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착두산(錯頭山)
장흥읍 삼산리와 안양면 기산리 경계에 있는 높이 545m의 산이다. 봉우리가 바위 더미로 되었는데 모양이 병풍처럼 되어 었다고 한다. 조선 영조 때 부사 황간(黃幹)이 고을 아전들의 세력이 너무 세어서 그 행패가 심한 어병산과 사자산이 두겹으로 장흥읍성의 동문과 마주 대하고 있음이라 하여 착정(錯頂) 또는 착두(錯頭)산으로 고치고, 동문을 옮겨 세웠다 한다. 화개산과 어병산(御屛山)이라고 한다. 제암산으로 보기도 한다.
<대동지지> : 착두산(錯頭山) : 동쪽 15리에 있다.
22. 사자산(獅子山)
장흥읍 삼산리와 안양면 비동리, 보성군 웅치면 대산리와 경계로 높이 668m 산이다. 어병산으로 보기도 한다.
<대동지지> : 사자산(獅子山) : 동쪽 20리에 있다.
23. 봉미산(鳳尾山)
장평면 청룡리와 화순군 청풍면 이만리 경계에 있는 높이 506m 산이다.
<대동지지> : 봉미산(鳳尾山) 북쪽으로 50리 능주 경계에 있다.
24. 화악(학)산(華岳山)
화순군 청풍면 청룡리와 도암면 우치리 경계에 있는 높이 613m 산이다.
25. 벽옥산(碧玉山)
장평면 진산리와 보성군 노동면 옥마리의 경계에 있는 높이 479m 산이다.
<대동지지> : 벽옥산(碧玉山) : 장택 옛현의 북쪽에 있다.
26. 가지산(迦智山)
유치면 대천리․봉덕리와 장평면 병동․우산리 경계에 있는 높이 510m 산이다. 골이 깊고 수석이 아름다우며, 보림사가 있다. 꼭대기에 큰 바위 넷이 높이 솟아 있고 니바우 또는 니바우산이라고도 부른다.
<대동지지> : 가지산(迦智山) : 북쪽 40리에 있다. 보림사가 있다.
27. 웅치(熊峙)
장평면 우산리에서 화순군 청풍면 이만리로 넘는 고개로 ‘곰재’라고도 부른다.
<대동지지> : 웅치(熊峙) : 북쪽 40리 능주 경계에 있다.
28. 웅치(熊峙)
장흥읍 금산리에서 보성군 웅치면 대산리로 넘는 고개로 제암산과 사자산 능선 중간이며, ‘곰재’라고도 부른다.
<대동지지> : 웅치(熊峙) : 동쪽 20리에 있는데 흥양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29. 가리치(加里峙)
영암군 금정면 연소리에 있는 ‘덤재(加音峙)’로 추정되며, 해발고도는 220m쯤 된다. 이 고개는 영산강 금천과 탐진강 유치천 큰내골의 분수령이다. 연소리에 원기(외태비)에 원(阮)터, 흡정에 저자(제잣거리)가 있었다.
<대동지지> : 가리치(加里峙) : 북쪽 60리 나주 경계에 있다.
30. 율현(栗峴)
유치면 관동리에 율치(밤재골)에서 신월리로 넘어가는 해발 265m 고개이며, 남서쪽 질마재(305m)를 넘으면 강진군 옴천면 동막리로 간다. 1747년 장흥읍지에 율치가 표기되어 있다. 율치는 옛 밤재의 명칭이었고, 1914년 행정 개편에 의해 학동․율치․학송이 관동에 속하였다가 1953년 한국전쟁이후 다시 관동, 밤재로 개편되었다.
<대동지지> : 율치(栗峙) : 북쪽 10리에 있다.
31. 사인암치(舍人岩峙)
장흥읍 송암리에서 강진군 군동면 풍동리로 넘는 고개로 옛 관행 길이었다. 재방재 또는 지방재라고도 부른다. 설암(雪岩)이나 시암바위로 부른다. 사인암에 음각석인상이 있다[장흥읍 송암리 산43-1번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우면 일설에는 김필이 북쪽의 임금을 기리며 새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인정은 송암리 359번지에 있다. 조선시대 초기 김필이 계유정란 뒤 장흥에 내려와 은거생활을 하면서 건립하여 후학을 교육시켰던 정자이다. 건물 동쪽 바위에는 김구선생이 썼다는 ‘제일강산’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대동지지> : 사인암(舍人岩) : 부의 서쪽 10리에 있다.
