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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유배문학 이행(李荇) 선생의 칠언율시 10首의 구성과 문학적 특징>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앞서 소개한 바가 있듯,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9~1534) 선생은 조선 전기 훈구파 문인들을 대표하는 뛰어난 문장가이자 문형(대제학)을 지낸 인물이다. 1504년 갑자사화 등으로 인해 거제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약170 여편(각종산문 포함)의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선생은 연산 10년(1504)에 일어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유배 길에 올라 2여 년 동안 충주와 함안 배소를 거쳐 29세이던 음력 1506년 2월부터 1506년 9월9일까지 거제도 상문동에서 약 7개월간 귀양 살다가, 이후 중종반정으로 해배 복권되어 의령의 별장 집을 거쳐 한양으로 올라갔다. 거제도 유배작품은 그의 문집 『용재집(容齋集)』 제6권과 제7권 「해도록(海島錄)」을 통해 전하고 있다. 이번 지면에는 그의 거제도 유배문학 중에 칠언율시(七言律詩) 10편을 소개하고 또 선생의 칠언율시 구성 양상과 문학적 특징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먼저 (1) ‘칠언율시(七言律詩)의 구성 양상(시상 전개와 형식)’에 대해 살펴보겠다. 이행의 칠언율시는 전통적인 기-승-전-결(起-承-轉-結)의 4단 구성과 대구(對句)의 미학을 엄격하게 지키면서도, 유배객의 복잡한 내면을 입체적으로 담아냈다. [수련(1~2구)]에선, 유배지의 환경과 시상의 시작기이다. 배경이 되는 계절감이나 날씨(「대풍」, 「비 온 뒤」), 혹은 벗이 보내온 시(「차직경~」)를 제시하며 시상을 일으켰다. 자신이 처한 고립된 섬(거제도)의 시공간적 황량함이 주로 전반부에 배치되었다. [함련(3~4구)]에선, 묘사와 대구(對句)의 심화가 이루어졌다. 율시의 규칙에 따라 철저한 대구를 이루었다. 자연풍경(시냇가, 비 갠 후의 모습 등)을 세밀하게 묘사하면서도, 그 속에 자신의 쓸쓸한 처지를 투영했다. 시각적·청각적 이미지가 긴밀하게 결합하는 단계다. [경련(5~6구)]에선, 정서의 반전과 심화(轉折期)과정이다. 외부 풍경 묘사에서 내면의 고독과 사색으로 시상이 크게 전환된다. 특히 「10일의 일을 적다」와 같은 진퇴체(進退體)나 운자가 교차하는 형식을 활용하여, 단조로울 수 있는 유배지 일상에 음악적 변주와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멀리 있는 벗(직경, 공석 등)에 대한 그리움이 극대화되는 구간이다. [미련(7~8구)]에선, 안분지족(安分知足)과 여운을 담아내었다. 현실의 고통을 술로 달래거나(「15일, 자백~ 소요동회음」), 자연의 섭리를 수용하며 시상을 마무리했다. 임금과 조정에 대한 그리움(연군지정)을 직접 표출하기보다는, 홀로 시를 읊조리거나(「溪上獨詠」) 무심하게 시를 짓는(「謾成」) 태도를 통해 담담하지만 깊은 여운을 남겼다.
두 번째로 (2) 이행의 거제유배문학 ‘칠언율시의 문학적 특징’에 대해 알아보겠다. 이행의 거제도 유배시, 특히 칠언율시 10편에서 도출되는 핵심 문학적 특징은 크게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① 화답(和韻)을 통한 문학적 연대와 고독의 극복이다. 동 시공간인 거제도에서 귀양살이 하던 20 여명의 유배자와 교류하며 문학적 연대를 이루었다. 작품 중 「차직경~」, 「직경 공석 차여선운~ 복화지」 등은 유배지에서도 끊임없이 유배객 벗들(홍언필 등)과 시를 주고받았음을 보여준다. 차운(次韻)과 화운(和韻)은 단순한 글자 맞추기가 아니라, 고립된 섬이라는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지식인 동료들과 정신적 유대감을 유지하려는 필사의 노력이었다. 둘째 ② '즉사(卽事)'와 '만성(謾成)'을 통한 시에서 알 수 있듯, 일상이 문화예술이었다. 「즉사(卽事)」(눈앞의 일을 바로 적음), 「대풍(大風)」(큰 바람), 「우후(雨後)」(비 온 뒤), 「만성(謾成)」(아무렇게나 지음) 등의 제목이 보여주듯, 유배지의 평범한 자연 현상과 일상적인 사소한 사건들을 놓치지 않고 시적 소재로 포착했다. 격렬한 정치적 분노를 터뜨리기보다는, 바람이 불고 비가 개고 시냇가를 거니는 일상적 행위를 통해 감정을 절제하고 객관화하는 격조 높은 문학성을 보여준다. 셋째③ 고도의 격식미와 문학적 기교(진퇴체와 운목 활용)로 문학을 격조 높게 완성했다. 