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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정치 10년을 돌아 본다【1】
함석헌
나는 말할자격이 있을까?
“군인 정치”라 했지만 내 참 느낌대로 한다면 “정치”라고 하고 싶지도 않다. 어떻게 이것을 정치라고 하겠는가? 차라리 “지배”라 하든지 “억누름”, “짜먹음”이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전체의 의견을 이끌어내기를 목적으로 하고서 하는 말에 너무 내 느낌만을 내세울 수는 없고, 또 공공하게 내놓고 하는 말에는 일반 세상이 통용하는 말을 따라 씀으로만 이해에 이르기가 쉽기 때문에 그냥 정치라고 부른다. 그러나 20년 동안 그들의 한 일을 정치라고 승인해 줄 마음은 절대로 없다.
나는 가장 밸 일어서는 것이 소위 그 “기정사실”이라는 말이다. 씨알의 목을 비틀고, 아니다 제 양심을 비틀고, “해먹는” 계급이야 물론 그러겠지만 신문잡지까지 그러는 데는 참 답답하다. 만일 돼진 일은 다 다시말 할 것이 없이 단념해 버리고 말 것으로 생각한다면 무엇이 사람인가? 생각해 보라, 만일 일본에게 정복 당했을 때 몇날 못가 곧 기정사실로 인정해 주고 나라 찾을 생각 아니 했다면 오늘이 있을 수 있었겠나? 따질 것은 10년이 지나가서도 따지고 아니라 할 것은 백년이 되고 죽으면서도 아니라 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면 혹시 “세상이 다 그렇게 됐는데 너 혼자 아니라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할지 모른다. 허지만 그렇지 않다. 소용되는 것만이 귀한 것 아니다. 사람은 뜻에 산다. 뜻이야말 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전민족이 다 제 백성이 된 것 같은 때에도 일본은 한 사람 안창호를 기어이 바다 밖에까지 나가 잡아다 죽였고, 그까진 늙은 도둑 하나를 죽여 일본이 다 없어 질 것 아님을 뻔히 알면서도 안중근은 시베리아까지를 헤매어 이또오(伊藤)을 쏘았다. 그리고 그 뜻 때문에, 짐승처럼 먹고 살고 새끼치기만을 생각했던 이천만이 아니라, 그 한 사람들이 죽음으로써 지켜 살렸던 바로 그 뜻 때문에 오늘은 있는 것 아닌가?
세상이 다 그 무리가 된다 하더라도, 그들이 그 마음씨를 고치지 않는 한은 나는 절대로 5.16을 혁명이라고도, 그 이후의 일을 나라함이라고도, 인정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역 사의 심판대 앞에 원고로 서서 고발하기를 그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한 사람이지만 절대로 혼자가 아니다.
그러면 내 속에서 소리가 나서 나 더러 묻기를 이렇게 한다.
“너는 고집 아니냐?” “삐뚤어진 생각 아니냐?” “너는 이날까지 됐다는 것은 하나 없고 반대 뿐이니 그것은 반대를 위한 반대 아니냐?”
“너는 말할 자격이 있느냐?”
그러나 곰곰이 생각한 후 내 마음은 역시 대답한다.
“그렇다, 나는 말할 자격이 있다.”
“버젓이 있다.”
“내게 아무 권력이나 명예나 돈이나 내 주장에 대한 야심 없다. 나는 다만 지극히 작은 씨알의 하나로서 나라를 위하고 도리를 살리자는 마음뿐이다. 그러므로 설혹 내 판단의 잘못된 것이 혹시 있다 하더라도 말할 자격이 충분히 있다.”
“그뿐 아니라, 이때까지 내 한 판단과 주장은 십년 역사에 의하여 옳은 것이 증거됐기 때문이다.”
내가 잘났단 말 아니다. 반대다. 잘 났다면 바른 판단을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못났기 때문에 볼 것을 본 것이다. 잘 드는 칼은 언제나 빗나가는 법이요. 무딘 칼에는 실수가 없다. 씨 알은 무딘 칼이다. “뾰족한 수”라는 말이 있지만,잘난 사람은 다 뾰족한 수를 가진 사람들이다. 학자라는 사람, 지도 능력이 있다는 사람, 사업가 운동가가 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에 뾰족한 것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 대신 제대로 있지 못하고 어디 가서 잘 꼬친다. 씨알의 마음은 그와 반대다. 뭉투룩 해서 잘난 것이 없는 대신 어디가 꼬칠 데가 없고, 그러기 때문에 제 자리를 잃지 않는다. 제 자리에 섰기 때문에 그 보는 것이 바르다. 나는 못나서 감히 잘나 보자는 엄두를 못 내기 때문에 오늘까지 내가 타고난 씨알의 자리를 떠 본 일이 없다. 그것이 나 스스로 말할 자격이 있노라는 이유다.
모든 잘난 사람들의 하는 의론은 다 객관적, 현실적임을 자랑한다. 그래서 어질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그 어짊은 우리를 죽는 데로 이끌지 사는 데로 이끌지 못한다. 가령 생각해 보라. “약육강식”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그처럼 객관적이요, 현실적인 사실은 없다. 그러나 그렇다면 나도 “약한 놈”이기 때문에 남에게 먹혀 마땅하다 하고 어질게 만족하고 있겠나?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때껏 모든 약한 놈이 다 강한 놈 한데 망해 버렸다 하더라도, 나만은, 그렇다 이 나만은, 그래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 사람이요, 살리는 진리 아닌가? 그런데 언제나 사람들이 정치 비판하는 것을 보면 스스로 후진국으로 자처해서 모든 죄악을 “할 수 없는 현실”로 인정하고 “기정사실”로 넘겨버리려고만 하니 이것이 정말 “망국노” 의 근성 아닌가? 어째 그렇게 모르나? “나”의 논리와 “남”의 논리가 어떻게 같을 수 있겠나? 지나가던 길손은 제 길이 바쁘면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도 지나갈 수가 있지만, 그 사람이 내 어버이요, 내 자식인 다음에는 그럴 수가 없다. “나”는 결코 일반적인 것의 한 예가 아니다. 나는 “예외”다. 씨알은 나라를 살고 있는 것이지 정치를 하는 것 아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선진국도 후진국도 없다. 이상도 현실도 없다. 그저 살아야 하는 명령과 지켜야 하는 뜻이 있을 뿐이다. “정치”란 한가히 옆에서 보는 사람이,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 지식을 즐기기 위해 하는 말이요, 그렇지 않으면 불 난 집에서 물건을 훔쳐 가기 위해, 큰소리로 “불을 꺼라”하며 분주히 돌아가면서, 남이 불 속에서 생명을 걸고 끄집어 낸 물건을 슬슬 도둑질 하는 도둑놈의 소리다. 정치 소리를 열심히 할수록 흉악한 도둑이다.
씨알아, 정치 강도와 정치학 절도에 속지 마라!
돌이켜 볼 때
이제 우리는 지나온 십년을 돌이켜 보아야 하는 자리에 왔다.
