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 추억 #53, 파독 간호원 사건
그때 내가 담당하고 있던 세칭 동방교의 '수원정' 제2성전(용산교회)에 대학의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원이 몇 명 있었는데 그중의 한명에게 병원 직인이 찍힌 백지 진단서를 3장 가져오라고 말했다.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도 묻지않고 이튿날 바로 가져왔다. 절대복종인 것이다. 바로 그 간호원들을 포함해서 세칭 동방교에 입교한 많은 간호원들이 독일로 갔을 것이다.
외화벌이가 절실하던 그 시절 광부와 간호원들이 독일로 가서 외화를 벌어 본국으로 송금하던, 그때는 애환의 시절이었다. 그런데 세칭 동방교에 함몰 되어버린 그들이 독일까지 가서 중환자를 뒷바라지하고 시신을 닦으면서까지 뼈빠지게 일하고 받은 급료를 자기 집으로 송금하지않고 몽땅 세칭 동방교로 송금해 버리는 사건(자료 #1)이 발생했다. 가족들이 난리가 났다.
---자료 #1---
파독간호원 30여명 세칭 동방교 4억송금 가족들 진정 수사 착수
동아일보 1976.02.17 기사(뉴스)
속보=사이비 종교에 대해 일제수사를 벌이고 있는 검찰은 17일 서독에 가 있는 30여명의 간호원들이 봉급을 가족에게 보내지 않고 모두 세칭 동방교로 송금하고 있다는 부모들의 진정에 따라 송금경위및 그 돈의 사용처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다. 이러한 사실은 지난 70년 서독에 간 간호원 왕모양(31)의 어머니 김모부인(60, 서울 관악구 노량진동) 최모양(31)의 아버지 최모씨(서울 성북구 돈암2동)등이 “딸들이 세칭 동방교에 속아 빼앗긴 봉급을 찾아달라”고 검찰에 호소함으로써 밝혀졌다.
이들의 진정에 따르면 지난 66년 이후 세칭 동방교에 포섭된 간호원들은 서독에 파견된뒤 매월 1천-1천3백마르크(한화 19만-24만원7천원)의 봉급을 받고 있는데도 집으로는 송금치 않고 미리 계약해둔 외환은행 창구를 통해 세칭 동방교로만 송금하고 있다는 것인데 세칭 동방교에만 송금하는 간호원이 30여명에 이르며 이들이 지난 7년동안 송금한 돈만도 4억여원에 달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
세칭 동방교에서는 파독 간호원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중간간부중의 한 사람인 A전도사를 독일로 보냈다. 연단선님들을 관리하던 순회자 출신이다. 여신도 연단선님들을 다루던 경험이 풍부했고 유독 여신도들을 잘 두드려 팬다고 대기처(천국을 가기위해 이땅에 임시로 머물며 대기하는 곳, 집을 나온 세칭 동방교 신도들이 집단으로 머무는 곳을 말하는 은어-隱語)내의 신도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파다하던 키가 작은 사나이다.
아마도 독일에 가서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간호원들을 주욱 세워놓고 연단선님들 다루듯이 ‘차렷, 열중쉬어’를 반복하면서 긴장의 강도를 높이고 일장 훈시를 하면서 손찌검까지 일어났던 모양이다. 이제 벌써 수년의 세월동안 서구의 문명을 접한 간호원들이 세상 물정을 알게 되었고 더 이상 세칭 동방교에 세뇌 당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가 지금 어느 나라이며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한국에서 하던 못된 버릇 그대로 우리를 지배하려느냐는 반항심이 일어났을 것이고, 폭행사태가 신고 되어 그는 추방절차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귀국해 돌아와 세칭 동방교를 살펴보니 왕년의 잘 나가던 그의 위치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는 없어진지 오래라, 흘러간 물로는 다시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는 법,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는지 빈집에 돌아가 있으라는 2대 교주 노영구의 지시였는지 그는 세칭 동방교를 떠나 자취를 감추고 잠적해 버렸다.
