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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반갑습니다.
이렇게 신도님들이 많이 오시는 날은 방석을 중간에는 제가 겨우 걸어갈 정도로만 놔두고 다 깔아두셔도 됩니다.
지금까지 제가 집착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처음이라 집착이라는 주제를 계속 얘기 하고 있구나.
그 집착을 넘어서 불교 핵심은 언제 해 주실까?
혹시나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는데
이 문제는 전부, 불교의 전부를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모든 것을 지금
이런 측면으로 집착의 측면으로 제가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이고요.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어떤 분들은 좀 의문을 가질 겁니다.
이 세상에서는 이 세상에서는 수많은 철학자들도 그렇고 수많은 사람들이 ‘사람은 집착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수 많은 철학자들은 집착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이렇게 발전해 왔고
변화해 왔고 진보 해왔고 우리가 이렇게 편리한 삶을 살게 됐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집착이야말로 삶의 원동력이고 인류 발전에 어떤 동력이 된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틀린 말은 아니죠.
근데 어떤 관점에서 틀린 말이 아니냐 하면
이 세상의 관점에서 틀린 말이 아닙니다.
즉, 이 세속의 관점에서는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그렇게 변화 발전해 가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불법은
불법은 세간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세간에서 어떻게 잘 사느냐 그걸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세간에서 살면서도 세간에서 벗어나는 길
출세간의 가르침을 설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붕 떠 가지고 깨닫고 나면 어디 딴 세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똑같이 사는데도 불구하고 세간 속에서 세간을 벗어나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종교 사상 철학 그 어떤 모든 가르침 에서도
이 불법 같은 것을 만나보기 어렵습니다.
불교를 공부하다 보면 이런 질문들을 합니다.
불교는 불성을 얘기하니까 일원론이죠.
일원론 아니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불성이 내재돼 있다고 하니까 범재신론(凡在神論) 아닙니까?
그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유물론입니까? 아니라고 합니다.
유신론입니까? 그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모든 ‘불교는 이런 거지요?’ 라고 물어보는 모든 철학자들이 하는 것에 대해서 불교는 전부 다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가르침들은 이 세간 속에서 이러한 범주 저러한 범주를 나눈 다음에 ‘이것이 진리야, 이것이 옳은 거야’ 라고 딱 정해놓고 그 속에 사람들을 가둡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종교에서 주장하는 가르침대로 살기 위해서 애써야 됩니다.
거기서 얘기하는 교리를 지켜야 되고 계율을 지켜야 되고 거기서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거야 라고 얘기하는 대로 살면 잘 사는 건데 거기서 얘기한 대로 살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불편하고 죄의식에 사로잡히고 내가 잘 못사는 것이구나 하는 마음을 가진 채 끊임없이 그 종교, 사상, 철학 에서 얘기하는 바 대로 살기 위해서 애써야 됩니다.
취사 간택해야 되는 것이죠.
취하고 버려야 됩니다.
좋은 진리는 취하고 진리 아닌 것은 버려야 되죠
끊임없이 취사 간택해야 됩니다.
취사 간택이야말로 중생의 어리석은 분별심이고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 입니다
불이중도(不二中道).
어디에도 어떤 곳에도 발 딛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이 가르침의 핵심이죠.
그래서, 아주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불법 에서는 그 어디에 대한 집착도 모든 집합으로부터 벗어나게 얘기합니다.
불교는 모든 집착을 뺏은 다음에 불교에 대해 집착 하도록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고 불교에 대한 집착 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다 빼앗아 버립니다.
왜 그러느냐?
이 세상에 무언가 하나에 안주하고 하나의 머물고 하나에 집착하는 것이 있으면 그건 세간입니다.
집착하는 것에는 머물고 집착하지 않는 것은 버려야 되거든요.
취사간택해야 됩니다.
그럼 중생심입니다.
아무리 불법을 취하고 불법 아닌걸 버리더라도 그 사람은 중생이에요.
그래서 이 공부는 출세간입니다.
세간 속에서 세간을 벗어나는.
지금 여러분들이 꿈꾸는 게 뭐겠습니까?
유한한 것, 제한된 것,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 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거 아니겠어요?
돈을 내가 열심히 벌기 위해서 불교를 불게 불교를 좀 써 먹겠다
내가 부처님께 열심히 기도하면 돈을 벌게 해 주겠지.
뭐 그렇게 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 돈은 반드시 사라집니다.
내가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부처님께 기도해서 건강을 얻겠다.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건강은 반드시 사라집니다.
생명도 반드시 죽음으로 돌아갑니다.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그것을 설하는 것이 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얘기하는
그 집착을 놓아버리라는 가르침은
그냥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이 심지어 어떤 자기계발서 같은 혹은 힐링 서적 같은
그런 곳에서 무수히 볼 수 있는 그런 단편적인 집착을 버리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의 완전한 벗어남.
그러니까 불교에서 ‘해탈(解脫)’이라는 표현을 쓰잖아요.
모든 묶여 있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걸 해탈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이렇게 법당에 와서 법문을 듣는다 라는 것이 참으로 불교 경전에 보면 부처님 법문을 들을 때 희유하고도 희유 합니다 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가 이것은 참으로 희유 하고도 희유 할 수밖에 없는 정말 놀라운 가르침입니다.
어디 가서도 세상 어디에 가서도 이런 가르침은 만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뭐 이렇게 표현하면 조금 안 되지만
불교 안에서조차 그렇게 방편적인 제한된 무 집착, 제한된 불법만을 지금까지 우리는 배워 왔어요.
저도 출가 하고 나서 어릴 적에 불교 공부하고 나서 수십 년간 그렇게 제한된 방편에 치우친 불교가 전부 라고 생각하면서 여러분과 똑같이 공부해 왔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죠.
이 공부는 여러분들이 어찌 보면 좀 그 뭐랄까
참 용기가 필요하고, 지혜가 필요하고 또 마음을 비우고
제 얘기를 들어 주셔야만 이 얘기가 좀 와 닿으실 겁니다.
만약에 딱 닫은 채 ‘내가 알고 있는 불교가 불교의 전부야’ 라는 마음을 가지고 제가 하는 말을 취사간택하면서 듣기 시작하면 제가 똑같은 얘길 했는데 전혀 여러분들은 다르게 들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했던 얘기들 가운데 재미난 비유들 이런 얘기만 쏙쏙 들어오지
참된 의미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그렇게 얘기하세요.
본인이 정말 마음을 확 열고 이 공부에 대해서 뭐랄까
참 공부가 어느 정도 익어가다 보니까 그런 얘기 하세요.
야 스님이 요즘에는 법문이 아주 너무너무 좋습니다
야 옛날에는 왜 이런 얘길 안 해주시다가 요즘에 와서 이런 얘길 해 주시냐고 그래서 제가 ‘예전 거 한번 들어 보셨나요?’ 그랬더니
그 분이 한 일년 전 거를 들고 오시더니
‘야 그때는 왜 그 얘기가 근데 안 들어 왔었죠?’
