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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상욱 작품론
꽃 한 잎 피는 데 아홉 마디가 간다
―피투성과 기투 사이의 존재론적 페이소스
이영숙(시인ㆍ문학평론가)
보내는 자가 있으면 받는 자도 있다. 일테면 네트를 사이에 두고 공이 오가는 테니스가 그렇다. 상대가 받아칠 수 없는 빈자리에 공을 메다꽂는 테니스는 시간제한이 없다는 점에서 자주 선수의 체력과 정신력이 고갈되는 지경까지 나아간다. 2008년 윔블던 결승에서 6연패를 노리는 로저 페더러와 도전자인 라파엘 나달의 경기는 오후 2시에 시작되어 두 번의 폭우로 경기가 중단되기도 하면서 밤 9시에야 끝났다. 당시엔 조명 시설도 없었기에 선수들은 몸의 기억과 공기를 가르는 파동에 의지하면서 코트에서만 무려 4시간 48분을 뛰었다. 9:7로 승리한 것은 나달이었으나, 두 선수의 기술적 완성도와 매너, 투지에 의해 이 경기는 ‘테니스 역사상 최고의 경기’라고 회자된다.
야구와 축구 등 대부분의 스포츠 경기는 정밀한 규칙, 페어플레이 정신, 선수들의 투혼이 맞물려 드라마틱한 서사로 완성되는 일이 다반사다. 그러나 영웅 서사에 가깝다. 이기면 부와 명예와 대중적 관심이 따라붙는다. 승리자의 관점에서 역사가 기술되듯 패자는 역사에서 배제되거나 소거된다. 아무도 페더러와 나달의 경기에서 쓰인 테니스공에 주목하지 않는다. 공 역시 라켓에 맞아 4시간 48분을 날아다니고 땅에 패대기쳐지거나 선수들과 함께 비를 내다보며 긴 시간을 대기하고 있었을 것임에도 ‘테니스 역사상 최고의 공’이라고 회자되지도 않는다. 마치 급소를 찌르듯 여기 허상욱의 시가 있다.
그들은 한 번씩 내 푸른 눈동자를 후려쳤다
번갈아 가면서 내 주인이 바뀌었다
나는 도망 다니는 줄도 모르는 채
그물 같은 담을 넘어 다녔다
낮도 밤처럼 울며 넘었다
흙의 색으로부터 도망 중인 푸른 일탈이며
불필요한 감정으로부터 도망 중인
샛노란 관용이다
검은 안경을 쓰고 있는 관중으로부터
시선을 터뜨려 먹는다
찬란한 일상의 햇빛을 터뜨려 먹는다
도망치다가 당신의 눈 속으로 귓속으로
은신처를 삼다가
뜰채처럼 흙바닥에 팽개쳐 두고
내어 줄 것과 받을 것을 확인한다
엇갈린 줄에 시선을 잡아 두려고
총알처럼 날아가는 비명으로 귀를 뚫어 보려고
그저 낮은 눈동자에만 허리를 굽힌다
순간순간 팡팡 터지는 공허에
함성 같은 피가 번지고
6:6 막상막하의 스코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테니스」 전문
공의 입장에서 보면 테니스 경기는 끊임없이 매질을 당하는 과정이다. 시적 주체가 공인 이 시에서 사정은 더 끔찍하다. 선수들은 ‘나’의 몸통이 아니라 “번갈아 가면서” “한 번씩 내 푸른 눈동자를 후려”치기 때문이다. 온전할 리 없는 ‘눈동자’로 인해 ‘나’는 “낮도 밤” 같아지고, “그물”도 “담” 같아지는 상황에 이른다. 선수들의 입장에서 보면 공은 자신의 코트 바닥에 한 번 이상 닿아서는 안 되며(“흙의 색으로부터 도망 중”), 일체 감정을 배제한 채 공을 장악해야 한다(“불필요한 감정으로부터 도망 중”). ‘나’는 두 선수 중 어느 “주인”에게도 머물 수 없는 처지다.
