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한 출판사에서 「친구」란 뜻의 정의를 가장 잘 표현한 사람에게 상금을 주기로 하고 공모를 했습니다. 수 천 통의 응모엽서가 도착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1차로 몇 작품이 선정되었습니다.
「기쁨은 곱해 주고 고통은 나누어주는 사람」, 「우리의 침묵을 이해하는 사람」, 「온 세상이 다 내 곁을 떠났을 때, 나를 찾아오는 사람」. 1등은 역시 맨 마지막 작품이었다고 합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그렇게 노래합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리 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도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만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순간 구명대 서로 양보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진정으로 그런 친구, 영원한 친구를 가지셨습니까?
지난주에 인터넷 사이트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이 아내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병원에 가보니까 벌써 수술 중이었습니다.
자정이 조금 넘어서 의사가 수술을 마치고 나와 말합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최선을 다했으나 돌아가셨습니다."
이 분은 수술실로 들어가 부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고 맥없이 나왔습니다.
갑자기 마음이 허전해지면서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하려고 구내 공중전화 박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수첩을 폈습니다. 수첩을 펴 보니 전화할 수 있는 친구들의 이름이 5장에 걸쳐 반듯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모두 93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어디에 전화를 해야 할지 다이얼을 돌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밤에 "내 아내가 죽었으니 와서 나를 좀 위로해 주게"라고 말할 친구가 93명의 명단 중에서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수첩만 뒤적이다가 전화 한 통 하지 못하고 마음에 큰 충격을 받고 전화박스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지나온 삶에 대해서 엄청난 실망감이 밀려왔습니다.
" 가장 어려운 순간에 전화할 친구 하나 없으니.... 이제까지 무엇하고 살았나?
내가 정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가장 어렵고 힘든 그 순간에 전화 할 수 있는 친구,마음을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습니까?
언제 어디서나 나를 이해하고 내 편이 되어줄 수 있는 그런 진정한 친구가 있습니까?
데이빗 리스만이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내 주위에 사람들은 많지만 정작 '나의 위로자'는 없다는 말입니다.
실질적으로 한 조사에 의하면 가장 사교적인 사람이 가장 외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수첩에 연락할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친구는 없습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만남도 많아지고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더욱 더 많아지는데.....
왜 사람들은 고독해집니까?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데.... 왜 만남의 깊이는 없습니까?
자칭 의로운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마음을 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가장 큰 이유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특히 이민의 삶은 더욱 더 그렇습니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서로들 마음의 문을 꼭 닫고 삽니다. 마음을 열어야 서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인생에 공백이 생기지 않습니다. 삶의 보람이 있습니다. 삶의 풍성함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고독하게 살아가는 한 인생이 나옵니다.
8절 말씀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아무도 없이 홀로 있으나 수고하기를 마지아니하며 부를 눈에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도..."
이 구절에 나오는 '어떤 사람'은 수고하고 열심히 부를 추구하지만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고 아무도 없는 고독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가 왜 그렇게 고독한 존재가 되었는지 바로 그 이유가 8절 하반부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위하여 수고하고 내 심령으로 낙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고 하나니..."
이 말을 보면 이 사람은 자신만을 위해서 일하지 주위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수고하지 않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사람이 고독하게 됩니까? 자신만을 위해 수고하고 자기의 목적만을 위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남을 위해 수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을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은 아무리 그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그는 고독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의 삶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헛된 삶이라고 말합니다.
본인은 부인할지 모릅니다. 나는 친구도 많고 아는 사람도 많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 많은 것이지 진정한 친구가 많은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헛된 삶이 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수많은 군중 속에서 고독한 존재가 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9-11절 말씀에는 친구관계를 맺는 세 가지 방법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1) 활동에 기초하는 친구관계입니다.
9절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저희가 수고함으로'라고 합니다. 같이 활동하면서 친구관계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같이 운동하고, 같이 배우고, 같이 함께 하면 즐겁고 좋은 열매가 생깁니다.
그러나 같이 활동할 때에는 친구이지만, 활동이 끝나면 관계도 끝납니다.
2) 도움에 기초한 친구관계입니다.
한 차원 높은 단계의 친구관계를 맺는 방법으로 10절이 그 말씀입니다.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이 관계는 넘어지면 붙들어 일으키고 서로 도와주는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보다 깊습니다. 그러나 이 관계도 든든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도움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돕다가 그 도움이 점차 짜증으로 변하는 관계가 얼마나 많습니까?
3) 헌신에 기초한 친구관계입니다.
11절에 그 관계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두 사람이 함께 눕는 관계, 정말 깊은 관계의 우정입니다.
