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인(韓山人)
수부 원외랑(水部員外郞) 이선(李䆄)이 할아버지의 묘명(墓銘)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증(增)이고, 자는 가겸(可謙)이며, 호는 북애(北崖)이다. 가정(嘉靖) 을유년(1525, 중종20)에 태어나 25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였으며, 36세 때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보임되었다가 홍문관 정자에 제수되었다.
이력을 고찰해 보면, 육조에서는 호조ㆍ병조ㆍ형조ㆍ예조ㆍ이조의 낭관을 지냈고,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에서는 정자ㆍ박사ㆍ수찬ㆍ교리를 지냈으며, 헌부에서는 지평을 지내었고, 간원에서는 정언ㆍ헌납을 지냈다. 외임으로는 함경도 북평사(咸鏡道北評事)와 경기 도사(京畿都事)를 지냈다. 사명(使命)을 받든 것은 무진년(1568, 선조1)에 명나라 사신이 나올 때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으며, 경진년(1580, 선조13)에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경사(京師)에 갔다.
계유년(1573)에는 하루에 여섯 번이나 옮겨져 이조 정랑으로부터 검상ㆍ사인ㆍ집의ㆍ전한(典翰)ㆍ직제학을 거쳐 승지에 이르렀으며, 자급(資級)이 뛰어올라 통정대부가 되었다. 통정대부로 있을 때에는 내직으로는 병조ㆍ호조ㆍ형조의 참의와 판결사(判決事), 도승지를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황해ㆍ충청ㆍ전라ㆍ경상 네 도의 관찰사를 지냈는데, 경상도의 경우에는 병으로 인해 부임하지 못하였다.
을유년(1585)에는 자급이 뛰어올라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으며, 뒤에 또다시 가의대부(嘉義大夫)로 뛰어올랐다. 가선대부와 가의대부로 있을 때에는 형조ㆍ예조ㆍ이조의 참판, 한성부의 좌윤과 우윤, 부제학, 대사헌, 동지의금부사를 역임하였다.
기축년(1589)에는 간원(諫院)의 장으로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국문(鞫問)하는 데 참여하면서 평번(平反)하기를 힘썼으므로 사람들이 많이 칭송하였다. 경인년(1590)에는 공으로 인해 평난 공신(平難功臣) 3등에 책훈되었으며, 아천군(鵝川君)에 봉해졌다.
신묘년(1591) 겨울에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며, 자급이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뛰어올랐고, 나중에 또다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뛰어올랐다. 자헌대부와 정헌대부로 있을 때에는 형조ㆍ예조ㆍ공조의 판서, 의정부의 좌참찬과 우참찬을 역임하였다. 계사년(1593)에는 막 큰 난리를 겪어 나랏일이 새로 시작되었다, 이때 공은 예조 판서로 있었는데, 헌장(憲章)과 예의(禮儀)가 찬란하여 볼만한 것이 있었다.
경자년(1600) 10월에 졸하니, 춘추가 76세였다. 부음을 아뢰자 상께서 몹시 애도하면서 조회를 정지하였으며,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난리가 나기 이전에 시행하던 예장(禮葬)의 제도를 다시 쓰라고 명하고는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 아천부원군(鵝川府院君)을 추증하였다. 신축년(1601, 선조34) 2월에 광주(廣州) 돌마리(突馬里)에 장사 지냈는데, 선영이 있는 곳이다.
부인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신라(新羅)의 원훈(元勳)인 알평(謁平)의 후손으로, 사직(司直) 이몽원(李夢黿)의 딸이다. 시부모 섬기기를 효성으로써 하였으며, 친척들 대우하기를 은혜로써 하였다. 자손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엄하면서도 법도가 있었다. 공보다 13년 뒤인 임자년(1612, 광해군4)에 졸하니, 춘추가 82세였으며, 공의 묘 왼쪽에 부장(祔葬)하였다.
공은 사람됨이 정직하여 아부하지 않았다. 홍문관 정자로 있을 적에는 권간(權奸)의 뜻을 거슬렀다가 북막(北幕)으로 좌천되었다. 성품이 또 청렴하고 검소하여 가산(家産)을 일구지 않았다. 지위가 재신(宰臣)의 반열에 있었는데도 자신의 생활은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효우의 성품을 타고났으며 생일날에는 잔치를 베풀지 않았고 새로 난 먹을 것이 있으면 반드시 백씨(伯氏)인 전부공(典簿公
이원(李垣))이 먹은 다음에야 먹었다. 제매(弟妹) 가운데 궁핍한 자들은 모두 공에게 의지해 지냈다. 붕우들의 상을 당하면 반드시 소식(素食)을 하였는데, 늙어서도 그만두지 않았다.
공은 젊어서는 문명(文名)으로 자부하였으며, 과거에 급제하여 제수될 때에는 반드시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중국 사신이 오면 빈상(儐相)을 따라가 일을 보는 사람은, 당시에 문사(文士)들이 매우 많았는데도 모두 공을 적임자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이것으로 스스로 자랑하지 않았다. 세 차례나 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출사(出仕)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국자(國子)의 사유(師儒)는 얕은 학문을 가진 나와 같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하였는데, 식자들이 그 겸손한 태도를 훌륭하게 여겼다.
