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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무치 시내 중심의 홍산공원에 세워져 있는 임칙서 석상 아편전쟁과 임칙서
아편전쟁은 영국이 식민지개척에 나선 서구 자본주의가 잠자는 동양 봉건 전제주의의 청나라에 비수를 꽂은 일대 사건이었다. 이 전쟁으로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고 아편전쟁전에는 과 청제국이 주연 을 맡은 이 피비린내나는 역사의 무대에서 고통스럽게 탄생한 것이 바로 식민지 홍콩이다.
아편무역은 청나라 강희-옹정-건륭으로 이어지는 1백30여년간의 태 평성세가 끝나고 국운이 쇠하는 시기와 맞물려 번성한다. 아편무역이 본격화되기 전에는 영국은 청과의 무역에서 상당한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영국은 생사, 견직물, 찻잎 등을 청나라에서 수입해갔으나 중화사상에 젖은 청은 대등한 통상 자체를 거부하며 영국상품을 거의 수입하지 않았다. 무역 적자를 보전하기 위해 영국이 착안한 것이 아편수출이다.18C말부터 아편수입이 본격화돼 청의 은이 수입대금으로 대거 빠져 나가자 은본위제인 청의경제는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1806년 한해 동안 중국이 수입한 아편은 약 27만t으로 추산되며 아 편전쟁 직전인 1838년엔 1800년에 비해 10배나 늘어났다. 청의 황제 도광제는 당시 호광(호북-호남성)총독 임칙서(린쩌쉬)를 흠차대신에 임명하여그에게 황제의 명령권인 조칙권을 부여하여 '아편유입을 저지하라.'는 특명을 내린다. 엄정한 판관으로 이름을 날려 '임청천'이라는 별명을 얻은 임칙서 는 열렬한 아편금지론자였으며 강직한 인물이었다. 시골 훈장 아들로 태어나 총독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청대 고관중 외국 문헌과 국제 법에 가장 밝은 사람으로 꼽혔다.
임칙서가 광동성에 도착한 것은 1839년 1월25일. 도착 9일만에 그는 아편을 중간거래해온 중국인 상회에 추상같은 명령을 내린다. '오랑캐들에게 앞으로 영원히 아편을 들여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 아내라. 그러지 못하면 황명으로 처형한다.' 이어 임칙서는 영국상인등이 갖고 있던 아편 1천4백25t을 압수, 소금물에 완전히 녹여 바다로 흘려보낸다. 그러자 보복에 나선 영국은 군동원 령을 내렸고 이듬해 6월 원정군을 실은 군함이 마카오해역에 도착한다.
이것이1차 아편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영국 함대는 남동부해안을 끼고 북상하면서 천진(톈진) 앞바다까지 와 수도 북경(베이징)을 짓밟아 버릴 기세였다. 1842년 8월29일 청조정은 결국 굴복하고 굴욕적인 남경(난징)조약에 도장을 찍음으로 인해 홍콩은 남경조약 제3조에 따라 영국에 영구 할양된다. 남경조약엔 아편무역에 대해 일체 언급이 없지만 영국의 아편무역은 이 조약을 계기로 '무언의 공식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이후 아편무역은 더욱 기승을 부려 늙은 청제국을 막다른 골 목으로 몰아넣었다. 아편무역으로 은이 유출돼 은값이 뛰자 죽어나는 것은 일반 백성들이었다. 은값이 뛴다는 것은 은시세를 기준해 동전으로 세금을 내던 백성들 에겐 실질적인 증세였다. 백성들의 생활이 피폐해지면서1850년 광서(광시)에서 과거 낙방생 홍수전(훙슈취안)을 중심으로 뭉친 배상제회'일종의 기독교'가 세상을 뒤바꾸겠다고 항거의 깃발을 들고 일어난 민란이 태평천국의 난이다. 임칙서는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러 가다가 중도에서 병사한다. 아편추방의 기치를 든 것까는 좋았으나 어느것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죽었다.급변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간파하지 못한 임칙서는 동점(東占)하려는 서방세력에 밀려 좌절했지만 부국강병을 꿈꾸던 그의 치열한 정신은 강유위(캉유웨이) 등 자강파로 이어졌다.
아편전쟁은 임칙서가 죽고도 계속됐다. 영국은 1856년 애로우호사건을 빌미로 청과 2차 아편전쟁을 일으켜 홍콩섬위의 구룡반도 남단과 앙선주(스톤커터스 섬)를 할양받았다. 이어 1898년엔 구룡반도 북부의 신계를 99년간 조차해 '동방명주' 로 불리는 현재의 홍콩식민지 지도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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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직에서 45년 산간[陝甘]총독에 임명되자 격한 심정을 토로하기를 '任枉歌. 醉臥紅山嘴 風動處酒鱗起 '임지에 부임하면서 홍산에 올라 세상을 바라보니 세상 어지럽기 술잔속의 물결 같구려!' 라고 토로한 글이 홍산공원에 세워져 있는 임칙서 석상 뒷면에 새겨진 글
임칙서 (林則徐 1785.8.30~1850.11.22)
중국 청(淸)나라의 정치가. 자 소목(少穆). 호 촌노인(村老人). 푸젠성[福建省] 출생. 1811년 진사(進士)·지방관을 역임하며 수리사업(水利事業)에 힘쓰고 승진을 거듭하여 장쑤순무[江蘇巡撫]·양강(兩江)총독을 거쳐 37년 후광[湖廣]총독이 되었다. 이듬해 황제 도광제(道光帝)의 자문(諮問)에 응하여 아편(阿片)의 엄금책(嚴禁策)을 진언(進言)하고 임지(任地)에서 큰 성과를 올렸다. 이로 인하여 39년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발탁되어 광둥[廣東]의 아편무역의 단속을 명령받고 영국상인들이 소유한 아편을 몰수하여 2만여 상자를 불태우고 아편상인들을 국외로 추방하는 등 강경수단을 써서 아편밀수의 근절을 꾀하였다.
