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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오늘도 주님의 나의 거룩한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귀한 우리 성도님들, 가정과 삶 가운데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앞뒤 좌우에 계신 분들과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도행전 6장과 7장에 등장하는 스데반이라는 사람 우리가 잘 알고 있죠. 최초의 순교자, 초대교회에 있어서 최초의 순교자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아낌없이 내어준 인물이라고 우리는 잘 알고 있죠. 그의 삶은 주님께 충성된 제자로서 모든 신앙인들에게 깊은 감동과 도전을 주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 그는 학식이나 말의 유창함으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성령의 충만, 성령의 권능과 지혜로 진리를 증언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복음을 위해서 담대히 나아갈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성령 충만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죠. 따라서 스데반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주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로 살아가면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사는 삶, 진리의 말씀을 담대히 증거하는 삶, 성령 안에서 거룩한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그러한 은혜가 이 스데반의 삶 가운데 있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일깨움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이죠.
특별히 현대 신앙인들은 각종 도전과 갈등 속에서 때로는 우리의 신앙이 위축되기도 합니다.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 참 쉽지 않구나라고 생각될 때도 있고요. 때로는 복음 증거하는 것이 참 어렵구나라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우리에게 주는 사단의 잘못된 생각일 뿐입니다. 우리에겐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 하나님의 영이 있기에 능히 이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우리를 그렇게 몰아간다는 것이죠. 이러한 현실 속에서 스데반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았던 신앙의 모범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주고 있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은 스데반의 이야기 일부분입니다. 복음 전파의 내용이죠. 그런데 이 스데반은 지혜와 성령의 능력이 있었다라는 사실을 우리는 보면서 이 지혜와 성령의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할 것이고요. 더불어서 우리도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지혜와 성령의 능력을 구할 수 있는 그러한 시간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으로 함께 말씀을 풀어가기를 소원합니다.
초대교회에 세웠던 일곱 집사증 가운데 스데반과 빌립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을 헬라파 유대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당시에 헬라파 유대인이 있었죠.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스데반과 빌립이라는 것이죠. 사도행전에 보시면 이 스테반에 이어서 빌립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도행전을 서술해 가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는 사도행전 1장 8절 핵심 구절이죠. 이 복음의 확산에 대한 아주 중요한 키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스데반과 빌립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 복음은 예루살렘과 유대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이들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 즉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게 될 것인데 예루살렘과 유다에만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과 유다로부터 시작을 해서 어디까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 증거한다라는 그 말씀의 실체가 오늘 이들의 모습을 통해서 나타 놀라운 분기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헬라파 유대인이었던 스데반의 순교를 기점으로 초대교회는 어마어마한 박해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박해로 인해서 성도들이 흩어지게 되죠. 흩어짐의 역사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중요한 인물을 소개해 주는데 그가 누구냐 바로 빌립이라는 사람이죠. 빌립이 가는 길에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는 장면을 그래서 서술해 주는 것입니다.
그중 오늘 본문은 스데반 집사의 활동 의 모습 그리고 오늘 본문을 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거짓 증언자들에 의해서 공예에 끌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변론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 가운데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중에 우리 앞부분을 좀 살펴볼 건데요. 8절에 보시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서 무스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놀라운 일과 기적을 행했다
라고 시작을 합니다. 우리 8절 함께 읽어보십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인간에게 행하니
이렇게 큰 기사와 표적만 행한 것이 아니라 실제 이 스테반은요. 복음을 힘있게 전하였는데 그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겠다는 참 복음의 진리를 선포한 것이죠.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스테반이요. 오늘 본문에 보니까 자유민의 회당이라는 곳에서 유대인 공동체 일부와 논쟁을 벌이는 장면을 기록해 주었어요. 격렬하게 아마 논쟁을 했던 것 같아요. 9절 말씀 한번 보실까요?
이른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 인 엘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오늘 이 말씀을 좀 풀어볼 건데요. 여러분 이것을 좀 알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우리가 알아야 될 내용이 있어요. 그래서 이 본문에 두 가지 질문을 던져야 됩니다. 첫 번째는 여기서 말하는 자유민의 회당은 무엇인가 여러분 아십니까?
자유민의 회당 그리고 두 번째는 이들이 논쟁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을 알아야겠죠 9절 서두에 보시면 이른바 자유민들은이라고 시작하면서 그 자유민들이 있고 그 안에 구성원들이 누구인지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 여러분 자유인이 누구인가?