갑오년(1594, 선조27)에 동료 관원들이 무함을 당하였는데, 이를 구원하는 자들은 배척을 당하였으므로, 비록 마음속으로 그들의 원통함에 대해 아는 자라고 하더라도 두려워서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당시에 공의 아들 경함(慶涵)이 장령으로 있으면서 공에게 거취에 대해 묻자, 숨기지 말고 직언하라고 면려하여 화의 기미가 조금 멈추었다.임진왜란이 일어나기 6, 7년 전쯤에 왜적들의 형세가 아주 치성하였는데, 조헌(趙憲)이 상소를 올려 왜적들을 제압하는 방책을 진달하면서 성혼(成渾), 박순(朴淳), 홍성민(洪聖民), 이준민(李俊民)과 다른 몇몇 사람을 불러들여서 미리 계책을 강구하여 후환에 대비하기를 청하였는데, 공의 이름도 들어 있었으니, 한 시대에 중시되어 나라의 안위가 공의 몸에 매여 있음이 이와 같았다.
공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7대손이다. 아버지의 휘는 지숙(之菽)으로, 종묘서 영(宗廟署令)을 지냈으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의 휘는 질(秩)로, 한성군(韓城君)에 봉해졌다. 증조의 휘는 장윤(長潤)으로, 봉화 현감(奉化縣監)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고조의 휘는 우(堣)로 대사성을 지내고 참판에 추증되었다. 이상은 모두 공이 공신에 책봉됨으로 해서 추증된 것이다. 어머니는 선산 김씨(善山金氏)로, 진사 김필신(金弼臣)의 딸이다.
공은 5남 2녀를 두었다. 장남 경홍(慶洪)은 생원이고, 차남 경함(慶涵)은 참판이고, 삼남 경심(慶深)은 통제사(統制使)이고, 사남 경류(慶流)는 병조 좌랑이고, 오남 경황(慶滉)은 군수이다. 장녀는 판관(判官) 유인(柳訒)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현감 이계(李繼)에게 시집갔다.
경홍은 1남 3녀를 두었다. 아들 확(穫)은 현감이고, 장녀는 생원 박유부(朴由孚)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진사 송희득(宋希得)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좌윤 김수현(金守玄)에게 시집갔다. 경함은 자식이 없어서 동생인 경황의 아들 선(䆄)을 후사로 삼았다. 경심은 1녀를 두었는데, 부사(府使) 이지정(李志定)에게 시집갔다. 경류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제(穧)는 문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로 대구 부사(大丘府使)이며, 장녀는 별좌(別坐) 권영(權偀)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목사 김효성(金孝誠)에게 시집갔다. 경황은 3남 6녀를 두었는데, 장남 복(穙)은 유학(幼學)이고, 차남 선(䆄)은 문과에 급제하여 수부랑(水部郞)이고, 삼남 환(
)은 유학이며, 장녀는 진사 신대업(申大業)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생원 이시형(李時烱)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현감 유득증(兪得曾)에게 시집갔고, 사녀는 현령 안응창(安應昌)에게 시집갔고, 오녀는 유학 신유(申柔)에게 시집갔고, 육녀는 진사 조문형(趙文馨)에게 시집갔다. 내외의 증손과 현손은 모두 320여 명이니, 역시 성대하기도 하다. 그 가운데 드러난 자로는 대구 부사의 아들 정기(廷夔)가 장원(壯元)으로 발탁되어 현재 대사간으로 있다.
임진년의 왜란 때 대구 부사의 아버지인 좌랑공(佐郞公)이 순변사(巡邊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있던 중 상주(尙州)에서 전사하였다. 대가(大駕)가 마침내 서쪽으로 행행하게 되었을 때 백료들 가운데 뒤처진 자가 많았는데, 공은 말을 달리다가 고양(高陽)에 이르러서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서럽게 울다가 기절하였으므로 역시 뒤처지게 되었다. 이에 매번 뒤늦게 따라간 것을 한스러워 하였는데, 서쪽을 바라보면 반드시 통곡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가을 사이에 행재소(行在所)로 나아가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정기(廷夔)는 사로(仕路)에서 아주 현달하였는바, 어찌 하늘이 충렬이 있는 사람에게 이런 보답을 한 것이 아니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
목은공의 뒤를 이은 그 후예들은 / 牧隱之後
대를 이어 아름다운 명성 있었네 / 世有令名
칠대 후손 태어나게 될 때에 미쳐 / 逮于七葉
빼어나신 북애공이 태어났다네 / 北崖挺生
아름답고 아름답다 북애공이여 / 猗歟北崖
실로 나라 버티게 할 기둥이었네 / 實邦之楨
조정에서 아름다운 풍모 날리매 / 羽儀王廷
크게 이름 드러나고 영예로웠네 / 極顯極榮
세 차례나 사양하며 안 받았거니 / 三讓不受
그 직책은 대사성의 자리였다네 / 職大司成
사양함이 마음속서 우러났거니 / 讓出中心
주역 겸괘 그 울림을 잘 얻었다네 / 得謙之鳴
큰 시내를 건너기에 이로웠거니 / 利涉大川
그건 실로 겸손해서 누린 거였네 / 實惟謙享
수명 보면 칠십육 세 장수 누렸고 / 壽七十六
지위 보면 정경 자리 올라갔다네 / 位躋正卿
다섯 명의 헌헌장부 아들 뒀거니 / 子五丈夫
성대함은 비길 만한 사람이 없네 / 盛莫與京
많은 복을 받은 것이 아니었던가 / 不其多福
귀신 본디 가득한 걸 싫어한다네 / 鬼神害盈
돌마리의 마을 곁에 언덕 있거니 / 突馬之原
그곳 바로 공의 선영 있는 곳이네 / 是公先塋
내가 이에 신도비명 얽어 지어서 / 刻此墓碑
영원토록 그 명성을 드리우노라 / 永垂厥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