전혀 안 들어오고 본인이 알고 싶은 얘기만 들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 공부할 때는 마음을 완전히 열고 마음을 비우고 공부를 해야 됩니다.
우선 이제 집착에 대한 이야기를 제가 하고 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집착을 이야기 했는데요.
이 금강경의 가르침 자체가
이러한 어찌 보면 집착에 대한 놓아버림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집착을 놓아버리려고 애쓰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집착을 놓아버리려고 애쓴다고 집착이 버려질까요?
그렇게 안 됩니다.
집착을 버리려고 애 쓰면 애쓸 수로 거기에 더 구속되기가 쉽습니다.
살 빼려고 살 빼려고 살 빼는데 너무 집착하는 사람들이 안 먹고 안 먹고 안 먹다가 나중에 보면 갑자기 확 폭식 해버리잖아요
안먹야지 하고 막 집착하던 마음이 안에 쌓여 있다가 터져버리는 거예요.
불법은 무위법입니다.
유위법, 애 쓰고 노력하고 조작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
바른 지혜를 확인하고 나면 바른 지혜가 생기면
저절로 저절로 삿된 것은 그냥 그냥 스르륵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고
내가 집착하던 바를 없애려고 애써서 집착하는 바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지혜가 밝아 지면 집착하던 것이 저절로 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집착하는 대상이 ‘집착할 만 한 거야.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거야.’ 라고 굳게 믿으면서 확신을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 왔는데
불법을 공부하니까
‘아! 내가 그렇게 집착해 왔던 그 집착의 대상이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무언가가 아니었구나’ 라는 것에 눈 뜨는 것이죠.
그래서 불교의 모든 교리가 이 사실을 설하고 있습니다.
연기법! 불교는 연기법이라고 설명하죠.
예를 들어, 여러분이 돈을 뭐 십억을 벌기를 원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머리 속에서. 그러면서 ‘10억을 벌면 난 행복할 거야’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께 제가 여쭤보면 어떤 사람은 아 저는 십억 벌면 행복합니다 이런 분도 계실 거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제가 제 인생에 십억을 벌면 저보고 행복하냐고요?
저는 이미 몇 십억 가지고 있어서 십억 가지고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뭐 천억은 가지고 있어야 행복하지 않을까요’ 이런 사람도 있을 수 있구요.
제가 이 질문을 했을 때 가장 단위를 크게 얘기했던 한 친구가 천조 정돈 있어야 행복하다 이렇게 얘길 하더라구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 행복의 기준은 다르거든요
어떤 사람은 십억 있는데 너무나도 행복합니다.
어떤 사람은 십억 있는데 너무나도 불행하고
천억을 일조원 이상을 가지고 있다가 다 날려버리고 십억밖에 안 남은 사람은 얼마나 비참하게 살겠습니까?
십억 자체에 행복이나 불행이 있지 않고 그 사람이 어떤 인연에 처했느냐에 따라서 그 십억이 행복한 삶이 될 수도 있고 불행한 삶이 될 수도 있죠.
인연 따라 행복이기도 하고 불행이기도 한 것이지 십억이라는 내 바깥에 있는 어떤 돈의 단위 속에 물질 속에 행복이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니죠.
인연 따라 변해가는 겁니다. 그러면 십억만 그럴까요?
백만원도 그렇습니다
내가 내가 마음속에 추구하고 있는 어쩐 액수가 있다. 그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인도나 아프리카 같은데 가보면 뭐 백만원이 뭡니까? 다만 단 돈 한 몇 십만원만 있어도 너무나도 행복해 할 만한 사람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어요.
그 친구들은 뭐 십만원 만원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냥 당장 내 손에 먹을 거 하나라도 요만한 쪼만한 초코렛 하나라도 받을 수 있으면 그걸로 너무나도 뭐 활짝 웃으면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 합니다.
인연따라 모인 것은 인연따라 흩어 지거든요.
그런데 인연따라 잠깐 모인 것을 진짜라고 여기고 실체 라고 여깁니다, 우리는.
그래서 부처님께서 연기법을 설하시면서
인연 따라 생겨난 거니까 진짜가 아니다 라고 설명해 줌으로써
집착하는 이에게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삼법인(三法印)을 설명 하심으로써 ‘무상(無相)’ ‘무아(無我)’ ‘고(苦)’를 설명 하십니다
그 모든 것은 내가 집착하고 있는 모든 대상은 변해 갈 뿐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고정된 실체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옛날에는 십억을 벌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상 번 사람이라면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 않죠. 변화 될 뿐이지. 고정된 뭔가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의 행복을 가져다 줄만한 고정된 외부 조건?
이런 건 없습니다.
내가 고정 돼서 실체다 라고 할 만한 뭔가가 없다는 것이죠.
그게 바로 제법무아(諸法無我)입니다.
실체적인 무언가가 없다.
어떤 조건이 있으면 나는 완전히 행복해질 거야 그런 건 없습니다.
바깥으로 추구하는 모든 것들은 진실하지가 않은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무상하고 무아인 모든 일체 모든 대상에 그것이 진짜라고 느끼고 실체 라고 느껴서 거기 집착하게 시작하면 일체개고일 수밖에 없고
그 집착으로부터 아 무상 무아라는 사실을 깨달아서
그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열반적정(涅槃寂靜)인 겁니다.
그러니까 삼법인(三法印)이 한 생각 어리석으면 일체개고가 포함되고
한 생각 밝으면 열반적정이 드러나는 것이죠
공하다 공하다 텅 비었다 같은 얘기입니다.
여몽한포영 (如夢幻抱影)
금강경에서 말한 꿈과 같고 환영과 갖고 신기루와 같다
우리가 취하고 있던 모든 것들이 그와 같이 진실하지 않고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설하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괴로워하고 있는 어떤 것이 있다.
나는 이것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 라고 생각한다면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분명합니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는 어지간해서는 내가 뭐에 집착하고 있는지를 볼 수가 없습니다. 보기가 힘들어요.
내가 집착은 잔뜩 하고 있으면서 내가 어디에 집착 했는지 모르고 심지어 ‘여러분은 어디에 집착해 있어요. 그것 때문에 괴롭습니다.’ 고 얘기해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절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나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너희들이 다 잘못됐지. 나는 옳다.’ 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나이가 들면 될수록 혹은 뭐랄까 이 알음알이 이런 것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점점 더 자기가 고착화 시켜놓은 집착들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열고 이 법을 듣기 시작해야 된다는 거예요.
뭔가 얘길 해 줬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 그렇지는 않다’ 라고 얘기를 하는 것들을 전 너무 많이 봤거든요.
한참 대화를 나누다 보면 ‘아, 그럴 수도 있었겠네요’ 하고 이제 조금 인정을
하는 것이죠.