이행은 해동의 문장가답게 한시의 형식을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10일의 일을 적다」에 쓰인 진퇴체(進退體)는 인접한 운목(韻目)을 번갈아 사용하는 고난도의 시체(詩體)다. 또한 '先' 운이나 '虞' 운 등 특정 운자를 엄격하게 구사하며 화답하는 과정을 통해, 유배라는 한계 상황 속에서도 지적 유희와 문학적 완성도를 포기하지 않는 선비 정신을 드러냈다. 넷째④ 소요(逍遙)와 동락(同樂)을 통한 초연한 태도다. 「15일... 소요동에서 모여 술을 마시다」에서 보듯, 유배지에서 만난 동료 혹은 현지 인물들과 함께 자연(소요동)을 찾아 풍류를 즐기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는 절망적인 유배 생활에 매몰되지 않고, 현실을 초연하게 바라보며 자연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는 도학자적(道學者的)이자, 문인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이행 선생의 거제도 유배 칠언율시는 철저한 형식미(대구, 진퇴체, 화운)를 바탕으로 유배지의 고독과 자연을 담아낸 유배문학의 정수다. 그는 거제도의 거친 바람과 비를 내면의 성찰 계기로 삼았으며, 벗들과의 끊임없는 시적 대화를 통해 절망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 ‘진퇴체[進退體]’란? 율시(律詩)에서 운자(韻字)를 쓰는 격식 가운데 하나로, 한 수의 시에서 두 개의 비슷한 운자를 압운(押韻)으로 하여 격구(隔句)마다 운자를 전환하는 시체(詩體)를 말한다. 이번 지면의 칠언율시(七言律詩) 10편 중에 ⑨번째 「10일의 일을 적다(十日書事)」는 진퇴체(進退體)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용재 이행 선생이 거제도 유배 시절 지은 「10일의 일을 적다(十日書事)」는 한시 형식 중에서도 고난도 기교에 속하는 ‘진퇴체(進退體)’ 형식을 빌려 유배지의 가을 풍경과 내면의 약속을 담아낸 명작이다. 가을날, 이행 선생이 유배지 처소 주변인 수청담(袖淸潭) 가의 우거진 잡목을 베어내어 풍경을 틔운 뒤, 벗들과의 약속을 기다리며 지은 시다.
⇨진퇴체(進退體)의 구체적인 표현 기법과 묘미에 대해 알아보자.
첫째① 「10일의 일을 적다(十日書事)」의 가장 큰 형식적 특징은 진퇴체다. 원래 칠언율시는 2, 4, 6, 8구의 마지막 글자(운자)를 같은 운목(운자의 그룹)에서만 골라 써야 하는 엄격한 규칙이 있다. 하지만 진퇴체는 서로 이웃한 두 개의 운목을 ‘한 걸음 나아갔다(進) 한 걸음 물러섰다(退)’ 하듯이 교차하여 사용하는 변칙적인 시체다. 이 시의 압운자인 花(화), 何(하), 斜(사), 過(과), 遮(차)를 보면, 평성 ‘가(歌)’와 마(麻)’ 계열의 인접한 운들을 절묘하게 교차시켜 한시 특유의 음악적 리듬감을 유지하면서도 지적이고 참신한 긴장감을 부여했다. 둘째② 수련과 함련에서 시공간의 대비와 자연의 객관화를 시도했다. [수련(1~2구)]에선, '봄의 진달래(躑躅花)'와 '가을의 단풍(丹楓)'을 대비시켰다. 봄철 급작스럽게 유배길에 오르느라 봄꽃을 즐기지 못했던 마음을 "부끄럽고 미안하다(愧負)"라고 표현한 뒤, 가을 단풍을 맞이하는 설렘과 쓸쓸함을 교차시켰다. [함련(3~4구)]에선, 움직이는 물고기(游魚)와 고요한 못의 중심(潭心靜), 푸른 절벽(蒼壁)과 비껴 내리는 역동적인 빗줄기(雨脚斜)가 완벽한 대구(對句)를 이룬다. 유배객의 복잡한 심경을 자연의 정(靜)과 동(動)으로 객관화하여 세밀하게 묘사한 대목이다. 셋째③ 경련과 미련에서 일상의 행위와 내면의 확장을 연결했다. [경련(5~6구)]에선, 외로운 유배지에서 벗(故人)이 찾아오겠다는 약속은 삶의 유일한 구원이자 최고의 '좋은 일(勝事)'이다. 인간적인 그리움과 문학적 연대의 기대감이 잘 드러난다. [미련(7~8구)]에선, 아침에 처소 주변의 무성한 푸른 나무들을 베어내어 숲의 빛깔을 줄였다(減却靑林色)는 실제 일상의 행위가 나온다. 나무를 치우자 그동안 가려져 보이지 않던 '구름 밖의 폭포(雲外懸流, 운문폭포)'가 가림 없이(不受遮) 시원하게 쏟아지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는 단순히 시야가 넓어진 것을 넘어, 유배라는 물리적 억압과 고독의 장막을 걷어내고 대자연 및 벗과의 정신적 소통을 이루겠다는 호방하고 초연한 내면의 확장을 상징하는 뛰어난 유의(寓意)적 기법이다.
결국 이행 선생의 「十日書事」는 진퇴체라는 격식 높은 기교를 통해 한시의 형식미를 극대화하는 동시에, 주변의 잡목을 베어내어 숨어있던 폭포를 찾아내는 일상적 경험을 고독한 유배 생활의 극복과 정신적 해방감으로 연결한 격조 높은 작품이다. 이행 선생은 이 시 외에도 거제도의 세찬 바람을 노래한 「대풍(大風)」이나 벗들과 시를 주고받은 화운시(和韻詩)들을 남겼다.