사람은 돌이켜 볼 줄 아는 물건이다. 길은 가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라 이때까지 온 길을 기억하고 이제 갈 길을 미리 생각할 줄 알아야 길이 된다. 앞뒤가 없으면 지금 가는 것은 하나의 헤매임 뿐이다. 그와 마찬 가지로 삶도 과거와 미래가 있어서만 삶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그 과거와 미래는 어떻게 생기느냐 하면 기억과 상상에 의하여서 된다. 사람도 일을 당하여서 거기 반응하는 데서는 동물과 다를 것이 없으나,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사람은 그저 일을 치루기만 하면 그만이 아니라, 다 치루고 난 후에도 그것을 기억이라는 방법으로 속에 두고 거기 대해 늘 생각을 하고 또 그것을 미루어 미래를 생각한다는 데 있다. 이것은 하나의 새 세계다. 겉의 세계에 대해 속의 세계다. 이것은 하나의 새로운, 보다 높은 차원의 세계다. 그림이 자연의 단순한 그림자만이 아니듯이 돌이켜 봄에 의해서 되는 정신의 세계도 결코 지나간 일의 그림자만이 아니다. 하나의 독립한 높은 가치의 세계다. 사람의 생활 의 목적이 되는 모든 보람은 여기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 돌이켜 봄은 엄정한 의미에서 시시각각으로 있는 것이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늘 그렇게 이론적으로만 할 수는 없고, 가다가 어떤 때에 매듭을 지어서 하게 된다. 생각하는 것이 사람의 특성이지만 생각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사정에 강요를 당해서만 비로소 하게 된다. 지금이 바로 그러한 때라는 말이다.
군대를 다루는데 늙혀서는 아니 된다는 법이 있다. 군대가 일없이 어느 한 곳에 가만있으면 그 기운이 죽어버린다. 이것을 늙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군대를 지휘하는 사람은 싸움이 없는 때는 늘 군대를 이동 시킨다. 아무 일이 없어도 한 곳에 가만 두지 않고 쉬지 않고 이동 시킨다. 졸병들은 알지도 못하고 늘 어디 무슨 작전이 생겼나 하고 이리 가고 저리 간다. 그것을 심리적으로 분석하면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일이 없이 가만있으면 자연 생각을 하게 되고 생각하면 시비가 나오고 불평이 나온다. 그러면 명령이 잘 실행되지 않는다. 그것을 막기 위해 될 수록 바쁘게 만들어 생각을 못하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이성에 어그러지는 일이지만 전쟁 그 자체, 군대란 물건 그자체가 이미 근본적으로 하나의 큰 부조리, 비이성적인 것임을 생각 한다면 각별 이상할 것도 없다. 거짓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또 하나의 거짓을 요구하고, 부조리는 그것을 억지로 세워 나가기 위해 또 하나의 부 조리를 강요한다. 그리하여 무리에서 무리로 달린다. 그러나 이 우주가 진리를 가진 우주인 이상 그것이 무한으로 용납될 수는 없다. 그래서 결국 터지고야 마는 날이 온다. 그것이 혁명이다.
5.16 이후 오늘까지의 정치를 한마디로 표시한다면 “못살게 군다”고 할 수 있다. 국민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계속 만들어서 쉴새없이 몰아쳤다 왜 그랬을까? 국민이 미쳐 생각할 여 유를 가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왜? 생각하면 5.16 자체가 당초부터 이성에 어그러졌던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압박자들은 언제나 씨알을 지치게 만들려고 하는 법이다. 물론 지쳐도 제 할 생각은 해야하는 것이 사람이지만, 사람은 또 약한 것이어서, 누으면 죽을 줄을 알면서도 놓지 못하는, 눈 속에 지친 사람같이, 생각을 될수록 피하는 버릇이 있다. 씨알을 짐승처럼 부려서 국물을 짜먹자는 지배자들은 이 심리적 법칙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계획적으로 악용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몰아침의 비이성의 행군에 변화가 오게 됐다. 이날까지의 사회가 무표정, 자포자기, 마미, 멍청이의 사회였다면 요새는 갑자기 생각하기 시작하는 사회다. 왜 그렇게 됐나?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기를 시작하게 했던가?
첫째, 미국의 갑작스런 정책 변경이다. 타고 가던 차가 급커브를 돌게 됐으니 몸을 세우려 의식적으로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계속해 일어나는 큰 사건들이다. 광주단지 사건, 특수부대 난동 사건, 한진 노무자 데모 사건, 매일 같이 있는 무장공비 침입 사건, 또 무슨 사건, 무슨 사건…… 차가 엎더질 듯한 것을 보자 큰 소동이 일어나는 데 차장이나 운전수가 아무 대책도 없이 “일 없어요, 일 없어요” 하기만 하니 의심스럽다.
셋째, 그 보다도 더 큰일 난 것은 엔진에 고장이 났다. 공화당의 내분이다. 엔진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그 까진 기계는 못쓰게 되면 내버리고 새 것으로 갈아치우면 그만이지만, 그 터지는 바람에 애매한 씨알만이 많이 상하겠으니 말이다.
이래서 우리는 이 10년 정치를 깊이 반성해서 마감을 봐야 하는 필요를 느끼게 됐다.
와서는 아니 되는 것
5.16이 일어나자 거리에 많이 나돈 소리가 “이제 정말 올 것이 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우리는 그 말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정말 와야 하는 것이었던가? 씨알은 정말 군인 혁명을 기다리고 있었던가?
첫째, 올 것이 왔다는 그 소리는 정말 씨알의 소리던가부터 생각해 보자. 아니다. 결코 씨알 전체의 소리 아니다. 일부지식인의 깊이 생각하지 않고 한 소리었고, 그렇지 않으면 일어난 힘에 대해 아첨하려는 심리에서 나온 소리다. 씨알 전체의 의견이 아닌 증거로는 그때부터 오늘 까지 5.16 그 사건이나 그것을 일으킨 사람들에 대해 감격하고 고마워한 일이 한번도 없다. 이제라도 극장에 가서 그 애국가 나오고 박정희씨 사진 나올 때에 관중의 태도보면 알지 않나? 일어서라고 강요하는 것부터가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는 일이지만 일어서면서도 입 속에서는 모두 피피 하지 않던가? 소위 정치란 본래 사람의 속을 문제 삼는 것 아니요. “옆 찔러 절 받자” 는 것이기 때문에 시키는 사람들은 억지로라도 절을 시켜놓고는 거기 쾌감을 느끼겠지만, 생각이 있는 사람은 아니 그렇다, 어린애처럼 그런 것 가지고 더럽게 싸울 수도 없으니 앙절거리는 강아지에게 먹을 것 던져 주는 식으로 하라는 대로 하기는 하지만 속은 크게 불쾌를 느낀다. 그러기 때문에 모두들 “이것은 애국가에 대한 모욕” 이라고 한다. 옳은 말이다.
십년이 지나서 다 굳어진 듯한 오늘도 그런데 하물며 그때에 환영했겠나? 나는 첨부터 5.16에는 반대했고 오늘까지 싸워 오는 사람이기 때문에 혹시 내 치우친 생각으로나 아닌가고 끊임없이 반성하고 지배자들과 씨알의 얼굴을 늘 번갈아 살펴보는데 절대로 씨알 전체가 고마운 혁명이라 하고 승인해 준일 없다. 지배자들은 이 후에 역사에 적힐 것을 생각해 신경을 곤두세워 가진 수단 방법으로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는 소리를 남기려 애쓰지만, 일부 시킨 사람들을 내 놓고는, 전체는 결코 지지하지 않는다.
또 그 올 것이 왔다는 말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올 것이라 할 때 그 올 것이란 무엇인가? 물론 혁명이다. 그때 전체 사회가 혁명을 기다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군인이 해야 한다고 기다린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것이요, 또 하리라고 짐작조차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올 것이 왔다는 말은 할만한 말이면서도 대단히 경솔한 말이다. 혁명을 기다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어떤 사람이 어떤 방법으로 해도 좋단 말인가?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
여기 대해서는 언론인들아 우선 책임을 져야지만 씨알들 자신도 깊이 반성해야 한다. 마음에 허락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분명 와서는 아니되는 것이면 그 경솔 혹은 아첨으로 하는 말을 분명히 부정 했어야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책임은 스스로 져야한다. 내가 기른 강아지가 내 발꿈치를 물었으면 은길 내가 책임을 아니질 수 없다.
