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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
1874. 11. 30 생
잉글랜드 옥스퍼드셔 블렌엄 궁~1965. 1. 24 런던.
영국의 정치가·저술가·웅변가.
1940~45년과 1951~55년 총리를 역임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중에 위대한 국가지도자로 활약했다.
그는 2개월 먼저 태어난 조산아였다.
그가 태어난 블렌엄 궁은 존 처칠(말버러 공작 1세, 1650~1722)이 스페인 계승전쟁에서세운 전공(戰功)으로 나라에서 하사받은 것이었다.
그의 부친 랜돌프 처칠 경(1849~95)은 뛰어난 보수당 정치가로서 재무장관 및 하원의 보수당 당수를 역임한 인물로 그에게는 항상 화제가 많았다.
어머니 제니 제롬은 미국인으로서 뉴욕의 은행가이며, 한때〈뉴욕 타임스 New York Times〉의 대주주였고, 아메리칸 재킷 클럽을 창립한 경마 애호가 레너드 월터 제롬(1817~1891)의 딸이었다.
성장과정
처칠의 아버지는 말버러 공작 7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말버러 공이 아일랜드 총독이었을 때 비서로 근무했다.
그리하여 윈스턴 처칠도 어린시절을 더블린에서 보냈으며, 그후 잉글랜드의 예비학교를 거쳐 12세에 해로 학교에 입학했다.
해로 학교 교사의 심술 사나운 처사와 사교에 바쁜 부모의 무관심으로 그의 어린시절은 불행했다.
게다가 처칠은 라틴어와 희랍어에는 전혀 흥미를 느낄 수 없었음에도 해로 학교의 다른 모든 하급생들과 같이 같은 문장을 몇 번씩이나 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훗날 그는 그 덕분에 영어의 기초를 완전히 습득할 수 있었고, 그것이 그의 유명한 연설에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윈스턴이 지능발달이 늦어 군인 이외의 직업에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장난감 병사의 전쟁놀이를 무척 좋아하기도 했다.
그후 윈스턴은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여 군사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으며, 1895년에는 명문인 제4경기병 연대에 입대했다.
그해 휴가를 얻어 비공식적으로 쿠바에 건너간 그는 반란 진압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스페인군과 합류했다.
이때 관전기(觀戰記)를 런던의〈데일리 그래픽 Daily Graphic〉에 기고하여 이 모험여행의 비용을 충당했다.
쿠바로 가는 도중 뉴욕에서 그는 아일랜드 출신 미국인 변호사·정치가 윌리엄 파크 코크란(1854~1923)과 만나게 되었는데, 훗날 '처칠식' 연설로 불린 화려한 연설 스타일은 코크란의 매력적인 화술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처칠의 문장 및 연설의 격조 높은 어법은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이 지은〈로마 제국 쇠망사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1896년 9월부터 제4경기병 연대의 사관으로서 인도에서 근무하는 동안 기번의 역사서를 비롯하여 철학·경제학·정치학의 고전을 가까이 했다.
폴로 경기를 잘했으며, 공부도 열심히 했다.
또 이야기할 때 혀가 꼬부라지는 경향이 있어서 말수가 적었으나 이 결점을 교정하기 위해 무척 노력했다.
즉석에서 말하는 것이 서툴렀던 그의 명연설들은 미리 원고를 써서 암기한 것이었다.
1897년 8~9월 연대의 휴가를 이용하여 인도의 북서 변경지구에 있는 파탄족 진압 작전에 참여했는데, 이때 군인과 신문기자라는 이중의 역할을 수행했다.
처칠이 인도의 영자 신문인〈파이어니어 Pioneer〉와 런던의〈데일리 텔레그래프 Daily Telegraph〉지에 기고한 기사들은 후에 그의 최초의 저서〈말라칸드의 야전군 이야기 The story of the Malakand Field Force〉(1898. 3)로 출판되었다.
키치너 장군(1850~1916)이 지휘한 나일 원정에도 군인 겸 종군기자로 참전했다.
이 원정군의 목적은 호전적인 이슬람교도인 마디스트(알 마디의 추종자 집단)들이 점령하고 있던 수단 지방을 탈환하는 것이었다.
