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杜詩 속에 나타난 諸葛亮 形象 考
정 호 준
단독 / 한국외국어대학교
Ⅰ. 들어가는 말
中國의 역대의 유명한 문인들은 三國 시기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諸葛亮
을 제재로 한 문장이나 시가를 다수 남기고 있다. 詩歌 방면에서의 杜甫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가 諸葛亮을 읊은 작품은 양적인 면에서도 많고, 작품성 면에서
도 우수하다. 杜甫가 인물을 제재로 창작한 작품 중에 동시대의 사람으로는 李白
을 그리워하며 지은 작품이 가장 많고, 이전 시대의 역사 인물로는 諸葛亮을 주인
공으로 한 작품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杜甫는 이 시들을 통해 諸葛亮
과 비록 같은 시대에 살지 않았고, 정치와 문학에서는 나아간 길이 달랐지만, 그에
대한 높은 평가와 흠모와 존경심을 아낌없이 표현해 내고 있다. 杜甫가 자신의
시 속에서 古今의 인물들을 평가할 때에 공정하며 합당하고 진실되었다는 것을
작품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屈原․宋玉․王昭君․曹植․
庾信․陳子昻․初唐四杰과『八哀詩』속에서 묘사한 인물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諸葛亮과 李白에 이르면 이 특징은 더 빛을 발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杜甫가 諸葛亮을 노래한 작품으로는 「遣興五首」之一(乾元2年[759]), 「蜀
相」(上元 元年[760] 봄), 「登樓」(廣德2年[764] 봄), 「武侯廟」(大曆 元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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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6]), 「八陣圖」(大曆 元年) , 「夔州歌十絶句」之九(大曆 元年 여름), 「謁
先主廟」(大曆 元年 가을), 「詠懷古迹五首」之四․五(大曆 元年), 「古柏行」
(大曆 元年), 「諸葛廟」(大曆 2年[767]), 「上卿翁請修武侯廟遺象缺落時崔
卿權夔州」(大曆 2年) 등 12수이다. 이 중 「登樓」와 「古柏行」은 감회를 읊거
나 비유로 표현해 내고 있다. 「謁先主廟」와 「詠懷古迹五首」之四는 劉備를
노래한 것이지만 반드시 諸葛亮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포함시켰다. 그리
고 諸葛亮을 언급한 시구로는 “더불어서〈梁甫吟〉을 얻었네.(得兼梁父吟)”
(「同李太守登歷下古城員外新亭」, 天寶4年[745]), “諸葛亮은 「貴和」편을
썼었네.(諸葛貴和書有篇)”(「赤霄行」, 永泰 元年[765] 봄), “처연하게 呂尙과
諸葛亮 같은 이들에게 희망을 거네( 凄其望呂葛)”(「晩登瀼上堂」, 大曆 2年),
“공은 제갈공명처럼 촉지방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고(諸葛蜀人愛)”(「八哀詩․
贈左僕射鄭國公嚴公武」, 大曆 元年 가을), “管仲과 諸葛亮이 그 당시에 등
용됐던 것이네(管葛本時須)”(「別張十三建封」, 大曆 4年[769]), “공명과 같이
많은 공적을 세웠으니(孔明多故事)”(「承聞故房相公靈櫬自閬州啓殯歸葬東
都有作二首」之一, 永泰 元年)등이 있다. 이들 작품 중 「遣興五首」과 「同李
太守登歷下古城員外新亭」을 제외하고는 모두 杜甫가 벼슬을 그만두고 유랑
을 시작하여 成都에 도착한 이후부터 夔州에 머문 시기 사이에 집중적으로 창작
되었다. 이는 杜甫가 유랑을 시작하여 蜀지방에 도착한 후 많은 蜀漢 관련 유적
을 보게 되었을 것이고, 이것이 창작을 통해 반영된 듯 싶다.
본고에서는 이 시들은 대상으로 하여 杜甫가 이들 시에서 표현하고자 한 생각
을 理想的 君臣 關係에 대한 所懷, 諸葛亮의 才能에 대한 稱頌, 자신의 처지
에 대한 감정 이입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Ⅱ. 理想的 君臣 關係에 대한 所懷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儒家的 家風에서 성장하였던1) 杜甫는, “은근히 스스로
1) 仇兆鰲, 杜詩詳注(北京: 中華書局)卷24, p. 2172, 「進鵰賦表」: “奉儒守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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稷과 契로 비유하였었네(竊比稷與契)”2)라고 이야기하였듯이, 임금을 보좌하며
자신을 이상을 펼쳐 태평성세를 만들고자 한 전형적인 儒家 사상의 영향을 받은
사대부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杜甫의 위대한 점을 자신의 생활이 어려울
때나 혹은 조정에서 관직을 하고 있을 때를 막론하고 항상 이러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孟子가 말한 “궁하면 홀로 자기 몸을 선하게 했고, 영달하
면 온 천하를 선하게 했다.(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3)를 더욱 확대 발전
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杜甫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던 것으로 그의 憂國憂民의 사상도 이곳에서 비롯되었다
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杜甫의 사상은 혼자 이룰 수가 없는 것이었다. 자기의 이상을
실현시켜 줄 조정과 황제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杜甫가 살았을 당시
의 현실은 이러한 이상을 실현시키기에는 너무나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懷才不遇의 감정을 품고 있으면서 자기의 이상을 실현시켜 줄 조정을 기대
하였고, 이를 위해서는 임금과 신하간의 밀접하면서 서로 보완적인 관계가 필요하
다고 본 것이다.