왜 나는 첨부터 반대했던가? 물론 박정희가 어떤 사람이고 김종필이 어떤 사람인 것을 알아서 한 일 아니다. 나만 아니라 거의 전 국민이 1961년 5월 16일 새벽 총소리가 귀를 울릴 때까지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 있는 줄조차 몰랐다. 반대한 이유는 오직 하나 군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60이 되도록 정치에 관계나 흥미를 가져본 일은 한 번도 없어도, “군인이 정치 에 주둥이를 내밀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일찍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이것은 상식이다. 천하의 통칙이다. 정치의 철칙이다. 인류 전체가 여러 천년 두고 많은 쓰라린 체험을 통해서 얻은 지혜다. 그러기 때문에 나도 그것을 믿었다. 믿은 것은 결코 나만 아니다. 사람인 담에는 다 그것이 옳은 말인 줄을 알았을 것이다. 다만 나는 그것을 내 믿는대로 말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분명히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그 말하지 않은 전체가, 더구나 그 중에서도 지식인이 나무럽다. 십년이 지나고 이제 끄트머리가 차차 내다뵈는 오늘 나는 그 올 것이 왔다던 사람들께 묻고 싶다. 그래 오늘날도 올 것이 왔다고 생각 하느냐? 그래 정말 잘됐다고 생각하느냐? 제발 사람이 되고 싶고, 나라를 사랑하고, 잘못을 저지른 그들도 사람으로 건져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거든 이제라도 그것은 잘못한 말이었다고 바로잡기를 바란다.
왜 군인은 정치를 하면 아니되나? 예로부터 “兵은 凶器라” 사람이 손에 칼을 잡으면 제 본심을 잃기 쉽기 때문이다. 사람의 근본 천성은 착한 것이나 한번 무기를 손에 쥐면 그만 그 본성을 잃고 사나워지기 쉽다. 사납다는 것은 남을 나와 마찬가지의 인격적인 존재로 알지 않고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하나의 물건으로만 보는 심정이다. 그래서는 정치는 못한다. 정치는 공자의 말대로 政也者는 正也라, 사람과 사회를 바로잡자는 것이다. 바르다는 것은 서로 제 욕심만 부리지 말고 사람답게 같이 살자는 말 이다. 그것을 하자고 나서는 것이 정 치다. 그러기 때문에 참의미로 하면 정치에는 스스로 나설 수는 없다. 남들이 나를 바른 사람으로 보아, 나서달라 해서 비로소 나설 일이다. 그때에도 정말 어진 사람은 사양하고 나 서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하겠다, 감히 나서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이나 스스로 칼을 들고 제 인격의 힘이나 사상의 힘으로도 아니고 단지 흉기의 힘을 빌어 세상을 바로잡아 보 겠다는 것은 어리석음에도 분수없는 일이다. 그러니, 나라는 그만두고 그 일을 하려는 그들을 인간으로 대접하는 의미에서도 어떻게 보고만 있겠는가? 어찌 차마 잘한다고 할 수 있겠 는가? 그래서 나는 그 사람들의 내력을 물을 것 없이 반대했다. “너 나올 자리 아니다.” 나라 일이 어지러운 것은 사실이니 단순한 군인 식의 생각에 우리가 일어서 바로잡자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은 허락해 준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거기가 생각이 부족한 데다. 스스로 자기 힘을 믿는데 두 가지 있다. 아주 어질어서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아주어리석어서 하든지. 그러기 때문에 나는 이 어려운 시대 에 감히 스스로 나서는 사람일수록 믿지 않는다. 어리석든지 그렇지 않으면 아주 흉악해서든지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5.16은 오발탄, 곧 잘못 쏜 총이었다고 분명히 규정짓는다. 나는 4.19는 헛총이라 했다. 헛총은 첨부터 쏴서는 아니 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알을 아니 넣는다. 사람 죽일 뜻 없다는 말이다. 오발탄은 그와는 다르게 쏴서는 아니 될 것을 쏜 것이다. 오늘의 이 어려움은 거기서 시작된다. 그들은 오늘도 계속해서 쏘고 있다. 내가 10년 역사를 군인정치라 이름짓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들은 민정이양 때부터 심술을 부려서 군복을 아니 벗으려 하였지만 여전히 군인이다. 군복을 벗어도 군인버릇을 면하려면 적어도 3년은 갈 것이라고 나는 말했었는데 3년은 그만 두고 10년에도 되지 않는다. 3년 기한은 씨알 노릇 그만하고 군에 잡혀 있은 것이 3년이니 다시 본성에 돌아오는 데도 적어도 그만한 세월은 들것이라는 생각에서 한 말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10년에도 아니 되니! 돌아 올 뜻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보라, 그 하는 모든 일이 군인 ᅳ색 아닌가. 그렇지만 마음에 새겨둘 것은 앗시리아도 스파르타도 로마도 나폴레옹도 비스마르크도 신통히 신통히 예외 하나 아 니 남기고 다 망했다.
그때에 도리를 배웠다는 지식인들이 분명히 “군사혁명은 해서는 아니 된다.” 말을 했던들 나라가 이렇게 망칙하게는 아니 됐을 것이다. 그들이 공약한 대로 다시 군인으로 물러 갖을 것이다. 그런 것을 “이제 정말 올 것이 왔다” 하며 인정해 주는 태도를 보이니, 이제 세상에 사람없는 것은 뻔한 일이고, 그래 그날부터 업신여기고 학자의 입에 말 자갈을 물리기 시작했다. 말을 했더라면 사람 대접을 받고 나라도 바로 됐을 것인데 말 한 마디 아니했기 때문에 말같이 자갈을 물고 밥은 아닌 죽을 얻어먹으면서 제 갈 길을 가지 못하고 타고 앉은 놈의 이끄는 대로 가야 했다. 아아, 도리야, 네가 지금 어디 있냐? 이성아, 네가 지금 어디 있냐? 양심아, 너는 지금 어디서 포로의 한숨을 쉬느냐?
속임수의 공약
혁명공약이란 것을 내세웠다. 그 목적은 자기네의 목적과 그 나가는 방향을 국민 앞에 내놓아 그 신용을 얻자는데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그들을 아는 데와 그들의 한 일을 비판하는데 가장 중요한 글이다.
나는 첨부터 그것을 믿을 수 없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 그들의 하는 말이나 글을 본 것이 없고 그들의 이날까지의 경력을 모르고, 따라서 그 어떤 심정의 사람들이며 얼마나한 인격을 가졌는지 모르는데 한 손에 칼을 들고 불쑥 나서서 하는 말을 어떻게 신용하겠나? 아는 것이 있다면 그들이 군인이요, 나라를 위해 싸웠다는 것 뿐인데 그것만으로는 믿을 수 없다. 군대에는 어떤 망나니도 가야 하는 곳이요, 전쟁은 시키면 제 인생관, 신앙, 사상과는 관계없이 해야 하는 것이니 단지 군대에 있었다는 것 만으로 무조건 애국자라 믿을 수 없고 전쟁에 참여했다고 해서 사상이 견실 하다고 믿을 수도 없다. 나 보기에는 그런 자기네들로서 일방적으로 국민 앞에 공약을 한다는 것은 너무도 자기를 모르는 일이요, 국민을 너무도 훌홀이 생각하는 행동이었다. 좋게 보면 그 단순성이 너무도 가엽고 나쁘게 보면 건방진 행동이었다. 첨에는 나는 동정하는 눈으로 보았다. 이때껏 전장판으로 다닌 사람들이 나라 일 한심한 것을 보고 의분을 느껴 그러는 것이겠지. 그러나 그 동기는 고맙지만 생각이 부족하다. 그들이 어떻게 정치를 알겠나? 그러나 후에 와서는 그 동기마저 의심하게 됐다. 마땅히 물러나야 할 때에 물러나지 않으니, 그럼 그 공약은 첨부터 지킬 목적으로 내세운 것 아니라 한 때 국민을 속이고 넘어가기 위한 것 아니었나. 나는 지금도 그들이 이것을 밝히지 않는 한은 믿지 못한다. “지키고 싶은 마음은 있었으나 못 지켜 죄송합니다.” 하고 물러나든지, 그렇지 않으면 “첨부터 우린 계획적으로 했다.” 그러든지 그러면 국민도 제 할 생각이 있을 것이다.