당시 마디스트들은 수단에서 이집트인을 축출하고 옴두르만을 수도로 하여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폴로 시합을 하다가 어깨가 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898년 9월 2일의 옴두르만 전투에 제21 창기병대 소속으로 돌격전에 참가했다.
그때 처칠이 런던의〈모닝 포스트 The Morning Post〉지에 기고했던 기사가 보완되어〈강의 전쟁 The River War〉(1899. 12)으로 출간되었다.
명성과 정치
용맹을 떨친 그의 대중적인 명성을 지지표로 발전시켜 정계에 진출하려고 했다.
당시 영국에서 의원에게는 급여가 지불되지 않았으므로 그는 저술로써 정치활동 자금을 마련할 작정이었다.
1899년 7월 6일 면직물로 유명한 랭커셔의 올덤에서 실시된 보궐선거에 보수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899년 10월 남아프리카 전쟁(보어 전쟁)이 발발했을 때 처칠은〈모닝 포스트〉지의 특파원이 될 채비를 갖추었다.
같은 해 11월 15일 동료였던 영국 육군장교들과 동행하다가 전투에 말려들었는데, 그는 복병의 습격을 당한 장갑열차에서 부상병의 구출을 도와주다가 보어인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12월 12일 프리토리아의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하여 다음해 7월 영국으로 귀환하여 영웅으로 환영을 받았다.
1897년 정치가를 주인공으로 하여 인도에서 쓰기 시작한 소설〈사브롤라 Savrola〉와 전쟁경험을 바탕으로 한 강연과 저작을 발표하여 2년간에 약 1만 파운드를 벌었다.
1900년 10월에는 올덤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보수당 의원이었지만 부친과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정치적 주장을 가지고 있었던 처칠은 부친에 관한 전기〈랜돌프 처칠 경 Lord Randolph Churchill〉(1906)을 썼다.
그는 남아프리카에 대해 관대한 강화조약을 체결할 것과, 육군 증강을 위해 지출을 확대시키지 말 것 등을 주장했다.
또한 영국에 국가 총동원령을 발표하지 않으면 안 될 중대사태가 도래하지 않는 한 기존의 해군력은 충분히 억지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보호무역주의적인 관세장벽을 제안한 일부 당지도층에 반대하여 자유무역을 주장했는데, 이로 인해 1904년 5월 31일 보수당에서 자유당으로 이적했다.
1906년 1월 13일 처칠은 맨체스터의 서북 선거구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자유당 내각의 식민차관으로서 정치 경력의 첫발을 내딛게 된 그는 남아프리카의 영국령 식민지인 트란스발과 오렌지 자유국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지지했다.
1908년 애스퀴스 내각에서 통상장관으로 임명되어 국무위원이 되었다.
당시의 관행에 의하면 신임 각료는 재선거에 의해 유권자의 지지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처칠은 맨체스터의 서북 선거구 보궐선거에서 근소한 차로 패배했으나 스코틀랜드의 던디 보궐선거에서 승리하여 의회에 복귀했다.
이때 처칠은 급진적 사회개혁안을 지지하여 노동계급의 표를 획득할 수 있었으나 이로 인해 보수당은 그를 '계급의 배신자'라고 공격했다.
같은 해 9월 12일 스코틀랜드 귀족의 딸로 조각처럼 아름다운 클레망스 도지에와 결혼했다.
클레망스는 과부였던 어머니가 어렵게 꾸려나가는 가계를 돕고자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반면 처칠은 이무렵 영국 사교계에서 가장 유망한 독신자였다.
런던의 세인트마거리트 교회에서 거행된 두 사람의 결혼식은 사교계의 일대 사건이었다.
통상장관으로서 처칠은 복지국가 정책의 선구라고 할 수 있는 사회개혁을 추진하고 있던 로이드 조지와 긴밀히 협력하면서 노인연금, 건강보험, 실업자 구제를 위한 직업소개소, 적정임금제의 도입, 과중한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중립적인 공공기관의 설립 등에 공헌했다.
당시 처칠은 부자에게 중과세를 부담시키려는 재무장관 로이드 조지의 1909년 예산안을 반대하고 있던 상원을 통렬히 비난하여 처칠과 보수당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10년 2월부터 내무장관으로 취임하여 형무소의 생활조건을 개선하는 개혁안을 제출했다.