중국 역사 전체를 보았을 때, 아마도 임금과 신하가 가장 이상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통치를 했던 때를 劉備와 諸葛亮의 蜀漢 시기로 보아도 전혀 무리가
없을 듯하다. 그리고 杜甫도 이 시기를 가장 이상적인 儒家 사상에 바탕을 둔
때로 보았음에 틀림없을 듯하다. 젊은 날의 杜甫는 강성한 제국 속에서 생활을
하면서 조정과 자신의 벼슬길에 대해 무한한 희망을 품고 있으면서 자신도 국가를
위해 이바지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만년에 들어 꿈을 이루지
못하고 유랑을 하는 속에서도 시인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었다 할지라
도 침묵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현실을 돌아보면서 유비와 諸葛亮의 군신 관계
를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杜甫는 諸葛亮을 제재로 한 자신
의 시 속에서 이러한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먼저 杜甫는 上元 元年(760)에 지은 「蜀相」(卷9)4)에서는 “先帝께서 삼고초
2) 仇兆鰲, 앞의 책, 卷4, p. 264, 「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
3) 孟子卷13, 「盡心章句上」(朱熹 撰, 四書章句集注本(北京: 中華書局), p. 351)
4) 이하의 卷數는 모두 仇兆鰲, 杜詩詳注를 기준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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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를 하시면서 천하의 계책을 자문하시어, 두 황제가 창업하고 위기를 극복하게
하는 데에 老臣의 충심을 다 바쳤네.(三顧頻繁天下計, 兩朝開濟老臣心。)”
라고 하였다. 이는 劉備가 三顧草廬를 하여 諸葛亮을 등용하여 창업을 이룬
계기가 된 것에 대한 시인의 감탄 섞인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大曆 元年
(766) 봄에 시인은 夔州에 도착하여 劉備와 諸葛亮의 사당을 참배하고는 각각
「謁先主廟」(卷15)와 「諸葛廟」(卷19)를 남기고 있다. 이 두 편의 시 속에서도
杜甫는 두 사람의 군신 관계에 대한 흠모를 드러내고 있다. 먼저 「謁先主廟」에
서는 “현명한 임금은 하늘에 합당하여 재주가 작지 않으니, 충신을 얻어 약조를
맺음이 비할 바 없도다.(應天才不小, 得士契無隣。)”라고 하였다. 楊倫은 劉
備가 자신에게 孔明이 있는 것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했다
는 「武侯本傳」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契無隣’은 하나의 덕에 마음을 맡긴 것으
로 서로 병립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였는데5), 이는 시인의 생각을 아주 정
확히 지적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諸葛廟」에서도 “당시에는 임금과 신
하가 함께 어려움을 헤쳐나갔고(君臣當共濟)”라고 하여 직접적으로 劉備와 諸
葛亮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역시 劉備와 諸葛亮의 관계를 부러워한 표현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楊倫이 “公은 先主와 武侯에게 대해 매번
정성스레 버려두지 않았는데, 대개 임금과 신하가 서로 때를 만난다는 것이 예로
부터 어려운 것이었다.(公於先主武侯每惓惓不置, 蓋君臣相遇, 自古爲
難。)”6)라고 이야기한 것이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시인은 大曆 元年 가을에 「詠懷古跡五首」(卷17)를 지었는데, 그 중 4수와
5수에서 각각 劉備와 諸葛亮을 노래하고 있다. 仇兆鰲는 이 시에 대해 先主와
武侯를 회상한 것을 통해 임금과 신하가 서로 좋은 때를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탄식한 것으로 보았는데,7) 이에 따르면 이 시의 창작 동기가 바로 군신간의 올바
른 만남을 칭송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중 제 4수를 보도
록 하겠다.
5) 楊倫, 杜詩鏡銓(臺北: 華正書局)卷12, p. 598,「謁先主廟」: “武侯本傳: 先
主曰: 孤之有孔明, 猶魚之有水。契無隣, 言其委心一德, 莫與相竝。”
6) 楊倫, 杜詩鏡銓卷12, p. 599, 「諸葛廟」
7) 仇兆鰲, 杜詩詳注卷17, p. 1499, 「詠懷古跡五首」: “懷先主、武侯, 嘆君臣際
會之難逢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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蜀主窺吳幸三峽, 촉 황제 유비가 오나라를 노려 삼협 땅으로 행차하시더니,
崩年亦在永安宮。돌아가신 해에도 영안궁에 계셨도다.
翠華想像空山裏, 화려한 깃발이 텅빈 산에서 날리던 것을 상상하고,
玉殿虛無野寺中。궁궐은 허무하게도 들판의 절 터가 되었도다.
古廟杉松巢水鶴, 옛 사당의 느릅나무와 소나무에는 학들이 깃들어 있고,
歲時伏臘走村翁。여름과 겨울에 지내는 제사에는 마을 노인들이 모이는구나.
武侯祠屋常隣近, 諸葛亮의 사당이 항상 이웃되어,
一體君臣祭祀同。한 몸된 임금과 신하가 제사도 같이 지내네.
시의 내용을 보면 首聯은 劉備가 關羽의 복수를 위해 오나라를 공격하다 실패
하고는 魚復으로 돌아와 永安으로 이름을 고치고는 이듬해에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8) 이 부분에서 杜甫가 ‘幸’과 ‘崩’이라는 표현
을 사용한 것에서 劉備를 정통으로 보고 있다는 자신의 관점을 은연 중에 드러내
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다음 연의 ‘翠華’와 ‘玉殿’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처음에 ‘蜀主’라고 한 것은 특별한 의미없이 그냥 예로부터 전해 온 통칭적인
표현을 그대로 따른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頷聯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궁터
에서 시인이 지난날의 영화를 회상하며 허무해 하고 있는 것이다. 하반부는 바로
이 시를 창작한 동기를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마지막 구에서 한몸과도
같은 임금과 신하에게 함께 제사를 지낸다고 표현한 것은 그 둘에 대한 당시 사람
들의 추앙이 조금도 식지 않았음을 드러냄과 동시에 시인이 당시에 선망해 마지않
던 군신 관계가 이 둘에 있었음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杜甫는 大曆3
년에 지은 「公安縣懷古」(卷22)의 頸聯에서도 “유비는 군신간에 결의를 맺어
화합을 이루었고, 여몽의 군사들은 전투에서 아름다운 명예를 얻었다네.(灑落君
臣契, 飛騰戰伐名。)”라고 하여 군신간의 화합의 중요성을 필요로 하고 또 그
8) 陳壽 撰, 三國志(北京: 中華書局)卷32,「蜀書․先主傳」, pp. 890~891: “先
主忿孫權之襲關羽, 將東征, 秋七月, 遂帥諸軍伐吳。……(章武二年)夏六月,
陸議大破先主軍於猇亭, 將軍馮習、張南等皆沒。先主自猇亭還秭歸, 收合離
散兵, 遂棄船舫, 由步道還魚復, 改魚復縣曰永安。……(三年)夏四月癸巳, 先
主殂于永安宮, 時年六十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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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기를 갈망하는 자신의 심정을 표현해 내었다.
