. 12월 발견한 이산표석 공사중 두동강 내어 석축 고임돌 쓰려다 발각돼 현 위치에 보존했다.
8. 장산역사탐사대는 5년간 탐사로 동변산의 고려고분 등 장산에 분포한 유적 440여곳을 확인하고 자료로 작성하여 신고했다.
☞ 비단 이런 문화유산만을 얘기하는 것 아니다. 훨씬 많은 문화재가 산속에는 있는데 기록 없다는 이유만으로 조사하지 않는다면 부산의 문화재 생명은 잃을 수 밖에 없다. 매장문화재 유존지역 조사는 왜 하며, 보존 또 어떻게 할것인가?
동부산권 매장문화재 지표조사에서 18세기 중엽 영남도 동래부 지도상의 萇山國基,古邑城基, 東平縣基 조사하지 못한 이유는?
첫댓글 도시개발로 훼손되는 매장문화재가 아무렇게나 방치되는 게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사상가인 '톨스토이'가 여행 중 한 여인숙에 들렀을 때 일입니다.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 날 여인숙을 나오려 할 때 병중에 있던 여인숙집의 6살 난 어린 딸이
톨스토이가 들고 있던 빨간 가방이 갖고 싶다며 자신의 어머니에게 눈물까지 흘리며 조르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톨스토이는 가방 안에 짐이 있으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가방을 주겠다고 아이에게 약속했습니다.
며칠 후 톨스토이는 여인숙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소녀는 이미 죽어 공동묘지에 묻힌 뒤였습니다.
톨스토이는 소녀의 무덤을 찾아가 가져온 가방을 무덤 앞에 놓고 비석을 세워주었습니다.
톨스토이는 만약 그때 여인숙 어린 딸에게 선뜻 가방을 내주었더라면 그 어린 딸은 기쁘고 행복한 마음에 생명의 끈을 조금 더 붙잡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면서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습니다.
그리고 여자아이의 비석에 '사랑은 미루지 말라'는 글귀를 새겨 넣었다고 합니다.
톨스토이 이야기는 늦으면 후회할 수 있다는 뜻도 됩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좋은 결실 기대합니다
2021.3.9일 5년후 이곳의 옛날 모습은 어땠을까 - 센텀2지구의 변함이 - 에서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과정에서는
생사를 넘나드는 정의로운 영웅들의 증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킬링필드의 현장>
다수의 약자들을 짓밟은
소수 아첨자들에 의한 '왜곡된 기록'이 아닌,
'진실에 근거'한 민초들의 바른 역사를...
오늘날 우리가 역사를 바로 볼 수 있는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음을
꼭, 기억해야하겠습니다. <역사의 이산표석 길>
진실은 어떤 시련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 엘버트 허버트 -
과학적 방법으로 각인된 이산 글자의 먹물을 이용 제작년도를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 글자체로 누구의 글씨인지도 파악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설치개수는 350여기로 짐작한다. 40~50kgX350=17ton 마차 8대로 운반해 왔다면?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비밀리에 이루어진 작업으로 보기는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