이때부터 다음해인 1911년까지 탄광부·철도원의 파업이 계속된 광범위한 노동불안시기에 내무장관으로 재직중이었던 그에게는 직책상 법과 질서를 유지할 책임이 있었다.
그리하여 때때로 군대에 출동준비를 명령하기도 했지만, 지방자치단체가 내무부에 군대의 지원을 요청하는 경우에만 경찰을 파견했다.
그는 군은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처칠에 대한 영국 노동운동계의 뿌리 깊은 불신은 이미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처칠은 소위 1910년 12월 '시드니 거리 포위사건'이 발생할 당시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공격을 받았다.
이 사건은 일단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도둑질을 하다가 포위당하자 런던의 경관 3명을 살해하고 총과 폭탄을 들고 최후까지 경찰과 군대에 저항한 사건이었는데, 이 사건을 다룬 뉴스 영화가 현장에 있던 처칠의 모습을 크게 비추었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처칠은 아일랜드에 영국 의회로부터 분리된 별개의 의회를 설치하자는 아일랜드 자치법안을 지지했고, 이러한 그의 활발한 운동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보수세력은 아일랜드를 영국의 직접 지배하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영국은 이 격렬한 분쟁을 해결하지 못한 채 1914년 8월 4일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다.
1911년 10월 해군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처칠은 즉각적인 전투태세를 갖추는 일에 착수했다.
영국이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처칠의 확신은 1911년 7월 독일이 아가디르에 포함(砲艦) 판테르호를 파견(아가디르 위기)하여 영국과 프랑스의 모로코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때부터 시작되었다.
처칠은 독일이 영국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종래의 견해를 버리고 독일 해군의 확장에 대항하여 영국 해군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육군과의 전략조정을 위해 해군사령부를 설치하고, 석탄 대신 중유를 연료로 하여 더 큰 대포를 적재할 수 있는 고속전함을 건조했으며, 해군항공부를 발족시켰다.
그 사이 처칠 자신도 비행기 조종을 배웠다.
또한 내각 내에 존재하는 평화주의적 세력에 대하여 영국이 독일의 침략에 저항해야 하는 필요성을 역설했다.
1914년초에는 해군 출동훈련을 실시했고,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선언하기도 전에 자신의 책임하에 함대를 출동시켰다.
처칠의 자발적인 전투개입은 물의를 증폭시켰다.
그는 독일군의 진격을 견제하는 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자신이 창설한 해군항공부 소속 비행사와 함께 됭케르크로 건너갔다.
장갑차가 급조한 야전비행장 방위용으로, 그리고 적지에 불시착한 비행사 구출용으로 유용하다는 점을 즉각 간파한 그는 해군항공부에 장갑차를 만들게 했고, 고르지 못한 지면이나 참호가 장갑차의 움직임에 방해가 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무한궤도장갑차, 즉 전차를 제조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영국 육군부가 1915년 2월에 전차 개발을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칠은 해군장관의 권한으로 전차를 개발하는 데 핵심이 된 '육상선박위원회'를 설립했다.
1914년 10월에는 독일군의 진격으로부터 안트웨르펜 구출방법을 조사한다는 목적으로 현지로 출발했으나, 처음 목적과는 달리 그곳에 머물면서 군사작전을 지휘하여 독일군의 진격을 1주일 동안이나 지연시켰는데, 이것 역시 비판을 받았다.
가장 물의를 일으킨 것은 다르다넬스 작전(갈리폴리 작전)을 추진시킨 일이었으며, 이 작전은 비극적인 실패로 끝났다.
연합군과 독일군이 서부 유럽에서 참호전에 빠져 있었을 때 처칠은 해군력을 이용하여 터키가 지배하고 있던 다르다넬스 해협을 돌파하는 웅대한 측면우회작전을 생각했다.
무기와 탄약의 부족으로 독일의 강공에 위축되어 있던 러시아에 물자를 보급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는 것도 이 작전의 목적이었다.