● 다음은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9~1534)의 칠언율시(七言律詩) 10편 ①「직경(直卿)이 매화를 읊어서 준 시에 차운하다(次直卿詠梅見贈韻)」, ②‘先’ 운목의 「즉사(卽事) 1.」, ③「시냇가에서 홀로 시를 읊다(溪上獨詠)」, ④「대풍(大風)」, ⑤「직경(直卿)과 공석(公碩)이 나의 ‘선(船, 先)’ 자 운(韻) 시에 차작(次作)하여 보여 주기에 다시 화운(和韻)하다(直卿 公碩 次余船韻見示 復和之)」, ⑥「비 온 뒤(雨後)」, ⑦‘虞’ 운목의 「즉사(卽事) 2.」, ⑧「아무렇게나 짓다(謾成)」, ⑨「10일의 일을 적다.(十日書事) 진퇴체(進退體)」, ⑩「15일, 자백(子伯), 자진(子眞), 공석(公碩), 대요(大曜), 군미(君美), 공좌(公佐)와 더불어 소요동(逍遙洞)에서 모여 술을 마시다 시를 짓다(十五日 與子伯 子眞 公碩 大曜 君美 公佐 逍遙洞會飮 有作)」 등을 차례대로 소개하겠다.
1) 다음 칠언율시(七言律詩) 「직경(直卿)이 매화를 읊어서 준 시에 차운하다(次直卿詠梅見贈韻)」는 조선전기 문신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의 작품으로, 『용재집(容齋集) 제6권(卷之六) 해도록(海島錄)』에 수록되어 있다. 저자 이행(李荇)이 그의 벗인 '직경(直卿, 홍언충)'의 매화 시에 화답(次韻)하여 지은 시다. 이 시는 단순한 자연 예찬을 넘어, 정치적 시련(유배) 속에서도 선비로서의 지조를 잃지 않으려는 의지와 벗과의 깊은 우정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의 저자 이행은 연산군~중종 대의 격동기를 거치며 2차례나 유배 생활을 겪었다. 시 끝의 자조(自註, 스스로 단 주석)에서 "양 치는 일(牧羊之役)을 맡아 고절령(高絶嶺) 아래로 가려던 참"이라고 한 것은, 신분이 낮아져 양을 치는 임무를 맡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 동시에 '유배지로 쫓겨 가고 있는 처지'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직경(直卿)이 매화를 읊어서 준 시에 차운하다(次直卿詠梅見贈韻)」/ 이행(李荇)
淸晨剝啄洪崖書 새벽에 문 두드리는 소리 홍애의 편지로고
忽喜春風生古屋 낡은 이 집에 봄바람이 일어 홀연 기쁘구나.
八行淡墨意甚苦 여덟 줄 시 몹시 고심해 지은 것이니
一夜梅兄寃已雪 한 밤에 매형은 이미 원통함이 풀렸으니.
梅兄定自非俗韻 매형은 그야말로 속된 운치가 아니고말고
君詩更有塵外格 그대 시는 다시금 티끌 벗어난 풍격 있구나.
他日相期拍肩笑 훗날 서로 만나 어깨 치며 웃길 기약노니
我今往作金華客 나는 지금 금화객이 되러 가는 몸이라네.
-내가 양 치는 일을 새로 맡아서 고절령(高絶嶺) 아래로 가려던 참이었기에 이렇게 말하였다(余新定牧羊之役 方赴高絶嶺下 故云)-
[주1] 직경(直卿) : 조선조 문신인 홍언충(洪彦忠)의 자(字)이다.
[주2] 홍애(洪崖) : 상고의 신선인 홍애 선생(洪崖先生)을 가리키는데, 그가 연단(煉丹)하여 도를 얻은 산의 이름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홍언충이 홍씨(洪氏)이므로 끌어다 차용한 것이다.
[주3] 금화객(金華客) : 황초평(黃初平)은 단계(丹溪) 사람으로 15살에 양을 치다가 도사(道士)를 따라 금화산(金華山) 석실(石室)로 가서 수도(修道)하였다. 그 후 40년 만에 그 형 초기(初起)가 수소문 끝에 그를 찾아가 만났더니 양은 보이지 않고 흰 돌들만 있었다. 초평이 “양들은 일어나라.”고 소리치자, 흰 돌들이 모두 수만 마리의 양으로 변했다.
○ 내용인즉, 이 시는 겉으로는 '매화'를 매개로 한 시의 주고받음을 노래하고 있지만, 내면에는 선비들의 끈끈한 유대감이 깔려 있다. 정치적 처벌을 받아 거제도의 험난한 고개(고절령) 밑으로 쫓겨 가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이행은 좌절하기보다 벗이 보내준 격조 높은 시를 읽으며 위안을 얻는다. 세상의 때(塵)가 묻지 않은 매화처럼, 자신들도 비록 현실에서는 쫓겨 가는 신세일지언정 정신만큼은 훼손되지 않는 고결한 선비의 풍격(塵外格)을 유지하겠다는 의지가 돋보이는 명작이다.
