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
대학로에서
12월 25일.
'성탄절'이었다.
대학로에서 대학친구들의 부부동반 모임이 있었다.
연극을 관람하기로 했다.
매서운 칼바람이 도시 전체를 꽁꽁 얼어붙게 만드는 혹독한 날씨였다.
좀 일찍 도착했던 까닭에 무대 바로 앞 중앙 좌석에 앉게 되었다.
무대와는 채 2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지근거리였다.
얼마 후에 잘생긴 배우 한 명이 나와서 유쾌한 개그로 관객들의 언 마음을 녹여주었다.
즐겁고 상큼했다.
연극의 본격적인 '오프닝'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그런데 그 젊은 배우가 앞줄에 있던 우리 일행을 보면서 짐짓 심각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뚝 던졌다.
"우리 작품이 언제부터 중년분들이 사랑하는 연극이 되었나요?"
약간 자조섞인 푸념조의 목소리였다.
그러면서 익살스런 표정과 몸짓을 지었다.
농담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헐"이었다.
우리도, 그 배우도, 관객들도 그 말에 박장대소를 터트리며 크게 웃었다.
그러나 그 흔쾌한 웃음 뒤로 약간의 충격과 슬픔이 뇌리를 강타했다.
왠지 모를 비애감도 들었다.
밀물 같은 감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소극장엔 2030 관객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 같은 40대 후반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약 2시간 가량 연극을 재미있게 관람했다.
아니다.
'관람'했다는 표현 보다는 함께 즐겼고 박수치며 환호했다는 말이 더 맞을 듯싶다.
모두 다같이 유쾌, 통쾌, 상쾌하게 공연을 만들어 나갔다.
관객 참여형 '퍼포먼스'였다.
그만큼 객석과 무대의 구분 없이 함께 호흡했던 멋진 시간이었다.
극장을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크리스마스'의 대학로엔 젊은이들로 인산인해였다.
성탄절의 축복과 은총이 넘실거렸다.
역시 인파의 대부분은 2030세대였다.
적어도 대학로에서 우리는 완벽한 중년임을 부인할 순 없었다.
우리가 스스로를 보기에도 그랬다.
'커리 전문점'에서 식사하고 자리를 옮겨 간단하게 술도 한 잔 나눴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성글어진 머리, 넓어진 이마, 깊은 주름, 흰 머리카락, 탄력이 떨어져 윤기없는 피부, 누가 봐도 지천명을 목전에 둔 전형적인 중년의 모습이었다.
"후후후"
근 30여 년을 이어온 멋진 우정이었다.
친구들의 모습은 하나 같이 대동소이했다.
그때 한 친구가 따끈한 정종을 한 모금 마시더니 중저음으로 촌평을 쏟아냈다.
"중년이 얼마나 좋은 지 모르고 하는 소리지. 니들도 살아보면 알게 될 거야. 편안하고 깊고 넓으며 격조 있는 중년기란다. 너희들이 삶의 깊이를 잘 몰라서 그런 얘기를 하지. 인생의 진정한 황금기는 2030 때가 아니라 4050 때라고"
한 친구의 독백 같은 멘트에 모두가 격하게 공감했다.
현재 대학생인 내 딸도 캠퍼스가 대학로 부근인 관계로 그곳에 자주 간다고 했다.
청춘들을 불러들이는 그곳만의 특징과 장점이 많다고 했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이든 중,장년들도 가끔씩 간다.
청년기적 온갖 추억들이 켜켜이 묻어 있는 곳이니까.
또한 그곳에 문화와 예술이 상존하고 있으며, 세대를 막론하고 모두가 소통하고 감동할 수 있는 공간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모임을 마치고 지하철로 귀가하는 길.
창밖으로 어둠 속에 잠긴 한강을 바라보았다.
강물의 윤슬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잔잔하게 일렁거렸다.
밤이 깊어갈수록 '나이듦'에 대한 온갖 상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사실 씁쓸하긴 했지만 중년임을 부인할 수도 없었다.
아직도 체력, 정신력, 감수성은 청년기적 그대로인데 세상의 기준이 우리를 한물 간 중년으로 취급하는 듯해서 심기가 편하진 않았다.
잊자고 생각했지만 마뜩찮은 느낌까지 흘훌 떨쳐낼 순 없었다.
2010년의 세모다.
정말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
다시 한 살을 먹는다.
가는 세월을 막을 순 없지만 더 넓고 뜨거운 가슴으로 신이 허락해 주신 인생을 야무지게 살아내고 싶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기도제목'이 점점 더 단출해 지고 간단해 짐을 느낀다.
삶의 이정표가 분명해 졌고 한 방향으로 일로매진하고 있다는 의미이리라.
그런 심플한 마음과 감사의 몸짓으로 신년의 첫 태양을 기다려 본다.
다시 가슴이 뛴다.
대학친구들과 배우자들 모두에게 신의 가호가 늘 함께 하길 소망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 2 >
영화 '황해'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황해'였다.
무자비한 살육이 자행되는 무서운 영화였다.
관객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렸다.
이 영화에 대한 평가도 다양했다.
좋다.
어떤 경우에라도 '다양성'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만큼 십인십색의 다채로운 평이 줄을 잇기를 기대해 본다.
과거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영화, '추격자'를 기억할 것이다.
그 제작 사단이 이번에도 일을 냈다.