영국 해군이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배한다면 흑해를 통하여 러시아에 물자를 보급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915년 2월 전함을 포함한 영국·프랑스 양국의 함대가 다르다넬스 해협을 방위하는 터키의 요새에 격렬한 포격을 가했다.
같은 해 3월 18일 재차 해협을 공격하기 위해 귀환하던 중 전함 3척이 미발견된 수뢰에 걸려 침몰했다.
이 전함들은 오래되어 폐선시킬 예정이었지만 이 사건 이후 현지의 제독들은 육상 지원이 없는 경우에는 공격을 재개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전선에서 싸우던 장군들이 마지못해 육군 부대를 지원하여 이들이 다르다넬스 해협에 도착했지만, 터키군의 병력은 이미 증강된 상태였다.
그해 4월 이후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한 영국 연방군은 같은 해 12월부터 다음해 1월 철수할 때까지 21만 3,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처칠은 신속하고 결정적인 행동을 강력하게 요구했는데, 처칠의 요구가 관철되었다면 다르다넬스 작전을 승리로 이끌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 처칠은 이 파멸적인 실패를 야기시킨 동료 및 부하의 주저함과 우유부단함을 책임질 수밖에 없었다.
처칠의 정책에 대한 비판은 높아만 갔고 애스퀴스는 처칠을 해군부에서 배제한다는 조건으로 보수당과 연립내각을 구성했다.
처칠은 해군장관에서 랭커스터 공령으로 좌천되었으며, 갈리폴리 작전에 대해 특별한 권한이 주어졌으나 작전지휘권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1915년 11월에 사임한 처칠은 프랑스 전선에서 제6 로열 스코틀랜드 퓨질리어 연대를 지휘했다.
1916년 6월 그는 평의원으로 의회에 복귀했으나 로이드 조지가 이끄는 연립정부 형성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1917년 3월의 다르다넬스 작전에 관한 조사보고서는 처칠이 이 사태의 처리에 관해서 적어도 동료와 같은 정도의 책임 밖에는 없다고 발표했다.
같은 해 7월 총리가 된 로이드 조지는 처칠을 군수장관으로 내각에 복귀시켰다.
군수장관으로서 그는 1917년 11월 20일 처음 사용된 전차를 제작했다.
당적 변경
1919년 1월 처칠은 공군장관 겸 육군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육군장관으로서 그의 주요임무는 러시아에 연합군을 개입시키는 것이었다.
열정적인 반볼셰비키주의자인 처칠은 분열되고 느슨하게 조직되어 있는 내각으로부터 러시아 백군에 대한 영국의 지원을 강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러시아에 보급품과 8,000명의 의용군을 파견했다.
이러한 조치로 인해 처칠은 노동자들로부터 적대감을 샀다.
더욱이 1920년 최후의 영국군이 러시아로부터 철수한 후 러시아에서 회수한 무기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폴란드인에게 제공하여 노동운동계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1921년에 처칠은 식민장관이 되었으며, 고문인 T.E. 로렌스의 도움을 받아 이라크와 트란스요르단의 정치를 안정시켰다.
또 같은 해에 수립된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를 원조했고, 아일랜드의 내란 상태를 비교적 안정된 평화상태로 전환시키는 데 기여했다.
1922년 연합군의 터키 주둔을 달가워하지 않은 터키의 케말 아타튀르크가 발칸 반도를 침입했을 때 처칠은 영국 육·해군이 단호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터키의 반란은 진압할 수 있었으나 처칠의 정책은 '군국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영국 국내의 정치적 위기를 심화시켜 로이드 조지를 총리로 하는 보수당·자유당의 연립정부를 붕괴시켰다.
보수당은 1922년 11월 총선거에서 정권을 획득했다.
연립정부를 지지하면서 입후보했으나 맹장염으로 선거운동을 하지 못한 그는 던디 선거구에서 1만 표 이상의 차이로 낙선했다.
1923년 12월 총선거에서도 자유당의 자유무역 지지자로서 서레스터에서 출마했으나 패배했다.
이 시기에 처칠은 노동당과 공산주의자에 맞설 강력한 대항세력을 의회 내에서 형성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중도파와의 연립을 희망했는데, 1924년 3월 웨스트민스터의 아베이 지구에서 '무소속의 반사회주의자'로서 보궐선거에 출마했으나 또 낙선했다.
