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35번째 시간으로서 “죄의 무게” 罪の重さ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로마서 5장 12절부터 14절까지로 하였습니다만, 사실 12절부터 시작하는 말씀은 5장 끝부분인 21절까지 이어져
있는 내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12절부터 21절까지를 하나로 보아야 합니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정보량이
많고 하기 때문에, 몇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따라서 오늘은 로마서 5장 12절부터 21절까지의 내용 중에서
서론에 해당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천 년 전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을 중에 보면 영생에 대해서 많이 언급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16절
“1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モーセが荒野で蛇を上げたように、人の子も上げら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それは、信じる者がみな、人の子にあって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す。」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一人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요한복음 10장 28절
“28.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わたしは彼らに永遠のいのちを与えます。彼らは永遠に、決して滅びることがなく、また、だれも彼らをわたしの手から奪い去りはしません。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영생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그렇다면 영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말 그대로 영원한
생명,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영원히 살게 된다면 좋으십니까. 100년 200년이 아니라 천년 만년 동안 영원히 살게 된다면 정말로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을 들으셨을 때, 아이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만도 지겨운데 천년 만년이나 살아서 뭘 해……
만약에 이처럼 영원히 산다는 것에 대해서 지겹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이는 성경말씀을 잘 이해를 못하셨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영원히 산다고 한다면, 나이가 들어서 기운도 없고 온몸 여기저기가 쑤시고 그러는데 오래 살아 봤자 뭘
하나……
그렇게 생각하시기 때문에 오래 산다는 것에 대해서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21장 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神は彼らの目から涙をことごとくぬぐい取ってくださる。もはや死はなく、悲しみも、叫び声も、苦しみもない。以前のものが過ぎ去ったからである。」
여러분께서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기뻤던 때를 꼽으라면 언제가 가장 기쁘셨습니까. 한 번도 없었어요? 에이, 그럴 리가 없지요.
금방 생각이 안 난다 하더라도 잘 생각해보시면 분명히 기뻤을 때, 즐거웠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본다면 그런 기쁜 감정이나 즐거운 감정을 생각해내기가 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힘들거나 슬프거나
했을 때의 기억이 더 많이 남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지요.
여기에는 그럴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2014년 벨기에에 있는 루벤대학의 두 교수가 감정의 지속시간에 대해서 연구를 한 논문을
발표했다고 하는데, 이 논문에 의하면 기쁨이 지속되는 시간은 길어 봤자 35시간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하는데, 반면에 증오는 어느
정도 지속되냐 하면 60시간이나 지속되고, 슬픔이라고 하는 감정은 무려 120시간이나 지속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머리에는 기쁨이나 즐거움보다도 슬픔이나 괴로움이 더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에 인생은 괴롭다고 생각되실 지 모르지만,
실제로 하나하나 따지고 본다면 안 좋은 일 못지 않게 좋았던 일, 기뻤던 일, 즐거웠던 일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된다고 하는 것은 돈이나 건강 같은 이 세상의 근심걱정을 다 안은 채로 살아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는 아무리 기쁜 감정이라 하더라도 길어 봤자 이틀도 못 간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날에는, 지금까지 기뻤던 그 기억보다도 훨씬 더 큰 기쁨과 즐거움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좀 영생에 대한 기대가 생기셨나요? 예, 지옥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크나큰 고통이겠습니다만,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크나큰 기쁨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면 크나큰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된다는 사실은 이제 알았습니다.
자, 다음으로 우리 좀 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주일학교 아이들이나 새신자나 아니면 아직 믿음이 없는 분들이 여러분께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을 안 믿으면 죽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왜 이와 같이 영원히 살 수 있게 됩니까.
이와 같은 질문을 받으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허허어. 그냥 성경에 적혀 있으니까 믿어라?
교회에 오래 다니셨다 하더라도 이 질문에 대해서 곧바로 명확한 답을 하실 수 이는 분들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구원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오늘부터 성경말씀을 배워가는 과정에서 이 부분을
명확하게 이해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면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죽음의 시작>이라고
하는 문제를 이해하여야만 합니다.
따지고 보면 애초에 사람은 어떠한 존재로 만들어졌습니까. 본래부터 어느 정도 살다가 때가 되면 죽는 존재로 만들어졌나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창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봐야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여러 가지 명령을 하십니다.
창세기 1장 27절~28절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神は人をご自身のかたちとして創造された。神のかたちとして人を創造し、男と女に彼らを創造された。
神は彼らを祝福された。神は彼らに仰せられた。「生めよ。増えよ。地に満ちよ。地を従えよ。海の魚、空の鳥、地の上を這うすべての生き物を支配せよ。」
하지만 여기에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벌칙이 없습니다. 명령에 있어서의 중요성, 말하자면 여러 명령이 있을 경우
어느 명령이 더 중요한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 벌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형법도 그렇잖아요? A라고 하는 죄를 지으면 벌금인데, B라는 죄를 지으면 무기징역이에요. 이럴 경우에는 A라는 명령보다 B라는
명령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하신 명령 중에서 벌칙이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창세기 2장 16절~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神である主は人に命じられた。「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하나님께서는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일명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면서, 만약에 이 명령을 어기는 날에는, 벌금도
아니고 징역도 아니고 사형,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 명령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어떻게 합니까. 그렇습니다. 이 명령을 어기게 되지요.