‘나’의 또 다른 자아로서 오직 “검은 안경을 쓰고 있는 관중”만이 선수들이 아닌 ‘나’에 집중하고 있다. “시선을 터뜨려 먹”고 “찬란한 일상의 햇빛을 터뜨려 먹”은 “당신의 눈 속으로 귓속으로/ 은신처를 삼”는 ‘나’의 “도망”은 그러나 “뜰채처럼 흙바닥에 팽개쳐”진다. 선수들은 “내어 줄 것과 받을 것을 확인”하며 스코어를 계산하고, ‘나’는 다시 “총알처럼 날아가는 비명으로” “검은 안경을 쓰고 있는 관중”의 “귀를 뚫어 보려고” 선수들의 타격에 ‘눈동자’를 맡긴다. ‘보는’ 테니스를 ‘듣는’ 테니스로 전이시킨 이 시는 역으로 시각장애인을 암시하는 “검은 안경을 쓰고 있는 관중”으로서의 ‘나’가 라켓에 맞는 공의 타격음을 통해 테니스 경기를 감각적으로 상상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보지 못하는 눈이 라켓에 맞은 듯 왜 아프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시의 클라이맥스는 마지막 행이다. “6:6 막상막하의 스코어는 끝나지 않았다”라는 문장은 중의적으로 읽히는데, 먼저 ‘6:6’이라는 스코어는 (우연이겠지만) 저 윔블던 결승을 환기시켜 9:7로 가는 계단참 역할을 한다. 당시 윔블던 스코어는 지금과 달리 타이브레이크가 없었기에 한쪽이 2게임 차를 벌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페더로와 나달은 ‘6:6’에서 7:7로 나아갔으나, 나달이 2게임을 연달아 이기고서야 경기는 끝날 수 있었다. 「테니스」가 포착한 ‘6:6’의 스코어는 단순한 경기 기록이 아니라 9:7로 끝이 날지 10:8로 끝이 날지, 혹은 무한 지속될지 모르는 불안과 공포라는 그 처절한 임계점에 자리한다. 그것은 시각적 고립이라는 피투적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 이 문장은 그에 맞서는 실존적 기투를 예고하는 결기로도 읽힌다. 나달이 어둠과 체력의 한계를 돌파했듯 허상욱의 시가 페이소스를 슬픔과 연민의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기투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존재론적 에너지로 사용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대전 유성 먹자골목 일당뼈다귀해장국집*
장님들 마주앉아
얌얌쩝쩝 뼛골 빼먹고 있다
극돌기 횡돌기 관절돌기 사이사이
은근슬쩍 숨은 속살을 찾아
날카로운 이빨 여린 혀 낼름거린다
처음 맵고 뜨거운 그 덩어리의 손길은 엉거주춤 소극적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남의 등살 주물러 먹고 사는 시원한 손이기에
골 빼 먹는다는 건 늘 신나고 재밌는 일
주머니 속에는 척주 기립근 대둔근 주물러 주고받은 안마 일당 십여만 원이 있고
유유상종 침묵이란 게 있기에
잠시 한때나마 이토록 끈끈한 식욕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치명적 뼈와 골의 사이는 태초부터 있었던 것이기에
거기 깊숙이 박힌 살들은 쉽사리 빠져 나오지 않는 것이다
일당이란 게 원래 다 그런 것이다
돼지등뼈 수북한 뼈통엔 얼씬도 않는 공허한 눈길들
뿌옇게 서려가는 김 너머
그들은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는 것이다
*대전 유성 먹자골목에 자리한 맛집
―「일당 빼먹기」 전문
하이데거의 용어로, 인간이 자신의 선택 의지 없이 세상에 던져지는 ‘피투성’의 개념과 주어진 조건에 머물지 않고 자신의 가능성을 향해 스스로를 내던지는 ‘기투’는 이미 일상에 녹아들어 상식이 되었다. 우리는 이 던져짐(과거)과 내던짐(미래)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인간 존재의 본질로 받아들인 지 오래다. ‘기투’하지 못하고 세인(世人)의 시선에 갇혀 사는 상태를 존재의 ‘퇴락’으로 보는 관점 역시 그의 것임을 잊지 않고 있다. 다만, 허상욱의 시를 읽으면서 이 개념들이 단숨에 떠오른 것은 시인이 시각장애인이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시를 쓰는 태도에 의한 것이다. 태도는 사유에서 나온다. 사유는 몸의 반영이다. 고로 허상욱의 시는 건강하다.