무언가로 인해서 괴롭다면 그 무언가가 내가 ‘분명히 옳아’ 라고 믿고 있는 이 생각 때문일 확률이 높습니다.
예를 들어, 내 아들이 서울대를 가야 되거나 뭐 좋은 대학교를 원하는 대학교에 가야 한다. 혹은, 내 아들이 좋은데 취직을 해야 된다. 일류 기업에 취직해야 된다. 혹은, 내 자식이 이번 진급 시험에 진급이 돼야 된다. 혹은, 내 남편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것이 안되면 나는 큰일 난다고 생각해서 거기 이제 집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식이 좋은 대학교 가야 된다고 하는 그것은 무엇이 나를 괴롭히고 있느냐? 그 생각!
내 아들은 반드시 이 정도의 대학은 가야 돼. 이 정도의 직장에 취직해. 야 혹은 이 직장에서 진급을 반드시 해야 돼.
이 생각을 취하고 있는 것이죠.
그게 제가 틀렸다 맞다 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지 말라는 얘기도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취해도 됩니다. 적극적으로 돈도 벌고 성공하고 삶에서 원하는 걸 다 이루기 위해서 노력해도 좋습니다.
그 부분을 어떻게 하라는 그 부분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을 하지 말라는 얘기도 아닙니다. 다만 진실을 바로 알고 진급을 위해 달려가는 사람과 진실을 바로 알고 자식 대학을 보내기 위해서 뒷바라지 하는 엄마와 진실을 모른 채 그렇게 하는 사람은 천지 차이입니다.
저는 그런 많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봤는데, 이런 식이죠.
이 진실을 전혀 모른 채 이게 실제 하지 않는 허망한 것이다 라는 사실을 모르는 엄마들은 제가 이런 얘기를 하면 발끈하면서 저에게 이제 따집니다.
자식이 당연히 공부를 좀 하면 더 시켜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부산대 이런데 보내야지 맞는 거지. 그렇게 집착을 버려 가지고 얘 대학교 좋은데 못 가면 책임질 거냐 하면서 저한테 이제 따져요.
그러면서 좋은 대학을 가야만 좋은데 취직할 수 있고 우리나라 학벌이
아니면은 잘 살 수 없다. 학벌이 좋아야지만 좋은데 취직도 할 수 있고 좋은 사람과 인연도 맺을 수 있고 어느 회사에 가든 거기서 잘 나가는 사람이 될 수 있다.
틀린 말 아니죠 틀린 말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100% 진실이라고 확신할 수 있으니까?
그것이 100% 진실이라면 서울대 나온 사람은 전부 다 행복해야 되죠.
전부 다 돈을 많이 벌어야 됩니다. 전부 다 성공적이라 합니다.
그러면 조금 더 한발 나아가서 우리가 그렇다면 그 성공과 행복이라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에 대해서도 관점이 다 다르죠.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벌고 좋은 곳에 취직해서 살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정말 행복 일까요?
너무나 좋은 곳에 취직해 살면서도 부부간의 불화가 너무너무 심해서 매일같이 지옥처럼 사는 그런 집들이 실제 있습니다.
제가 뵈었던 분들 중에도 계시구요.
너무나 고통을 받고 사시는 거죠. 겉으로 봤을 때 너무나도 화려한데.
내가 원하는 대학교를 내 자식을 보내는 것이 100% 진실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죠.
근데 그것은 가능성으로써 상당히 많은 가능성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100% 진실은 아닙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참 뭐하지만서도..
옛날에 어떤 아는 분께서는요 그렇게 그렇게 원하던 대학교 원하던 과를 누구나 남 부러워하는 곳을 합격을 했습니다.
무사히 졸업을 해서 원하는 직장에 취직을 했습니다.
취직해서 신입 사원들 교육 받다가 회식 하다가 계단을 걸어 내려 오다가 이렇게 넘어져서 죽게 됐어요
누구나 남부러워 하는 모든 조건을 갖췄습니다.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 모든 것을 갖춰서 이제 행복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런 일이 벌어졌을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 부모님께서.
이럴 줄 알았으면 그렇게까지 닥달하지 않는 것인데 살면서 행복 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행복을 누려 보지 못하고 떠날 줄 어찌 알겠습니까?
100% 확신할 순 없다 라는 말의 의미를 잘 이제 이해 하셔야 됩니다.
그 말은 내가 이 생각을 완전히 고집해서 집착할 필요 까지는 없다는 얘기겠죠.
이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 대학교에 가서 좋을 수도 있고 가서 안 좋을 수도 있으니까 나는 오히려 다른 대학을 가는 게 더 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만날 수 있는 정말 놀라운 귀인들이 지방에 있는 대학교에 있을 수도 있는 것이죠. 내 남편이 반드시 진급해야만 좋을 거야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생각이고 집착 입니까 생각입니다 단순히 망상.
그것을 100% 확신할 수 있느냐? 그럴 수도 있을 뿐이지.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일 뿐이지. 100%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근데 그것을 알 수 있을까요?
나에게는 내 남편이 진급 하는 게 좋은지 안 하고 밖에 나가는 게 좋은지 100% 내가 알 수 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내 남편의 길이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어요.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젊었을 때 40대 초반인가 좀 일찍 퇴사를 했어요.
그래서 그때 진급이 안돼서 너무 충격을 받았었는데
퇴사를 하고 나서 이분이 첨엔 식당을 하나 하다가 이걸 키워 가지고 그 빌딩 전체를 샀어요. 그래서 건물주가 되었는데.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자신은 그 직장에 있을 때는 내가 이런 쪽으로 능력이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했다는 겁니다.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었다는 거죠. 특출 나게 잘하는 모습은 전혀 없었대요. 그냥 그냥 이렇게 사는 회사원이었다는 거죠.
그런데 본인이 뭔가 원하고 간절하고 이런 부분이 있긴 있었는데 그걸 몰랐다는 것이죠.
근데 퇴사하고 나서 사업을 하는데 자신한테 이런 모습이 있는지 전혀 몰랐다.
내가 이렇게 사업 수완이 좋은 사람인지 내가 막 애써서 하는 게 아닌데 그냥 저절로 이런 일들이 막 생각나고 아이디어가 생각 나고 막 친절함이 저절로 저절로 되더라는 거에요. 그래서 막 다양한 방법으로 이렇게 하다 보니까 이렇게 지금 이 자리까지 왔다. 내가 옛날에 그 회사에 올인 해서 있었으면 올라가고 올라간다 할지라도 지금까지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
알 수 없는데 우리는 알 수 있다고 그 생각에 집착합니다.
내 남편이 이 회사 안에서 진급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집착을 하는 것일 뿐이지. 그 생각이 100% 옳은 것은 아닐 수 있는 것이죠.
모든 것이 생각이 만들어내는 환상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쥐고 있어요.
무엇을 집착하고 있느냐?
