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결과는 거대한 코끼리 만지기다. 접근 각도에 따라 의미 심상한 특징과 시사점을 뽑아낼 수도 있다. 물론 자칫하면 특정 부위를 일반화하여 전혀 엉뚱한 전체상을 그려낼 수 있다. 다리를 만지면서 ‘기둥이다, 벽이다’ 하고 배를 만지면서 ‘천정이다’ 하는 것처럼. 내가 그런 우를 범하고 있지 않는지는 불암회 선수님들이 판단 해 주시길.
나에게 포착된, 내가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총선 결과를 말하겠다. 첫째는 비호남 진보, 개혁, 민주 성향 지지 층의 대 이동이다. 1인 2표제가 실시된 2004년 총선과 2008년 총선의 정당 득표율을 보면, 2004년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정당 득표 총합은 45.4%(38.3%+ 7.1%)였다. 이 둘은 이번 총선에서 통합민주당으로 합쳤으나 불과 25.2%를 얻었다. 뉴타운 사기 공약 파동이 일어났다는 서울에서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2004년 정당 득표율은 46.1%(37.7%+8.4%)였고, 통합민주당의 2008년 정당 득표율은 28.3% 였다(이는 17대 대선 정동영+이인제 후보 득표율 25%보다 3.3% 늘어난 수치다). 투표율 차이를 사상하고, 정당 득표율로만 보면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은 2004년 대비 지지 층의 44.5%(전국 평균), 38.6%(서울)를 잃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같은 기간 호남(광주.전남.전북) 지지율이 81.2%(55.3%+25.8%)에서 66.8%로 불과 17.7%만 빠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다시 말해 서울을 포함한 우리나라 전역에서 호남 지역주의 성향이 강한 지지 층이 통합민주당을 든든히 떠받쳐 주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비호남 민주, 개혁, 진보 성향의 지지 층은 적어도 70~80% 이상 빠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민주노동당은 2004년 13%의 정당 득표율을 기록했으나 이번 총선에서는 8.6%(민주노동당 5.7%+ 진보신당 2.9%)로 33.8%가 빠졌다. 만약 새로운 상품인 진보신당이 분리되어 민주노동당에 식상한 진보 지지자들을 결집하지 않았으면 민주노동당의 정당 득표율은 5.7%와 8.6% 사이 어디쯤에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통합민주당과 비슷한 수준의 지지율 감소를 기록했을 것이다.
2004년 탄핵 역풍에 휘말린 한나라당의 정당 득표율은 35.8%, 자민련은 2.8%로 도합 38.6%였으나, 이번 총선에서는 한나라당 37.5%, 친박연대 13.2%, 자유선진당 6.9%로 도합 57.5%를 기록하였다. 거칠게 보면 2004년 진보계열(열린우리당, 민주당, 민주노동당)의 정당 득표 총합이 58.4%였고, 보수계열(한나라당, 자민련) 총합이 38.6% 였으나, 이번 총선에서는 완전히 역전되어 창조한국당까지 포함한 진보계열이 37.6%, 보수계열이 57.5%로 되었다. 투표율 차이를 사상하면, 4년 만에 총 투표자의 20% 가량, 기존 진보계열 지지자의 35~40% 가량이 보수계열당으로 옮겨 갔다고 할 수 있다. 이 역시 호남 지역주의 성향이 강한 지지 층과 민주노동당(진보신당 포함)에 충성도가 높은 지지 층을 감안하면 중간적 성향의 지지 층은 대략 70~80%가량이 보수계열당으로 옮겨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통합민주당 또는 진보계열 정당들이 집권을 꿈꾼다면 이들 부유(浮游)내지 스윙(swing)하는 지지 층을 어떻게 끌어오느냐가 관건 임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이는 정책노선, 지역.계층적 조직기반, 경쟁 규칙과 의사결정체계를 핵심으로 한 정당 시스템, 조직 문화(기풍)과 리더십의 대대적인 혁신을 요구한다는 것 역시 명약관화하다.
