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노가(樂老歌)
심완 박전상환
1. 初章
서릿발 세월이다
그 또한 즐거워라
2. 中章
누구도 늙을 老 字
피해 갈 수 없다더니
3. 終章
참으로 꽃과 같구나
머리 위의 흰 백발
ㅡ 마음그릇 心椀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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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로가(嘆老歌)에 답(答)하다.
마음그릇 心椀 박 찬
탄로가(嘆老歌)는
최초의 우리말(한글)
시조(時調)이다.
우리나라
현대시조(時調)의 원류(源流)이며
시절가조(時節歌調)에 근본(根本) 뿌리이다.
탄로가(嘆老歌) 또는
백발가(白髮歌)라고도
부르며
세월에
조금씩 백발이 되어 인생의 늙어감을 안타까워 하는
탄로가(嘆老歌)는
전체
모두 3수로 구성되어 있으며
늙음을 한탄하는 주제를 담고 있다.
지은이(作者)
역동(易東)
우탁(禹倬1263 ~1342) 선생은
고려(충렬왕-충선왕) 후기시대(後期時代)의
문인(文人)이요, 문신이며 정치가이다
역동 우탁(易東 禹倬) 선생은
주자(朱子)의 저서인
주자대전을 직접 필사(筆寫)하여
성리학(聖理學)을
고려에 소개, 전파했던
해동 18현(海東十八賢)
안향(安珦 원래 이름 안유 安裕)
즉,
고려국 문하시중 등을 지냈던
대유학자 안향(安珦)의 제자이며,
퇴계(退溪)
이황(李滉1502-1571)선생이
백세(百世)의 스승(師)이라고 흠모하던 고려말 성리학자로서
고려(高麗)의
충선왕의 패륜을 극간하다가 왕(王)의 진노(眞怒)를 받아서
경상도
예안(현 안동단양)에 낙향하여
은거(隱居)하면서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며
중국에서
새로 들어온 성리학(性理學)
(12세기에 남송의 주희(朱熹)가 집대성한 유교의 주류 학파로서
성리학의 어원은 주희가 주창한
성즉리(性卽理)를 축약한 명칭,
집대성한 주자(주희)의 이름을 따서 주자학(朱子學)이라고 한다.)
즉, 주자학을 연구하다 보니
어느덧 백발이 되어
인생(人生)의 늙어감을
탄식하고 안타까워하며
읊은 시조(時調)로
역사적,
문학적 사료로서도
그 가치를 감히 산정할 수 없는
매우 귀중한 작품이다.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단양 사인암(丹陽舍人巖)에 있는
최초의 한글 시조(時調)
탄로가(嘆老歌) 비문(碑文)
전체를 옮겨 적어보면
"
탄로가(嘆老歌)
우탁(禹倬) 지음
제 1수. 백발가
한 손에 막대기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렷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제 2수. 춘산에 눈녹인 바람
춘산에 눈 녹인 바람
문득 불고 간데 없다
잠간만 빌어다가
머리 위 불게하고 싶구나
귀 뒤에 해묶은 서리
녹여 볼까 하노라.
제 3수. 늙지 않으려고
늙지를 않으려고
다시 젊어 하였더니
청춘이 날 속이고
백발이 거의로다
이따금 꽃밭 지날 때
죄지은 듯 하여라.
"
_ 전문_
"
한 손에 가시를 들고
또 한 손에 막대 들고
”
로 시작되는 작품은
자연적으로
찾아오는 늙음을
인위적으로 막아보려는
인간의 솔직한 감정을
처절하게 노래하였고,
“
춘산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데 없다.
”
로 시작되는 작품은
자연의 힘을 빌려
인간의 삶을 변화시켜보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봄바람이
눈 덮인 산을 녹이 듯
자연의 위대한 힘을 빌려
인간에게
찾아오는 백발을
없애보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다.
“
늙지를 말으려고
다시 젊어 보려터니
”
로 시작되는 작품은
늙지 않고
젊어보려는 욕구에도
불구하고
찾아드는 백발은
어쩌지 못하고 젊은 여인을 탐하는
자신의 인간적 욕구를
“
이따금
꽃밭을 지날 때면
죄지은 듯 하여라.
” 라고
솔직히 고백함으로써
죄책감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있다.
늙음을 가져오는
자연의 질서에 맞서보려는
안간힘과 죄책감이
인간미를
담뿍 담아 더 해 주어
살아있는 듯
생생한 삶이 묻어나는
절창의 시조(時調)이다.