뼈다귀해장국을 먹는 광경이 선연히 그려지는 이 시의 고객은 “장님들”이다. 그러나 여느 손님들과 다름없이 맛있게(“얌얌쩝쩝”), 여느 손님들보다 능숙하게(“극돌기 횡돌기 관절돌기 사이사이/ 은근슬쩍 숨은 속살을 찾아”) 그들은 “뼛골 빼먹고 있다”. 안마사가 직업(“남의 등살 주물러 먹고 사는”)이다. 주머니가 두둑하고(“안마 일당 십여만 원이 있고”), 서로의 처지와 고단을 아는(“치명적 뼈와 골의 사이는 태초부터 있었던 것이기에/ 거기 깊숙이 박힌 살들은 쉽사리 빠져 나오지 않는 것이다/ 일당이란 원래 다 그런 것이다”) 동료들과 마주 앉아 굳이 서로 말하지 않아도(“유유상종 침묵이란 게 있기에”) 식탁은 “이토록 끈끈한 식욕”과 조용한 활기로 충만한 것이다. 여기에 시인의 시적 유머가 빠질 리 없다. “일당뼈다귀해장국집”의 ‘일당’과 하루치 노동의 대가인 ‘일당(日當)’, 뼈다귀해장국의 ‘뼛골’과 인체의 ‘뼛골’을 은유적으로 병치함으로써 시에 동선과 여백이 생겼다. 입체적인 시를 쓰는 시인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탠다. 앞에서 언급한 그들 일원으로서의 내부자 시선과 그들을 대상화한 외부자 시선이 그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오래도록 장애인에 대한 비하적 호칭을 별 문제의식 없이 써왔다. 그러나 1981년 이래 몇 차례의 법 개정과 순화의 과정을 거쳐 장애를 사회적 권리의 주체로 바라보는 언어들이 일상에 자리 잡은 것은 2000년대 이후의 일이다. 이제 시각장애인을 ‘장님’이라 부르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런데 시인 자신이 “장님들”이란 용어를 쓰고 있다. 이는 자기비하가 아니라 내부자 시선이기에 가능한 겸양 어법에 가깝다. 이 시의 흐름에서도 “시각장애인들 마주앉아”라는 표현보다 “장님들 마주앉아”가 더 리듬감 있고 자연스럽다. 그러나 시인은 마지막 연을 돌연 외부자 시선으로 전환한다. 온몸의 감각을 동원해 “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듯/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서/ 통로 저편으로 물 흐르듯” 걸어간 시각장애인이 접이식 지팡이를 “착착착! 다시 접어 넣”고 “귀에 이어폰을 슬그머니 끌어 당겨서 넣”고 “머리 위 손잡이도 능숙하게 찾아서 잡”(「착시」)을 수는 있지만, “돼지등뼈 수북한 뼈통엔 얼씬도 않는 공허한 눈길들”을 내부자 시선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외부자 시선이기에 그들의 “공허한 눈길들”과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는” 다 먹고 난 “돼지등뼈”가 등가를 이룰 수 있다. 앞에서의 활기를 차분히 가라앉히면서 발생하는 페이소스를 시인이 의도한 것은 아닐까. 「일당 빼먹기」의 여운이 오래 남는 이유이다.
다음 시들은 시적 공간 운용에 관한 것이다.