둘째, 한나라당과 통합민주당으로 대표되는 양당의 독과점적 지배력의 약화 현상과 유권자들의 활발한 전략적(사려 깊은) 투표 현상이다. 원래 한국이 채택하고 있는 소선구제 단수다수 득표제는 양당 구도를 강화하는 제도이다. 그런데 이번 총선에서는 의석을 확보한 정당 수도 많고, 특히 양대 정당의 독점력이 강한 지역에서 인물론을 앞세워 당선된 무소속이 많다. (통합민주당이 석권하던 호남 31석 중 무려 6석을 무소속이 차지했으며, 한나라당이 석권하던 영남에서는 총 68석 중, 통합민주당이 2석, 민주노동당이 2석, 친박연대가 5석, 기타 무소속(친박무소속 포함)이 13석을 차지하였다) 동시에 해당 지역의 정당 지지율을 월등히 뛰어넘는 후보들도 많이 출현했다. 이는 유권자들의 자발적인 전략적 투표(예컨대 이재오, 강기갑, 노회찬, 심상정 등 반한나라당 유력 후보에게 표 몰아주기 등) 행위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
예컨대 문국현은 지역 기반도 거의 없고, 창조한국당 서울 지역 정당 득표율이 불과 4.6%(은평갑.을 합쳐서는 11.1%)임에도 불구하고 은평을에서 52%를 얻어 당선되었다. 그것도 한나라당의 최고 실력자로서 은평 지역의 개발 예산 확보, 법.제도적 지원 등을 가장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재오를 상대로! 한편 이 지역의 통합민주당 후보이자 호남 출신 유권자들의 지지를 독식해 온 송미화는 2004년 총선에서 50,566표를 얻어 53,107표를 얻은 이재오에 석패했지만 이번 총선에서는 불과 5397표(5.8%)를 얻었을 뿐이다. 은평갑.을 지역 정당 득표율은 한나라당 38.2%, 통합민주당 26.6%, 창조한국당 11.1%, 친박연대 8.9%, 자유선진당 4.3%, 민주노동당 3.9%, 진보신당 3.2% 순이다. 그런데 이재오의 후보 득표율은 정당 득표율에 비해 불과 2.6% 증가한 40.8%이지만, 문국현은 통합민주당, 창조한국당, 친박연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정당 득표율을 합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52%의 지지를 받았다. 비슷한 현상이 강기갑을 당선시킨 경남 사천에서도 일어났다.
진보신당으로 노원병 지역에 출마한 노회찬은 서울지역 정당 득표율이 3.8%(노원갑.을.병에서는 6.2%)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40.1%를 얻었다. 같은 지역 통합민주당 후보 김성환은 16.3%를 얻었다. 비록 이들은 한나라당의 참신한 신인 홍정욱(43.1% 득표)에게 패했지만, 노-김 두 후보의 지지율 합은 무려 56.4%에 이른다. 진보신당으로 경기도 고양.덕양갑 지역에 출마한 심상정은 경기 지역 정당 득표율이 3.3%임에도 불구하고 37.7%를 얻었고, 통합민주당 한평석은 정당 득표율이 26.4%임에도 불구하고 11.5%를 얻었다. 이들 역시 43.5%를 얻은 한나라당(경기 지역 득표율 40.9%) 후보 손범규에게 패했지만 심-한 두 후보의 지지율 합은 49.2%이다. 부산에 통합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조경태와 전재수는 부산지역 정당 지지율이 12.7%임에도 불구하고 각각 44.9%(당선), 38.6%를 얻었다. 최철국은 경남 지역 통합민주당 지지율이 10.5%임에도 불구하고 47.8%를 얻어 당선되었다. 한나라당 아성인 대구 수성을에서 사실상 1:1 대결을 벌린 무소속 유시민은 인물을 앞세워 불과 100일도 안되는 짧은 기간 선거운동을 통해 32.6%를 얻었다.(해당 지역의 통합민주당 정당 득표율은 4.9%이다)
양대 정당의 전통적 강세 지역에서 무소속이나 전통적 강세 정당이 아닌 정당 후보들이 대거 당선이 되었거나 당선권에 근접한 것은 나름대로 유권자들이 정당과 더불어 후보의 인물 됨됨이에도 비교적 예민하게, 역동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뜻 보면 유권자들은 (낮은 투표율로 상징되듯이)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대충 정당만 보고 찍거나, 지역 개발이나 부동산 가격을 잘 올려줄 것 같은 후보를 생각 없이 찍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총선 결과는 적어도 이전에 비해, 유권자들이 훨씬 전략적으로, 그것도 변화를 추구한 흔적이 뚜렷하다. 사실 이번의 투표율 조차도 자신의 한 표가 뭔가 의미가 있거나,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은 데서는 높았고, 하나 안 하나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은 데서는 낮았다.