주전 53년경에 로마 장군 폼페이가 유대를 토벌합니다. 그러면서 백성들을 끌고 가게 되죠. 노예로 잡혀가게 된 것입니다. 노예로 잡혀간 자들이 그곳에서 살다가 훗날에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게 되면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정책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 정책을 펼친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노예가 더 많아야 되기 때문에 출산 장려 정책을 하기 위해서 노예에게 그러한 미끼를 던진 거죠. 그래서 잘 낳게 하고 그중에 모두가 다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가 특정 조건에 맞는 사람들은 자녀를 낳았을 때 법적 지위를 변동시켜주는 거예요. 그래서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장려 정책을 펼친 것이죠. 당시에 이들을 해방 노예 또는 자유민이라고 걸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해방 후에 자유인이 되었을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 중에는
야 로마가 살기 좋네. 또 로마에 의해서 우리가 포로로 끌려왔지만 환경이 좋으니까 이곳에서 그냥 살자
하는 사람들이 있을 테고요. 개중에는
야 우리 고향으로 가야 되지 않겠느냐 우리 고향으로 돌아가자.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자들이 있었더라는 특별히 고향으로 돌아온 자들이 모여서 함께 나누는 회당이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자유민의 해당이었다. 그 당시에 여러 회당들이 있었을 것 아니에요. 근데 특별히 자유민들이 모인 그런 회당이 있었다. 그리고 그 구성원에 대해서 내 부류의 사람을 소개하죠.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인 아시아인이다. 이들이 지금 스데반과 논쟁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들이 논쟁을 벌이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만히 있는데 논쟁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아마도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찜찜한 거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저렇게 해도 되는 거야라고 하면서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면서 논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죠.
그렇다면 이들이 논쟁할 수밖에 없었던 핵심되는 스데반의 설교는 도대체 무엇이었는가라는 거 그 설교의 핵심을 알아야 논쟁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아니겠어요?
스테반의 설교는 나중에 7장에도 나오지만 그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열어주었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게 당시에 여러분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또 복음이 전해지긴 했지만 아직까지 그 땅에는 유대교 그렇죠 그들의 일반적인 토대 가운데는 예수가 복음이다라는 것이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은 시대였던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참된 구원의 완성으로 제시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 중심 사상 가운데에는 율법, 모세 오경 율법을 굉장히 중시했고 더불어서 성전을 매우 중요시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스데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율법도 무너지게 생겼고 성전도 의미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죠. 그러니 듣는 과정 가운데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듣는 자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길래 이 논쟁을 하게 되었는가 이들의 삶을 좀 면밀히 살펴보면 좀 이해가 되시겠죠.
논쟁했던 사람들 보니까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인 아시아인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구레네 구레네 하면 혹시 떠오르는 사람 있습니까?
구레네 사람 시몬 이거는 우리가 좀 자연스럽게 나오는 인물이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실 때에 대신 십자가를 짊어지고 갔던 구레네 시 이 구레네는 바로 리비아의 도시입니다. 이스라엘이 있고 그 아래쪽 남서쪽에 애굽 이집트가 있잖아요. 그 옆에 리비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서쪽으로 이동했던 사람들이죠. 당시에 그곳에 큰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헬라 문화에 물론 노출되어 있었죠.
하지만 고유의 유대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종교적 열심이 매우 강렬했던 사람들이죠. 그래서 이들의 상황 속에서는 스테반의 이야기를 듣고 논쟁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전통성을 강하게 지지하는 성향이 있었기 때문이죠.
알렉산드리아인 알렉산드리아는 바로 좀 전에 설명했던 남서쪽의 애굽 이집트를 이야기합니다. 그곳에는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특징은 조금 달랐습니다. 유대교의 신앙과 더불어서 헬라 문화 이것을 융합하려 하는 성향들이 있었어요. 조금 자유로웠죠. 지금 이야기하면 자유주의 신학에 가까운 상황이었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의 메시지를 들었을 때 그래도 우리가 아무리 융합을 한다 하더라도 기존 율법과 성전은 건드리지 않았는데 이 스데반은 도를 넘네 좀 선을 넘었어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우리도 자유롭지만 스테반은 너무 자유주의로 간 거예요. 지금 그때 상황으로 보면요. 그래서 이 논쟁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지 길리기아인 여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북서쪽 북서쪽에 위치한 지금의 터키 지역을 이야기합니다.