바깥의 물질 세계를 집착하고 있기도 하지만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고 있기도 하지만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 생각을 금강경 에서는 상(相) 이라는 말로 표현을 합니다.
모양, 모양 상(相)자를 써요, 이미지.
여러분 저 앞에 금련사 들어오다 보면 부처님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님이 계시죠.
이미지가 떠오르죠?
바깥에 금련사 앞에 딱 들어오면 보이는 금련사 모습이 이미지 그려지시죠.
그걸 이제 상이라고 합니다.
머리 속에 이미지로 그려지는 모습 그 상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하면 행복할 거야 라는 머리 속에 이미지가 있죠?
난 이렇게 살면 행복할 거야 라고 생각해 놓은 모양이 있죠?
그게 상입니다.
그래서 그 모양이 100% 옳을 거라고 취하고 있는 것이죠.
자기 머릿속에 그려놓은 상을.
‘내가 이런 모습을 살게 되면 난 행복할 거야. 저렇게 살게 되면 난 행복할 거야.’ 라고 머리 속에 그림 그려 놓고 그것을 쫓아갑니다.
항상 이 상을 가지고 머리 속에 상을 끊임없이 입력해 놓고 기억해 놓는 거예요.
옛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만들어왔던 수 많은 상들이 있습니다.
행복에 대한 어떤 특정한 모습이 될 수 있고 모든 게 다 상이죠.
이거 이걸 죽비 라고 하잖아요?
죽비라는 상입니다.
이게 이름이 죽비죠? 이게 100% 죽비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이거 미국 사람이나 아프리카 사람이나 죽비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걸 보면 이걸 죽비라고 안하겠죠?
그죠 그러니까 100% 죽비라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근데, 우리는 이런 모양을 보면 죽비라고 집착을 합니다.
아는 것은 괜찮아요. 당연히 아는 건 알아야죠.
근데 여기에 과도하게 집착할 필요는 없는 것이죠.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있는데 그 돈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거야 라는 것이 100% 진실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 돈이 사람을 망칠 수도 있죠.
오히려 부모님들이 과도한 재산을 물려 줬을 때 오히려 자식들이 막 싸우는
일도 있잖아요.
로또가 당첨 됐을 때 오히려 집안이 파탄 나는 일도 많습니다.
돈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줄거야 라는 것은 상이지.
내가 그렇게 그려놓은 머릿속에 그려놓은 상, 모양일 뿐이지.
그것이100% 진실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100% 진실일 거라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그 상을 쫓아갑니다.
모양을 쫓아 가죠. 내가 머릿속으로 그려 놓은 생각이 옳다 라고 쫓아갑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지냐 하면 상을 쫓아 가기 때문에
이 상이 허망한 지 모르고
모든 상은 허망하잖아요.
내 머릿속으로 그려 놓은 거지.
이것도 죽비라고 진짜인지 알았는데 사실은 100% 확인할 수 없어요.
죽비라는 이름 일 뿐이지.
저는 여기 지금 법상 스님은 한 명이 있거든요.
근데 여러분 머릿속에 저는 여러분 인원 수만큼 다른 제가 있습니다.
저를 다 똑같이 생각하겠어요?
어떤 분은 좋아하는 분도 계실 것이고
어떤 분은 저 양반은 좀 이상해 이상하게 자꾸 얘기해 이럴 수도 있을 거겠죠.
혹은 너무 너무 좋아할 수도 있고 또 뭐 그냥 그냥 그냥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제가 하는 말에 대해서도 이런 건 맞는데 저건 틀려 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야, 정말..’ 이렇게 생각한 사람도 있을 겁니다.
왜 그럴까요?
있는 그대로의 저를 여러분은 보지 않습니다.
여러분 머릿속으로 저에 대해서 그려놓은 그림자 그려놓은 그림 상을 가지고 저일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저라는 상을 좋게 가진 어떤 분이 계세요.
그럼 제가 혹시나 조금 실수를 했어요 잘 못 했어요.
그래도 내 머리 속에 상의 ’저 분 훌륭한 분야’ 라고 생각하던 사람이라면 저럴 수도 있지 뭔가 이유가 있었겠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런데 어떤 분은 ‘저거 봐. 내 저럴 줄 알았어 겉으로만 저런 착하지 속은 다 이상한 놈일 거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죠.
그 어디서 오는 걸까요?
상이 만들어 낸 겁니다.
자기가 자기가 그려낸 겁니다.
있는 그대로의 저를 단 한 순간도 여러분은 보지 않습니다.
자기 이미지로 그려낸 상을 거죠.
부처님도 마찬가지죠.
제 고등학교 때 친구는 제가 출가를 하는 것을 보고 펑펑 울면서 정말 내가 딴 사람은 몰라도 내가 너무 좋아하는 친구라 너만은 내가 정말 천국으로 보내 주고 싶었는데. 너가 이렇게 지옥으로 지 발로 쫓아 가는걸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았고 반드시 나를 구해 주겠다고 막 난리 난리를 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에게 저는 지옥에 빠질 게 분명한 아주 처량하고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런 것이죠.
내가 어떤 이미지 어떤 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바뀌는 것이지.
실제 여기 안에는 사람이 전부다 뭐 마구니에 빠진 사람들일까요?
반대로 우리는 저 대형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아 저 어리석은 중생들 참 불쌍한 사람들 저 수준 낮은 그 종교를 하느냐?’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도 내 머릿속에서 그려 놓은 그림입니다.
모든 것이 그렇게 우리 머리 속에서 그려놓은 그림, 상, 이미지 속에 갇혀서 살고 그것을 진짜라고 집착하고 삽니다.
내 자식은 내가 잘 알아.
내 자식은 반드시 이러이러한 대학을 가야 되고 이러한 직장을 가면 더 좋고.
‘야 저런 여자는 너한테 안 맞아’
‘이런 남자는 너한테 안 맞아’
‘저런 사람은 나중에 너를 힘들게 할 거야’
이렇게 생각해 놓고 그 생각이 100% 일 거라고 굳게 믿고 있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보자마자 기분 나쁘게 보이기도 하구요.
어떤 사람은 보자마자 첫인상이 호감을 느끼기도 하죠.
근데 머리 속에서 이미지가 그려놓은 상이거든요.
상인데 상 인줄 몰라요
상을 따라가고 생각을 따라가고 기억을 따라가고
그러다 보니까 지금 이 순간 이라는 놀라운 진실의 세계에 발 딛고 살아가지 못합니다
제가 집착을 버리라고 하는 이유는 버리라고 애쓰라는 것이 아니라
참된 진실이 무엇인지에 눈뜨라는 얘기 이거든요.
그렇다면 진실은 뭘까요?
집착하느라고 참된 진실을 보지 못하고 살고 있거든요.
집착하지 않았을 때 참된 진실을 볼 수 있는 확률이 훨씬 높아집니다.