창세기 3장 6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そこで、女が見ると、その木は食べるのに良さそうで、目に慕わしく、またその木は賢くしてくれそうで好ましかった。それで、女はその実を取って食べ、ともにいた夫にも与えたので、夫も食べた。
하와가 따먹고 이를 아담에게 주어서 아담도 맛있게 그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십니다.
창세기 3장 19절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あなたは、顔に汗を流して糧を得、ついにはその大地に帰る。あなたはそこから取られたのだから。あなたは土のちりだから、土のちりに帰るのだ。」
하나님께서는 그 먹지 말라고 하신 명령을 어기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명령을 어기고 말았던 그들에게는
결국 흙으로 돌아가게 되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이 사실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무엇입니까. 그렇죠. 하나님 명령을 어기지 않았더라면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말았기 때문에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리고 죄로 인해서 죽음이 비로소 우리한테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원하셨습니다. 이 죄악을 해결하고 또다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크나큰 기쁨과 함께 영원히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 어떻게 하셨느냐 하면,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여기까지가 말하자면 총론입니다. 12절부터 21절까지의 개괄적인 설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세부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
“12.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⑫こういうわけで、ちょうど一人の人によって罪が世界に入り、罪によって死が入り、こうして、すべての人が罪を犯したので、死がすべての人に広がったのと同様に──
자, 이 말씀에 의하면 한 사람 때문에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해요.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이 세상에 들어온 죄라고
하는 것이 바로 창세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렇다면 이 말씀에서 가리키는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런 생각 해보셨습니까. 아담과 하와 중에서 누가 더 나쁩니까.
앞서 살펴본 창세기 3장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먼저 따 먹은 사람이 누구에요? 예, 하와지요.
그렇다면 하와가 제일 나쁘고,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먹지 말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와이프가 준다고 해서 그걸 낼름
받아먹어버린 아담은 그 다음으로 나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게 적어도 이 로마서 5장에서 하와 이야기가 한 번도 안 나옵니다. 그럼 누가 나오냐 하면 오늘 본문 말씀인
14절에 보면 ‘아담’이 나옵니다. 음? 혹시 잘못이 아닐까? 하고 의심할까봐 14절에 보면 ‘아담’이라고 하는 이름이 몇 번
나와요? 예, 세 번이나 나옵니다.
이것 참 억울하지 않습니까. 직접 따먹은 것은 하와이고, 아담은 하와가 주는 것을 먹었을 뿐인데, 왜 아담만 나쁘다고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아내가 차려주는 밥을 싫다면서 안 먹을 수 있어요? 죽을라고 환장했습니까? 뭐, 이러면서 아담을 두둔하면서, 이와 함께
남자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어하는 마음도 이해를 합니다만, 이에 대한 답은 역시 성경에 보시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장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それゆえ、男は父と母を離れ、その妻と結ばれ、ふたりは一体となるのである。
여자가 선악과를 먼저 따먹었기 때문에 남자보다 여자가 더 벌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 해석은 어디까지나 나중에 사람들이 한 해석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부가 한 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저희 상황을 본다면 저는 지금 종교자격으로 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제 아내는 종교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 몸을 이루는
부부이기 때문에 똑같이 체류자격이 주어지는 것이고, 기간도 똑같이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하와가 먹었는데 아담이 안 먹었다면 또 모를까, 둘이 함께 사이 좋게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다면, 이는
50보 100보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죄를 지은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를 통틀어서 ‘한 사람’이라고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다.
12절에 의하면 이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로 인해서 이제 그들만이 아니라 그들 자손들까지도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게 되고
말았습니다.
다음으로 13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13절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実に、律法が与えられる以前にも、罪は世にあったのですが、律法がなければ罪は罪として認められないのです。
여러분께서는 혹시 그런 생각을 하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선악과는 도대체 어떤 성분이
들어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라고 하는 열매에는 어떤 특수한 성분이 들어있었기에, 하나님은 그것을 먹지 말라고 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먹었더니
눈이 밝아졌다고 느낀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거기에는 어떤 성분이 들어 있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슨 마약과도 같은 성분이 들어 있어서, 이것을 먹으니까 정신이 확 간 것처럼 느껴진
것이었을까요?
어쩌면 이 소박한 의문을 해결해주는 것이 바로 이 로마서 5장 13절 말씀인지도 모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있었지만,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마치 그런 거죠. 지금 일본에서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성인 둘이 함께 한 자전거를 타는 것이 금지되고 있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무슨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을 보면 남녀가 자전거를 함께 타면서 데이트를 하는 장면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지금 일본에서는
이제 그렇게 하지도 못하겠어요.