어떻게 지킬 수 있겠나? 조금 생각이 있는 사람은 그 公約이 空約인 것을 첨부터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그들이 감히 혁명에 손을 땐 것은 인생에 경험이 적고 정치가 뭔지를 몰라서 한 것이었다. 모르고 했으니 일을 그르칠 것은 변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지식인들이 올 것이 왔다 했으니 너무도 잔혹한 일이다. 사람을 그렇게 못쓰게 만들고 나라를 망가쳐 놨으니. 그래, 잘됐다고 항변할 자신 있는 사람 있거든 씨알 앞에 나서 봐라!
그들이 얼마나 생각이 부족했던 것은 내가 지나 본 한토막 대화로 짐작 할 수 있다. 유달영님이 국민운동 본부장으로 있을 때 찾아갔다가 그 자리에서 재건 최고회의의 한 사람을 만났다. 유부장은 이미 그들과 접촉이 있어서 알기 때문에 내게다 그 사람을 소개 하면서 말하기를,
“최고회의 안에도 선생님 좋아하는 파와 좋아하지 않는 파가 있습니다. 이분은 선생님을 굉장히 좋아하시는 분입니다.”
했다. 나도 나를 좋아한다니 좋았지 나쁘지 않았다. 그래 있는 대로 말을 했다.
“당신들이 전장판으로 다니노라 책을 봤담 몇 권이나 봤겠소? 생각을 했담 얼마나 했겠소? 당신들은 정치 못합니다.” “왜 못해요 할 수 있습니다.” “그럼 할 것 다 한 다음 공약대로 물러나겠소?” “아, 물러나지요.” “그만두시오. 거기가 당신들이 생각이 모자라는 데 입니 다. 정치란 것은 내놓는다, 아니 내놓는다, 싸움으로 되는 것이지, 그래 학교 선생이 일정한 연한이 지난 다음 이제 너는 졸업이다 하고 증서를 주어 내 보내 듯이 그렇게 한단 말이요?”
“그렇게 못할 것 있어요. 저희들은 그렇게 합니다.”
“저희들은 그렇게 합니다.”하던 그 소리가 지금도 내 귀에 쟁쟁하다. 이 10년 어느 날이면 그것을 잊었겠나? 그 사람 이름을 내가 기억하지 못한 것이 다행이다. 이름이라도 알았다면 욕을 많이 했을 것이다. 물론 그 사람 하나를 가지고 전체를 단정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생명 내걸고 한다는 혁명 동지들이었으니 대체 그 정도에 그 방식이라 생각해 무방할 것이다. 슬픈 일이다. 어쩌면 무슨 운명에 나라가 그런 사람들 손에 떨어진단 말이냐? 아니다, 운명없다. 모두 우리 자신의 책임이지.
나무는 그 열매로 좋고 나쁨을 판단한다. 5.16 혁명공약 나무에는 어떤 열매가 달렸나? 정직하게 말해 봐라. 저즘께 국무총리라는 사람이 제 입으로 三不를 말하지 않았나? 군인으로 서 돈 한푼 없던 사람이 무엇으로 지금의 그 큰돈을 모았나? 나라의 것 도둑질 한 것 아니냐 하는 정문(頂門)의 일침을 맞고도 “내 재주와 힘으로도 그만 것은 모을 자신이 있다”고 재치있게 뱃심 좋게 넘기는 그 사람들이 왜 10년 정치에 달린 열매가 不正, 不信,不安뿐인가? 그 재치, 그 뱃심, 더 분명히 말해서 그 철면피가 그 공약을 애당초 만들고 그 자연적 인 결과가 오늘에 나라를 휩쓰는 이 不信, 不正, 不安 아닌가?
기차표 사러 창구에 가면 얼마냐 물을 줄도 모르고 돈뭉치를 드려밀고는 모든 것을 옳게 해 주겠지 믿고 거스름돈을 헤어 보지도 않으리 만큼 순진한 백성을 어떤 놈들이 오늘처럼 서로 못 믿게 만들었느냐?
나라를 다 뺏기고 일본 밑에 종살이를 하면서도 안심하고 농사 장사하고 일본 선생 손에 제 새끼를 키워 달라 맡기리 만큼 마음 착한 사람들을 어떤 놈들이 오늘처럼 이렇게 근심 걱정에 쌓여 있게 만들었느냐?
부정 부패야 말인들 할것 있느냐? 너희 정치한 것들이 그렇게 만들었지 누구냐?
공약이라 해서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았다는 면만 생각할 것 아니라 그것이 이르킨 사회 악을 생각해야 한다. 어째서 잘했노라 자랑하고 싶을 때는 모든 것이 5.16 덕택에 다된 것처럼 말하면서 잘못된 것을 물으면 그것은 사회가 나빠서 그렇다고 책임을 씨알에다 미느냐? 그렇다. 너희가 그러지 않아도 모든 책임을 어미처럼 그 등에 몰아친다. 그러나 씨알의 손에서 가장 좋은 것은 다 뽑아서 나라한다는 이름 아래 진탕 치듯 먹고 마시고 놀아나는 너희로서야 어찌 그럴 수 있느냐? 그렇게 비겁하냐? 최치원이 신라 때만 있고 지금은 없는 줄 아느냐? 지금도 세상을 망가치는 놈은 “不啼天下之人皆思顯戮이라 抑亦地中之鬼己議陰詠”라, 다 하고 있다. 귀신이 다른 데 있는 줄 아느냐? 노하는 씨알의 마음 거기가 곧 그 있는 곳이다.
그러나 그까진 모든 것보다 더 중대한 것은 그들의 사상이다. 집을 헐어 고치는데 목적도 설계도 없이 헐기만 하면 되느냐? 그런데 나라는 어째 아무 이념도 사상도 없이 손을 대느냐? 그 이념 없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그 공약이다. 그 속에 민주주의나 세계라는 말이 도무지 나와 있지 않다. 단 한마디 “민주공화국”이란 말이 있으나 그것은 민주주의를 위한 말이 아니다. 사상 비슷한 것이 있다면 오직 한 귀절 반공을 국시로 한다는 것이 있으나 그것이 어떻게 무식한 말임은 이미 우리가 여러번 한 말이다.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하나는 그들이 평생에 민주주의에 대한 열심이 없고 따라서 거기 대해 이해가 도무지 없음을 말하는 것이요, 그 다음은 그들이 민중을 모른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둘은 민중을 아주 깔봐서 굶주린 것만 제해 주면 자기네를 영웅으로 알려니, 아마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다. 그리면 그들이 전 민중의 지지를 종시 얻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씨알은 아무리 보잘 것 없이 바닥에 사는 듯해도 그들의 마음은 결코 의식주에만 있지 않다. 권력에 욕심 있는 사람들은 저희 인생관이 그 정도기 때문에 민중도 그러려니 하지만, 민중은 시냇물 같아 매우 얕으면서도 그 속에 별이 찬란한 하늘을 품고 있다. 민중을 동원시키려면 높은 이상을 보여주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것은 모든 시대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혁명을 하는 애국 영웅으로 자처하면서 민주주의고 사회주의고 간에 아무 이념의 내세우는 것이 없는 것을 보면 그 사상의 빈곤의 정도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당초의 말대로 청소작업을 끝내고는 곧 물러갔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일은 잘못될 수밖에 없었다.