1대 교주 노광공이 지병인 당뇨합병증으로 세상을 하직한 후 그의 둘째 아들 노영구가 2대 교주로 등극한 후 진용은 새로 갖추어 졌고 노광공 시절의 억센 간부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사주(四柱)의 한사람이요 최고위 간부였던 정재덕 요나단목사는 심판을 받아 ‘악령’으로 불리워 마산에 있던 자기 집에서 은거중에 있다가 얼마후 생을 마감했고 같은 사주인 양학식 베드로목사는 옥살이를 마치고 출소하는 교도소 정문에서 그의 아들이 차에 태워 어디론가 사라진후 전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는데 그는 끝내 다시는 세칭 동방교에 나타나지 않았고 지금은 생사여부도 확인할 길이 없다.
김태문 삼손목사, 권병찬 아마샤전도사등도 마누라가 있는 빈집으로 돌아가 있었으니 자기가 설 자리가 없었던것이 아닐까. 파독간호원사태의 책임 때문인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그는 세칭 동방교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사정이 있었으리라,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확인할 수 없는 소문으로 부산 어디에선가 외국어 학원에서 독일어 강사를 한다는 이야기가 들리기도 했지만 잠시 체류했던 독일경험으로 독일어를 강의할 수준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A전도사)는 김인경 입다목사의 부산 사상8교회 출신으로 ‘사상’의 근처 ‘모라’라는 동네 출신인데 그의 모친은 혼자 과부의 몸으로 새벽에 재첩국(경상도 지방의 향토요리)을 한 솥 가득 끓여 머리에 이고 골목 골목마다 다니며 ‘재칫국(재첩국의 사투리) 사이소’를 외치던 부산지방의 그 유명한 재첩국 장사를 하던 분이었는데 나는 그분의 집을 방문할 때 마다 진한 국물의 진짜(진국이라 함) 재첩국을 듬뿍 얻어 먹곤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흔히 ‘사사빼이 이빨쟁이’(무면허 치기공사 정도로 생각되는) 라고 부르는 일을 이곳 저곳 다니며 하고 있던 중에 믿음이 출중하다고 인정되었던지 서울의 대기처로 불려 올라가 노광공교주의 옆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연단선님 순회일을 하는 전도사로 호칭되는 대기자로 있었는데 노광공이 관계당국의 지명수배를 받아 외부 병원의 치료가 어려웠던 시절, 사사빼이 이빨쟁이 하던 시절에 익힌 기술로 이빨이 안좋아 고생하던 교주 노광공의 이빨치료를 해주고 의치를 만들어 씌워 주어 노광공의 총애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였다.
같은 부산의 사상8교회 출신으로 서울의 대기처로 올라가 껌을 팔아 바치는 성적이 월등해서 1등선님으로 있다가 노광공교주의 사후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양학식 베드로목사와 깨춤을 추던(이단의 추억 #35 천국잔치 참조) 김순연 히스기야와는 ‘모라’에 살던 시절 연인관계였다는 소문도 들리고 있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그가 다시 나타난 곳은 '초량12교회'가 문현동으로 이전하여 위장 개업한 세칭 동방교의 부산 문현동 한빛교회였다. 동방교의 내밀한 사연을 잘 알지 못한 채 아편 중독 같은 오랜 세뇌에 사로잡혀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던, 2대교주 노영구의 시대에 동방교안에서 짝을 맞춘 그의 부인이 계속 세칭 동방교를 출입하다가 고희를 넘겨 얼굴에 주름살 깊은 그를 다시 세칭 동방교로 데리고 나왔다고 한다. 참 질긴 인연이다.
일말의 의문도 없이 절대 복종하는 믿음으로 직인이 찍힌 백지 진단서 3장을 나에게 가져다 주었던 예쁘고 상냥하던 그 간호사님, 어느 세월에 혹시 이 글 접할날이 있을까, 이순을 넘긴 지금쯤 예쁜 손자, 손녀들 귀여서 하면서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으면 좋으련만.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