내가 따뜻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함께 하는 사람!
이러한 헌신에 기초한 인간관계를 하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를 얻습니다.
인도의 성자 썬다싱의 전도 일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네팔 전도를 위해 친구와 함께 눈보라가 치는 혹독한 추위의 히말라야산맥을 넘고 있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눈보라 속에서 한 사람이 쓰러져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친구는 그냥 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썬다싱은 어떻게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그냥 가냐고 그렇게 옥신각신하다가 친구는 먼저 가고 썬다싱은 얼어죽어 가는 사람을 등에 업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쯤 가다보니까 앞서 간 친구가 얼어죽어 있는 것입니다.
죽어 가는 사람을 업고 몸부림치며 가면서 그의 온몸은 따뜻한 열기가 흘러나와 그 두 사람 모두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반드시 패하고, 반드시 헛된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무 바쁘게 목표를 위해서만 살지 마십시오.
옆 사람을 배려하고 생각하는 데에도 시간을 써야 합니다.
위로하고 격려하며 손잡아 주는데 소용되는 시간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닙니다.
이웃도 없이 빨리 달려가는 사람을 향해서 성경은 헛되다 말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바빠도 두 가지 시간만은 기본적으로 빼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 앞에 나오는 시간,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교회 안에서 한분 한분을 그냥 스쳐 지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처음 오신 분이라 할지라도 교회 내에서는 절대 고독한 군중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배만 드리고 가는 교인으로 지내지 마십시오.
기쁨을 곱하고 슬픔을 나누는 성도의 교제(코이노니아)가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이름을 알면 이름을 불러 주고,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어 의미 있게 만져 주고, 서로 기도하고, 서로 관심을 기울여 주면서 시간을 내어 헌신해야 합니다.
그 사실을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에서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끊어지지 않느니라."
참으로 이상한 구절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한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단결하면 산다"라고 하지 않고, 왜 갑자기 "삼겹줄은 끊어지지 않느니라"라고 말했을까요?
여기 "삼겹줄은 끊어지지 않느니라"는 말은 두 사람 사이에 견고한 하나의 줄이 더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관계는 쉽게 끊어지지 않는 견고한 관계가 된다는 말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그 하나의 줄.....?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 그 하나의 줄입니다. 그러나 물질은 결코 사람 관계를 견고하게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떤 사람은 자녀가 그 하나의 줄입니다.
사랑스런 자녀 때문에 서로의 관계가 견고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관계에서 삼각관계는 항상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많습니다.
둘 사이를 맺어주는 가장 위대한 또 하나의 줄....?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성령께서 이어주시는 줄입니다.
둘이 믿음으로 하나되고 그 사이에 성령의 줄, 삼겹줄의 은총이 함께 할 때 둘 사이의 관계는 가장 견고한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1920년대 후반 윔블던과 전 미국 오픈 시합, 프랑스 오픈 시합 등에서 우승을 했습니다. 주요 단식경기에서 일곱 차례의 우승을 했습니다. 그가 '르네 라코스트'라는 테니스 선수입니다.
친구들은 그를 '악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코트에서 그의 집요한 경기 태도를 적절하게 표현한 별명이었습니다. 라코스트는 친구들이 붙여준 이 별명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테니스복 상의에 작은 악어 무늬를 수놓아 입었습니다. 이 무늬가 큰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무늬의 의미를 모른 체 '악어 셔츠'를 입습니다.
그러나 라코스트의 친구들은 다릅니다. 누군가가 입고있는 셔츠에 붙은 작은 악어를 보면 '난 저 무늬의 내막을 알고 있지. 라코스트는 내 친구야'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는 "그리스도는 나의 친구"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구주"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든지 십자가를 볼 때마다 이는 갈보리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물과 피를 흘려주신 나의 친구 "예수 그리스도야" 그렇게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15장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라"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곧 그분과의 친구가 되는 비결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떠나도 그분만은 저와 여러분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분을 만나면 기쁨은 곱해지고 또 곱해집니다. 고통과 슬픔은 사라집니다. 모든 염려 근심이 떠나갑니다.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연약한데도 '불구하고'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해 줄 영원한 친구, 그 친구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찬송가 97장
사랑하는 나의 친구 늘 가까이 계시도다 그의 사랑 놀랍도다 변함없는 나의 친구
위에 계신 나의 친구 그의 사랑 지극하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나의 구주 나의 친구
사랑하는 나의 친구 늘 가까이 계시도다
그의 사랑 놀랍도다 변함없는 나의 친구
출처: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