새 역사라 말은 그러지만 정말 새 역사를 생각했다면 어떻게 “세계”라는 생각이 한 번도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을까? 이 시대는 “세계적인”이 시대인데, 그렇게 역사에 대한 이해, 이해는 그만두고, 성의도 없는 사람들이 정치에 손을 댔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우리 역사가 새롭게 앞으로 나가기는 고사하고 뒤진 거름을 하게 된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이었으니 말이다.
일전 공화당 내분 파동이 있었을 때 바람결에 오는 소리가 박총재가 노발 대발해서 하는 말이 “민주주의를 못 하더라도 당의 단결을 깨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사실 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나타난 결과로도 맘 속에 공화당이 있을 뿐이지 민주주의가 없는 것은 알 수 있다. 하나님, 이 백성이 무슨 죄로 이 운명을 당해야 합니까?
비겁한 지식인
내가 만일 5.16 주체만을 잘못이라 한다면 비겁한 일이다. 우리들 지식인이라는 사람들도 책임을 같이 져야 한다. 사실은 더 밉다 해야 할 것이다. 오지 못할 것이 왔을수록 씨알을 이끌어갈 책임은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혁명공약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그 본문 여섯 조건 보다도 끝에 붙여 쓴 말이다. 여섯 조건이 다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또 못했을수록, 그 마지막에 달아 쓴 말대로 물러갔더라면 일은 이렇게 나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달아 쓴 조건은 말 그대로 진심으로 한 것으로 받아드리고 싶다. 자기네도 군인으로서 정치에 나서는 것이 옳치 않은 줄은 처음에는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정치 잘못해서 4.19의 비싼 값을 내고 모처럼 얻은 좋은 기회를 놓쳐버리고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고 있는 썩어진 정치인들을 깨끗이 몰아내기만 하면 곧 물러서려고 했을 것이다. 이것은 그들 혁명동지 사이의 굳은 약속이었을 것이다. 그중 몇은 그렇게 해서 주체 세력을 만들면서도, 우리 다 같이 물러서자 하면서도, 속으로는 일이 잘 되기만 하면 한 번 권세를 쥐어 볼 것을 첨부터 슬그머니 속에 품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것도 그랬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적어도 전체로서 하는 엄숙한 약속에서는 전원이 일치해서 욕심없이 할 일 다 하고는 깨끗이 물러날 것으로 결심하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고는 그 만큼 일이 성공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그후에 민정으로 돌려야 한다 할 때에 그들이 약속을 어기고 주저앉아 해먹기로 태도를 고친 것은 일부의 몇은 몰라도 대다수의 분자는 중간에 변한 마음에서 된 것이라고 본다. 제가 제 자신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수양이 퍽 깊은 사람 아니고는 못하는 것이고 보통 사람은 제 속에 무엇이 있어 어느 때 자기 양심을 누르고 발동을 할런 지를 모른다. 군인같이 생각이 단순한 사람들은 더구나 그럴 것이다. 그렇게 제가 저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혁명에 손을 대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나라 형편 두 눈이 있으면 못 볼리 없고, 보면 세상이 한 번 바꿔야겠다 하는 생각 누구는 못 하나? 그것도 모르면 정말 천치 바보게. 알지만 알면서도 감히 손을 내밀지 못한다. 왜? 내가 나를 좀 알기 때문에. 그러기에 감히 하는 사람이 잘난 것 같지만 아니다. 감히 하지 못하는 사람이 감히 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어질다. 그러기에 보라. 혁명치고 실패 아니한 것 어디 있나? 그리고 그 깊은 원친이 어디 있나 하면 혁명가 그 자신의 타락에 있다. 본래는 순수한 의협심에서 일어났는데 나중에 성공해서 권력의 맛을 보면 그 맘 변해 버린다. 나폴레옹, 레닌, 스탈린, 모택동만 아니다. 다다 거의 다가 해방의 영웅에서 지배자로 떨어져 버린다. 슬픈 일이다. 이에서 더 슬 픈 일이 어디 있겠나?
5.16도 그 예외 아니다. 몇 십년 죽을 판 살 판, 지하로 감옥으로 피 비린내 나는 혁명운동에서 부대낀 사람도 변하는데 하물며 8기생 7기생 아직 여름철에 자란 해바라기 대 같은 사람들에서일까? 누구의 말처럼 5.16은 자기네도 그렇게 쉽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의외에 쉽게 성공이 됐기 때문에 그만 미쳐 버린 것이다.
그런데 여기 지식인의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당초에 무엇이 올 것이 왔다고 했나? 모르는 길거리의 군중은 또 몰라도 일 뒤의 이치를 더듬고 말 속의 뜻을 캐려는 지식인이 어찌 그 것을 모른단 말인가? 이제 올 것이 왔다는 그 한 말의 죄가 얼마나 큰지 아나? 쫓겨 갔던 원수가 불과 20년에 다시 오는 것도, 학원이 짓밟혀 승냥이 자고 간 자리같이 된 것도, 농촌이 말이 못돼 양식을 사다 먹고 거지 떼가 서울로 몰려오는 것도, 내일의 주인이 될 젊은이가 얼굴로 아스팔트 바닥을 닦으며 골목에 헤매는 것도, 강도 깡패가 날뛰는 것도 다 이 한마디에서 시작된다. 공약에 나타난 것 보면 그래도 아직 조심성이 남아 있었는데, 올 것이 왔다는 바람에 아주 피가 머리로만 올라가 돌아버렸다. 그래도 아니 속은 것은 씨알이었다. 그들은 아무리 억지로 춤을 취려 해도 아니 추었다. 차마 팔다리가 놀지 않았다. 양심이 살아 있기 때문에.
지식인이 그 죄를 속하려면 이제라도 솔직히 우리 판단이 잘못됐었다 하고 씨알 앞에 증언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그때 잘못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큰일을 할 수 있다.
못쓸 나물은 떡 잎에서 부터 잘라야 하는데, 그것을 못하면 그담은 없애 버리기가 참 어려워진다. 올 것이 왔다 하고 승인해 주지 않았으면, 지식인이 용감히 일어나 성의 있는 태도로 이것은 아니 되는 일이라 했더라면, 지나가긴 한 일이지만, 5.16은 성공 못 됐을 것이다. 오늘의 이 꼴을 보고 잘 됐다 한다면 언어도단이다. 그 사람과는 말도 할 필요가 없다. 사실상 공화당은 지성과 사회 양심에서는 줄 떨어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만일 정직 하게 이것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는 역사임을 인정한다면 그것이 우리의 하지 못한 “아니” 한마디 때문인 것을 알고 이제라도 해야 한다.