'나홍진'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하정우','김윤식','조성하' 씨 등 당대 최고의 캐릭터들이 열연했다.
오랜 시간 동고동락하며 함께 호흡했던 파트너십이 탄탄하게 빛을 발했다.
특히 '하정우 씨'의 흥미진진하고 실감나는 연기는 단연 압권이었다.
그러나 이런 잔혹한 영화가 우리 사회에서 횡행하는 데 대해선 적잖은 우려가 들기도 했다.
더욱이 한 해를 갈무리하며 감사와 희망을 생각하는 세모에 이런 컨셉의 영화들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음에 마음이 조금 무거워 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자식이 부모를 죽이거나 부모가 어린 자식을 버리기도 한다.
지나가는 행인을 아무런 이유 없이 찌르고 사람의 목숨을 경시하는 세태가 점점 늘어만 가고 있다.
안타깝고 때로는 화가 치민다.
살인을 저지르거나 청부하는 사례들도 점증하고 있다.
무섭고 두렵다.
걱정스럽다.
예서제서 긴 탄식이 쏟아지고 있다.
학생들은 죽어라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자신이 원하는 직장에 입사하려 난리다.
인지상정일 테지.
경력이 쌓이면 직책이 커지고 연봉도 많아 진다.
그러나 각인의 '행복지수'가 연봉이나 직급에 꼭 비례하는 건 아니다.
관계의 절망.
탐욕과 배반의 눈동자.
그 극심한 갈등과 고민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적잖다.
영화 '황해'도 결국은 마음을 비우지 못한 데서 출발했다.
끝내 가족과 지인에 대한 살인을 청부하기에 이르렀다.
돈이 된다면 '살인'도 크게 고민하지 않는 세태다.
사람을 향해 거침없이 손도끼를 휘두르고 섬뜩한 회칼로 도륙을 자행했다.
잘 살수록 사람들은 '감사의 삶'을 사는 게 아니라 더 큰 탐욕으로 영혼이 얼룩진다는 것을 이 영화는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세상이 점점 '소돔과 고모라'로 변질되고 있다며 힘써 경계할 것을 호소했다.
"신께서 진노하실 '그날'이 그리 멀지 않았으니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라"는 강력한 메시지로 들렸다.
나는 그렇게 해석하며 보았다.
작품의 극적 전개와 살아있는 '리얼리티'를 위해 한두 번의 잔혹한 영상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간 중간에 빈번하게 그런 영상으로 스크린을 채우는 건 그닥 바람직스럽지 않다고 본다.
'은유'와 '복선'이 사라진 현대사회는 '직설'과 '찰라'만 가득했다.
깊은 사유와 오랜 기다림으로 말미암는 '풍자'와 '익살', '낭만'도 저만치에 밀쳐둔 지 오래다.
돈과 출세만을 열심히 추종하기에 정신과 신체의 밸런스도 이미 심각하게 깨져버린 상태다.
오늘 새벽에 눈 쌓인 길을 뚫고 출근하면서 나도 모르게 '유리상자'의 '사랑해도 될까요'를 계속 흥얼거렸다.
가사가 정말로 좋았다.
한 편의 시였다.
"웬일인지 낯설지가 않아요. 설레고 있죠 내맘을 모두 가져간 그대. 참 많은 이별 참 많은 눈물 잘 견뎌냈기에 좀 늦었지만 그대를 만나게 됐나봐요. 지금 내 앞에 앉은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요. 두근거리는 맘으로 그대에게 고백할게요. 조심스럽게 얘기할래요 용기 내볼래요. 나 오늘부터 그대를 사랑해도 될까요. 처음인걸요. 놓치고 싶지 않죠. 사랑이 오려나봐요. 그대에겐 늘 좋은것만 줄게요. 내가 그대를 사랑해도 될까요"
우리네 삶은 하나의 커다란 건축물이다.
건물을 지었다면 그 다음엔 어떤 컨텐츠로 내부를 채우고, 어떤 감동으로 덧입힐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유물론적 사고에 매몰되어 계속해서 '건물높이'에만 집착한다면 필경 '바벨탑'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의 탐욕을 먹고 자란 '바벨탑'의 끝은 붕괴와 파멸뿐이다.
같은 한국말을 주고 받아도 서로 소통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한 물고기가 물 속에서도 목이 말라 죽어갈 때도 있다.
슬픈 일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의 현실은 더 엄중하고 우려스럽다.
새해엔 상대방의 얘기를 좀 더 '경청'해 주고 '역지사지'하는 습관이 몸에 배기를 소망해 본다.
그런 작은 태도와 자세가 곧 사랑이고 배려다.
또한 우리의 '행복지수'를 높여주는 거의 유일한 패스워드가 아닐까 한다.
"아듀, 2010"
'세밑인사'를 건네는 시간이다.
한 잔의 구수한 커피를 앞에 두고 있다.
스피커에선 '유리상자'의 감미로운 노래가 흐르고 있다.
내년엔 더 사랑하고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한다.
내가 먼저 져주고 양보하면서 푸른 하늘을 자주 볼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조금 느리게 간다고 해서 인생 레이스 전체가 실패한 건 아닐 테니까.
'사랑발전소 회원님들'께 진심어린 감사를 전한다.
한 해 동안 수고 많이 하셨고, 내년엔 더욱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해 본다.
감사와 사랑을 전하며.
2010년 12월 30일.
아침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