이곳에서도 많은 유대 공동체가 있었는데 이곳 출신하면 혹시 기억나는 사람 있습니까?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데 길리기아 길리기야 사도 바울 사도바울이 길리아 다소 출신 아니겠어요? 사도바울 같은 경우 당시에 이 사건의 중심에 목격자로 있었고 논쟁 자리에 목격자로 있었고 또한 이제 직장을 넘어서면 스데반이 죽잖아요. 돌에 맞아 죽잖아요. 그 중심에 서 있던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이죠. 그가 예수 만나기 전에는 예수 믿는 자를 먼저 잡으러 다녔던 그 앞잡이에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길리기아인 하면은 사도바울하면은 굉장히 열심히 믿는 그러한 율법 중심의 사람인 걸 알잖아요. 그러니까 그러한 성향들이 그들에게 있었다. 그러니 철저히 유대의 정통을 지키는 이들에게 스데반의 설교는 굉장히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율법의 절대성은 지켜야 되는데 이거 무너뜨리면 안 된다 해서 논쟁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아시아인 아시아인은 비슷합니다. 바로 터키 지역 쪽에 있는 바로 소아시아 지역, 특히 에베소와 같은 주요 도시, 로마 속주 에 속한 그러한 도시들을 이야기합니다. 이곳에서도 물론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고요. 헬라 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죠.
그러나 이들도 여전히 유대의 정통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던 사람들, 특별히 이들이 강조했던 것은 율법과 성전 가장 중요한 핵심을 매우 강력하게 추천하고 애착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의 이야기가 그들에게는 위협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이렇게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수용할 수 없었던 여러 사람들이 하나로 뭉쳐서 지금 스데반과 논쟁을 하게 되었다라는 것이죠.
그러면 이 논쟁에 참여했던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이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었느냐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이들은 세상 학문에도 뛰어난 사람이었고요. 또한 율법에도 굉장히 뛰어났던 사람들, 제법 유식한 자들이 모여서 논쟁을 했다라는 것이죠. 한 교류는 세상 지혜와 율법에 뛰어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고 이쪽 반대편에 산 스데반은 물론 그도 세상 지혜와 율법을 잘 알았겠지만 성경은 말합니다. 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맞섭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스데반의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니 이 무리가 능히 감당하지 못했다. 10절 말씀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여기에서 우리는 스테발이 어떤 사람인지를 볼 수가 있는 것이죠. 스데반은 앞서 일곱 집사를 세울 때 그 기준에 부합했던 사람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사람으로서 말씀을 전했던 것이죠. 즉 스데반은 지혜와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그 진리를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좀 잘 아셔야 될 것 같아요.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이 진리는 성령의 계시로만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비밀이며 지혜라는 사실이에요. 저와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복음 안에서 살잖아요. 그런데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받고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설교를 많이 들었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죠. 내가 믿음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깨닫게 하시고 고백해 하셨다.
할렐루야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복음을 복음으로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언급했던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느니라는 전제 조건 아래에 그렇게 되었을 때에 어떻게 한다고요?
승이 됩니다. 왜 성령이 임하였을 때 내가 복음을 알기에 그 복음을 증언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복된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죠.
같은 맥락으로 볼 때 사도바울은요 에베소교회에게 편지를 합니다. 그들을 위해서 날마다 기도한다고 이야기하면서 감사 기도를 하면서 이어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혜와 계시의 영을 부어주셔서 이들이 하나님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할렐루야 그러니까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하나님 지금 저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부어주셔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좀 잘 알기를 소원합니다.
그렇게 기도했다는 것이지 또한 마음의 눈을 밝혀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복음이죠. 하나님의 나라 이것을 그들이 깨닫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그들의 마음의 눈을 밝혀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이 성도들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 건지 이들이 알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의 풍성한 은혜, 우리가 마지막 주님 오시는 그날 우리가 맞이하실 그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그 자리를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이어서 마지막으로 기도한 내용이 매우 중요한데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 알게 해 주십시오. 믿음으로 사는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해달라는 것이죠.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는 믿음으로 사는 우리에게 강력하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뭐냐는 거죠. 이어지는 말씀 에베소서 1장 20절 22절은 이렇게 우리에게 소개해 줍니다.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늘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를 삼으셨느니라
무슨 말씀이에요?