한편, 杜甫가 成都에 들어온 이후부터 집중적으로 창작하기 시작한 諸葛亮의
형상 속에는 현실에 비추어 자신이 가지고 있던 희망을 그 속에 담아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전란이 끊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杜甫는 당 제국이 중흥하기를 간절
히 바라고 있었다. 이러한 杜甫의 생각은 그의 「北征」(卷5)시의 마지막 부분에
서 잘 드러내고 있는데, 보도록 하겠다.
憶昨狼狽初, 지난번 막 난리가 일어났던 때를 생각하니,
事與古先別。그때의 현종 임금의 처사가 옛날의 선례와는 완전히 달랐네.
姦臣竟葅醢, 간신(양국충)은 마침내 죽여 젖 담그셨고,
同惡隨蕩析。동조한 악한 무리들도 따라서 쓸어버리셨네.
[…]
桓桓陳將軍, 힘세고 날랜 陳玄禮 장군이,
仗鉞奮忠烈。손에 도끼를 짚고서 충렬을 떨쳤으니,
微爾人盡非, 그대가 아니었으면 백성들이 모두 잘못되었을 것이니,
於今國猶活。이제 나라는 오히려 다시 살아날 것 같네.
[…]
園陵固有神, 능원에 진실로 열성조의 신령이 계시니,
掃灑數不缺。장안을 수복한 후에 자주 청소하고 제사를 빠뜨리지 않으면,
煌煌太宗業, 빛나고 빛나는 태종의 업적이,
樹立甚宏達。매우 크게 세워질 것이네.
즉 위의 시에서 보이듯이 杜甫는 줄곧 자신의 조국에 몰아닥친 혼란을 종결하
고 태평성세를 구가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임금과 신하의 유기적
인 협조가 필요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몸담고 있는 왕조에서는 太
宗 때를 가장 이상적인 시대로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 위의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태종의 업적을 칭송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9) 그 후 杜甫는 成都에 들어오게
되었고 劉備와 諸葛亮에 관한 많은 유적들은 직접 눈으로 본 후에 이러한 생각이
9) 이밖에도 杜甫의 太宗을 존경하고 추앙하는 마음을 담고 있는 시로 「行次昭陵」(卷
5)․「重經昭陵」(卷5)을 들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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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확고해졌고, 이를 시를 통해 표현해 낸 것이 아닌 가 생각되어진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당시의 통치자들이 이런 이상을 실현하기에는 한참 모자란 현실에 대
한 시인의 한탄과 실망이 그 속에 담겨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Ⅲ. 諸葛亮의 才能에 대한 稱頌
杜甫는 평생토록 “임금을 堯舜보다 더 훌륭하게 되게 보좌하고, 또한 풍속을
순박하게 만들려고 한(致君堯舜上, 再使風俗淳。)”10)사람이었다. 그러나 현
실 정치는 杜甫를 받아들여주지 않아 杜甫는 이러한 자기의 꿈을 실현시킬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얻은 從8品에 지나지 않는 左拾遺 벼슬을 제수받게 되었
고, 이 자리는 비록 품계는 낮았지만 모든 정사에 대해 직간을 하고, 인재를 추천
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평소 강직한 성품의 杜甫에게는 적합한 것이었으며
그 역시 만족하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친구인 房琯을 변호한 일로 인해 肅宗에게
진노를 사 1년 여 만에 華州司功參軍으로 좌천되었고, 끝내는 벼슬을 그만두고
유랑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成都에 들어온 이후에 諸葛亮의 유적을 여러
차례 참관하게 되면서 재상으로서 그가 편 경륜과 재능에 대해 깊은 탄복을 하게
된 것이고, 이를 여러 편의 시에서 드러내며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기가
이루지 못한 이상을 실현했던 역사적 인물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투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젊은 날에는 자신이 직접 諸葛亮과 같은 인물이 되어 세상
에 이름을 떨치고 싶었던 것이고, 나이가 든 이후에는 자신의 시대에 諸葛亮과
같이 능력이 있는 인물이 나와 어려운 현실을 타개해 주기를 바라는 진실한 감정
을 시로 표현해 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杜甫의 생각을 담은 작품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杜甫는 「蜀相」에서 “두 황제가 창업하고 위기를 극복하게 하는 데에 老
臣의 충심을 다 바쳤네. (兩朝開濟老臣心)”라고 하여 諸葛亮의 뛰어난 재상으
로서의 모습을 개괄해 내고 있다. 이는 힘이 미약했던 劉備가 나라를 건국한 것과
10) 仇兆鰲, 杜詩詳注, 卷1, p. 74, 「奉贈韋左丞丈二十二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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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둔한 후주가 후사를 이을 수 있었던 것 모두가 공명의 노고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11) 孔明이 후대에 존경을 받았던 가장 중요한 요인
으로 忠을 꼽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는 처음에는 先主를
보필했고, 先主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조금은 부족한 듯한 황제였던 後主 劉
禪에게 충성을 다 바쳐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하였으며12),
결국은 자기의 목숨까지 바쳤던 충신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유가
적인 분위기의 사회에서 사대부들이 가져야 하는 첫 번째의 덕목이었고, 유가의
가풍에서 성장한 杜甫가 이처럼 諸葛亮에게 敬慕의 마음을 품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杜甫가 成都에 도착한 이후의
唐 조정의 상황은 安史의 亂이 아직 종결되지 않았을 때였고, 그 이후 安史의
亂이 진압된 뒤에도 藩鎭 등의 割據로 인해 혼란이 계속 진행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諸葛亮과 같은 능력있고 충성스런 인물이 나와 세상을 구제
해 주기 바라는 杜甫의 강렬한 희망이 시 속에서 諸葛亮에 대한 흠모와 칭송으로
표출되어 나왔다고 볼 수 있다.
杜甫는 大曆 元年에 夔州에 있는 諸葛亮의 사당을 참배하고는 「武侯廟」
(卷15)라는 五言 絶句 작품을 남기고 있다. 시를 보도록 하겠다.
遺廟丹靑落, 남겨진 사당의 단청은 다 벗겨졌는데,
空山草木長。적막한 산의 초목만이 무성하구나.
猶聞辭後主, 후주와 이별하는 말이 들리는 것 같은데,
不復臥南陽。다시는 남양에서 눕지 않으리라 하네.
