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체육복을 읽는 아침 13. 그대 이름은 장미 240627
“쌤! 제 이름이 뭐게요?”
적게는 수십 대 일에서, 많게는 수백 대 일의 관계를 맺는 학교에서 만나는 참 곤란한 미션 중 하나는 아이들의 이름을 외우는 일이다. 아이들이 복도를 지나다 마주치는 안면이 있는 선생님에게 던지는 이런 질문은 기본적으로 ‘선생님의 눈에 들고 싶다, 인간적으로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겠지만, 내게는 교사에게 치명적인 ‘안면 인식 장애’라는 질환―이라고 쓰고 핑계라고 읽는다.―이 있으므로 대처하기 무척 난감한 질문이다. 사실 학생이든 성인이든 처음 만나는 사람 앞에서 수줍음이 굉장히 많아서 말을 좀 더듬는 습관이 있는데 익숙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하면, 학교 축제 때마다 무대에 올라가서 노래 부르는 인간인 주제에 이상한 코스프레하지 말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이기 때문에 그냥 ‘안면 인식 장애’라고 해 버리는 것이 설명을 구구절절 안 해도 돼서 편하다. 아무튼, 이것은 대답하기에 따라서 아이들과 나와 관계를 단숨에 친밀하게 만들거나 혹은 아주 어색한 관계로 만들 수 있는 극단적인 질문이다.
“몰라, 말 안 해줄 거야.”
라고 말하면 진짜 모르는데 모른다고 말하기는 부끄럽다는 뜻.
“에이~ 그럼 당연히 알지. 너 3학년 1반이잖아.”
라고 말하면 수업 시간에 언뜻 본 것 같긴 한데 아이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는 뜻.
“너 지난 시간에 쌤한테 질문했었잖아.”
라고 말하면 이제 슬슬 관계를 맺어가는 단계.
“야, 지혜야. 섭섭하게 뭐 그런 걸 물어봐?”
라고 대답하면 현장 채점 만점. 물론 그 뒤로 특별한 대화가 이어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자기 존재에 대한 인정과, 믿을만한 성인과의 유대관계를 확인했으므로 다른 말은 굳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요즘은 개인정보 보호와 범죄 예방을 위해서 학생들의 겉옷에 명찰을 달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더구나 코로나가 유행한 이후에는 마스크를 써서 얼굴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얼굴과 이름을 연결하는 게 훨씬 어렵다. 그래서 아이들의 이름을 외고 부르는 것은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일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일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교사가 수십, 수백 명의 학생 가운데 그 한 명의 이름을 정확히 부르는 일은 단순한 명사 하나를 기억해 내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유일한 ‘자기’라는 존재를 세계가 인식하고 있다는 무척 효과적인 증명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교사에게 있어서도 학생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는 일은 내 마음의 한켠에 그의 방을 내어준다는 뜻이고, 그 입주자를 위해서 수업에서도, 만남에서도, 대화에서도 집주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하는 일인 것이다.
존재를 인정해 주었다면, 학급 안에서 담임 교사는 다양한 방법으로 그의 자존감과 역할 기대를 높여줄 수 있다. 이른바 ‘1인 1역할’이다. 10년쯤 전엔 이걸 하시는 분도, 하지 않으시는 분도 계셨지만, 학교생활기록부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기도 했거니와 학생의 다양한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에 요즘은 거의 모든 담임 선생님들이 이를 저마다의 방법으로 개성 있게 활용하고 계시다. 반장, 부반장을 시작으로 학급비를 관리하는 총무, 게시판 담당, 칠판 담당과 같은 식으로 자신만의 일거리를 맡김으로써 학급의 일원이라는 소속감과 책임감을 심어주는 순기능도 있다.
나도 별 고민 없이 종례가 끝난 교실 안을 둘러보며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 일감을 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학급 전원이 응시했던 한 자격증 시험 결과가 발표되는 날이었다. 그 자격증이라는 것이 취득한 사람에게는 자신이 가진 여러 가지 자격증 중의 하나가 되지만, 취득에 실패한 사람에게는 시험의 실패, 경쟁에서의 뒤처짐, 자존감의 하락이라는 복합적인 타격으로 다가온다. 종례가 끝난 뒤 자격증을 딴 친구들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기숙사로 올라갔지만 그렇지 못한 친구 몇은 교실에 남아 심란한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얌마! 자격증 시험은 앞으로도 계속 있는데 뭐 그렇게 기가 죽어 있어!”