어쨌든 서울 48개 지역구 별 투표율을 보면, 가장 높았던 지역은 정동영-정몽준이 맞붙었던 동작을이 56.8%로 1위, 손학규가 출마한 종로가 52.2%로 3위, 이재오-문국현이 맞붙었던 은평을이 51.4%로 4위, 노회찬-홍정욱이 맞붙었던 노원병이 51%로 5위를 차지했다. 2위는 언론에 거의 보도가 되지 않은 노원을(52.4%)이 차지했다. 이 지역은 강북 지역의 강남 같은 곳으로 불려왔는데, 이 지역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탄핵 총선 때 빼앗긴 지역구 탈환 의지를 강하게 발휘한 것으로 추정된다. 투표율이 가장 낮았던 지역은 강남갑이 39%, 강북갑이 42.1%, 중랑갑이 42.2%, 송파을이 42.5%, 양천을이 42.6% 순이다. 17대 총선에 비해 투표율이 가장 큰 폭으로 감소한 지역은 송파갑.을, 강남갑.을, 서초갑, 강동갑, 양천갑, 광진갑 등 한나라당 초강세 지역이다. 이는 탄핵 총선시기에 위기감에 사로 잡혀 대거 투표장에 나온 한나라당 지지 층이, 해보나 마나 결과가 뻔한 18대 총선에는 별 흥미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국적으로 투표율이 낮았던 것은 유권자들의 의식이 정치(총선 결과)가 만들어 낼 수 있는 변화에 대한 기대도, 위기도 크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참여정부의 큰 성과이자 큰 실책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의 투표 행위에는 좀 더 국정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인물, 좀 더 획기적인 변화.개혁을 추구할 수 있는 인물, 좀 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인물을 선호하는 심모원려(深謀遠慮) 징후가 뚜렷하다. 하지만 자칭 진보개혁 세력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진보적 변화와 개혁만이 진짜로 생각하여 유권자들의 표심을 보수화(경제성장에 대한 묻지마 열망), 낮은 투표율, 뉴타운 같은 사기 공약과 변칙적 관권 선거 탓으로 지나치게 폄하.왜곡하고 있다.
종합적으로 18대 총선 결과는 한나라당과 적어도 통합 민주당은 춘추 전국 시대의 주나라 황실처럼, 전통적 지지 층(지역)에 대한 내적 통합력의 한계가 온 조짐이 뚜렷하다. 그런 점에서 통합을 통한 정치적 독점체 형성 노선(5.31 이후 열린우리당 주류가 걸은 노선) 보다, 시대와 유권자가 요구하는 가치에 따른 분화와 경쟁 노선이 힘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바탕에는 한국의 정치 시장이 정당 또는 후보의 품질에 대해 점점 예민하게, 역동적으로 반응하는 성숙된 시장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장은 참신하고 질 좋은 신상품(정당이나 후보)이 빠르게 득세할 수 있는 시장이다. 그야말로 통합이 먼저가 아니라 가치가 먼저 인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 가치의 핵심은 한나라당과 통합민주당 사이에서 부유(浮游)내지 스윙(swing)하는 호남 지역주의 성향이 약한 민주, (현실적이고 합리적인)개혁, (유연한)진보 성향 유권자의 지지 확보이다. 제후국들이 생사를 걸고 경쟁, 대립, 협력하던 춘추전국 시대는 제자백가 등 사상과 문명이 꽃피던 시대이다. 중화문명의 토대를 닦고, 골조를 올린 시대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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