시의 처음 두 구는 영웅이 떠나고 남은 사당의 적막함을 그려 내었다. 이는 일반
적인 회고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시들에서 보이는 내용으로 諸葛亮의 사당의 모
습을 묘사하면서 人生無常을 엿보게 해 준다. 다음의 3구는 諸葛亮이 건흥 5년
11) 楊倫, 杜詩鏡銓卷7, 「蜀相」, p. 316: “言以先主之彈丸而能立國, 以後主之昏
庸而能嗣位, 皆武侯一片苦心也。”
12) 諸葛亮, 「前出師表」: “先帝知臣謹愼, 故臨崩, 寄臣以大事也。受命以來, 夙夜
憂嘆, 恐託付不效, 以傷先帝之命。”(陳壽 撰, 三國志卷35, 「蜀書․諸葛亮
傳」, p. 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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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북벌에 앞서 後主에게 그 유명한 「出師表」를 올리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
다13). 이 3․4구에 대해서 朱鶴齡은 “이 시의 뒤 두 구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武侯는 昭烈帝를 위해 분주히 일을 했지만, 그 충성을 다 보이지
못하였고, 後主는 아둔하고 어리석었지만 마음과 힘을 다해 출병했으니 다시는
南陽으로 돌아가 눕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此詩後二語, 人無解者。武侯
爲昭烈驅馳, 未見其忠, 惟當後主昏庸, 而盡瘁出師, 不復有歸臥南陽之
意。)”14)라고 해석을 하고 있다. ‘未見其忠’ 이라고 평을 한 것은 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지만, 이 시에서 杜甫가 나타내고자 했던 諸葛亮의 충성에 대한
칭송을 잘 파악한 듯한 해석이다.
宋代의 張戒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諸葛亮이 남양에 은거하고 있을 때, 어찌 등용이 되리라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유비의 삼고초려로 의기가 서로 투합하여 신명을 바칠 것을 약속한 것이다. 더욱
이 어린 후주를 보필하게 되자 표를 올려 의견을 직언하고 정도로써 북벌을 감행
하다 끝내 군영에서 세상을 뜨니 그 의기와 기개는 경외할 만하였고, 천 년의
세월을 뒤흔들었다. 그러므로 杜甫는 적막한 산에서 그 남겨진 사당을 보고
‘후주와 이별하는 말이 들리는 것 같은데, 다시는 남양에서 눕지 않으리라 하네.’
라고 하며 그를 회상하며 찬탄하고 흠모한 것이다. 이 시는 간략하여 마음에
두고 지은 것 같지 않지만 읽는 이를 엄숙하게 만들고 諸葛亮의 풍모를 그릴
수 있게 한다. 李商隱의 ‘원숭이와 새들은 아직도 장군의 군령을 두려워하고,
바람과 비는 언제나 전위 부대가 된다.’에 비하면 杜甫의 시가 한 등급 위이다.
孔明臥于南陽之時, 豈期爲人用耶? 及玄德三顧, 意氣相感, 遂許以驅
馳。更幼主之託, 抗表以辭, 仗義北伐, 卒死于軍, 義風凜然, 竦動千載。
故子美于空山之中, 睹其遺廟而曰‘猶聞辭後主, 不復臥南陽。’者, 追想
而歎慕之也。此詩若草草不甚留意, 而讀之使人凜然, 想見孔明風采, 比
夫李義山‘魚鳥猶疑畏簡書, 風雲長爲護儲胥。15)’之句, 又加一等矣。16)
13) 陳壽, 三國志卷35, 「蜀書․諸葛亮傳」, p. 916: “(後主建興)五年, 率諸軍北駐
漢中, 臨發, 上疏。”
14) 仇兆鰲, 杜詩詳注卷15, p. 1277, 「武侯廟」
15) 李商隱, 「籌筆驛」의 首聯. 原詩는 ‘猿鳥猶疑畏簡書, 風雲常爲護儲胥’라고 되어
있다.
14 세계문학비교연구 제31집 (2010년 여름호)
張戒의 이 시에 대한 설명과 평가 역시 큰 틀에서는 朱鶴齡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다만 杜甫가 이 시를 통해 드러내고자 한 諸葛亮의 충신으로서의 면모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해석을 해 주고 있다. 그리고 후대에 역시 諸葛亮을 형상
화한 唐代의 七言律詩 작품의 걸작 중 하나라고 평가받는17) 李商隱의 「籌筆
驛」과 비교해서 한 단계 뛰어난 시라고 평가한 것을 통해 杜甫를 바라보는 張戒
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시가 지닌 함축적인 미를 가지고 평가해 볼 때, 張戒가
이렇게 평가한 것은 무리가 따르지 않는 타당한 평가라고 보여진다.
諸葛亮에 대한 杜甫의 칭송을 표현하고 있는 또 다른 작품으로 「八陣圖」(卷
15)를 들 수가 있다.
功蓋三分國, 그대의 공은 세 나라를 덮었고,
名成八陣圖。명성은 팔진도에 이루어졌네.
江流石不轉, 강물은 흘러도 돌은 구르지 않으니,
遺恨失呑吳。남은 한은 오나라를 병탄하는 데 실패한 것이네
이 시는 위의 「武侯廟」와 같은 시기인 大曆 元年 夔州에서 지은 것이다. 八
陣圖는 奉節縣 永安宮 남쪽 1리 떨어진 물가 아래 평평한 곳에 있었는데, 가는
돌을 모아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18) 이것은 본래 諸葛亮이 진법을 훈련시키던
돌계단 모양이었는데, 三國志演義에서 이것에다 신비한 색채를 부여한 것이
다.19) 三國志卷32 「蜀書․先主傳」및 卷58 「吳書․陸遜傳」에 의하면,
劉備가 白帝城으로 달아난 뒤, 陸遜은 곧 군사를 물려 魏의 침략을 방비하였지
16) 張戒, 「歲寒堂詩話」卷下, 第26條(丁福保 輯, 歷代詩話續編本(北京: 中華書
局, p. 473)
17) 陳增杰은 唐人律詩箋注集評(杭州: 浙江古籍出版社), p.984에서 이 시와 杜甫
의 「蜀相」, 溫庭筠의 「過五丈原」을 唐代에 諸葛亮을 노래한 七言律詩의 3대 걸
작으로 평가하였다.
18) 仇兆鰲,『杜詩詳注』卷15, 「八陣圖」, p. 1278: “寰宇記: 八陣圖, 在奉節縣
西南七里。荊州圖副云: 永安宮南一里, 渚下平磧上, 有孔明八陣圖, 聚細石
爲之。”
19) 羅貫中 編著, 毛宗崗 批評, 三國演義(臺北: 三民書局) 第84回 陸遜營燒七
百里, 孔明巧布八陣圖 참조.