“쌤…… 이래서 저 취업할 수 있을까요. 친구들은 거의 다 땄는데 ……”
“참 내. 자격증이 그거 하나 뿐이겠니? 에잇 기분이다. 쌤이 자격증 하나씩 발급해 줄게!”
“엥? 어떻게요?”
“넌, 친구들 얘길 잘 들어주고 고민 상담도 잘해주니까 음 ……‘경청지도사’. 어떠냐?”
“나 참. 그게 말이 됩니까 쌤.”
“1인 1 역할 정하는데 그것도 자격증을 딱 발급해 가지고 어? 충실하게 자기 역할 하면 어? 생기부에다가도 있는 그대로 쓰고. 그러면 뭔가 되게 전문성 있어 보이지 않냐? 자격증 개수도 늘어난 것 같고.”
“눈 가리고 아웅이지만 자꾸 쌤 얘길 들으면 이상하게 맞는 말 같단 말이에요.”
“그래. 생각하기 나름 아니냐. 혹시 알아? 나중에 니가 지원하는 기업에서 남의 말 잘 들어주는 사람을 뽑으려고 하는데 이 생기부 가지고 이력서를 딱 내면!”
“오!!!”
“결국 성적이 더 중요하겠지만 말이야.”
“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이름들. 교실 자리 추첨 기능인. 학급 비품 관리실장. 청소구역 확인 감독. 빌 게이츠(정보기기 관리). 서기장(학급 서기). 가정통신문 수거 자격증. 자격증 일정 관리사. 주간지 및 신문관리국장. 칠판 세정사. 취업 정보 수집 담당관. 국가 공인 자격증의 양식을 따와서 아이들의 사진과 담임의 인증 도장, 명칭을 적어넣은 자격증을 만들고 게시판에 붙였다. 사소한 일에 거창한 이름을 붙여 헛웃음을 유발했지만, 어차피 1인 1역을 정해야 했던 차에 어느 하루 조회 시간이 재미있었으면 덤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게 뭐냐며 깔깔거리는 아이들의 말에 대꾸하는 내 눈은, 가기가 받은 자격증을 핸드폰으로 찍어서 그걸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있던, 어제의 자격증은 물론이고 학교생활 1년이 넘도록 자격증을 하나도 따지 못한 아이의 눈매와 입꼬리에 머물러 있었다.
비단잉어 코이는 어항에서 살면 10cm도 안 되는 크기로 살지만, 연못이나 강에서는 사람 크기까지도 자란다고 한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데 영향을 주는 것은 환경의 영향도 있겠지만, 믿을만한 어른이 자신을 뭐라고 불러주느냐에 따라, 그 이름에 맞게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그 가슴속에 어떤 이상을 품느냐에 따라 성장의 정도가 달라진다고 나는 아직 믿는다. 우스꽝스러운 명칭일지라도, 내가 그가 그리되리라는 믿음과 함께라면, 그것이 그의 가슴속에 자그마한 희망의 씨앗으로 심길 것을 함께 믿는다.
[요지경 생각]
나도 교직 생활 34년이니 이 책을 연재하면서 동감하는 글이 매우 많았다. 모든 글이 나의 회상이면서도 또 다시 학교, 교실, 복도에서 학생들을 만나는 듯 착각 속에 나를 만나는 기분이었다.
첫댓글 유정민 선생님
과연 선생님은 존경 받기위해 안면 인식 장해 까지 격으며, 모든 것이 힘든가요?
그런데도 수십년이 지난 지금 선생님의 설자리는 요?
참 생각 나네요, 돌아가신 최태상 선생님의 기역력,
나는 최태상 선생님과 특별한 인연이 없는데, 동창회에서 처음 뵈었는데
"형섭아 니 오랫만이다." 말씀 하시는데 나는 정말 깜짝 놀란 일이 있어
정민 선생님 수고가 많으 셨습니다.
시간은 쉬지 않고 흐르고
나도 점점 목적지에 가까이 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늘 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가장 평탄한 길이 학교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나만의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었습니다.
전에는 수업 일수가 연 220일,
수업 시간은 많아야 주 24시간 정도이었으니까요!
정년 가까워지니 더 줄어 20시간도 안 되었었지요.
진 회장님!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