내용 중, ‘매형(梅兄)'은 매화를 인격화하여 높여 부른 말이다. 매화는 추위를 뚫고 가장 먼저 피는 고결한 꽃이지만 흔히 세상의 오해를 받거나 외롭게 피어난다. 직경이 시를 통해 매화의 고결함을 완벽하게 알아주었기에, 매화의 원통함과 서글픔이 오늘 밤에 다 풀렸다고 극찬한 것이다. 동시에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자신들의 처지를 매화에 투사한 것이기도 하다. 매화 자체가 본래 속세의 티끌이 묻지 않은 고고한 존재인데, 그대가 지은 시는 한술 더 떠서 속세를 초탈한 격조(塵外格)를 지니고 있다고 찬사를 보낸다. 벗의 문학적 식견과 지조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2) 다음 ‘先’ 운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 「즉사(卽事)」는 조선전기 문신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의 작품으로, 『용재집(容齋集) 제6권(卷之六) 해도록(海島錄)』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자신의 처참한 유배 생활의 고통과 인간적인 고뇌, 그리고 회한을 처절하면서도 담담하게 그려낸 명시다. 여기서 ‘즉사(卽事)’란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나 그때그때 일어나는 감흥을 즉흥적으로 읊은 시라는 뜻이다. 격동의 시대 속에서 거제도까지 유배와서 온갖 풍파를 겪었던 작가의 쓸쓸한 노년과 심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행은 연산군 대에 갑자사화로 충주, 함안, 거제도 등에 유배되었고, 중종 대에도 기묘사화 이후 정계의 풍파 속에서 좌천과 유배를 갔다가 배소에서 사망했던 인물이다.
**「즉사(卽事)」** /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9~1534)
茅茨四面僅如船 작은 띳집 넓이가 기껏해야 거룻배만 하고
枳棘重圍不見天 가시울을 겹겹이 둘러 하늘도 안 뵈어라.
淡坐漸知春晝永 담담히 앉았으니 봄 낮이 긴 줄 점차 알겠고
乾愁更惜物華遷 무단한 시름에 경물이 바뀌는 게 안타까워라.
十年多難功名薄 십 년 동안 다사다난 속 공명은 보잘것없고
白首離群疾病纏 백발로 외로이 지내매 질병만 몸에 얽혔어라.
挾筴讀書終底用 책을 끼고 공부한들 마침내 무슨 소용이람
世間岐路劇茫然 세간의 갈림길은 아득하여 알 수 없는 것을.
○ 내용인즉, 이 시는 화려한 수식이나 은유 대신, 가시나무 울타리에 갇힌 늙고 병든 죄인의 처지를 가감 없이 정직하게 서술했다. 선비로서의 고고한 지조를 노래하기보다는, 좁은 방 안에서 느끼는 지루함, 늙어감에 대한 서글픔, 그리고 "내가 왜 평생 공부를 했을까"라는 근원적인 실존적 회의를 드러냈다. 그렇기에 시대를 뛰어넘어 인간적인 연민과 깊은 울림을 주는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3) 다음 ‘魚’ 운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 「시냇가에서 홀로 시를 읊다(溪上獨詠)」는 조선전기 문신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의 작품으로, 『용재집(容齋集) 제6권(卷之六) 해도록(海島錄)』에 수록되어 있다. 저자 이행(李荇)이 지은 이 작품은 앞서 감상하신 유배 시들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명시다. 정치적 풍파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 은거하며 깨달은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자세와 유유자적한 심경, 그리고 인생의 부귀영화에 대한 초탈함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앞선 시 「즉사」에서 좁은 유배지에 갇혀 "책을 읽어 무엇하랴"라며 한탄하던 모습과 달리, 여기서는 대자연 속에서 완벽한 자유와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귀양살이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도 세상의 집착을 내려놓은 선비가 도달한 정신적 해탈의 경지를 잘 보여준다.
**「시냇가에서 홀로 시를 읊다(溪上獨詠)」 / 이행(李荇 1478~1534)
飮有淸泉食有蔬 맑은 샘물을 마시고 나물 뜯어 먹으니
洞門重鎖是仙居 동문이 겹겹이 닫혀 신선이 사는 곳일세.
古松障日何妨偃 늙은 솔이 해 가리니 구불텅한들 어떠리
細草如氈不遣鋤 가는 풀 융단과 같아 김을 매지 않노라.
獨嗅石蒲兼賞竹 홀로 돌창포 냄새 맡고 대를 완상하고
靜聽山鳥更觀魚 고요히 산새 소리 듣고 물고기 구경한다.
百年得失眞兒戱 인생 백 년 득실은 참으로 아이 장난
一笑悠悠莫問渠 유유히 한 번 웃을 뿐 물어 무엇하리요.
○ 내용인즉, 이 시는 이행이 평생 동안 겪었던 격렬한 사화와 고초 끝에 이 도달한 정신적 평온함의 절정을 보여준다. 가시울타리에 갇혀 괴로워하던 처지를 지나, 이제는 스스로 세상과의 문을 닫고(重鎖) 소나무, 풀, 새, 물고기를 벗 삼아 지낸다. 세상의 잣대로 보면 은거이자 좌절일 수 있지만, 작가는 이를 '신선의 삶'으로 승화시켰다. 과거의 상처를 '한 번의 유유한 웃음(一笑悠悠)'으로 털어버리는 대문장가의 연륜과 기상이 깊은 감동을 준다. 결국 지난날의 고통과 세상의 시시비비를 호탕하게 날려 보낸다. 그 아등바등했던 삶을 생각하며 그저 유유하게 한바탕 “허허 웃어넘길 뿐(一笑悠悠)”, 지나간 일이나 세상 돌아가는 이치(渠)에 대해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겠다며 담대하게 시를 마무리했다.