정호준 / 杜詩 속에 나타난 諸葛亮 形象 考 15
결코 魚腹脯까지 추격한 적은 없었고 단지 장군 李異․劉阿 등을 보내 추격케
한 적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三國志演義에서의 八陣圖에 대한 내용은
작가가 지어난 허구임을 알 수 있다.
杜甫는 이 시의 처음 두 구에서 諸葛亮의 일생의 공적에 대해 총결해 내었다
고 볼 수 있다. 주지하듯이 諸葛亮의 뛰어난 재능은 재상으로서 두 황제에게 충성
을 다했다는 것 뿐만 아니라, 三國 鼎立의 국면에서 蜀漢이 하나의 세력을 차지
하도록 그의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타고난 뛰어
난 재능이 없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로 보여졌을 것이다. 따라서 杜甫는 짧지
만 강하게 이 시를 통해 그의 재능을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위에서도 언급했
듯이 八陣圖를 비롯한 많은 諸葛亮에 관한 고사가 후대에『三國志演義』등을
통해 과장되고 신비화된 경향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조차도
그가 본래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
을 것이다. 杜甫도 후대에 정착된 三國志演義의 내용과는 전혀 관계없이 그
때까지 전승된 사실을 통해 諸葛亮이 지니고 있던 재능을 칭송하기 위해 이 시를
지었을 것이고, 이를 통해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에도 諸葛亮과 같은 인물이 나타
나 어려운 현실을 타개해 주기를 바라는 바람을 드러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
다. 그리고 杜甫의 이 시는 三國志演義에도 인용되어 諸葛亮의 능력에 대한
후대인의 칭송을 입증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다.
이 시기에 杜甫는 또한 「謁先主廟」를 창작하였는데, 劉備에 대한 회상을 하
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諸葛亮의 공덕을 칭송하는 것 역시 빠뜨리지 않고
있다. 그 부분만을 보도록 하겠다.
復漢留長策, 한 왕실을 부흥시키려는 원대한 계책을 남기시고는,
中原仗老臣。중원을 통일하는 대업을 노신에게 맡기셨네.
雜耕心未已, 둔전을 실시하려 한 웅대한 뜻을 그만두지 않았는데,
歐血事酸辛。갑자기 군중에서 세상을 떠나니 일이 더욱 어려워졌네.
覇氣西南歇, 서남쪽의 覇者의 기운은 이미 다하여졌고,
雄圖歷數屯。천하를 통일했던 한 왕실의 운수도 다하였도다.
이 부분에서 杜甫는 諸葛亮이 劉備가 맡긴 웅대한 대업을 이루려 노력하다가
16 세계문학비교연구 제31집 (2010년 여름호)
아쉽게도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이후 蜀漢의 운명도 다하게 되었음을 슬퍼
하고 있는 것이다. ‘復漢留長策, 中原仗老臣’은 유비가 임종 전에 諸葛亮에게
“그대의 재능을 曹丕보다 열 배 뛰어나니 반드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마침내는
대업을 이룰 수 있을 것이요.”20)라고 유언한 것을 이르는 것이다. 諸葛亮이 이후
에 蜀漢을 위해 신명을 바쳐 일한 것은 古今의 역사를 통해 찾아보아도 그 예를
찾기가 힘들 정도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杜甫 역시 이 시를 통해 이러
한 자신의 심정을 표현해 낸 것이라 볼 수 있다.
杜甫는『詠懷古迹五首』중 제5수에서도 諸葛亮의 업적과 명성에 대한 존
경을 표시하고 있다.
諸葛大名垂宇宙, 諸葛亮의 큰 이름이 천지에 드리우니,
宗臣遺像肅淸高。재상으로 남긴 모습은 정숙하고 청렴하며 고아하도다.
三分割據紆籌策, 세 나라로 갈라져 할거하니 많은 계책을 세웠고,
萬古雲霄一羽毛。오랜 세월동안 구름 낀 하늘의 한 마리의 봉황 같도다.
伯仲之間見伊呂, 伊尹과 呂尙에 비교하여도 뒤지지 아니하니,
指揮若定失蕭曹。그 분의 통찰력은 마치 蕭何나 曹參을 무색케 할 만하다.
運移漢祚終難復, 운이 바뀌어 한나라의 운명이 마침내 회복되기 어려우니,
志決身殲軍務勞。뜻을 단단히하고 몸을 죽여서 군대를 다스리느라고 지쳤구나.
7言律詩인 이 시에서 전반부는 사라지지 않을 諸葛亮의 명성을 칭송하고 있
고, 후반부에서는 대업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애석해하는 심정을 담고 있다. 첫 구의
‘諸葛大名垂宇宙’는 諸葛亮에 업적이 온 천지에 드리웠다라고 칭송을 하는 것
으로 이를 통해 諸葛亮에 대한 杜甫의 존경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제4구에서
‘萬古雲霄一羽毛’라고 한 것에 대해 金聖嘆은 ‘羽毛’는 그 청렴함을 묘사한
것이고, ‘雲霄’는 그 높음을 묘사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전반부는 공명의 위대한 명성이 사라지지 않는 것을 흠모한 것이고, 후
반부는 대업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애석해하는 것으로 흠모함과 애석함을 충분히
드러냈다고 평가를 하였다.21) 沈德潛은 이 구에 대해서 봉황이 높이 나는 것처럼
20) 陳壽, 三國志卷35, 「諸葛亮傳」, p. 918: “章武三年春, 先主於永安病篤, 召亮
於成都, 屬以後事, 謂亮曰‘君才十倍曹丕, 必能安國, 終定大事。”
정호준 / 杜詩 속에 나타난 諸葛亮 形象 考 17
그 재주와 품덕에 미칠 수 없음을 묘사한 것이라 하여22), 이 구가 孔明이 높은
인격과 재능을 지니고 있던 것에 대한 杜甫의 높은 칭송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
놓고 있다. 그리고 頷聯은 孔明이 뛰어난 재상이었다는 것을 역대의 賢相의 전
범으로 꼽히는 인물들과의 대비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즉 商湯의 伊尹,
周의 呂尙, 漢의 蕭何23)와 曹參24)으로 모두 명재상의 典範으로 꼽히는 인물들
이다. 杜甫는 諸葛亮이 이들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하여 그의 재능에
대한 칭송을 다시 한 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杜甫는 이 시를 통해 諸葛亮에
대한 높은 찬사를 바침으로 그의 존경심을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가 있듯이 杜甫는 諸葛亮의 명재상으로서의 재능을 칭송하
는 것을 통해 출구가 보이지 않는 암담한 현실 속에 처해 있는 나라를 구할 능력을
지닌 인재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大曆 원년 여름에 지은 「夔州歌十絶句」(卷15)의 제9수에서도 杜甫는 다음
과 같이 諸葛亮을 그리워하고 있다.