반드시 했어야 할 그 한마디를 아니 했기 때문에 그담은 자승자박이라 점점 끌려 들어갔다. 정치 고문이란 것이 한동안 사슴의 뿔처럼 올라갔던 일이 있었다. 세상에 무용의 장물도 그런 따위가 어디 있을까? 이제와서 공정히 말해 보자, 그래 그 정치 고문들이 한 것이 무엇인가? 계엄령 펴게한 것인가? 일제시대부터 눈물로 해온 것 까지 넣어 모든 사회 단체 해체 시킨 것인가? 두 번 헌법 고친 것인가? 날치기 국회인가? 만일 그것들을 부인한다면 한 일없이 수십 만원 씩 월급 받아 먹은 것 밖에는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묻지 않아도 그 대부분은 나갔던 것을 후회할 줄 안다. 왜 그것도 몰랐는가? 나는 배운 것은 없어도 거기는 혹하지 않았다. 물론 나같은 사람에게는 오지도 않았거니와 설혹 왔다 해도 거기 넘어가 지 않을 자신은 있다. 나간데는 두 가지 사람이 있다. 하나는 정말 5.16을 찬성해서 나간 사람. 그러나 그렇다 해도 그것은 버젓치 못한 일이다. 찬성했다면 일전에 벌써 동지가 되어 지도했어야지. 학자가 나갈 자리는 지도의 자리지 그 고용원으로 채용이 돼서는 학문에 대한 모욕이다. 그러므로 학자답다면 생각이 설혹 같다 해도 다 된 일에 참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담 둘째 사람은 찬성은 아니 하면서도 나간 사람인데 그들에게는 두가지 죄가 있다. 하나는 거절 했어야는데 못한 것이요, 하나는 이미 나갔으면 당당히 그 잘못을 말해 주었어야 하는데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결론은 목숨이 아까워서 했다는 것밖에 없다. 왜 찬성 아니 하면서도 거절 못했나? 칼보다도 제 한 말 때문이다. 나와서 아니 되는 것이 나왔는데 유언 무언으로 그것을 승인했으니 협력하라는데 거절이 어려웠을 것이다. 위에서 말했던 그 최고 회의의 사람이 나 보고 하는 말 중에 “우리 처음에는 국민 운동을 위해 선생님을 모시려 했는데 들으실 것 같지 않아 그만 뒀습니다” 했다. 그래 내 대답도 “잘 알았습니다” 했지만 이쪽 태도가 분명하면 시시한 말은 걸어오지 않는다. 코를 한번 꿰인 다음에는 죽을 땅인 줄 알면서도 끌려가지 않을 수 없다. 생이란 그렇게 앞이 어두운 것이다.
내게는 생각할수록 이상하다. 왜 첨부터 그것을 몰랐을까? 고문으로 나오라는 것이 정말 내 가르침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네들 저지른 죄에 승인의 넷델을 부쳐서 국민을 속이려 하는 것 인데 그것을 몰라? 몰랐다면 어리석은 것이고 알고 했다면 비굴하고 간악하다. 자기의 학자로서의 지위를 위해서는 내가 살겠다고 남을 죽을 데로 넣는 악독이다. 나를 먹여 살리고 나를 동지로 대해 주는 민중을 차마 저버리다니!
눈에 뵈지는 않으나 그것이 후진인 젊은이에게 미친 영향은 참 크다. 지금도 우리는 일제시대를 돌이켜 보며 아깝게 생각하는 몇 인물이 있다. 그들이 시국 강연하라고 할 때에 죽기를 각오하고 아니 했다면 젊은이들은 크게 정신의 자람을 얻었을 것이요, 그랬다면 해방 후에 온 어려움도 좀 더 잘 이겨 넘겼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상당한 학식과 인망을 가지는 분들이 그 굴레를 쓰고 들어가는데 참 안타깝다. 자기는 자기로서 생각이 있어서 하는 일이라 하겠지만 거기 잘못 생각이 있다. 칼 들고 혁명한 사람이 누구의 말 듣겠나? 또 할 말 있다면 왜 제 자리에서는 못하나? 일반으로 우리 나라 지식인이 용기가 없다. 부끄럽고 슬픈 일이다. 三隱은 이제 어디로 갔는가? 사육신은 어디 갔으며 생육신은 어디 갔는가? 세상이 얼마나 타락이 됐으면 예술가라는 것들이 세조를 잘했다고 하게 됐으니! 이놈들, 살아있는 권력에 아첨하기 위해 죽은 권력을 지옥에서 끌어내느냐? 부귀는 아무리 누려도 끝이 있고 목숨이 산다면 얼마를 사느냐? 그러나 비벼버리면 거품보다도 더 쉽게 자취도 없어지는 듯한 이 정신이란 것이 종내 꺼짐이 없이 살아나서 말을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부귀야 그까진 누리고 싶거든 누리라 하지, 권력의 정말 죄악은 국민을 비겁하게 만들고 가슴 속에서 자유 판단의 능력을 마비시켜 버리는 일이다. 사람은 사람이기에 그 능력이 아주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참혹하다. 아주 없어지면 차라리 짐승이 되니 문제가 없는데 아주 없어지지도 않으면서 그 힘을 잃기 때문에 사람도 못되고 짐승도 못되고 참혹하고 흉악한 괴물이 돼 버린다. 네가 어찌 사람이라면서 너의 한때 쾌감을 위해 사람과 나라를 그렇게 만드느냐'?
빗나간 칼
예로부터 “칼이냐 붓이냐” 하는 말이 있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결국 폭력이냐 그렇지 않고 이성이냐 하는 말이다. 사람따라 의견도 다르고 시대따라 그 모양도 다르지만, 긴 역사에 비쳐서 그 결국을 따진다면 붓이 이기고야 만다는데 이미 판결이 내려 있다고 할 것이다. 그것이 인간 역사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늘 칼 이기는 듯하다. 그러기 때문에 문제다. 그 이유가 뭔가? 속담말로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기 때문이다. 폭력은 곧 눈에 뵈게 결과가 나타나는데 이성의 작용은 그렇지 못하다
여기 생각할 것은 인간의 정신 연령이다. 정신이란 따지고 들면 결국 사람을 알아보는 일이다. 우선은 나는 사람이다 하는 것이고 그담은 저것도 사람이다 하고 알아보는 일이다. 이것은 인간이 허구한 세월을 동물의 지경에 헤매다가 제 속에 알갱이처럼 들어 있던 속의 빛에 의해서 된 일이다. 그때까지 그들도 동물처럼 본능적으로 하는 폭력밖에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될 수 없어서 많은 비극이 일어났을 것이다. 물건이라면 폭력이면 그만이지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이기에 첨부터 잠자는 상태 로나마 그 물건만이 아닌 무엇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폭력을 쓸 때마다 문제가 해결된 것 같으면서도 거기 늘 강한 항의가 들어 있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했고 그 결과 이성으로 사랑으로 발동하게 됐다. 그것이 어떻게 힘들었을 것이라는 것을 어린 아이의 자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첨에는 순전히 동물인듯 폭력 밖에 모르다가 그담에 감정이 일어나고 그담에야 이성의 작용이 나타난다. 인류 전체의 진화과정도 그러했을 것인데, 길고 긴 세월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급히 폭력이냐 도리냐 하고 결정을 하려하기 보다는 먼 뒤를 돌이켜 보느니 만큼 또 영원한 앞을 내다보아 확실한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붓이 이긴다. 그렇다. 인간이 동물의 지경을 면한 것은 아직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도 폭력이 세를 쓰는 것 같지만 정신적인 존재인 인간은 그것을 이루어 내고야 말 것이다. 5.16도 그 대세 속에서 한 때 거꾸로 흐르는 조그만 파동일 뿐이다.
흔히 하는 말이 후진국이라는 나 에서는 군사혁명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 한다. 그것을 하나의 치루지 않고는 빠져나갈 수 없는 시련으로 말한다면 옳다. 그러나 그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한다면 잘못이다. 객관적 논리와 삶의 진리가 서로 딴 것임은 이미 위에서 말했다. 피할 수 없다는 것은 과학이지만 “나”는 과학의 대상 속에만 업디어 있지는 않는다.