같은 해 1월 자유당이 노동당을 지지하여 영국 최초로 노동당 정권을 탄생시켰을 때, 처칠은 이미 가장 강력한 대항세력으로서 보수당측에 되돌아가 있었다.
그해 11월의 총선거에서 전통적으로 보수당 지지 지역인 에핑에서 '헌정옹호자'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으며, 다음해인 1925년에 다시 보수당에 입당했다.
의회를 떠나 있는 동안 처칠은 많은 계획에 몰두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쓴 자전적 역사서라고 할 수 있는〈세계의 위기 The World Crisis〉를 쓰기 시작하여 1923~31년에 출판했다.
그는 아마추어 화가로서 그림에도 열정적이었으며, 벽돌쌓기를 즐겼다.
화가로서의 그의 이름은 찰르 마린이었다.
1924년 11월 선거 후 보수당의 당수 볼드윈은 처칠을 재무장관으로 임명했다.
재정문제에 있어서 그는 엄격한 정통주의를 고수했다.
처칠이 영국의 파운드 화(貨)를 금본위제로 복귀시키자 경제학자 케인스는 처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금본위제로의 복귀정책은 디플레이션, 실업, 광부의 파업, 1926년의 총파업 등을 야기했다.
처칠은 이 총파업이 국민을 인질로 하여 몸값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에 대해 강경한 조치를 취할 것을 주장했다.
파업이 절정에 이르고 런던의 거의 모든 신문사가 폐쇄되자, 정부의 견해를 강하게 시사하는〈영국 관보 British Gazette〉의 간행을 자신이 직접 조직하고 지도했다.
1929년 6월 보수당 정부가 무너졌을 때 처칠은 노동당 소수 정부와 협력하려는 보수당 당수 볼드윈에게 반대했다.
처칠과 볼드윈의 관계는 특히 처칠이 인도에 자치령의 지위를 승인하자는 볼드윈의 제안을 비난했을 때 더욱 악화되었다.
처칠은 예비내각에서 사임했으며, 열정적으로 때로는 신경질적으로 인도통치법에 반대했다.
1930년대에 처칠은 의석은 보유하고 있었으나 내각에서는 제외되어 있었다.
그는 자유당과 보수당으로부터 지나치게 독립심이 강하여 당규율을 받아들이기 힘든 인물로 간주되었고, 큰 불신을 사고 있었다.
그러나 저술가로서는 성공하여 많은 수익을 올렸는데, 주목할 만한 저서로〈나의 반생 My Early Life〉(1930)과 4권의〈말버러:그 생애와 시대 Marlborough:His Life and Times〉(1933~38)가 있다.
처칠은 점차 독일의 위협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비록 처칠의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은 적었지만 그는 계속 재무장을 주창했으며, 특히 영국 공군은 독일 공군에 비해 우위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베니토 무솔리니가 지배하는 이탈리아군이 에티오피아를 침입했을 때, 처칠은 만약 영국이 이탈리아에 제재조치를 취한다면 무솔리니가 히틀러에게 접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처음에는 제재에 반대했다.
그러나 동시에 영국이 일단 행동을 취한 이상 최후까지 목적을 철저히 관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국왕 에드워드 8세의 퇴위(1936. 12. 10)를 둘러싸고 논란이 발생했을 때, 볼드윈에 반대하여 국왕의 입장을 옹호했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1937년에 네빌 체임벌린이 볼드윈의 뒤를 이어 당권을 장악하자 처칠과 보수당 지도부와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독일의 재무장과 팽창정책에 대해 처칠이 제공한 정보의 정확성은 사태의 추이에 따라 몇 번씩 확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경고는 자주 무시되었다.
체임벌린이 히틀러와 뮌헨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를 희생시켰을 때 처칠은 그것을 '전면적이며 완전한 패배'라고 비난했다.
전쟁 발발 당시 이미 여론은 처칠의 공직 복귀를 요구하며 들끓었다.
1939년 9월 3일 영국은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했으며, 이날 체임벌린은 처칠을 해군장관에 임명했다.