위에서도 언급 했듯이
이 시조(時調)는
최초의 우리말 시절가조로서
사람들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전해 내려 오다가
한글이 반포 된 1446년
후대 100년 이상 지난 뒤에
문자로 기록되었다.
역동 우탁(易東 禹倬) 선생은
1308년
(충선왕 즉위년) 조정의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고
충선왕이
부왕(父王)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와
통간하자
백의(白衣) 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극간언을 하였다.
이 것이 그 유명한
《지부상소(持斧上疏)》이다.
고려와 조선시대
왕권(王權)을 견제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에 하나가
상소(上疏)였기에
도끼(斧)를 지니고(持)
임금이 계신 대궐(闕)에 들어가
꿇어 엎드려(伏)
상소(上疏)를
올린다는 뜻으로
전체적 명칭은
[ 지부복궐상소(持斧伏闕上疏) ]이다.
즉, 상소를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도끼로
머리를 쳐 달라는 각오로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上疏)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순수 우리말 한글 창제본
원문을 첨부하여 올려 드린다.
탄로가(嘆老歌) 한글본
우탁(禹倬1263 ~1342) 지음
제 1수. 한 손에 가시 돌고
한 손에 가시를 들고
또 한 손에 막대 들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白髮 막대로 치랴터니
白髮이 제 몬져 알고
즈럼길로 오더라.
출처: 악학습영 해동가요(일석본)
제 2수. 춘산에 눈 노긴 바람
春山에 눈 노긴 바람
건 듯 불고 간 대 업다
져근듯 비러다가
불리고쟈 마리 우희
귀 밋테 해 무근 서리를
노겨 불가 하노라.
출처: 악학습영 청구영원(진본)
제 3수. 늙지 말려이고
늙지를 말려이고
다시 져머 보려타니
靑春이 날 소기고
白髮이 거의로다
잇다감 곳밧찰 지날 제면
罪 지은 듯 하여라.
출처: 악학습영악부(서울대 본)
지은이(作者)
우탁(禹倬1263 ~1342)은
호 역동(易東)이며
단양 우(禹)氏 고려의 문신이며
정치가 학자이다.
원종~충혜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하다 물러나 예안에 돌아가
글(學)을 벗하였다.
뒤에
성균관 제주(祭主)가 되어
성리학을 후진들에게
가르쳤다.
대유학자(大儒學者)
안향(安珦)의 제자이며
주자학(朱子學)에 정통하여
퇴계가 백세(百世)의 스승으로
부르며 안동 역동서원을
건립하여 흠모하였다.
역동서원(易東書院)은
대원군 때 철폐되었다가 최근
안동대학교내에 복원되었다.
충청북도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에는
역동 우탁(易東 禹倬) 사당이 있다.
우탁 선생은
1308년(忠宣王 즉위) 조정의
감찰규정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고려 충선왕이
충열왕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와
밀통하자
흰옷에 도끼를 들고
거적을 메고 대궐에 입궐하여
상소(上疏)를 하니
측근 신하(臣下)가
상소문(上疏文)을 펴들고도
감히 읽지 못하니
우탁(禹倬)이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
경(卿)은 그 죄(罪)를 아느냐 ?
"
하고 말하니
대신들이
어쩔줄 모르고 말문도 못열고
충선왕(王)도 부끄러워하는
얼굴 빛이 있었다고 한다.
그 뒤 관직에서 물러나
예안(지금의 안동 단양 부근)에
은거하며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학문을 닦았다고 전한다.
역동 우탁(易東 禹倬) 선생은
경사(敬史)에 정통하고
역학(易學) 견해(見解)가 깊으니
정주학(程朱學)
즉 성리학(聖理學 朱子學)이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나
이 것을 아는 사람이 없자
한달 동안 문을 닫고 연구하여
이를 해득하고 후진을 가르치니,
성리학(性理學)이
비로소 행(行)하게 되었다.
이 어려운
성리학을 해득(解得)하여
우탁(易東 禹倬) 선생께서
정리하게 되자
중국에 여러 학자들이
중국의 易이 이제는 東으로
가게 되었다하여
후세에 사람들이
우탁(禹倬) 선생을
역동(易東)선생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시아문(如是我聞)
나는 이와 같이
보고 듣고 배웠다.
- 終 -
경상북도 포항 구룡포
별빛총총한
깊고 깊은 산골 초가삼간두옥
묵우당(墨友堂 글벗터)에서
마음그릇 心椀 박 찬
(박전 상환)
두손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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