내가 손바닥만한 죄에 사무쳐
낯을 들 수가 없어서
보다 더 습한 곳에
내 스스로 엎드려 기도하노니
사랑조차 구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내 목을 꺾는 이를 미워하지 않기 위하여
더 그늘진 곳에 고개 숙여
이슬처럼 눈물을 또 흘리노니
행여 누가 내 빛을 가리더라도
내가 먼저 용서하며
죽을 때까지
더 깊이 웅크려 살게 하소서
―「고사리」 전문
푸른 하늘을 우러른 것은
허공을 한껏 미분하고픈 욕구
흰 구름은 바람에 내맡긴 가지 끝에서
메타세쿼이아의 껍질 속을
수없이 셈한다
그 가지에 서식하는 작은 일꾼들과
한겨울에도 잠들지 않으리라던 약속까지
―「메타세쿼이아」 부분
‘지극히 낮아지기’(「고사리」)와 ‘지극히 높아지기’(「메타세쿼이아」)를 한 입으로 말하기는 쉽지 않다. 자칫 이율배반이나, 혹 어느 한쪽은 허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적 대상의 속성에 시인 자신을 투사하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어느 지점에서 두 대상이 만나 서로의 진실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시에서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는 찰나를 우리는 「고사리」에서 본다. 어린 ‘고사리’가 “고개 숙”인 모습은 기도의 자세와 같고, 시 역시 기도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고사리’에게 “손바닥만” 하나마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인간인지라 시인에게는 “손바닥만” 하나마 “죄”가 있을 수는 있겠다. 그러나 몸통만 한 죄를 짓고도 거리낌 없이 활보하는 이들이 더 많은 세태에 이게 “죄에 사무쳐/ 낯을 들 수가 없어서/ 보다 더 습한 곳에/ 내 스스로 엎드려 기도”할 일인가. “눈물을 또 흘리”며, “죽을 때까지/ 더 깊이 웅크려 살”겠다고 서원할 일인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최대 50m까지 자란다는 나무를 소재로 한 「메타세쿼이아」도 그 연장선에 있다. 나무의 상승 의지는 “푸른 하늘을 우러”르기 위한 것이지 푸른 하늘을 제압하기 위함이 아니다. “흰 구름”의 하강 의지는 “메타세쿼이아의 껍질 속”과 “그 가지에 서식하는 작은 일꾼들”의 삶을 “수없이 셈”하고 “한겨울에도 잠들지 않으리라던” 나무의 “약속”을 독려하기 위한 것이지 지면에 그늘을 드리우기 위함이 아니다. 땅에 발 디딘 존재로서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를 시인은 진정성 충만한 시적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보잘것없어도 내 것이기에/ 누구에게도 내어 줄 수 없다”(「개밥그릇」)는 선언은 욕심이 아니라 자존감의 표현이며, “차가운 금속형 가위로 빨강을 따는 일이/ 당신은 재밌습니까”, “제각각 다 다르게 생겼는데/ 왜 똑같다고 생각합니까”(「장미」)라는 문장은 질책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재인식의 촉구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인간 중심주의와 획일주의는 ‘퇴락’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이를 거부하는 시인은 묻는다. “내게 빨강은 어떤 색깔입니까/ 가시를 먼저 보아야 합니까 그냥/ 겹과 겹의 사이입니까 애초 익은 그런 색깔입니까/ 5월입니까 이마가 뜨거운/ 오후 세 시의 빛깔입니까”(「장미」)란 대목에는 볼 수 없는 자의 자의식과 미의식이 담겨 있다. 자료에 의하면, 시인은 후천적 질병으로 거의 서른 살 무렵에 잔존 시력을 완전히 상실했기에 물론 “빨강”이 “어떤 색깔”인지 알고 있다. 따라서 이 질문은 존재의 본질을 향한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붉은 장미, 장미 가시, 장미 꽃잎은 장미의 본질이 아니라 관습적으로 통용되는 관념일 수 있다. 시인은 문득 반문한다. 장미는 “애초 익은[굳어진] 그런 색깔”이 아니라 “5월” 자체이며, “이마가 뜨거운/ 오후 세 시의 빛깔”이 아니냐고.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진정한 장미를 볼 수 있는 게 아니냐고. 대상의 본래적 자아를 찾아가는 것이 기투하는 존재로서의 우리의 기본 태도가 아니냐고. 그러니 이제 시는 어디로 갈 것인가.