21) 金聖嘆, 杜詩解(沈陽: 萬卷出版公司)卷3, 「詠懷古迹五首」, p. 163: “羽毛狀
其淸, 雲霄狀其高也。……前解慕其大名不朽, 後解惜其大功不成。慕是十分
慕, 惜亦是十分惜。”
22) 沈德潛 編, 唐詩別裁集卷14, 「詠懷古跡五首」, p. 193: “雲霄羽毛猶鸞鳳高
翔, 狀其才品之不可及也。”
23) 蕭何(?-B.C193): 沛縣(지금의 江蘇省) 사람으로, 전한 건국의 일등공신이다. 패현의
하급관리를 지내다가 B.C. 209년 劉邦을 도와 秦의 수도 咸陽을 점령했다. 그 후
진의 丞相 御史府에 있던 律令集들을 거두어 전국의 戶口와 민정을 장악했다. 項羽
가 유방을 漢王에 봉했을 때도 그는 한의 승상으로 있으면서 關中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 확대에 주력했고, 韓信을 유방에게 천거하여 대장으로 삼기도 했다. 楚·漢 전쟁
때 그는 승상의 신분으로 관중 지방에 머물면서 그 지역을 한군의 후방기지로 만들어
병력·군비의 보급을 원활하게 했다. 유방이 천하를 평정한 후 그는 鄼侯에 봉해졌으며,
진의 법을 참고한 九章律을 만들어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유방이 異姓王
제후들을 암살하는 데 협조하여 相國에 임명되었다.
24) 曹參(?-B.C 190년): 前漢의 명장이자 개국 공신. 沛郡 출신으로, 자는 敬伯이다.
원래 秦나라의 옥리였으나, 高祖 劉邦의 거병 시에 뜻을 같이하였다. 韓信과 더불어
군사면에서 활약을 하였다. 진나라와 項羽를 공략하여 한나라의 통일대업에 이바지한
공으로 건국 후에는 공신서열 2번째 平陽侯로 책봉되었고 식읍 10600호를 하사받았
다. 九江王 黥布의 반란을 평정하기도 하였다. 高祖가 죽은 뒤에는 蕭何의 추천으로
상국이 되었다.
18 세계문학비교연구 제31집 (2010년 여름호)
武侯祠堂不可忘, 무후의 사당은 잊을 수가 없는데,
中有松栢參天長。그 속의 소나무와 잣나무가 높은 하늘에 솟아있었네.
干戈滿地客愁破, 전운이 온 땅에 감도는 시대에 나그네의 수심을 없애주고,
雲日如火炎天凉。구름낀 무더운 여름날 시원함을 느끼게 해 주네.
첫 구에서 武侯의 사당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한 것은 실제로는 武侯를 잊을
수 없다는 시인의 감정의 비유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제3구는 武侯의 시대로
부터 시인이 처한 시대로 시점이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즉 “安史의 亂”은 간신히
진압되었지만, 그 후로도 藩鎭의 할거와 吐蕃의 침입 등 당나라는 내우외환이
그치지 않았다. 이런 전란의 시대에 유랑하며 憂國憂民의 의식이 투철했던 杜甫
는 당연히 諸葛亮같은 충성되고 재능있는 영웅이 나와 혼란을 종식시켜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시인의 생각을 3구와 4구에서 표현
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같은 해 가을에 지은 「八哀詩」(卷16)의 제3수인 「贈左僕射鄭國公
嚴公武」에서도 “公은 諸葛孔明처럼 蜀지방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고, 文翁처
럼 儒家의 교화를 이루었네.(諸葛蜀人愛, 文翁儒化成。)”라고 하여 세상을 떠
난 嚴武을 애도를 하며 諸葛亮에 비유하고 있다. 이 속에는 세상을 구제할 수
있는 재능있는 인재가 존재하지 않게 됨을 슬퍼하는 감정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杜甫는 만년에 蜀에 이른 후에 諸葛亮의 뛰어난 재능을 흠모하는 시를 많이
남기고 있다. 이는 安史의 亂 후에 당 왕조에 중흥의 기운이 일어나고 있는 분위
기에서 나라를 백성을 구하기 위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던 杜甫였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 이상을 실현시키기에는 점점 힘이 부쳐가고 있었다. 그래서 자
신의 이상을 실현시켜 줄 능력있는 인재를 출현을 杜甫는 갈망하게 되었고, 모범
이 되는 모델로서 諸葛亮을 그리게 된 것 같다. 물론 이는 杜甫가 諸葛亮의
근거지였던 蜀 지방에 도착하게 된 것과도 분명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정호준 / 杜詩 속에 나타난 諸葛亮 形象 考 19
Ⅳ. 자신의 처지에 대한 감정 이입
杜甫는 비극적인 일생을 산 사람이라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뛰어난 詩
的 재능을 지니고 있었지만 과거에 합격하지 못해 변변한 벼슬을 하지 못했으며,
강성했던 자신의 조국도 쇠퇴 일로에 처하게 되어 나날이 몰락해가는 것을 바라보
아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노년에 처하게 된 시인은 점점 자신의 한계를
절감해야 했고, 이상을 실현시킬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하고 절망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蜀지방에 머물게 되었고, 그곳에서 諸葛亮에 대한 고사와
추앙하는 말을 많이 듣게 되었을 것이다. 그 속에서 諸葛亮도 이상을 실현시키지
못한 才士였다는 점에서 同病相憐의 감정을 느꼈을 것이고, 이러한 감정은 諸
葛亮을 노래한 시 속에서 자신의 감회를 이야기하는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
게 되었다. 본 절에서는 이러한 부분을 몇 군데 살펴보도록 하겠다. 「蜀相」尾聯
에서 杜甫는 “군사를 일으켜 승리하기 전에 그 몸이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영원
히 후대의 영웅들이 눈물로 소매를 적시게 하네. (出師未捷身先死, 長使英雄
淚滿襟。)”라고 하였다. 이 두 구에 대해 王嗣奭은 諸葛亮에 대한 슬픔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천고의 영웅들 중 재주는 있으나 명운이 따라주지 못한 사람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것으로 그 의미가 무궁하다고 하였다.25) 따라서 이 구는
諸葛亮의 비극적인 일생을 슬퍼함과 동시에 자신의 비극도 슬퍼하는 감정을 함
축적으로 포함하고 있다고 보더라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또한 杜甫는 「登樓」(卷13)의 尾聯에서 “가련한 후주같은 임금도 백성의 제
사를 받는데, 날 저무는 속에서 잠시 양보음을 읊조리네.(可憐後主還祠廟, 日暮
聊爲梁父吟。)” 라고 하였다. ‘梁父吟’을 諸葛亮이 출사하기 전에 즐겨 불렀
던 노래로, 諸葛亮같은 이가 현재 없음을 탄식함과 동시에 쓰임받지 못하는 자신
의 신세에 대한 한탄의 의미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26) 즉 孔明의 비극적 삶이
25) 王嗣奭, 杜臆(上海: 上海古籍出版社)卷4, 「蜀相」, p. 120: “蓋不止爲諸葛悲
之, 而千古英雄有才無命者, 皆括于此, 言有盡而意無窮也。”
26) 楊倫, 杜詩鏡銓卷11, 「登樓」, p. 520: “傷時無諸葛之才, 以致三朝鼎沸, 寇盜
頻仍, 是以吟想徘徊, 至於日暮而不能自已耳。幷自傷不用意亦在其中, 其興
寄微婉若此。”
20 세계문학비교연구 제31집 (2010년 여름호)
시인이 시를 창작하는 모티브가 되었지만, 杜甫는 작품 속에서 諸葛亮의 이야기
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자기의 슬픔과 감정을 기탁하고 있는 것이다.