4) 다음 ‘尤’ 운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 「대풍(大風)」은 조선전기 문신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의 작품으로, 『용재집(容齋集) 제6권(卷之六) 해도록(海島錄)』에 수록되어 있다. 대문장가 이행(李荇)이 지은 「대풍(大風)」은 몰아치는 거센 바람을 마주하며 느낀 처절한 현실과 이를 압도하는 호탕한 기상(호연지기)을 장엄하게 그려낸 한시다. 이 시는 작가가 거제도 등 남해안 변방의 유배지에 갇혀 있을 때 지은 것이다. 몰아치는 대풍(폭풍우) 속에서 느낀 육체적 고통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 밖으로 날아오르려는 대문장가의 면모가 돋보인다.
⇨이 시는 중국 당나라의 대시인 두보(杜甫)가 지은 명시 「모옥위추풍소파가(茅屋爲秋風所破歌, 가을 바람에 띠집 지붕이 날아가다)」를 연상시킨다. 지붕이 날아가 별이 보이는 극한의 고난 속에서도 이행은 나약하게 눈물 흘리지 않는다. 오히려 몰아치는 폭풍을 '생황 소리'로 승화시키고, 뚫린 지붕으로 보이는 밤하늘을 보며 '구주 밖을 유람하는 거대한 상상'으로 나아간다. 현실의 고통이 깊을수록 그것을 이겨내려는 선비의 정신적 스케일은 더욱 웅장해짐을 증명하는 명작이다.
**「대풍(大風)」** / 이행(李荇 1478~1534)
茫茫炎海浸坤陬 대지 한쪽에 자리한 망망한 남쪽 바다
日夜盲風不少休 밤낮으로 사나운 바람 잠시도 쉬지 않누나.
天地無根應覆却 천지도 뿌리가 없으면 응당 뒤집히련만
鴟鳶挾勢迭飄浮 솔개는 기세 타고 번갈아 공중에 뜨도다.
門前席破鳴笙籟 문 앞에 거적자리 찢어져 생황 소리 울리고
屋上茅飛見斗牛 지붕 위 띠풀이 날려 별이 다 보이는구나.
安得雲帆高萬丈 어찌하면 만 길이나 높은 구름 돛을 달고
九州之外作奇遊 구주 밖을 두루 다니며 기이한 유람할거나.
[주1] 맹풍(盲風) : 풍력(風力) 계급 5의 바람. 10분간의 평균 풍속이 초속 8.0~10.7미터(m)이며, 잎이 무성한 작은 나무가 흔들리고, 바다에서는 작은 물결이 인다.
[주2] 구주(九州) : 조선 땅. 통일신라 시대에, 전국을 나눈 9개의 주(州). 상주(尙州), 양주(良州), 강주(康州), 웅주(熊州), 전주(全州), 무주(武州), 한주(漢州), 삭주(朔州), 명주(溟州)를 이른다.
5) 다음 ‘先’ 운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 「직경공석 차여선운견시 부화지(直卿 公碩 次余船韻見示 復和之)」는 조선전기 문신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의 작품으로, 『용재집(容齋集) 제6권(卷之六) 해도록(海島錄)』에 수록되어 있다. 저자 이행(李荇)이 지은 이 시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유배 생활에 대한 탄식과 운명에 대한 순응, 그리고 세월의 무상함과 서글픔을 처절하면서도 절제된 어조로 노래한 한시다. 제목의 '직경(直卿, 홍언충)'과 '공석(公碩, 김세필)'은 이행과 평생을 함께하며 문학적·정치적 동반자가 되어주었던 소중한 벗들이다. 벗들이 자신의 시에 답시(차작)를 보내오자, 그들의 우정에 감동하여 다시 한번 운자를 맞추어(화운) 자신의 속마음을 고백한 시다.
⇨ 결국 이 시는 일전에 보셨던 폭풍우 속의 기상을 노래한 「대풍(大風)」이나 해탈의 경지를 노래한 「계상독영(溪上獨詠)」과 달리, 인간 이행이 가진 가장 약하고 솔직한 내면의 슬픔을 꺼내 보인 작품이다. 자신의 삶을 '바람에 흔들리는 돛단배'로 규정하고, 겹쳐오는 유배 생활 속에서 늙어가는 처지를 벗들에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눈물은 단순한 나약함이 아니라, 자신을 알아주는 유일한 존재인 '직경'과 '공석'이라는 벗들이 있기에 비로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던 깊은 우정의 반증이기도 하다.
**「직경(直卿)과 공석(公碩)이 나의 ‘선(船, 先)’ 자 운(韻) 시에 차작(次作)하여 보여 주기에 다시 화운(和韻)하다(直卿 公碩 次余船韻見示 復和之)」 / 이행(李荇)
生涯眞箇使風船 생애는 참으로 바람을 받은 돛단배
漂泊非人自有天 표류하는 건 사람 뜻 아니라 하늘 뜻,
往日靑衫無一補 지난날 벼슬길에선 하나도 도움 없고
秖今炎海已三遷 지금은 남쪽 바다에 세 번 귀양 왔도다.