차들 싱싱 지나는 신작로에서
노년의 부부가
승용차를 세워 놓고 고구마를 캔다
남의 밭에서
누가 다 캐낸 자리에서 저토록 열심히 호미질을 할까,
벌건 낮을 캔다
거칠디 퍽퍽한 흙을 열심히 판다
검은 비닐봉지에 흙 묻은 걸 주워 담는다
어떤 때는 호미질 두어 번에 주먹만한 게 나오고 어떤 때는 수십 번
호미질에 쥐꼬리 같은 게 중동이를 분지르며 나온다
저 고단한 호미질에 나는 또 무언가 한 마디 하려다 만다
그냥 구경만 한다
―「추수 이후」 부분
그해 추석날
하일동 128번지 우리 여섯 식구는
아래층 여덟 세대와 위층 다섯 세대가
2층 두어 평 옥상에 올라
멀리 떠나려는 제비들을 구경하였다
(중략)
제비는 올해도 강남 가기 전
하일동 128번지 옥상이며 전깃줄에
잠시 들르러 왔다
우리 128번지 식구들은 멀리 떠나려는 제비를
한참 구경하였고
제비들도 우리 하일동 식구들을
한참 동안 구경하였다
―「하일동 제비」 부분
이 두 편의 시에서 시인은 “구경”하는 위치에 있다. “노년의 부부”가 “남의 밭” 옆 “신작로”에 “승용차를 세워 놓고 고구마”를 캐는 광경을 “구경”(「추수 이후」)하고, “강남 가기 전/ 하일동 128번지 옥상이며 전깃줄에/ 잠시 들르러” 온 “제비”를 “구경”(「하일동 제비」)한다. 앞의 시적 정황에서 실한 고구마는 모두 거두어간 다음이니 “남의 밭”이라 하더라도 도둑질은 아닐 것이며, “호미질 두어 번에 주먹만한 게 나오고 어떤 때는 수십 번/ 호미질에 쥐꼬리 같은 게 중동이를 분지르며 나”오는 것으로 봐서 수확량이 많을 것 같지도 않다. “저 고단한 호미질”은 그들 부부의 고단했을 삶의 제유이다. 뒤 시의 정황에서는 “옥상에 올라/ 멀리 떠나려는 제비들을 구경하는” 구성원에 주목해 보자. 아마도 다세대 주택일 텐데, 옥상 넓이가 “두어 평”인 것으로 봐서 “우리 여섯 식구”와 “아래층 여덟 세대와 위층 다섯 세대”가 사는 건물의 방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라임을 넣어보자면 ‘저 고단한 살림방’쯤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시에서와는 달리 두 편의 시에서 시인의 호흡이나 정서는 평온하다. 자신이 장애에 던져졌다고 생각하지 않는 시인처럼, 그들도 자신이 가난에 던져졌다고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추수 이후」에서 “노부부”의 “승용차”는 허름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유지할 만한 여력, 운전하고 “호미질을 할” 정도의 건강, 그리고 무엇보다 부부 공동체의 훼손되지 않은 유대감은 그들이 지나왔을지도 모를 역경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일동 제비」의 등장인물들과 “제비”의 만남이 사뭇 장엄한 것은 집단 대 집단의 서사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128번지 식구들은 멀리 떠나려는 제비를/ 한참 구경하였고”, “제비들도 우리 하일동 식구들을/ 한참 동안 구경하였다”. 존재들과의 이 대등한 관계를 시인은 그동안 꿈꾸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까. 어쩌면 시인이 「추수 이후」에서 “무언가” “하려다 만” “한 마디”는 「일당 빼먹기」에서의 “유유상종 침묵”이었을 테고, 말 한마디 섞이지 않은 「하일동 제비」에서도 그러했을 것이다. 시인에게 “구경”은 ‘기투’의 다른 말이다. 그 연장선상에 「구절초」가 있다.