상에 얽매지 않았을 때
금강경에서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라는 말이 있어요.
범소유상(凡所有相) 상위 있는바, 무릇 상이 있는바 모든 것은
개시허망(皆是虛妄) 모두 다 허망하다 실체가 아니다.
약견재상비상(若見諸相非相) 만약에 상이 상이 아니라는 것을 보면
즉견여래(卽見如來) 곧바로 여래를 본다.
그게 여래라는 거예요.
상을 상에 집착하지 않을 때 여래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에 집착 하느라고 그 생각에 집착하느라고 여래를 보지 못합니다.
여래는 뭔가요?
지금 이 자리에 여래는 언제나 구족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부처가 아니야’ 라는 생각에 집착하고 있을 뿐이지.
여래가 아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지금 저를 보고 있단 말이에요.
저를 보고 있는 이 ‘봄’은 어찌 보면
이렇게 둘로 나누면 안되지만 편의상 말씀 드려보면
저를 여러분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보고 있어요.
부처가 부처를 보고 있는 게 하나구요.
하나는 중생으로써 보고 있습니다.
저를 보자마자 저를 인식하는.
보입니까?
보자마자 그냥 딱 보자마자 아는 이건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다 똑같아요.
하나죠 똑같죠 똑같이 보자마자 알거든요.
그런데 보자마자 곧장 ‘아 죽비’, ‘아 죽비를 들고 있구나’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합니다.
저를 보자마자 아 뭐 ‘스님’, ‘법상 스님’ 아니면 뭐 어떤 사람
이렇게 그 이미지 개념으로 바로 저를 인식하는 것이죠.
제가 어딘가에서 툭 튀어 나왔을 때 뭔가가 딱 순수한 봄 순수한 어떤 알아차림
그 자리에서는 누구나 똑같습니다.
이 소리를 첫 번째 자리에서는 누구나 똑같이 들어요.
똑같이 소리를 듣습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다르게 듣지 않는 그 자리는
부처의 자리에서 듣고 있는 거예요.
부처이니까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귀가 귀가 소리를 듣는다.
이게 100% 진실입니까?
귀가 소리를 듣는다면 무조건 들어야 되는데
마이크 미세한 치직 하는 소리 계속 안 듣고 계셨죠?
작게 올리던 아까 울리던 새소리를 아마 못 들으셨을 겁니다.
어딘가에 몰입해 있으면 내 이름을 불러도 못 듣는 일이 있죠?
나한테 뭔 말을 했는데 내가 전혀 못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귀가 있는데.
귀가 듣는 거면 무조건 들어야죠.
근데 들을 때도 있고 못들을 때도 있는 것이죠.
귀가 듣는 게 아닙니다.
내가 듣는다.
나라는 뭔가가 실체가 있어서 내가 듣는다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말하는 실체가 있어서 내가 듣는다.
100% 진실 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듣는 게 확실하면 내 맘대로 할 수 있어야 되요.
나니까.
진짜 나라면.
그러면 이 소리를 듣고 싶으면 듣고 듣기 싫으면 듣지 말아야 됩니다.
내가 듣는 거니까.
내 맘대로 할 수 있으니까.
여러분 지금부터 이 소리를 듣지 마세요.
여러분이 듣는 거니까
듣지 마세요.
(죽비 소리)
안 들립니까? 들려요.
여러분이 듣고 있는 게 아니에요.
듣고 싶다고 듣고 듣기 싫다고 안 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내가 듣는 게 아니라서 그래요.
그래서 이것을 불교 교리에서는 무안이비설신의 이렇게 얘기합니다.
눈귀코혀몸뜻도 본래 없다.
오온개공이라고도 표현하죠.
색수상행식이라고 말하는 나라고 실체화 시킬만한 뭔가가 없다는 것이죠.
나라는 것은 인연 따라 왔다가 가는 것일 뿐이지.
그게 진짜 내가 아니다.
내가 내가 보는 게 아닙니다. 이 소릴 내가 듣는 게 아닙니다.
내가 하는 건 뭐냐?
그 소릴 듣고 해석하는 것만 내가 해요.
해석해서 그 해석한 이미지를 내가 취하고 집착하는 것만 내가 합니다.
그럼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할까요?
보는 이걸 말로 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의 자리는 말로 할 수가 없어요.
뭐 굳이 말한다면 뭐 보는 놈이라는 표현하기도 하고 보는 성품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고 듣는 성품 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그런 말은 그 것을 의미할지
그런 말에 말을 취해 가지고 말의 이미지에 걸려 있게 되니까
그 말이 그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언제나 매 순간 지금 이 순간 존재함으로써
언제나 부처를 쓰고 있고 부처와 살고 있어요.
부처를 찾아야 되는 게 아니라 부처를 버릴 수가 없습니다.
단 한 순간도.
그러면 왜 우리는 부처를 쓰고 살면서도 부처에서 멀어져서 중생으로 사는 걸까요?
부처로 사는 대신 상을 취하며 살거든요, 매 순간.
매 순간 여러분은 ‘나는 상을 취하치 않는데요’
하지만 상을 취하고 삽니다.
상 없이 보면 이게 뭐죠?
‘몽둥이’
몽둥이라는 ‘말’이죠.
어릴 적, 옛날에 배웠던 말을 여기다가 갖다 붙인 겁니다
몽둥이 라는 말도, 그죠?
이거 (죽비를 들어 보이시며) 이제 보이죠. 보입니까?
(죽비를 감추시고) 지금은요?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면
상에 빠지지 않고 생각이나 개념에 빠지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면
(죽비를 들어 보이시며) 보이죠?
(죽비를 감추시고) 지금은요?
안 보인다는 말은 조금 전에 지나간 과거에서 보인다는 생각을 쥐고 있어야만 지금 안 보인다는 말을 할 수 있죠. 그죠?
조금 전에 (죽비를 들어 보이시며) 이게 보인다 라는 생각을 내가 취하고 있고 이 상을 이미지를 쥐고 있는 사람만
(죽비를 감추시고) 이렇게 했을 때 안 보인다고 할 수 있어요.
이처럼 매 순간 우리는 바로 지나간 과거심불가득 인데도 불구하고
지나간 것을 그 이미지를 그려서 취하고 있습니다.
이게(죽비) 보인다고 했다가 이렇게 하면(죽비를 감추시고) 안 보인다고 하는 말을 ‘그게 아니다. 그 답이 아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발끈해서 이게 보이고 이게 안 보이는 거지 왜 그러냐면 따지는 사람들이 있죠.
분명한 분명히 보였다가 분명히 안 보였다고 굳게 믿고 집착하는 거죠.
이 작은 거 하나에도 우리는 그렇게 상을 그려서 이미지를 그려서 집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옛날에 미워하던 어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해서 그 사람을 엄청나게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했던 그 행동이 미온 행동이 100% 진실 일까요?