이를 보면 어떻습니까. 똑같이 둘이서 자전거를 타는 행위인데, 이를 금지하는 법이 생기기 전에는 아무런 문제가 안됐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위험하니까 금지한다는 법이 생기니까, 이제 그 다음부터는 이를 어기면 경찰의 단속을 받게 된 것이지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입니다만,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기 전에 아무 것도 모른 상태에서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한다면,
그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고 하니,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이 없었을 때에는 선악과를
먹는 것이 죄가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아담도
알고 하와도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시점부터는 죄를 죄로 여기게 되어서 이를 어기게 되면 무서운 벌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무서운 벌, 그것이 무엇입니까.
죄를 지은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3장 17절~19절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また、人に言われた。「あなたが妻の声に聞き従い、食べてはならないとわたしが命じておいた木から食べたので、大地は、あなたのゆえにのろわれる。あなたは一生の間、苦しんでそこから食を得ることになる。
大地は、あなたに対して茨とあざみを生えさせ、あなたは野の草を食べる。
あなたは、顔に汗を流して糧を得、ついにはその大地に帰る。あなたはそこから取られたのだから。あなたは土のちりだから、土のちりに帰るのだ。」
이 말씀, 창세기 2장 16절과 비교해볼까요?
창세기 2장 16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神である主は人に命じられた。「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하고 돈을 버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자아 성취를 위해서도 필요하겠습니다만, 기본적인 문제가 의식주 문제
아니겠습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열심히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에는 어땠습니까.
먹는 문제요? 없었습니다. 지천에 널려 있는 먹을 거리들을 마음대로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에이, 과일들만 먹으면 질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에덴이라고 하는 곳은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과일을 먹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그 어떤 산해진미를 맛보는 것보다도 훨씬 더 큰 기쁨이 있었을 것입니다.
먹는 문제, 식은 그렇다고 치고, 그러면 의, 옷 문제는 어떨까요?
창세기 2장 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そのとき、人とその妻はふたりとも裸であったが、恥ずかしいとは思わなかった。
죄를 짓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옷에 대한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세기 3장 7절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こうして、ふたりの目は開かれ、自分たちが裸であることを知った。そこで彼らは、いちじくの葉をつづり合わせて、自分たちのために腰の覆いを作った。
죄를 짓기 전에는 옷이 필요 없었습니다.
옷이 없이 벌거벗은 채로 지내면 여기 긁히고 저기 찔리고, 그리고 온갖 벌레들한테 물리고 그럴 것처럼 생각하기 십상인데,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에덴에서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셨기 때문에 옷을 입고 있지 않아도 찔리는 일도 없고 긁히는 일도 없습니다. 벌레한테도 물리지 않아요.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인해서 우리는 진정으로 벌거벗은 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지켜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뭇잎으로라도 옷을 만들어 입을 수밖에 없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럼 ‘주’, 사는 곳은요?
우리가 얼핏 생각하기에 에덴이라고 하면, 무슨 나무 숲 속 정글 같고, 그런 데에서 대충 누워 자면서 살지 않았을까,
그렇게 되면 위생적으로도 불결하고, 정말 여러가지로 참 불편했겠다 하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에덴은 하나님께서 이 지구상에
지으신 최고의 낙원입니다. 지금 우리 식으로 본다면 최상의 편의시설이나 문화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는 환상적인 곳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그 곳에서 영원히 편안하게 살아갈 권리가 주어졌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죄를 지음으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세기 3장 24절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こうして神は人を追放し、いのちの木への道を守るために、ケルビムと、輪を描いて回る炎の剣をエデンの園の東に置かれた。
아담과 하와는 그와 같은 정말 하와이나 오키나와, 안 가봤습니다만, 아무튼 그런 환상적인 휴양지에 있는 특급리조트호텔 부럽지 않은
곳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었으나, 결국 그들은 죄를 지음으로 인해서 살아갈 수 있는 공간 마저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들이 지은 죄의 대가가 얼마나 큽니까. 그들에게는 이세상 최고의 의식주가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크나큰
기쁨과 함께 영원토록 허락된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죄를 지음으로 인하여 의식주의 문제가 최고에서 최악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힘들게 고생을 해야
합니다. 입을 옷과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고생을 해야만 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가 아담과 하와만의 문제라고 하나요?
오늘 본문 말씀 중 14절을 봅니다.
로마서 5장 14절
“⑭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⑭けれども死は、アダムからモーセまでの間も、アダムの違反と同じようには罪を犯さなかった人々さえも、支配しました。アダムは来たるべき方のひな型です。”
모세라고 한다면 이는 율법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당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의하면 율법이 있기 전인 사람들을 모두 포함해서 아담처럼 죄를 짓지 않은 사람에게 있어서도 죄의 대가, 사망이 왕노릇한다는
것은 죄의 대가인 사망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너무나도 억울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니라고, 나는 그런 죄를 짓지 않았다고 아무리 우겨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죄가 없이 자신의 힘만으로 의롭게 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합니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갈 분만 아니라, 우리의 죄로 인하여 말미암아 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한 고통으로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도 완전히 해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우리 질병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질병의 원인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야지만 그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지고 있던 죄의 무게와,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셨다는 사실을 배워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를 깨닫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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