32. 계치(界峙)
장흥군 대덕읍 신월리에서 강진 대구면 계율리로 넘는 고개로 ‘지개’또는 ‘지잿재’라고도 한다. 밑에 월정마을이 있다. 이 고개를 넘어 서편에 강진 고려청자요지가 있고, 북쪽이 옛 탐진(저두 아흔골)터다.
<대동지지> : 계치(界峙) : 서남쪽 50리에 있다.
33. 면치(眠峙)
장흥읍 덕제리 동남쪽에서 용산면 어산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23번 국도가 넘어가고 해발고도는 155m 쯤이다. 신라 때 스님 통령(通靈)화상이 이 고개에 이르러, 갑자기 졸음이 와서 자다가 꿈의 암시를 받고 천관사를 세웠다고 한다. 잘재, 자올재, 자울재, 면래치라고도 부른다.
<대동지지> : 면치(眠峙) : 남쪽 10리에 있다.
34. 고리치(古里峙)
보성군 득량면 정흥리 동막골에서 회천면 화죽리로 넘는 고개로 ‘고릿재․고리테․환치’라고도 한다.
35. 계반산(界畔山)
제암산(779m)으로 추정된다. 장동면 반산리(반산리) 계재골에서 보성군 웅치면 대야리 강산마을로 넘어가는 고개가 계재(270m)가 있어 한자는 다르나, 계반산과 관련된 성 싶다.
36. 노동치(蘆洞峙)
보성군 노동면 가리재로 추정된다. 장평면 진산마을과 호동골에서 보성군 노동면 거석리 가리재골로 넘는 고개로 윗재는 해발 330m이고, 아랫재는 300m쯤 된다. 가리재>갈재>가 된 뒤, 한자로 표기해 ‘蘆洞’이 되었고, 노동마을은 거석리로 변했다.
37. 예양강(汭陽江)
탐진강을 장흥에서 부른 명칭이다. 영암군 금정면 기동마을 북서쪽 궁성산(484m) 범바웃골 성터샘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장흥군 유치면 대천리에 이르러 남쪽으로 꺾여서 유치면과 부산면의 복판을 뚫고 장흥읍에 이르러 작천을 합해 가지고 서남쪽으로 흘러 강진군 군동면, 강진읍 목리를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수령(遂寧)천’이나 ‘예양(汭陽)강’으로 불리우다 일제가 ‘탐진(耽津)강’이라 하였다. 수령은 장흥의 옛 고을터의 이름이었고 예양은 장흥읍내에 있다.
탐진이란 이름은 강진 대구일대에 있었던 현터였다. 탐진현은 757년 경덕왕 때 동음현(冬音縣)을 개칭하면서 처음 사용한 지명이다. 본디 동음은 도무, 두무 즉 원산(圓山)을 의미한다. 제주의 고지명인 탐라(耽羅)도 같은 뜻을 지니고 있고, 한라산이 화석지명으로 남아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수령천을 비롯하여, 작천, 예양강, 구십포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수령천: 예양강이라고도 하는데, 가지산에서 나와 (장흥)부의 북쪽 2리를 지나 돌아 동쪽으로 흐르고 또한 서남쪽으로 흘러 성암에 이르러 강진현의 구십포와 합하여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예양강: (장흥)부의 동쪽 성문 밖에 있다. 작천(鵲川): 영암군 월출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강진현의 북내상 서남쪽을 지나 부의 남쪽 6리에 이르러 수녕천과 합쳐 강진의 구십포로 들어간다. 구십포(九十浦): (강진)현의 남쪽 6리에 있다. 근원은 월출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현 서쪽의 물과 합쳐 구십포가 되며, 탐라의 사신이 신라에 조공할 때 배를 여기에 머물렀으므로 이름을 탐진이라 하였다.>
1682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여비고에는 보림사와 가지산 남쪽에 수령천, 장흥 동편에 예양강, 탐진폐현 서쪽에 구십포가 표기되어 있다. 자료를 정리해보면 조선시대까지는 예양강과 구십포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탐진의 기원은 삼국시대에 나온 탐라라는 지명과 관련을 맺은 듯하다. 