복음이죠. 그러니까 믿는 자들에게 나타난 뛰어난 하나님의 능력은 아주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단 한마디 복음이라 예수 그리스도 따라서 복음이라는 것은 세상의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율법의 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았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바로 지혜와 계시의 영 성령이 임할 때야 그 말로만 듣던 복음이 내 인격 가운데 찾아오는 참 복음으로 자리매김할 수가 있다는 것이죠.
또한 나에게 참 복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 안의 지혜와 계시형이 충만하기 때문에 나아가 복음 증거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진,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성령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복음에 대해서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고 못할 이유도 없는 거 이거는 우리가 마땅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안에 이미 있다는 거죠.
근데 뭐가 문제예요? 우리의 생각이 문제지 좀 부담스러운데 이거 어떻게 해야 되지? 이 잘못된 생각 사단은 생각을 불어넣는다 하잖아요. 그걸 하지 못하게 하는 잘못된 생각 우리는 이미 구원받아 성령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있는데 그 성령의 이름으로 나아가 전하면 되는데 못하게 하는 생각이 문제라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깨달은 것도 성령이고요. 우리가 전하는 것도 성령이고 할렐 이것을 고백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전도라는 것 이것을 생각해 보면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아주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21절부터 25절에 전도에 관련돼서 말씀을 하고 있는데 우리 한 구절씩 한번 읽어볼게요. 21절 먼저 읽어보실까요?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에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여러분 이 문장을 잘 보십시오. 여기에서 보면 아무리 자기 지혜가 뛰어나도 세상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재간이 있다 없다 없다 이렇게 결정을 지어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세상 지혜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요?
전도에 미련한 것으로 하셨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구원을 얻게 하는 방법으로 선택하신 것이죠. 전도라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그리고 22절을 보면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방법과 다른 방법으로 진리를 추구했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읽어보실까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리는 전도라는 것을 통해서 했는데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했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았다.
여러분 유대인들 같은 경우는 신적 존재의 능력을 증명하면서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기를 기대했던 사람들이 왜 그렇습니까?
이들에게 메시아 사상이 있었잖아요. 하나님의 말씀 구약에서 이미 전해준 메시아 사상. 그래서 메시아가 오시면 반드시 신적 능력으로 우리에게 참 자유를 줄 것이다. 로마의 속국 가운데 있는데 여기에서 놀라운 능력으로 일할 것이다. 그런 신적 능력에 대한 기대감이 이들에게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했던 것이죠.
또한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했다. 여러분 헬라 문화를 알잖아요. 그들에게 있어서 철학과 지혜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논리적인 사고와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진리를 탐구했던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던 것이죠. 이들은 인간의 이성적인 논리에 맞지 않으면 거부하는 거예요. 그게 맞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러니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셔야 된다. 그래야만 구원이 있다. 유대인들이 바라볼 때는 야 이게 무슨 기적과 같은 표적이야 말도 안 돼 예수님이 죽지 말고 놀랍게 구원해내셔야지 이런 마음이 있었을 것이고, 헬라인들에게는 이성적으로 이해가 안 되죠. 왜 죽어 왜 왜 왜 죽으셔야 돼? 왜 와서 잘 설명해 주고 이해하게 깨닫게 해주고, 그래서 우리를 믿게 하셔야지 왜 죽어 이거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아 그러니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죠.
그런데 당시에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스데반도 그랬지만 차후에 바울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복음의 핵심이다라는 것을 선언한 것이죠. 바울이 전한 복음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거리끼는 거 또한 헬라인 입장에서 볼 때는 미련한 일 수밖에 없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복음이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 십자가의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지금 두 부류를 이야기했어요. 한 부류는 유대인 아우 왜 그렇게 거리끼는 거 헬라인들은 이제 할 수 없어 무식해 이해할 수 없는 방법. 그렇다면 이것이 적용되는 한 부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우리 24절 말씀 한번 보실까요? 24절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의 능력이 보이시죠? 성령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가 보이십니까? 부르심을 입은 자들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누굽니까?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 그 사람은 이게 생각했던 유대인일지라도 또 미련하게 생각했던 헬라인일지라도 뭘 본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 이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여러분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바로 미련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무엇이라고요?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 이것으로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예수 십자가는 인간의 관점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이게 가장 큰 능력이며 지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그 안에 무엇이 담겨져 있느냐 구원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그 안에 담겨져 있다라는 그러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과 깊은 지혜를 얻고 하는 자가 되는 것이지 그러니까 우리 안에 뭐가 있어요?