후진국이 뭐냐? 그 인간적인 점에서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정치적인 경제적인 조건이 혼란한 상태에 있는 것뿐이다. 그 어지러운 것을 보면 차분 한 이성이나 따뜻한 사랑만으로는 해결될 것 같지 않고, 쾌도난마(快刀亂麻)라, 단 번에 칼을 가지고 해치우는 수밖에 없다. 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난다. 그래서 군인이 칼을 들고 일어서게 된다. 그렇지만 아무리 급해도 인간의 알갱이를 희생시키면서까지 할 수는 없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무력은 쓰면서도 그 쓴 것이 잘못임을 인정해서만 어느 정도의 가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첨부터 그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야심가만이 하는 소리다.
분명히 알 것이, 모든 칼은 빗나가고야 만다. 칼 그 자체가 빗나감이다. 이날까지 모든 칼 든 사람이 잘못했지만, 나만은 빗나가지 않는다는 확신, 혹은 변명을 하지만, 그 생각이, 바로 그 생각이 빗나간 생각이다. 칼이 빗나갔다니 그 칼날 가는 데를 말하는 것 아니다. 물론 칼날 그 자체가 잘 갈았을수록 빗나가는 법이지만 설혹 그 자르기로 목적한 것을 똑바로 자른다 해도 그것으로 칼질이 바로된 것 아니다. 도대체 빗이고 바르고가 그 칼 맞는 물건에 있는 것 아니라 제 마음에 있다. 죽일 놈을 죽이고 살릴 놈을 살리는 데 왜 잘못이냐 반문하겠지만 그것이 빗나가는 칼의 소리다. 도대체 누구를 죽일 권리가 있나? 악한 놈? 누 가 악한 놈인가? 누구를 악한 놈이라 할 때 벌써 칼이 빗나간 것이다.
그러므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에수의 말은 영원히 진리다. 칼 쓴 놈을 어느 다른 칼 쓰는 놈이 반드시 죽여서 하는 말 아니다. 칼을 써서 사람의 목이 떨어질 때 사실은 제 목이 떨어진다. 제가 저를 죽이지 않고 남께 칼을 대는 재주는 없다. 그러므로 모든 칼은 첨부터 빗나갔다.
5.16은 빗나간 칼이다. 빗나갔기 때문에 치노라 친 도둑은 못치고 딴 것을 쳤다. 첫째, 그 자신의 목을 쳐서 군인 정신을 잃게 했고 국민자격을 잃게 했고 인간성을 잃게 했다. 그리고 나라도 죽고 도리도 죽었다. 내리쳤던 칼을 다시 뽑았을 때 거기 엎뎌져 있는 것은 公이요, 남아서 있는 것은 私黨이었다. 이 10년 정치는 한마디로 공화당을 위한 것이었지 “나 라”는 그 눈 속에 있지 않았다.
칼을 뽑아들고 “모든 사회 단체는 해체해라” 했다. 꿈적 못하고 그대로들 했다. 칼이 이겼다. 그러나 바로 자른 것일까? 빗나갔다. 모든 사회 단체가 죽었을 때 죽은 것은 그 단체 만이 아니라 이 나라의 이성이요, 문화 창조 의식이었다. 무슨 권위 가지고 그 명령을 할까? 사회 단체란 다 악한 것일까? 그럴 리 없다. 그러면 그 행위는 곧 이성에 대해 도전한 것이다. 그들은 이성의 명령이 씨알의 가슴 속에 살아 있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 앞에서 칼은 어떻게 힘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도둑놈이 강도질 하려할 때 우선 그 입부터 막아 “도둑이야!”소리를 못하게 하듯이 그들은 인간적인 모든 활동의 동맥인 사회단체를 없애 버렸다. 그러나 사회단체 없는 나라에서 임금자리에 올랐다기로 그것은 돼지 무리에 임금으로 앉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돼지무리에 임금이 될 때 그 자신은 먼저 돼지가 된 것을 그들은 모를까? 사실 십년 동안의 일이 먹을 것만 얻으면 만족하는 돼지의 생활이다. 그러기 때문에 남이 업신여긴다. 우리를 사람있는 나라로 안다면 일본이 그렇게 건방진 태도로 전국을 누비지는 못할 것이다.
그 다음에 일어난 신문 압박, 학원 사찰, 학생 데모의 짐승 같은 탄압, 반공법 제정, 중앙정보부 설치, 낱낱이 들 필요도 없이, 모든 것이 결국은 이 칼이 붓을 꺾자는 의식적인 계획적인 작업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신문은 군인이 고대에 새벽에 뛰어들어 학생을 잡아갔다는 보도가 나온다. 차차 절정에 오른다. 어서 올라라. 태강칙절(泰剛則折)이다. 칼치고 아니 꺾어진 칼 있드냐? 칼만을 알고 붓을 모르는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 불쌍한 일이다. 씨알이야 칼을 맞거나 총알을 맞거나, 상관이 없다. 불사체다. 칼로 자를 수도 없고 불로 태울 수도 없고 물로 녹일 수도 없는 것이 정신이요, 이성이요, 그 정신 그 이상을 품고 못난체 살아 있는 것이 씨알이다.
생각해 봐라, 칼을 설혹 쓴들 어찌 그렇게 쓰느냐? 군인은 칼을 알아야 하는데, 첫째, 칼은 집에 꽃아 두는 것이지 뽑는 것 아니다. 집에 둔채 대적을 이기는 것이 정말 군인인데 네가 몰랐고, 또 뽑아도 칼은 밖에서 쓰는 것이지 어찌 안에서 쓸 수 있느냐? 칼을 방 안에서 쓰는 놈은 도둑이다. 반드시 제 집과 저를 망친다. 60만 칼자루를 이 좁은 집 안에서 10년 휘둘렀으니 결과가 어떻겠나 생각해 봐라!
아, 사람 노릇 하기가 이렇게 어려우냐? 나라하기 이렇게 힘드냐? 제발 붓을 한번 맘대로 놀리도록 해 보려므나! 시와 노래와 철학으로 이 강산을 빛낼 것 아니냐?
짓밟한 씨알
뭐니 뭐니 해도 10년 군인정치의 가장 큰 죄악은 씨알을 업신여긴 일이다. 글을 쓰고 힘써 바른 말을 해 보자는 사람들도 흔히 서민이란 말을 쓰지만 나는 그 서민이라는 말부터 보기 싫다. 서자에 무슨 죄가 있는 것 아니지만, 그것은 몇 천년 내려오면서 나라의 주인인 씨알을 억누르고 짜먹는 도둑놈들이 그들의 들고 일어나는 것이 무서워서, 어려서부터 저의 자손에게는 나면서부터 잘난 것이 있는 듯이 특권의식을 불어넣어 주고 씨알의 새끼들에게는 첨부터 하늘이 못난 것으로 만들어서 제 등에 타고 앉은 위에 양반들께 짐승처럼 복종하는 것이 그 본분인 듯 열등의식을 갖도록 하자는 목적에서 만든 말이다. 그러므로 정말 역사를 바로 잡고자 하는 사람들은 말부터 그런 것은 아니 써야 한다. 서민이니, 하층사회니, 무식계급이니,다 씨알을 업시 보고 타락시키는 독한 병균이 들어 있는 말이다. 세상이 바로 되려면 혁명 밖엔 길이 없는데, 혁명하려면 생각부터 달라져야 하고 생각이 달라지려면 말을고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이니 민중이니 인민이니 하는 말을 버리고 씨알이란 말을 우리가 새로 만들어 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참 웃을 일이, 각하니, 영감이니, 장관, 관청하는 말들을 아무 생각없이 하는 그들을 이 인간혁명이니 세대교체니 체질개선이니 하는 말을 마구해 돌렸으니! 그들은 그것이 봉건시대의 죽은 말인 줄을 모른다. 이 민주주의에 도대체 관이란 것이 어디 있겠나? 그들이 관청이라고 부르면서 무슨 높기나 한 곳이거니 생각하는 곳이나 내가 아침 저녁으로 손질을 해야 하는 우리 집 닭장이나 그 나라 해가는 데 없어서 아니 되는 점에서는 터럭만큼도 다름이 없다. 이 10년의 불행의 근본원인은 그 둘의 머리가 낡은 데 있다. 케케묵은 봉건시대의 “나라는 우리가 한다”,“저것들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이런 따위 식의 머리다. 그러기 때문에 혁명을 저희 몇이서 어느 구석에서 만들어서 씨알 위에 내려 씌우려 했다. 무식이 다. 어느 곡식 어느 열매 어느 버러지 새끼 하나가 밖에서 자라 들어가는 것이 있던가? 어느 조그만 집 하나라도 지붕 꼭대기서부터, 토대로 지어 내려오는 것이 있던가? 그런데 만물의 으뜸인 인간의 역사만은 위에서 내려 씌워서 된다? 모든 도둑이 이날까지 그랬고, 그랬기 때문에 그 죄로 망했다. 너희도 그 예에서 빠지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서민이란 말 쓰지 않는다. 씨알이다. 새 시대를 낳을 씨알이다. 그런데 그 씨알을 업신여겼다. 그 때문에 이 10년 씨알은 자라지 못하고 병들었다. 나라의 주인이 병들 었니 어떻게 나라 일이 바로 됐겠나.