朝廷未必憎魑魅 조정이 두억시니 꼭 미워하진 않으리니
造物庸知解糾纏 조물주가 규전을 풀어 줄 지 어이 알랴.
更恐悠悠時易失 하염없는 세월 쉬 흘러갈까 걱정하노니
白雲廻首獨潸然 흰 구름에 고개 돌리고 홀로 눈물 흘린다.
[주1] 조정이 …… 않으리니 : 순(舜) 임금이 사흉(四凶)을 유배시켜 사방의 변방으로 보내어 두억시니[魑魅]를 막게 하였다 했다. 여기서는 조정이 두억시니를 미워해서 그를 막으라고 용재를 계속 변방에 두지는 않으리란 것으로, 귀양에서 풀려날 수도 있음을 뜻한다.
[주2] 규전(糾纏) : 두 가닥 노끈이 뒤얽혀 밧줄을 이루는 것으로, 화(禍)와 복(福)이 서로 의지하여 생겨나는 것을 비유하였다.
[주3] 염해이삼천(炎海已三遷) : 이행이 연산군 대부터 중종 대에 이르기까지 남쪽 바다(거제도, 진도 등)로 세 번이나 유배(좌천)를 다니는 극심한 정치적 시련을 겪었다. 이 시는 바로 그 험난한 유배의 여정 속에서, 멀리 있는 벗들과 시를 주고받으며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돌아보는 참담한 심경이 담겨 있다.
6) 다음 ‘庚’ 운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 「비 온 뒤(雨後)」는 조선전기 문신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의 작품으로, 『용재집(容齋集) 제6권(卷之六) 해도록(海島錄)』에 수록되어 있다. 저자 이행(李荇)의 한시 이 시는 비가 개인 직후 펼쳐지는 자연의 생동감 넘치는 풍경과, 그 속에서 느끼는 시인의 복잡한 심경 및 귀거래(歸去來)의 염원을 담은 작품이다.
**「비 온 뒤(雨後)」** / 이행(李荇)
前山雨罷半邊明 비 갠 앞산 반쪽이 밝아 지팡이 끌고
曳杖閑吟信步行 한가히 시 읊으며 발길 닿는 대로 걷는다.
鼈脚經春成老硬 자라 다리는 봄 지나매 늙어서 굳었고
猫頭出地鬪崢嶸 고양이 머리는 땅에 솟아 다투어 뾰족해라.
木梢語鳥渾相惱 가지 끝에 지저귀는 새는 나를 심란케 하고
池面遊魚不更驚 지당 수면에 노는 물고기는 놀라지 않누나.
三徑只今無恙否 내 집 정원은 지금도 탈없이 잘 있는지
白頭歸去要尋盟 백발로 그곳에 돌아가 뜻대로 은거하리라.
[주1] 자라 다리 : 자라는 걸음이 몹시 느리다 하여 파별(跛鼈)이라 불린다.
[주2] 고양이 머리 : 묘두죽(猫頭竹)이란 대나무의 일종으로, 모죽(毛竹)이라고도 불린다. 여기서는 죽순이 비 온 뒤 땅에서 솟는 모습을 형용하였다.
○ 내용인즉, 비 온 뒤 자연의 생동감과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고 싶은 마음(귀거래의 염원)을 노래했다. 선경후정(先景後情)의 구조가 뚜렷하다. 앞부분(1~6구)에서는 비 개인 날의 역동적인 자연 풍경(산, 죽순, 새, 물고기)을 시각적·청각적으로 묘사하고, 뒷부분(7~8구)에서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은거를 다짐하는 시인의 주관적 정서를 표출했다. 또한 죽순이 돋아나는 모습을 '고양이 머리가 땅에서 솟아 다투어 뾰족하다'고 표현하는 등, 자연의 변화를 생생하고 개성 있는 비유로 포착했다. 게다가 새소리에 심란해하는 모습은 시인이 당시 처했던 정치적 현실이나 유배 생활 등의 답답한 심경을 암시한다. 시인은 이 복잡한 마음을 '고향으로의 귀환'이라는 결심을 통해 해소하고자 했다. 고로 이 시는 단순히 비 온 뒤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계절과 자연의 변화 속에서 인생을 돌아보며 결국은 자연의 품(고향)으로 돌아가 평온을 얻고자 하는 사대부의 전형적인 은일(隱逸) 사상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7) 다음 ‘虞’ 운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 「즉사(卽事)」는 조선전기 문신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의 작품으로, 『용재집(容齋集) 제6권(卷之六) 해도록(海島錄)』에 수록되어 있다. 이행(李荇)의 「즉사(卽事)」는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유배된 상황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느끼는 여유와 노년의 한가로움, 그리고 도를 닦는 마음(유유자적)을 노래한 작품이다. '즉사(卽事)'라는 제목은 '눈앞에 보이는 일이나 경치를 즉흥적으로 읊음'이라는 뜻이다.