따라 합시다.
하나님의 능력 지혜
우리 안에 있다는 우리 안에 있는 이것을 풀어내는 게 뭐라고요?
우리 안에 주신 거예요 없고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연약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인지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죠. 이제 다시 본문으로 한번 돌아와 보겠습니다. 지혜와 성령으로 전한 스데반의 복음 이것을 논쟁하는 자들이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면 자유민들이 스데반과 논쟁에서 이길 수 없었다는 것인데 그러면 이길 수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이 성령의 권능과 지혜로 정했기 때문이 이제 마지막으로 성령의 권능과 지혜가 무엇인지를 그럼 간단하게 정리를 해드리겠습니다.
성령의 권능은 스데반의 말이 어디에서 충만했다고요?
성령에서 충만해서 전해졌다. 즉 단순히 자기 생각이나 지식을 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진리를 성령 안에서 전했다. 성령의 능력은 논쟁에서 그의 말을 강력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듣는 사람들이 쉽게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능력이 그 안에 있었다는 것이죠. 따라서 초대교회는 당시에 우리가 읽어보셔서 알겠지만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기적과 강한 증거들이 나타났잖아요. 그 기적과 강한 증거들에 포함되는 것이 어떤 것이었냐 바로 스테반의 이 설교 또 지혜로 전했다고 말합니다. 지혜로 전했다.
이것은 나중에 7장에 보면 정확하게 이해할 수가 있는데 유대인들에게 익숙했던 역사와 율법을 가지고 그 성전의 의미를 풀어가면서 설교를 했다는 거예요.
이게 매우 중요하죠.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그냥 예수 그리스도 딱 그 한 분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이들이 과거부터 늘 기억하고 생각해왔던 역사적 인물 사건들을 중심으로 풀어갔다는 것이죠. 그래서 7장의 설교 내용을 보면 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세, 다윗, 솔로몬 이런 사람들을 등장시켜서 이들이 왜 있었는가 바로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의 조상 아브라함 여러분들의 조상 야곱 모세 이들에 거쳐왔던 놀라운 역사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등장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라는 것으로 설명해냈다는 것이죠.
논리적으로 설득했다는 것이 그래서 여러분 이 스테반이 펼쳐놓은 지혜는 유대 전통의 깊이 뿌리박혀 있던 내용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듣고 반박할 수가 없었던 거 왜 본인들도 인정하거든요.
아 맞아 아브라함 맞네 야곱 그렇지 모세도 그랬지 그러면서 거기에 다 반응하면서 인정했다는 것이죠.
이처럼 스데반은 초대교회가 이해했던 당시의 복음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그 복음을 새로운 관점으로 잘 이해했다는 거 그러니까 사도들만 가지고 있었던 복음의 진리 그것이 스테반도 이제는 돈이 되어지고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았고 더 나아가서 성전과 율법의 절대적으로 여겼던 그 유대교 신앙을 넘어서는 해석을 제시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들이 반박할 수 없었다 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따라 합시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도다.
할렐루야 우리가 못한다. 그러지 마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안에 있으면 다 할 수 있는 그러고 내 삶 가운데 이 스데반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스데반의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성령의 권능과 지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도 세상에서 복음을 증거할 때에 이와 같이 성령의 충만함과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스데반처럼 복음을 전해야 될 상황들이 있습니다. 그렇죠 우리의 삶의 현장이 사실 복음의 현장입니다. 근데 문제는 그럴 때에 자신의 논리와 생각으로 의존해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스데반처럼 성령의 은혜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의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던 스데반의 논쟁처럼 우리가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 복음을 전하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상황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일상에서 성령의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의지해야 된다.
그렇다면 여러분 한 주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적용을 한번 좀 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몇 가지를 제시해 드릴 텐데 여러분 내가 이거 다 적용하면 좋겠다 그러면 제일 좋고요. 한 가지만 알고 싶은 게 그런 마음으로 좀 적용했으면 좋겠는데 첫 번째 성령이 충만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구해야죠? 이번 한 주를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 나 성령 충만한 삶 살게 해달라고 기도 생활을 하신다.