그것도 알 수 없을뿐더러 지금까지 계속 그 개념을 가져와서
지금까지 내가 괴로워하고 있다는 게 상에 빠져 있는 거에 불구 하잖아요.
상에 빠져서 아파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약견재상비상을 모르고
그러니까 우린 이와 같이 매 순간 상에 떨어져서 상에 집착하는 것을 통해서
지금 이 순간에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뭐 49 제가 있으니까
사실은 이제 돌아 가신 분은
돌아가신 게 100% 확실 할까요?
100% 진실 일까요?
100% 진실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아 우리는
눈에서 보이지 않으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기도 하잖아요.
제가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지금 내 생각 속에서 많은 분들이 그러거든요.
딱 돌아가시고 나서 그때는 멍해서 잘 몰랐다.
근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빈자리가 느껴진다.
이렇게 표현을 해요.
사랑하다 헤어진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는 몰랐으나.
이게 사실은요.
돌아가셨기 때문에 괴롭다 라는 것은 생각입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만 일어납니다.
그것이 괴롭다 라는 것은 내가 생각할 때만 일어나는 망상입니다.
그게 진짜 괴로운 것인지 아닌 것인지 는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생각으로 취할 때만 괴롭습니다.
아무리 괴로웠더라도.
이제 이런 비유를 들 수 있는데요.
어 장례식장에서 너무나도 괴로워하던 어떤 분께서
법륜 스님 책인가 옛날에 제가 대학교 다닐 때 본 거 같아요.
장례식장에 갔는데 너무 너무 막 침통해서 계속 울고 있는데 어떤 분이 이렇게 문상을 와서 절을 하는데 절을 할 때마다 방구를 뽕뽕하면서 뀌는데 처음에는 이렇게 웃음을 참다가 또 절을 할 때마다 이렇게 방구를 뽕뽕 뀌니까 그 상주 분이 갑자기 웃음이 터져 가지고 막 웃고 있더라는 거죠.
그분은 옷을 상황이 아니잖아요.
근데 왜 웃었을까요?
그 인연이 모이면 그냥 웃어지는 겁니다.
웃을 인연이 모이면 그냥 웃는 거예요.
그럼 웃는 동안은 어때요?
조금 전에 그 아픈 괴로움은 의미 없습니다.
없어요.
아픔, 괴로움은 생각할 때만 있습니다.
항상 생각해서 그것을 취할 때만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 존재 하게 되었을 때
그 어떤 괴로움도 사실은 괴로움일 수가 없어요.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면.
지금 이 자리로 돌아오면 나의 진실된 자리.
이것만이 변함이 없는 것이거든요.
다른 건 전부 다 왔다 가잖아요.
여러분 이걸 듣는 자리가
듣는 것이 누가 능력을 주어서 얻었습니까?
이 소릴 듣는 능력을 개발했나요, 학교에서?
개발하지 않았습니다.
획득한 것도 아닙니다.
누가 준 것도 아니고 누가 뺏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언제나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던 거예요.
십대 때 이것(죽비소리)과 이 자리와 죽기 직전에 이 자리(죽비소리)가 똑같아요.
그래서 해석하는 분별의 의식은 달라지겠지만 변치 않는 진실이 있단 말이죠.
변치 않는 진실.
거기에서 뿌리를 내리려면 그 동안 우리가 취해 왔던 모든 이미지 상에 얽매였던 모든 생각들 허망한 망상분별들 거기서 놓여 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매, 언제나 자기 생각을 의심해 봐야 됩니다.
내가 굳게 뭐라 라고 생각한 게 진짜 옳은지?
어떤 보살님이 그러시대요.
남편이 평생 담배를 주구장창 피워 되니까 정말 꼴 보기 싫어 가지고 너무 화가 나고 담배 피러 나갈 때마다 막 짜증이 나는 게 이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평생인데 도저히 고칠 수가 없다.
그나마 고칠 수가 없다는 말 자체는 내가 한번 고쳐 볼까 생각을 한 게 참 대단한 분이죠.
그전까지는 절에 나오기 전까지는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 저 놈 잘못이다 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는 거죠. 100% 백퍼센트 내 남편이 잘못이다.
담배 피우는 게 잘못이다. 그래서 담배 피러 나갈 때마다 화가 나더래요.
그런데 어느 순간 가만히 보니까 남편이 담배 피우는 것 때문에 내가 화난다.
이게 진실일까 100% 진실일까?
남편이 담배 피우는 것이 나를 괴롭게 한다는 게 100% 진실일까?
그게 아니더라는 겁니다.
그러면 남편이 담배 피우는 모든 보살님 들은 다 괴로워야 되잖아요.
그 다음에 딴 보살님들 보니까 남편이 담배를 그렇게 펴도 안 괴로워 하는 사람도 있더라는 거죠. 담배 사다 주는 보살님들도 있겠죠.
아 이거는 남편이 담배 피우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남편 담배 피우는 건 문제라고 생각하는 내 안에 의식이 문제 인 것이죠.
내 안의 식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죠. 그 남편 분 담배 끊으라고 노력을 해 봤느냐? 노력을 죽도록 해봤는데 안 된다.
죽도록 해봤는데 안 되면 방법이 마음을 바꾸는 게 가장 편한 방법이거든요.
그러니까 그 분이 어느 순간 ‘아 내 마음을 바꿈 되겠구나’
그래서 마음을 딱 바꿨더니 너무 신기 하더래요.
내가 남편이 담배 피러 나갈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고 그때마다 자식들이 내 눈치를 보고 집안의 긴장감이 딱 느껴지더라는 거죠.
그런데 내가 그것을 전혀 문제 삼지 않고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니까
집안 분위기 되게 좋아지고 남편 하고도 좋아지고 한편으로는 그 추운 겨울날 담배 피러 잠바 챙겨 있고 엘리베이터 타고 차가운 저 밖에 나가서 벌벌벌 떨면서 그게 얼마나 좋아서 쪼그리고 앉아 가지고 담배를 벌벌 떨면서 피는 남편이 안쓰럽고 불쌍해 보이기도 하고
야 어떤 어떤 어떤 놈들은 집에서 골방에 가서 창문 열어 놓고서 피고 그런다는데 베란다에서도 핀다는데 그래서 윗집 아랫집 다 피해를 주고 한다는데 야 내 남편은 참 착한 사람이었구나
내가 그 그 담배 피는 거 나쁘다 라는 그 한 생각 때문에 평생을 내가 시달려왔을 뿐 이었구나.
이와 같이 내가 평생토록 나를 괴롭히던 모든 것들이 사실 한 생각에서
내가 마음속에서 그려놓은 그림 이미지 그 한 생각에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내가 나를 구속할 뿐 세상은 나를 묶지 않습니다.
세상이 나를 묶을 수가 없어요.
자승자박 무승자박
포승 줄도 없는데 스스로를 묶었을 뿐입니다.
어떻게 헤어나올 수 있을까요?