大曆 2년에 지은 「諸葛廟」의 尾聯에서도 “갑자기 양보음을 노래하던 것이 생각
나니, 몸소 밭을 갈고 있어도 아직 늦지 않은 것 같구나.(欻憶吟梁父, 躬耕起未
遲。)”라고 하여 孔明을 빌어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다만 위의 「登樓」에서는
중용되지 못한 실망한 감정이 강했다면, 여기에서는 出仕의 희망의 끈을 아직
놓지 않고 있는 杜甫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듯하다. 특히 楊倫은 이 부분을 大曆
元年 가을에 劉備를 사당을 참관하고 지은 「謁先主廟」의 마지막 부분에서,
遲暮堪帷幄, 나는 이미 늙어 군영에 참여할 수 없어,
飄零且釣緡。타향을 떠돌며 낚시대만 드리우고 있네.
向來憂國淚, 나라를 근심하여 흘리는 눈물이
寂寞洒衣巾。쓸쓸하게 옷자락에 뿌리네.
라고 이야기 한 것을 대비시켜서 諸葛亮이 몸소 밭을 갈다 출사를 하게 된 것은
그리 늦은 시기가 아니었지만, 杜甫는 만년이 되어도 뜻을 이루지 못하여 슬퍼하
는 것이라 하며, 杜甫가 諸葛亮을 빌어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고 있음을 보여주
고 있다.27)
大曆 원년에 지은 「古柏行」(卷15)의 마지막 부분에서 杜甫는 재목이 큰 것은
쓰이기가 어렵다고 하며 諸葛亮을 빌어 자신의 처지를 드러내고 있다.
大廈如傾要梁棟, 큰 집이 기울어지는 것 같아 서까래와 기둥이 필요한데,
萬牛回首丘山重。이 나무는 무겁기가 산과 같아 만 마리의 소도 고개를 돌리네.
不露文章世已驚, 문채를 드러내지 않고도 이미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未辭剪伐誰能送。베어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지만 누가 옮길 수 있겠는가?
苦心豈免容螻蟻, 근심을 하면서도 어찌 땅강아지와 개미가 침범하는 것을 면치 못하는가?
香葉終經宿鸞鳳。향기로운 잎에는 마침내 봉황이 깃드네.
志士幽人莫怨嗟, 지사와 은자는 원망하지 말지니,
古來材大難爲用。예로부터 큰 재목은 쓰이기 어렵다네.
27) 楊倫,杜詩鏡銓卷12,「諸葛廟」, p. 599: “南陽時年尙少, 雖躬耕以待際會, 何
遲之有。二句正傷己之垂暮無成也, 與前詩遲暮堪帷幄, 皆以武侯自況。”
정호준 / 杜詩 속에 나타난 諸葛亮 形象 考 21
이 시는 夔州의 諸葛亮 사당에 있는 오래된 잣나무를 보고, 諸葛亮에 대한
회상과 감회를 비유적으로 쓴 시이다. 인용한 부분은 모두 24구의 시 중 마지막
8구에 해당한다. 이 시의 앞부분에서는 諸葛亮을 흠모하는 시인의 감정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부분에 이르러서는 쓰임받지 못한 자신의 처지에 대해 이야
기하고 있는 것이다. 시에서 보이듯이 큰 재목은 쓰임받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
며 스스로 위안을 삼는 시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마지막 두 구에 대해 王嗣奭
은 “공은 평생토록 孔明을 극찬하였는데, 비유의 뜻을 엿볼 수 있다. 孔明은 재주
는 뛰어났으나, 그 쓰임을 다하지 못했고, 공은 일찍이 스스로를 稷과 契에 비유
했으나, 사람들에게 등용되지 못했기 때문에 작품의 끝에서 큰 재목은 쓰이기 어
렵다고 한 것이다.(公生平極贊孔明, 蓋竊比意。孔明才大而不盡其用, 公嘗
自比稷契而人莫之用, 故篇終結出材大難用。)”28)라고 평하고 있다. 즉 孔
明은 재주를 가지고 국가의 통일을 위해 힘쓰며 자신의 한 몸을 희생했고, 그 재주
를 다 펼치지 못했던 것이다. 杜甫는 여기에서 이 사실을 反用해서 국가를 위해
일할 큰 뜻을 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럴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던 자신에 대
해 슬퍼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杜甫는 諸葛亮의 뛰어난 능력에 대한 칭송을 통해 현재의 자신의 모습
을 살펴보게 되었고, 이상을 실현시키지 못한 자신의 처지에 대해 슬퍼하고 한스
러워하는 감정을 작품 속에서 드러내고 있다. 杜甫 자신 뿐만 아니라, 당 제국에
도 하나의 재앙으로 자리잡았던 “安史의 亂”이 종결되었지만, 吐蕃의 침입과 節
度使의 반란 등 도처에서 전란이 끊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杜甫는 자신이 능력을
발휘하고픈 생각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더구나 인생의 말년에
접어든 杜甫에게는 이러한 생각이 더욱 간절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杜甫
가 長江에서 배를 타고 동쪽으로 가며 선상 생활을 시작한 것도 다시 한 번 수도
인 장안으로 가 벼슬을 구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킬 강한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다.