첫째 마디는,/ 한때의 새끼손가락인 듯 그냥 뿌리인 듯/ 천진의 어느 한 끝부분이라/ 흙이 측은하여 세상의 틈으로 내어 준 흔적이다/ 절절 순서대로 기어 나올 마디로/ 이때가 봄이라 이 수작도 생경한 시작이다/ 마디마디 피어나려면 봄이 가슴을 두드릴 때라/ 그럴 때는 아예 들판으로 걸어가는 것이라/ 맞춤한 호흡같이 저만의 몸짓같이/ 애달픈 시력으로 들여다볼 마디라/ 당연한 구절조차 낯설어하는 빛깔이다
(중략)
넷째 마디는, 날로 흥분 고조되어 잎 더 파란 마디라/ 푸릇푸릇 벽을 세운 풀숲도/ 피다 만 잎도 녹록하다/ 마디도 맞춤하여 네 마디라/ 제 살 퍼렇게 게워 내도록/ 한참 충혈된 시절 돌아볼 것 없는 흥이 즐겁다/ 잎 내밀다가 손가락 사이 다른 잎을 훔쳐볼/ 아직은 파란 잎이라/ 허공 제 키 높이려고 이리저리 까치발 떼는지라/ 씁쓸한 잎 두어 절 떼어 내준다
(중략)
아홉째 마디는,/ 붉게 희어진 머리로 말하는 마디라/ 피는 꽃잎과 지는 잎새가 서글프다/ 간격이 서로 아프게 부딪히지 않으려고 절절 애쓰다가/ 살면서 기어이 죽어 가는 것을 알아 버리는 것이라/ 결국 꽃은 꽃 혼자 필 뿐 잎은 잎 혼자 쓴다/ 세상은 마디의 굳은 사이만 핥으며 순해지는 바람이라/ 누구에게만 향기 진한 잎을 내미나니/ 꽃 한 잎 피는 데 아홉 마디가 간다/ 이토록 완전한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것이나/ 겹을 덜어 낸 향기만 먼저 날아오르곤 했다
―「구절초」 부분
결국, 시인이 우리에게 보여준 세계는 보이지 않는 어둠이 아니라, 온몸의 감각으로 빚어낸 거대한 판소리 한마당이다. 그는 세인의 구경거리로 전락하거나 무미건조한 일상 속으로 ‘퇴락’하기를 단호히 거부한다. 대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각의 부재라는 ‘피투적 운명’을 딛고 서서, 한 마디 한 마디 삶의 굴곡을 소리로, 감촉으로, 그리고 문장의 리듬으로 ‘기투’해 나간다. 그 정점이 바로 시 「구절초」이다. 이 시는 아홉 번의 굽이침을 거쳐야 비로소 꽃을 피우는 생명의 일대기와 인간의 생의 주기, 계절의 변화와 철학적 성찰 과정을 동시 편집하는 방식으로 판소리의 긴 호흡에 담아냈다.
유년의 평화로운 진양조로 시작된 생의 사설(1~3마디)은, 청춘의 뜨거운 자진모리(4~6마디)를 거쳐, 마침내 노년의 달관한 아니리(7~9마디)에 도달한다. 화자에게 마디는 단순히 식물의 관절이 아니다. 그것은 세속의 ‘퇴락’을 견뎌낸 흉터이자, 어둠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미래를 향해 자신을 내던진 실존의 흔적이다. 윔블던의 어둠 속에서 9:7의 승부를 갈랐던 그 처절한 투지는, 이제 구절초의 아홉 번째 마디에서 터져 나오는 진한 향기로 승화된다. 우리는 이 시의 마지막 대목에서 비로소 존재론적 페이소스의 실체를 만난다. “꽃 한 잎 피는 데 아홉 마디가 간다”. 그것은 나약한 자의 슬픔이 아니라, 자신의 아홉 마디 고통을 기꺼이 긍정하며 “순해지는 바람” 앞에 선 단독자의 숭고함이다.
지팡이를 내려놓고 시인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삶은 지금 몇 번째 마디를 지나고 있느냐고.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세인의 화려한 조명이 아니라, 내 몸의 마디마디가 기억하는 정직한 통증과 그 안에서 피어날 단 하나의 향기라는 사실을 시인은 아홉 마디 구절초의 몸짓으로 증명해 보였다. 이로써 허상욱의 시는 장애의 기록을 넘어, ‘피투’된 모든 존재가 어떻게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며 ‘기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실존의 창(唱)’이 된다.
―《솟대평론》 2026 상반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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