스스로가 헤어나올 수 있을 뿐입니다.
저는 헤어나올 수 있는 모티브를 조금 조금씩 이렇게 끊임없이 드릴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나는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은 그리고 그 생각에 너무 고집해서 너무 화를 내는 사람은 방법이 없어요.
분명히 이 분의 이 생각이 문제라는 걸 짚어주면 발끈하고 화를 내요.
거기에서 어떤 경우 더 많이 화를 내면 내가 분명히 옳은 게 분명히 보일
때 저 사람이 틀리고 내가 잘한 게 분명 할 때 그땐 화를 냅니다
남편이 담배 피우면 전 사람 잘못이지 왜 나를 고치라고 하는 거냐 하고 발끈
하는 것이죠.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보면 좀 심하게 파격적인 말까지 하세요.
보살님이 남편이 바람 펴서 미치겠다 그러면
그 남편 바람 핀 남편을 뭐라고 안 하시고
보살님 마음을 바꾸든지 그 도저히 못 바꾸겠으면 이혼 하면 되지 간단한 걸 뭘 그리 힘들어하느냐? 이렇게 쿨하게 답변을 하세요
맞거든요.
죽어도 못 살겠음 헤어지면 되고 헤어지자니 그래도 남편이 돈도 벌어 오고 그래도 저 바람 피는 놈이라도 있어야 되겠다 하면 막 그땐 알아서 해라 하고 그냥 같이 살던지 해야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제 보살님들 사회에서 한때 법륜 스님은 본인도 남자라서 남자 편만 든다.
절에는 주로 보살님이 많이 오잖아요
그러니까 그 남자 편 드는 게 아니라 항상 불교는 본인의 얘기를 합니다.
저 놈 때문에 문제가 있어도 내가 그 사람 때문에 내가 힘든 거잖아요.
내 마음 힘든 거잖아요.
이 힘든 마음을 치유하는 것이지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닙니다.
내 마음을 바꾸는 것이지.
다 자기 세계 속에 살고 있어요.
이 세상 이라는 독자적인 실체적인 세상이 하나 있어서 우리는 그 세상에서 잘 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이 있다? 아닙니다
자기 개념으로 그려놓은 자기 이미지 속에서의 허망한 생각 허망한 세상에 살고 있어요. 자기 세계에. 세계 하나가 아닙니다.
다중우주. 무한한 우주.
무한한 우주 속에 무한한 세계 속에서 자기 세계가 분명한 진실이야 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죠
자기 세계가 진실일 거라고 굳게 믿고 있을 뿐입니다.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 100%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이게 100% 확신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인연따라 모였다 인연따라 흩어질 뿐이다.
여러분 혹시나 일요 법회 때 제가 혹은 이제 제일 기도나 이럴 때
제가 법회 법문 시간이 이제 조금 긴 길 수도 있는데 뭐 모르겠어요.
예전에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는데, 조금 길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냥 포기 하시면 편합니다
아 20분 만 했으면 좋겠는데
한 20분 만 했으면 딱 좋겠는데 이러지 마시고
다리를 좀 쭉 피셔도 괜찮아요.
다리 아프신 분 다리 좀 피셔도 저는 전혀 상관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공부하는 것에서
사실은 저는 아까도 축원 카드 읽으면서도 뭐 열심히 읽고 참 잘 읽긴 하지만
뒤에서 계속 한숨을 푹 쉬는 분들이 계시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제가 읽는 것보다도 저야 뭐 매 순간 있는 그게 그거에요.
있는 자리가 그 자리에요.
늘 그 순간에 있음 그만이거든요.
그런데 뒤에 앉아 계시는 분들이 참 힘들겠다는 생각도 들고 또 하나는 기도 의식 같은 것이 이게 기도 의식을 저는 뭐 그렇게 뭐 몇 시간씩 길게 하는 것이 ‘이게 법에 맞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아주 존경하는 큰 스님들이나 많은 스님들이 계시는 곳에서는 사시불공 죽비 세 번 딱 치고 삼배 하고 끝냅니다.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죠.
사시불공 이라는게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거잖아요, 사시 때. 부처님은 항상 열시부터 열두시 어간쯤 되면 탁발을 나와서 신도님들에게 밥을 받아서 돌아가셔서 공양을 하셨어요.
12시 전까지 공양을 마쳤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는 해시계가 있잖아요.
그래서 이 해시계가 12시를 딱 넘어올 때까지 끝내고 그 넘어가면 아예 못 먹어 안 먹었습니다. 밥을 그래 나중에 열반 이후에 ‘야 그래도 요 해시계가 요 손가락 한마디 넘어갈 때까지는 먹어도 되도록 해 주자’
이래가지고 계획을 바꿔오고 그런 논쟁 때문에 부파가 나뉘었거든요 예를 들면
그러니까 그 정도로 열두시 떙하면은 끝냈어요.
사시불공 뭐 1시 2시 3시까지 할 필요도 없을 뿐 아니라 그 불공 이라는 어원 자체가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거예요. 죽은 부처님이 와서 탁발 하는 것도 아니고 그 의식을 그때 당시 부처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그래도 내가 부처님 전에 공양 올리고 싶다 하는 마음으로 공양 올리는 그냥 그 의미를 되새기면서 내 안에도 나에게도 부처님이 오실 수 있도록 내가 부처가 될 수 있도록 하고 자꾸 발심을 다지는 그것을 하기 위해서 하는 게 불곰이고 기도 거든요. 근데 그 본래 목면에 온전 해야 되는데 지금은 불교가 완전히 뒤바뀌어서 사시때 기도만 하고 축원만 하고 법문을 안 하면 이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불법에 대해서 공부를 안하고 그냥 기도만 한다.
기도 백년 한다고 사십오년 오십년 한다고 내 인생이 확 뒤바뀝니까?
잘 안 뒤바껴요. 이건 기도한다고 상이 깨지지 않거든요.
약견재상비상 즉견여래가 안됩니다
그래서 참된 이 법당에 나오는 의미를 알아야 내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어요. 직접적으로 내 인생이 행복해 지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일이 우리의
목적이잖아요.
부처님을 공경하는 게 우리의 목적이 아닙니다.
내가 자유로와지는 거.
그래서 내 안에 부처님을 진정으로 공경하는 것 그게 우리의 목적이죠.
그래서 절은 그 어느 곳보다 편해야 되요, 사실은.
집보다 더 편한 데가 절이야 돼야 돼요.
절이 너무 거룩한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 절에서 너무 뭐 거룩하게 있지 마시고 도반들끼리 막 재잘재잘 대화도 하시고 기도할 때 딱 하시더라도 너무 막 거룩하고 엄숙하게 계시지 않아도 됩니다.
실제 법문 들을 때 다리 좀 피셔도 괜찮아요.
이거는 저부터도 그렇습니다.
저도 몇박몇일 모임에 가거나 수련회 가거나 안거에 가거나 하면요.