즉 구십포일대 오늘날 강진만(도암만)이 제주를 오가는 주요 항로였기에 탐라로 가는 포구라는 속성이 반영되어 탐진이란 지명이 기원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탐진에서 제주도로 갔기 때문에 제주를 탐라라 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면 구십포와 탐진은 같은 장소인데 오늘날 어디를 말하는가. 동여비고를 비롯한 고문헌에는 대구면 지역을 비정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상당히 신빙성이 높다. 이곳 지형을 보면 매우 깊숙한 만(灣)이다. 앞 남해바다 즉 마량으로부터 강진읍 남포까지 50리나 들어온 협만이다. 이러한 지형을 어원상으로 분석해보면 그 의미를 더할 수 있다. ‘구십’은 ‘구강’과 같이 같이 불려왔는데 큰 어귀(入口)를 뜻한다.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 ‘대구(大口)’가 되며 이 지명 자체가 도암만을 상징하고 있다. 강진문헌연구회 양광식 회장의 제보에 따르면 대구면 저두리 하저마을이 옛 구십포요, 탐진이라는 것이다. 이 마을 포구 동편 골짜기에 ‘앙(아흔)골(九十谷)’이란 땅이름이 남아 있다. 이 포구의 바로 서편에 가우도가 있다. 이곳은 일제가 탐진강의 하구로 정한 곳보다 12㎞ 하류 지점이다. 따라서 조선시대까지의 지리정보는 가지산(상류 궁성산) 발원하여 활성산에서 나온 진밭내(유치천)와 옴내(옴천), 월출산 출발한 작천(鵲川,별명 錦江) 등이 예양강 되었다가 강진읍내 남쪽 바다로 유입되면서 탐진강이 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는 우리 선조들이 산천의 기록 지역특성을 따라 정확하게 표기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유역전체에 탐진강이란 개념은 1910년대 일제가 지지자료와 함께 지형도 제작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오늘날 법으로 정하여 사용하고 있는 하천자료도 실제 이때 작성된 자료를 토대로 하고 있다.(김경수, 2001, 탐진댐 수몰지역의 지리, 탐진댐 수몰지역의 역사와 문화<목포대학교박물관>, 21~25쪽).
<대동지지> : 예양강(汭陽江) : 수령천(遂寧川)이라고도 한다. 나주 쌍계산(雙溪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지나 가지산을 돌아서 남으로 흘러 돌아 고을 남쪽에서 서쪽으로 흘러 예양강이 된다. 사인암에 이르러 오른쪽 지나 강진 작천(鵲川)을 지나 강진 남쪽에서 오른쪽을 지나 주교천 남으로 흘러 구십포 즉 탐진이 되고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 완도로 남쪽이다.
38. 내덕도(來德島목장)
회진면 덕산․신상․대리일대 덕도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 “장흥(長興)의 내덕도(來德島)에는 본래 방목한 소가 1백 88두였는데 고실이 26두”[<성종실록> 2권, 성종 1년(1470 경인) 1월 계미(4일)조]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통하여 장흥 내덕도는 소목장으로 활용되었고 감목관이 파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소의 사육 두수는 188두로서 당시 기록상 나타나는 전라도 8개 목장 가운데에서는 유일하게 소 목장이다. 장흥 한우의 역사성을 증빙해 주는 기록자료인 셈이다.
<대동지지> : 방면 : 내덕도(來德島) 산일도(山日島) 평일도(平日島) 금당도(金塘島) [장흥도호]부(府)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섬[島嶼] : 내덕도(來德島)[이상 여러 섬은 동남쪽 바다가운데 있다]
39. 우도(牛島)
관산읍 삼산리 우산도로 추정된다.
<대동지지> : 진도(津渡) : 우도진(牛島津)
우도(牛島)[이상 여러 섬은 동남쪽 바다가운데 있다]
40. 장내곶(帳內串목장)
관산읍 고마리 장환도로 추정된다.
<대동지지> : 목장(牧場) : 장내곶(帳內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