그들이 씨알을 어떻게 학대했나? 권세의 자리를 씻자마자 그들도 진정으로는 그 자리가 씨알이 앉아야 하는 자리임을 앞으로 씨알에게 좀 아첨하는 소리를 하여서 그 자리를 놓치지 않아 보려했다. 그래서 큰 소리로 한 것이 부정부패를 깨끗이 쓸어버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들을 때부터 웃었다. 어떻게 그들이 그것을 할 수 있을까? 제 실력을 모르는 말이다. 마치 페스트균을 손으로 씻어 버리자는 것과 마찬가지다. 용감이람 용감이지만 그것은 참 용감이 못된다. 의분이람 의분이지만 그것은 참 의분이 못된다. 사람의 모든 일이 자기를 아는 데서 시작인데 자기 처지도 능력도 모르고 하는 일이 어떻게 옳은 일이 되겠나? 그럼으로 그것은 욕심에서 나왔다는 것이요, 의의 탈을 쓴 자기기만이요, 따라서 씨알에 대한 아첨이라는 것이다. 부정 부패는 사회의 병인데 병은 그 병에 대해 공부한 의사가 병의 이치 약의 이치에 따라서 해야지, 결코 무리로는 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첨부터 웃고 걱정했다. 이제와서 그 둘이 무슨 말을 할 수 있나? 독한 균을 맨 손으로 씻으려 했으니 결과는 저도 거기 전염된 것과 사방 더 많이 퍼진 것 밖에 없다. 도대체 5.16에 관계되고 부자 아니 된 사람 어디 있나? 첨에 그 마음 깨끗했던 것을 나도 믿으련다. 그러나 소독 아니하고는 아무리 힘 있고 재주 있는 사람도 페스트에 전염 아니 될 놈 없듯이 네가 당초에 수양은 부족한 전쟁에만 전문한 하나의 군인인데 어떻게 그 돈의 왕국의 마수를 벗어날 수 있느냐? 증권파동 이르킬 때 벌써 너는 죽을 병이 든 것이다. 그런데 그 부정한 몸을 가지고 혁명 한답시고 도시로 농촌으로 교회로 학교까지 까불고 아니 간데가 없이 다녔으니 어떻게 이 나라에 성한 곳이 있겠느냐? 아아 슬픈 일이다.
또, 그담 뭐라 했지? 농어촌 고리채 정리라 하지 않았나? 나는 무식하고, 경험이 적어도 그것이 “군인식” 으로 될 수 없는 것은 첨부터 환했다. 그런데 그것을 한다고 서둘렀으니 어떻게 됐느냐? 들어 두어라, “뿔을 바로 잡다가 소를 죽인다” 하지 않드냐? 너를 두고 한 말이다. 농촌을 살린다는 것이 그 근본 목적인 것을 잊지 않아야지. 그 생각은 없이 결과만을 내려 하는 것은 자기 자랑하려는 욕심에서 나온다. 반성해 보라, 너의 한일 중 어느 하나가 잘했다는 공로 내세우려는 심리로 하지 않은 것 있으며, 실속보다는 껍대기 수작, 사실은 없는 숫자 마춤으로 하지 않은 것 있나? 제발 명심해 두어라. 농어촌이 나라의 생명이 들어 있는 곳인데, 그 생명이 어디 있느냐 하면 그 인간적인 인정, 그 정과 의리로 얽힌 산 관련에 있는데, 어리석은 네가 빚 정리 하노랍시고 그 산 관련을 왼통 끊어 버렸으니 어떻게 됐겠나 생각해 보아라, 오늘의 이 전면적인 불신풍조의 장본인이 누구냐? 일본시대에 이러했느냐? 자유당 시절인들 이렇게 까지야 했느냐? 한마디로 이 원인은 네가 칼부림을 했기 때문에 민족의 동맥, 모세관, 신경이 왼통 끊어져서 그러는 것이다. 그래 농어촌의 빚이 정리 됐느냐? 사실대로 말해봐라, 집을 텅텅 비며 이 서울에 거지살림 하러 오는 그 사실이 말하고 있지 않느냐?
그럼 또, 네 한 것이 무엇이냐? 거지 없엔다 했지, 폭력배 없엔다 했지, 그래 모두 강제로 잡아서 강원도로 보냈지. 너는 기억 아니하는지 몰라도 나는 기억한다. 어떻게 잊겠나? 그들도 사람인데! 네가 정말 그들도 인간으로 대접하고 그들을 인간답게 만들자는 성의가 있었다면, 그 겸손과 그 사랑이 있었다면 차마 그렇게는 못했을 것이다. 비겁한 신문 잡지가 따끔한 비평 하나 못했으니 너는 정말 잘한가보다 했는지 모르나, 씨알들은 외면했다. 그것이 내 자식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어찌 사람이 될 수 있겠나? 그렇다 첨부터 너는 사람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무리 아니다. 전장판에서 늘 “대적”만을 보고 자랐지 인간을 볼 기회가 없었으니! 네 목적은 시원히 했다는 치하 듣자는 어리석은 자부심과, 더 파고들면 그 소위 잘 산다는 지배계급이 하나되어 눈에 가시같은 그런 찌꺼기들을 외지 않게 멀리 치워 놓고 맘 놓고 재미있게 살아보잔 고약한 귀족주의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역사는 이렇게 참혹한 것이냐!
그러니 그들은 우리를 업신여기고 짓밟고 짜먹을 뿐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을 했다. 우리를 타락시켰다. 우리를 가르치지도 않고, 배울 수 있는 평등한 기회를 주지도 않고, 우리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게 그냥 두지도 않고, 그 결과 우리를 무식과 가난에 얽매 놓은 후에는 미신과 주림을 악용하여 우리의 인권을 스스로 팔아먹도록 만들었다.
내 자립 협조 하던 시골을 내버리고 도시라는 인간 공창가로 몰려들 때 벌써 타락이지만, 그대로만 둔것 아니라 막걸리 한 잔 종이 조각 하나에 우리의 인권을 팔도록 강요했다. 그리해서 민주주의의 이 세계 무대에서 우리를 주권 없는 하나의 식민지 백성으로 전락시킨 후 우리를 이제까지 미국에 팔더니 또 오늘은 일본에 팔았다.
이 죄를 어떻게 할까? 너와 나 사이에 이루어진 이 죄, 너만 아니요, 나만도 아니요, 너와 내가 합작해서 지은 이 죄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