○ 내용인즉. 자연 속에서 느끼는 한가로움(유유자적)과 노년의 소박한 삶, 그리고 일상에서의 깨달음을 그렸다. 비바람 치는 자연을 '수묵화'로, 산을 '푸른 병풍'으로 표현하여 회화적 미감이 뛰어나고, 또 외적인 풍경(1~2구)에서 시작해 술과 시(3~4구), 늙어가는 자신(5~6구)을 거쳐, 마침내 일상 자체가 도(道)라는 정신적 경지(7~8구)로 시상이 심화되었다. 정치적 풍파를 겪었던 조선 중기의 문신 이행은 이 시를 통해 세상의 번잡함을 벗어던진 선비의 가장 이상적인 정신세계, 즉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모든 것을 얻는(무위)' 평온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즉사(卽事)」** / 이행(李荇)
群山遠近翠屛紆 원근의 산들 푸른 병풍 두른 듯,
風雨眞成水墨圖 비바람에 진정 수묵화 이루었구나.
濁酒熟時看造化 탁주가 익을 때에 조화를 보고
新詩妙處憶吾徒 새 시가 묘한 곳에서 내 벗 생각한다.
頭童叵耐羊冠側 머리털이 없으매 양관이 기울어지고
脚軟還須竹杖扶 다리가 약해 죽장을 짚어야만 되네.
盡日逍遙無一事 진종일 소요할 뿐 아무런 일이 없어
只今眠食亦工夫 지금은 잠자고 밥 먹는 것도 공부라오.
[주1] 잠자고 …… 공부라오(眠食亦工夫) : 마음이 한가하여 아무런 잡념이 없어, 잠자고 먹을 때에도 진심(眞心)을 보존한다는 뜻에서 이렇게 말한 듯하다.
8) 다음 ‘支’ 운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 「아무렇게나 짓다(謾成)」는 조선전기 문신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의 작품으로, 『용재집(容齋集) 제6권(卷之六) 해도록(海島錄)』에 수록되어 있다. 이번 한시 「만성(謾成)」은 제목 그대로 '부질없이. 또는 아무렇게나 손길 가는 대로 짓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앞서 보신 「즉사(卽事)」가 자연 속의 평온함과 도를 닦는 마음에 집중했다면, 이 시는 유배지나 타향의 아름다운 경치 속에서도 문득 솟구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유배 생활 속의 향수와 외로움을 깊이 있게 담아낸 작품이다.
**「아무렇게나 짓다(謾成)」**/ 이행(李荇)
小洞眞成嘯詠宜 작은 골짜기 참으로 시 읊기에 좋은데
故人更乞竹亭資 벗님이 다시금 정자 지을 대나무 보냈어라.
靑山遮作東西障 청산은 둘러쳐져 동서로 장막을 이루고
流水潛通上下池 유수는 가만히 상하의 못으로 통하는구나.
迎雨遊魚爭出縮 비를 맞아 노는 물고기 다투어 들쭉날쭉
避風飛鳥自斜欹 바람 피해서 나는 새는 절로 기우뚱하여라.
異鄕信美非吾樂 타향이 진정 아름다워도 나는 즐겁지 않아
滄海何時見有涯 저 푸른 바다는 언제나 그 끝이 보일는지.
○ 내용인즉, 아름다운 타향(유배지)의 경치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향수)을 묘사했다. 특히 선경후정(先景後情)으로 구성했다. 앞부분(1~6구)에서는 아늑한 골짜기, 물고기, 새 등 아름다운 자연 경치를 먼저 보여주고, 뒷부분(7~8구)에서 시인의 쓸쓸한 속마음을 반전처럼 드러낸다. 경치가 아름다울수록 시인의 외로움은 더욱 대비되어 강조된다. 벗의 호의와 자연의 생동감(물고기, 새)은 활기차지만, 정작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내면은 '끝없는 바다'처럼 막막하고 고독하다. 제목 ‘만성(謾成)’과 달리, 철저한 대구와 감정의 대비를 통해 유배객의 쓸쓸한 심사를 극대화한 명작이다. 특히 결구에서, 아무리 이곳이 아름다워도 내 고향이 아니기에 진정으로 즐거울 수가 없다. 끝없는 푸른 바다를 기한 없는 유배생활로 대비하여 귀양살이 막막함과 고향(또는 임금님이 계신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절망감을 바다에 투사하여 표현하였다.
9) 다음 ‘麻’와 ‘歌’자를 통운한 칠언율시(七言律詩) 「10일의 일을 적다.(十日書事) 진퇴체(進退體)」는 조선전기 문신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의 작품으로, 『용재집(容齋集) 제6권(卷之六) 해도록(海島錄)』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가을날 벗들과의 약속을 앞두고, 정성이 담긴 준비를 하며 자연을 감상하는 설렘과 기대를 노래한 작품이다. 제목의 '십일서사(十日書事)'는 미래 10일, 눈앞의 일을 적었다는 뜻이며, '진퇴체(進退體)'는 한시의 운자(韻字)를 배치할 때 앞의 구절과 뒤의 구절에서 운을 맞추는 독특한 격식을 활용했다는 의미다. 시인이 직접 적은 주석(수청담 가의 수풀을 베어내어, 4일 뒤인 14일에 모여 놀기로 한 약속을 준비함)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시의 정취를 더욱 깊게 느낄 수 있다.
**「10일의 일을 적다.(十日書事) 진퇴체(進退體)」* / 이행(李荇)
愧負春風躑躅花 춘풍에 진달래 져버려 부끄러웠는데
丹楓更奈九秋何 구월이라 고운 단풍을 또 어이할거나.
