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바람 동래 온천] 노래 가사에도 있지만, 부산이라고 하면 제일 좋은 데가 송도, 그 다음이 동래였던 적이 있었다. 지금은 온천장 자체가 부산의 다른 곳에 비하여 많이 쇠락하였지만 한때는 주말이면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넘쳐 났던 곳이다. 1950년대 중반기에는 권번 소속 기생이 120명에 달하였고 숙박, 욕객의 수도 급증하였다. 온천장의 지명도가 점점 높아지자 온천장은 전국적인 관광지가 되었고, 1960년대에는 영도 대교와 함께 학생들의 수학여행 목적지가 되었다. 당시 학생들이 주로 이용한 관광 교통수단은 버스와 전차였다. 1960년대 당시 부산으로 수학여행을 왔던 이복성[61] 씨의 말을 들어 보자. “밀양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던 중에 6학년 봄에 수학여행을 가는데, 부산으로 가더라고. 제일 먼저 부산에 와서 영도 다리 드는 것을 봤지. 그 무거운 다리가 서서히 들리는데, 얼마나 신기하던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다음에 태종대에 갔어. 지금 영도 등대 있는 곳에 신선 바위가 있지? 거기서 내가 열두 살 때 사진 찍은 게 있어. 며칠 전에 그 자리에 50년 만에 다시 서 봤어. 그러고 영도에서 전차를 타고 마지막 종점 동래 온천에 갔지. 당시 동래 온천이 엄청 유명했거든. 부산에 다른 곳은 숙박할 곳이 마땅치 않았고 동래 온천은 별천지였어. 사람들이 넘쳐 나더라고. 동래 온천에서 하룻밤 자고, 그러고 다음 날 목욕하고 금강원에 놀러 갔다. 아마 그게 당시 일반적인 수학여행 코스였던 것 같아.” 어디 수학여행뿐이겠는가. 그런 이벤트뿐만 아니라 부산 사람들에게 온천장은 힘겨운 일상생활 속에서 한 번씩 콧바람을 넣을 수 있는 쉼터였다. 매일 금강원에 올라 가벼운 등산을 하고 하산 길에 동래 온천에 들어 목욕을 한 후 집으로 돌아가는 심재홍 어르신은, 온천장에 관해 묻는 필자에게「부산 행진곡」 3절을 들려주신다. “‘봄바람 동래 온천, 여름 한철 송도요~ ’, 이 노래 아나? 동래 온천은 노래 가사에 나올 정도로 유명했어. 요즘 사람들은 알란가 몰라.” 올해 76세인 심재홍 어르신은 16세 때부터 우장춘 박사한테 농업 교육을 받기 위하여 동래 온천에 다녔다. 그때나 지금이나 강서구 쪽에서 살고 있지만 그 먼 곳에서 아직도 매일같이 온천장을 찾고 있다. 어르신은 온천장의 흥망성쇠를 직접 온몸으로 체험한 장본인이자, 온천장의 쇠락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하는 부산 시민이었다. 옛날 전차가 다닐 때는 전차 종점에서부터 금강 공원에 올라가려고 줄을 서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