저도 허리가 아프고 이렇게 막 이래가지고
저부터도 예전에는 그래도 진짜 내가 그래도 수행 잘하는 사람처럼 보여야지 하는 상이 있어서 더 거룩하게 허리 꽂꽂하게 펴고 법문도 끝까지 듣고 이랬거든요.
그 허망한 생각이에요. 그 꼿꼿하게 앉아 가지고 오래 있으면 수행 잘하는 사람이고 이렇게 꾸부정하게 있으면 수행 못하는 사람 이라는건 내가 이미지가 만든 개념이고 생각이에요.
다리 피고 있으면 뭐 부처님께 불경이다? 부처님이 어디 있는데 불경 이에요?
자기 안에 부처님이 다 있는데.
그러나 이제 그렇다고 해서 예절을 뭐 다 깰 필요는 없으니까
부처님쪽을 향해서는 발을 안 피고 양 옆 쪽을 향해 핀다던지
요 정도의 뭐 그냥 가벼운 정도 수준의
이렇게 지켜준다면 뭐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하죠.
그래서 여러분들도 한번 늘 자기 자신을 비추어 봐서 내가 상에 빠져 있기 때문에 내 스스로를 얽어매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절대 아니다 라고 느끼지만
사실은 나는 절대 아니라고 느끼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보이죠.
그게 왜 보일까요?
지혜로운 부처님이라 보이는 거기도 하고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보입니다.
근데 그게 내일이 되면 절대 안 보입니다.
내일이 되면 안 보이는 거에요. 자기는 자기를 볼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고집을 하는 거에 집착을 하고 싸우는 거에요.
나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나는 옳아 하고 그렇게 싸우고 하는 거죠.
내 생각을 끝까지 쥐고 있는 것이죠.
자기는 안 보이니까 자기가 어디 빠져 집착했는지를 안보이니까
그래서 그것을 개괄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사실 선지식입니다.
그래서 큰스님들이
저희 은사 스님이 저희 제자들 아주 무섭게 가르치셨습니다.
막 뺨을 때리고 심지어 욕도 하시고 엄청 엄하게 하셨어요.
심지어는 법회 하다가 우리가 일부러 대답 못 하는 질문을 하셔 가지고
‘나와’ 그래 가지고 ‘그것도 모르냐?’
뺨을 신도님들 보는 앞에서도 때리기도 하셨어요.
그리고 우리 스님들 중에 그 약간 뭐랄까 이렇게 표현하면 죄송스럽지만 주리반특 같은 조금 힘들어 하는 분이 계셨어요.
그분에게는 아침에 공양 할 때 이야기 해줬던 아주 쉬운 거 너무 쉬운 얘기를 물어봐요.
그 분이 대답하니까 막 찬탄을 하면서 막 박수를 치면서 그 자리에서 용돈을 막 주시면서 박수 치라고 막 이러시고.
또 이제 내가 안다 내가 뭔가 좀 잘 안다는 상이 있는 사람에게는 아주 말 못할 만한 걸 물어봐서 막 뺨을 때리고 막 욕을 하고 혼을 내 주면서
그런 식으로 상을 깨 주셨던 것이죠.
지금 같으면 고발 들어갈 일인데.
제자들은 내가 이분에게 법을 공부하겠다는 확실한 마음을 가지고 오니까
나를 딱 낮추고 무엇이던 받겠습니다 하고 가니까 공부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전 그런데 저희 큰 스님한테 지금 대통령 했던 사람들 뭐 수많은 사람들이 뭐 저명한 분들이 찾아 왔어요.
그 분들에겐 그냥 일상적인 예를 지키시죠.
심지어 다른 스님들이나 다른 상좌 스님들이나 다른 신도들한테도 아주 깍듯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당신이 제자라고 생각하고 또 제자라고 나는 제자로써 모든 것을 받겠습니다 하고 오는 사람에게는 아주 엄하고 혹독하게 하시거든요.
그 말이 뭐냐 하면 그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내가 깨질 준비가 되지 않으면 절에 가서 배울 게 별로 없어요.
좋은 얘기만 듣고 싶어 하면 내가 깨지지 않는데 내가 어디에 묶여 있는지를 모르는데 어디에 묶여 있는 지를 알아서 딱 질러 주면 발끈하고 화부터 내거든요.
내가 그걸 지금까지 쥐고 있었고 그게 나라고 생각했는데 나를 깨뜨리니까 저 놈이 아주 미워 지는 것이죠.
그래서 사실은 너무 자비롭기 만한 스님들이 좋은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자비롭다가도 때로는 또 쳐줄 수 있어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사천왕상이나 절에 가면 자비로운 부처님의 모습도 있지만 우락부락한 모습도 금강역사나 이런 분도 함께 계시는 것이죠.
다양한 방편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러나 그런 방편까지 필요 없이 마음을 열고 있으면 가볍게 찔러도 저도 알겠습니다 하고 바로 깨닫는 사람들도 있는 거죠.
그래서 오늘 계속해서 제가 이제 집착에 대한 문제 이런 것들을 하는 그 본뜻 본 낙처가 어디 있는지를 이제 지속적으로 제가 짚어드리도록 할 것이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뭐랄까 참 본성에 조금 더 눈뜨게 되고 그래서 정말 참된 진실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묶여 왔던 것으로부터 조금조금씩 벗어날 수 있는 해탈을 해나갈 수 있는 그런 어떤 공부들을 우리가 이제 조금씩 꾸준히 하려고 합니다.
그 상을 깰 수 있는 경전 가운데 최상의 경전이 금강경입니다.
상을 타파하도록 이끄는 최상의 가르침.
조계종에서도 소위 경전 가장 중요한 경전이 금강경 반야심경이라고 하잖아요.
제가 금련사에 아마도 2년 있잖습니까.
거기서 금강경은 아마 이번 학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겁니다.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이 경전인 금강경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정말 옛날에 나 금강경 공부 다 했어요 하는 분들일 수록 들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금강경을 공부했다는
경전은 하나인데요. 내가 일년전 이년전 십년전에 공부하는 것과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나도 달라졌고 가르치는 사람도 다르고 반드시 다를 수밖에 없어요.
이거 한번 공부했다고 안 한다는 건 정말 어리석은 생각이에요.
깨닫기 전까진 계속 해야 되는 공부가 금강경입니다.
그리고 아주 놀라운 텍스트입니다.
정말 야 금강경의 내가 막 생각 없이 읽던 금강경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가르침이었나를 알게 되면 정말 놀라움을 금치 못하실 겁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이제 3월 6일부터 6월까지 아 4개월 동안 이렇게 매주 수요일날 2시부터 4시까지 강의를 이제 할 예정입니다.
첫댓글 감사히 잘 법문 읽었네요
정말 수고 하셨습니다,
생생하게 지금 여기서 법문을 듣는 듯 합니다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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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