전부터 중국의 개항(開港)과 자유무역 실현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영국은 자국 상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임칙서는 해외사정을 연구하며 군비(軍備)를 강화하는 한편 관민(官民)의 협력을 얻어 영국군에 저항하였으나 오히려 타협파(妥協派) 관료들에 의하여 전쟁도발자로 몰리게 되었고 40년 청나라 조정이 강화(講和)로 기울자 그는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이듬해 이리[伊犁]지금의 우루무치로 유배되었다. 후에 복직이 허락되어 45년 산간[陝甘]총독에 임명되자 격한 심정을 토로하기를 '任枉歌. 醉臥紅山嘴 風動處酒鱗起 '임지에 부임하면서 홍산에 올라 세상을 바라보니 세상 어지럽기 술잔속의 물결 같구려!' 라고 토로한 글이 신강성 수도 우루무치 시내 중심에 있는 홍산공원에 그의 석상 뒷면에 새겨져 있다. 47년 윈구이[雲貴]총독을 역임하였다. 50년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을 진압하라는 명을 받고 흠차대신 광시순무[廣西巡撫]에 임명되어 부임 도중 병사하였다. 저서에 《임문충공정서(林文忠公政書)》 《임문충공유서(遺書)》 《신급록(信及錄)》 등이 있다. |
아편전쟁 당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인물 가운데 하나가 임칙서다. 그러나 그에게도 명암(明暗)이 있다. 강건파였던 그는 아편을 피우는 자들을 엄벌할 것과 영국의 아편 밀매 행위를 엄단할 것을 촉구하며 열강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 뚝심은 있었다. 아편을 태우고 그로 인해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강단있는 인물로 일반인에 널리 애국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38년 중국 교수 지앙팅후가 기술한 사실은 전혀 다르다. 임칙서는 비굴한 중국인들과 다른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결국 그도 체면을 중시하여 대의를 저버린 인물이라 소개하고 있다. 중국인은 面子(체면)을 목숨보다 중시하는 면이 있는데 목숨은 잃어도 체면은 잃지 않는다 한다. 임칙서도 체면을 중시하는 중국인이었다. 순수 한족이었던 그는 어느 정도 열강과 타협을 보자고 주장하는 온건파 기선을 매국노로 배척하고 군사를 길러 열강에 맞서 싸우자고 주장했으나 그는 몰래 친한 벗에게 편지를 보내며 그 편지를 타인에게 보이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 편지에는 임칙서가 서양 열강의 무서운 화력에 대해 기술하기를 '중국은 결코 서양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체면 때문에 이 사실을 함부로 공표할 수 없다. 이 사실을 절대 비밀로 해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임칙서의 예언대로 허장허세의 종이 호랑이 중국은 열강에게 대패하고 거액의 보상금과 아편수입의 개방이라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만일 임칙서가 솔직하게 서양의 화력과 전쟁의 승패에 대해 황제에게 아뢰었으면 전쟁의 비참함은 막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기선과 같은 부류로 매도당했을 것이다. 그는 결국 자신의 체면에 큰 것을 잃어버린 인물이였다. 다행히 그는 아편전쟁 전에 기선에게 몰려 유배를 당했다가 풀려난 후에 요직에 재등용되었고 병사하였다. 그가 그토록 중시하던 체면에 때문에 청나라는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어버렸다.
오늘날 그것도 한달이 넘게 촛불로 인해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45년 해방 직후의 좌우익 대립을 연상하는 상황이 밤마다 연출되어 시위가 폭력으로 절대 다수의 시민보다는 데모꾼들로 아수라장이 되고 있다. 인터넷에 온갖 유언비어와 MBC ‘PD수첩’의 광우병 보도가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촛불은 서서이 꺼지고는 있다. 그동안의 촛불이 정치권과 공권력, 언론과 기업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기존 질서와 체제를 모두 태워버릴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그 촛불로써 '그네들이 직접 나서면 기존 체제를 깨뜨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 것 같다. 그 촛불이 우리 민주주의의 영광으로 아니면 상처로 남을지? 정권을 빼앗긴 민주당과 좌파 지식인 진영에선 '위대한 직접민주주의의 희망을 봤다'며 찬가를 불렀으며 한나라당과 우파 지식인들은 '이게 중국을 망가뜨린 문화혁명과 뭐가 다르냐'고 항변했다.'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고, 제도적 민주주의가 정착한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시위가 벌어지느냐'고 외국 기자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광우병 대책위원회에 속한 이른바 ‘시민단체’들과 민주당은 촛불에 대해 당신들은 그 때에 무엇이라 했으며 훗날 그에 대한 답변들을 들을 수 있는 시기는 반드시 오고야 만다. 흐르는 시간은 아수라장의 진실을 밝혀주기 마련이다. 세월은 분명히 민주당과 이른바 좌파 진영의 편이 아닐 것이다. 임칙서를 아편전쟁의 당사자로서 당시의 청나라와 대외 정세판단보다 자신의 체면과 뚝심으로 인해 전쟁 패배로 동방명주인 마카오와 홍콩을 영국에 활양했듯이 자신들의 利를 아니면 정권을 잡기위해 촛불을 이용했다면 어찌 임칙서와 같은 평을 듣지 않으랴? 08.7.10 찜통 무더위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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