28) 王嗣奭, 杜臆卷7, 「古柏行」, p. 243
22 세계문학비교연구 제31집 (2010년 여름호)
Ⅴ. 나오는 말
지금까지 杜詩 속에서 諸葛亮에 대해 노래하고 있는 작품을 통해 그 속에서
杜甫가 표현하고자 한 내용을 살펴보았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杜詩 중에서 諸
葛亮에 대한 작품이 집중적으로 창작되는 시기는 杜甫가 벼슬을 그만두고 蜀
지방에 도착했을 때부터이다. 이는 문헌 속에서만 諸葛亮을 접했던 杜甫가 蜀漢
의 근거지인 蜀 땅에 거주하게 되면서 劉備와 諸葛亮에 관련된 많은 유적지를
직접 참관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 지역에 전해지고 있던 고사와 전설을 많이 습득
하게 된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杜甫가 成都에서 머물
렀던 草堂과 武侯祠가 현재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것을 보아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시를 고찰해 본 결과 첫째, 杜甫는 유가 사상에 입각한 올바른 군신 관계를
정립하기를 바라고 있었고, 그 모범이 되는 예로 劉備와 諸葛亮을 상정하고 있었
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杜甫는 군주에 의한 일방적인 지시와 명령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재상을 위시로 한 여러 대신이 화합을 하여 군주를 받들면서 태평
성세를 이룩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에서는 太宗의 때를 劉備와 諸葛亮의 관계가 실현된 때로 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로는 諸葛亮의 뛰어난 재능에 대한 칭송을 담고 있었다. 이는
어느 인물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시에서는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지
만, 諸葛亮에 대한 杜甫의 칭송은 좀 각별했던 것 같다. 이는 자신의 조국이 어려
운 현실에 처해있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강한 열망이 작품 속에서 드러난 예라
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려운 현실을 타개해 줄 諸葛亮과 같은 현신의 출현을
갈망하고 있던 杜甫의 생각을 시에서 표현해 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셋째, 이
런 諸葛亮의 재능에 대한 칭송을 통해 이상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늙어가고 있는
자신의 신세에 대해 한탄하고 있는 내용이 작품 속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유가적
인 가풍에서 성장한 杜甫는 당연히 벼슬을 해서 자신이 지닌 재능을 펼칠 꿈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위해 열심히 노력을 했지만 말년에 유랑 생활을 하며 근근이
목숨을 연명해 가는 자신의 처지를 諸葛亮의 일생에 빗대어 보았을 때 회한이
없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감정을 시 속에서 은유적으로 표현해 내면서 한편으로
정호준 / 杜詩 속에 나타난 諸葛亮 形象 考 23
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는 자신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諸葛亮을 소재로 한 작품의 고찰을 통해 杜甫가 “詩史”라고 불려지는
이유가 사실주의적 시의 창작을 통해 당시의 현실을 반영하고 비판하고 있기 때문
인 것이 주된 원인이겠지만, 개인의 일생에 대해서는 정당하고 합리적인 평가를
내려 역사 속의 인물이 하나의 위치에 자리잡게 하는 데에 큰 공헌을 세웠다는
것도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았다.
주제어
두보, 제갈량, 군신 관계, 회재불우, 시사
❖ 참 고 문 헌
杜甫 著/仇兆鰲 注, 杜詩詳注, 北京: 中華書局, 1995.
杜甫 著/楊倫 箋注, 杜詩鏡銓, 臺北: 華正書局,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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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嗣奭 撰, 杜臆,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1983.
陳貽焮 著, 杜甫評傳, 北京: 北京大學出版社, 2003.
劉大杰 著, 中國文學發展史, 홍콩: 三聯書店有限公司, 1992.
沈德潛 編, 唐詩別裁集, 北京: 中華書局, 1981.
朱熹 撰, 四書章句集注, 北京: 中華書局, 2001.
陳壽 撰/裴松之 注, 三國志, 北京: 中華書局, 2002.
丁福保 輯, 歷代詩話續編, 北京: 中華書局, 2001.
羅貫中 撰/毛宗崗 評, 三國演義, 臺北: 三民書局, 1989.
陳增杰, 唐人律詩箋注集評, 杭州: 浙江古籍出版社, 2003.
金聖嘆, 杜詩解, 沈陽: 萬卷出版公司, 2009.
謝冰瑩 等 註譯, 古文觀止, 臺北: 三民書局, 1992.
❖ 中文摘要
杜詩中的諸葛亮形象考
정호준
诸葛亮作为一代贤相名臣而後世稱颂。杜甫晚年多次创作歌颂诸葛亮
的诗。杜诗中,吟咏历史人物以诸葛亮为最。这些诗歌数量大,质量
高,表现出杜甫对诸葛亮的尊敬和爱慕之情。
特别是此类诗歌创作于上元元年,杜甫到达成都以後。其主要作品有
「蜀相」、「武侯庙」、「登楼」、「八陣圖」、「謁先主廟」等十二多首。成都
和其後杜甫所住的夔州都是属蜀汉的领土,有很多遗迹露出着往日之历
史。杜甫在蜀,感物思念古人,觸景兴情,写下许多关于诸葛亮的诗歌。
本论文对这类诗歌进行了考察,从对于理想的君臣关系之所懷、对于
诸葛亮的才能之稱颂、对于自己的处境之感懷等三個方面进行解读。
通过考察,认为杜甫吟咏诸葛亮的诗不但其感情很深,而且对诸葛亮
的论定很正确。这样的事情也表示了"诗史 杜甫"之另外的真面目。
關鍵詞
杜诗,诸葛亮,君臣關係, 懷才不遇, 诗史
이름: 정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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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접수일: 2010년 4월 09일
심사완료일: 2010년 6월 11일
게재확정일: 2010년 6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