游魚得計潭心靜 노는 물고기 활기차고 못 중심 고요하며
蒼壁無蹤雨脚斜 푸른 절벽 자취 없고 빗줄기는 비꼈어라.
勝事從前難屢挹 좋은 일은 예로부터 자주 갖기 어려운데
故人有約許重過 벗님이 다시 찾아오겠다고 언약하였다오.
今朝減却靑林色 오늘 아침에 숲의 푸른빛을 줄였더니
雲外懸流不受遮 구름 밖 걸린 폭포 가리어지지 않구나.
이날 수청담(袖淸潭) 가의 우거진 초목을 베어 내었으니, 이는 4일에 모여 놀기로 한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이다(是日 刪薈蔚于神淸潭之上 欲成四日之約也)
[주1] 춘풍(春風)에 …… 어이할거나 : 봄에 진달래가 한창 피었을 때 꽃구경을 하지 못했고, 이제 가을이 되어 단풍 구경을 해야겠는데 여의치 않다는 것이다.
○ 내용인즉, 가을 단풍과 폭포의 아름다운 경치 감상, 그리고 벗을 맞이하는 설렘과 기대감을 그렸다. 단순히 자연을 감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찾아올 벗들을 위해 아침 일찍 수풀을 치우는 시인의 다정하고 정성 어린 면모가 돋보인다. 또한 무성했던 숲을 걷어내자 가려져 있던 거대한 폭포가 눈앞에 확 나타나는 마지막 구절의 묘사는 읽는 이에게도 시원한 해방감과 통쾌함을 선사한다. 이 시는 앞서 감상하신 외롭고 쓸쓸했던 「만성(謾成)」이나, 늙음을 담담히 수용하던 「즉사(卽事)」와 달리 자연을 적극적으로 가꾸고 향유하려는 활기찬 태도와 벗을 향한 살가운 정이 가득 묻어나는 따뜻한 작품이다.
10) 다음 ‘東’ 운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 「15일 여자백 자진 공석 대요 군미 공좌 소요동회음유작(十五日 與子伯 子眞 公碩 大曜 君美 公佐 逍遙洞會飮 有作)」은 조선전기 문신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의 작품으로, 『용재집(容齋集) 제7권(卷之七) 해도록(海島錄)』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음력 9월 15일, 시인이 유배지인 거제시 상문동 소요동에서 마음 맞는 여섯 명의 벗(총 7명)과 만나 세상의 시름을 잊고 호쾌하게 술을 마시며 즐긴 밤을 노래한 시다. 직전 시 「10일의 일을 적다(十日書事)」에서 수풀을 베어내며 애타게 기다리던 '벗들과의 약속'이 드디어 이루어진 날의 풍경이자, 그 결정판이라고 볼 수 있다.
**「15일, 자백(子伯), 자진(子眞), 공석(公碩), 대요(大曜), 군미(君美), 공좌(公佐)와 더불어 소요동(逍遙洞)에서 모여 술을 마시다 시를 짓다(十五日 與子伯 子眞 公碩 大曜 君美 公佐 逍遙洞會飮 有作)」** / 이행(李荇 1478~1534)
河朔先賢有古風 하삭의 선현들은 고풍이 있었나니
逍遙今復七人同 오늘 또 소요하며 일곱 사람 모였어라.
小塘影澈涵山翠 작은 못 그림자 맑아 푸른 산빛 적시고
老木陰疏漏日紅 늙은 나무 그늘 성글어 붉은 햇살 새누나.
痛飮狂歌酬歲晩 통음하며 광가를 불러 세모에 답하노니
白頭靑眼信途窮 백발로 청안의 만남 처지야 곤궁하건말건.
莫虞夜徑歸無火 밤길 돌아갈 제 불 없다 걱정일랑 마시라
海月如輪欲上東 수레바퀴 같은 달이 바다 동쪽에 떠오르리.
[주1] 하삭(河朔)의 …… 있었나니 : 여름에 피서하면서 술을 마시는 흥취를 뜻한다. 삼국 시대 위(魏)나라 광록대부(光祿大夫) 유송(劉松)이 원소(袁紹)의 군대를 진압하러 가서 원소의 자제들과 삼복(三伏) 더위에 밤낮으로 술을 마셔서 흠뻑 취했던 데서 유래한다.
○ 내용인즉, 가을밤 소요동에서 벗들과 나누는 호쾌한 술자리와 변치 않는 우정, 그리고 처지를 초월한 풍류가 주제이다. 극적인 대비와 흐름과 호탕한 영웅적 기개가 특징이다. 고요하고 맑은 소요동의 낮(3~4구)에서 시작해, 뜨겁고 격정적인 통음과 광가(5~6구)를 거쳐, 밤하늘을 환하게 비추는 거대한 달(7~8구)로 이어지는 시간적·감정적 흐름이 매우 자연스럽고 극적이다. 자신의 처지가 곤궁함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굴하지 않고 둥근 달을 등불 삼아 호령하는 조선 선비 특유의 대범함과 멋이 잘 살아있다. 이행의 여러 시를 관통하는 '벗에 대한 그리움'이 마침내 해소되어 가장 환하고 열정적으로 터져 나온 거제도 유배 시기의 대표적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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