여러분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을 증거했다라는 것은 그가 날마다 성령이 부여했다는 것 아니겠어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의 현장 속에서 복음의 삶을 살기 위해서 일어나셔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십시오. 교회에 나오시는 게 가장 좋고요. 나는 멀어서 도저히 안 되겠다 하시는 분들은 일어나셔서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꼭 기도해 보십시오. 이것이 이번 주에 내가 열심히 살아내야 할 복음의 삶이 둘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확고히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스데반이 이들에게 지혜로 설명할 때 말씀 중심으로 설명을 했어요. 구약의 율법을 중심으로 그마만큼 성경에 능통했던 자이죠. 따라서 우리도 뭔가 복음을 제시하기 위해서 내가 복음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말씀이 내 안에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시면 기도하시고 성경을 펼치셔서 단 10분이라도 20분 30분이면 더 좋고요. 말씀을 보십시오. 이번 한 주 내가 7일 동안 그렇게 살겠노라 그러한 다짐으로 성경을 펼쳐서 읽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그 말씀이 주신 은혜 가운데 내가 살게 되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그 때 세 번째 전도할 기회를 주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내가 전해야 되는데 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때 내 생각이 그 마음을 돌려버리는 아니야 아니야 여러분 그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거 내가 기도하고 말씀을 보면 분명히 그 기회는 내 삶의 현장에 주어지게 돼 있습니다. 그때 외면하지 말고 스데반이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복음의 그 놀라운 능력을 제시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요. 복음의 능력을 삶 속에서 드러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스테반이요 성령과 지혜가 충만했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일곱 집사가 되었다는 건 무엇이에요?
지난주 말씀을 기억해 보면 지혜가 충만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이 충만했을 뿐만 아니라 칭찬받는 사람, 칭찬받는 사람이라 하는 것은 삶 속에서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아냈다 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복음의 진리를 전할 수 있어야 가족과 직장과 내가 속한 공동체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보이고 성령의 능력으로 삶 속에서 살아갈 때에 우리의 삶은 복음이 될 것이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 스데반처럼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 쓰임 받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그래서 각자의 자리에서 내가 스데반과 같이 살아야 되는데 그래 내일 새벽부터 일어나서 기도하자 여러분 그 마음이 중요한 것 아니겠어요? 실천하시고 그래 또 말씀이 중심이 돼야 는데 말씀 한 구절이라도 읽고 시작하지 그런 세력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 누군가를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마음 주시면 제 시장이 특별히 지난 한 주 동안 여러분 기도하면서 한 영혼들을 틀렸잖아요. 오늘 적어서 내시고 꼭 적어서 내십시오. 되든 안 되든 적어내십시오. 안 하니까 그것마저도 안 되는 거예요. 적어내시고 그분에게 이번 한 주 동안 어떻게 내가 찾아가서 접근할 것인가 하나님 은혜 주셔서 기억나게 하시고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그리고 만나서 전해 보는 그러면 그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아니겠어요? 내가 막 억지로 목사를 자꾸 끌고 올 수 없어 하나요? 하나님께 맡기고 문제는 접어내는 것조차도 안 하는 게 문제죠. 왜 내 마음을 접어놨으니까 그러지 마시고 접어서 내셔서 기도해 보십시오. 우리 부활 주일날 20 30여 명 가까이 왔는데 그래도 너무 감사한 건 한 명의 열매가 있습니다. 금요일 예배도 나오시고요. 일부 예배 드리고 가셨는데 이번 추수 감사 줄 때 하나님께 열배로 올려드리는 한 분이 됐습니다. 그분을 축복하면서 그날 오신 분들에게 좀 돈이 될 수 있도록 그래서 그러한 축제가 우리 안에 일어나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모르겠다. 그러지 마시고 저와 여러분들이 한 영혼을 품고 한 주 동안 기도하셨다면 또 아직 안 하셨다면 오늘이라도 기도하셔서 꼭 적어내시고 영혼들을 위해서 한번 기도해 보시죠. 우리에게 주신 사명 아니겠어요? 내 힘으로 하려니까 어려우니 성령의 은혜를 주셔서 우리에게 감당케 해 주십시오. 그래서 한 주 동안 저와 여러분들이 한 영혼에게 찾아가고 다가가는 축복의 자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