소위 '겉치레만의 전쟁'에 대한 불안과 노르웨이에서 영국 파견군의 패배, 그리고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의 네덜란드 침입 등으로 인해 체임벌린은 사임하게 되었다.
체임벌린의 후임으로 총리직에 오른 처칠은 참다운 거국 내각을 실현하기 위해 이전의 적대 관계를 뛰어넘어 노동당도 연립정부에 참여시켰다.
1940년 5월 13일 신임 총리로서 의회에서 행한 최초의 연설에서 그는 "나에게는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 이외에는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했으며, 전원일치의 신임투표를 얻었다.
됭케르크 철수 후 영국이 침략을 받을 가능성을 경고함에 있어 그는 그 특유의 자신에 찬 불굴의 의지를 잃지 않았다.
"대가가 어떤 것이든간에 우리들은 바다에서 싸울 것이다.
또한 우리들은 상륙 지점에서 싸울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들판과 시가지에서도 싸울 것이다.
우리들은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가 붕괴에 직면하자 처칠은 프랑스를 연합국측에 계속 남아 있게 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1940년 6월 16일 영국·프랑스 연합을 제안했다.
이러한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만약 우리들이 싸움을 중단하면 그때,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 그리고 우리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고 애착을 품어왔던 일체의 것이 새로운 암흑시대의 심연 속으로 잠겨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무를 수행할 결의를 굳게 다져야 한다.
만약 영국과 영국 연방이 1,000년 동안 지속된다면, 사람들은 '이때야말로 그들의 가장 훌륭한 시기였다'라고 이야기하며 행동하지 않겠는가!"라며 다가올 '영국의 결전'을 격려했다.
독일 폭격기가 영국의 도시들을 폐허로 만들고 있을 동안 처칠은 연설과 피폭지역의 시찰, 그리고 그의 특징이 된 'V' 사인으로 사기를 진작시켰다.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과 사적인 서신을 교환하여 밀접한 협력관계를 강화했고, 1941년 8월에는 자유진영의 승리를 약속하는 대서양헌장이 작성된 회담을 포함하여 일련의 회의를 성사시켰다.
히틀러가 소련을 침입하자 처칠은 1941년 6월 22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찍이 공산주의에 대한 비난을 취소할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러시아와 러시아 국민에 대해 가능한 한 지원을 할 것이다"라고 맹세했다.
뒤이어 처칠은 스탈린에게 최초의 사적인 서신을 보냈으나 스탈린 앞으로 보낸 편지에 관해서 후일 "……나는 많은 거절의 회답을 받았다.
다정한 말을 받아본 일은 좀처럼 없었다"라고 술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국과 소련을 포함한 '대연합'을 형성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1941. 12)은 전쟁의 국면을 일변시켰다.
처칠은 "나는 미국의 참전을 알았다.
그 결과에 대해서는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라고 썼다.
그는 루스벨트와 교섭하여 자원을 공동비축하고, 태평양에서 지휘체제를 통하여 먼저 독일을 격퇴한 후에 연합국측의 전병력을 일본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극동과 중동에서의 군사적 불운에 대처하고 신속하게 유럽에서 제2전선을 형성하자는 스탈린의 압력에 직면하여 그는 이 제안이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이 시기에 총리와 국방장관을 겸임하고 있던 그는 지나치게 많은 일을 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전쟁 수행에 관한 전반적인 정책뿐만 아니라 많은 사소한 일에 대해서도 끊임없는 흐름처럼 메모를 했다.
의회에서 처칠에 대한 신임은 확고부동했다.
바쁜 예정 속에서도 루스벨트와 스탈린과의 회담을 계획하고 있던 처칠은 1943년에 2번 폐렴으로 쓰러졌으나 1944년 1월 중순에 회복되었다.
5월에는 영국 해협의 순양함에서 연합군의 독일 점령하에 있던 프랑스 공격을 관전하겠다고 고집했으나 국왕 조지 6세가 직접 나서 간신히 그의 모험을 단념시킬 수 있었다.
군사적 성공과 동시에 정치적인 문제들이 발생했다.
처칠은 발칸 반도에서의 세력권 분할에 합의를 보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또한 그리스에서 공산주의자가 정권을 장악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영국의 무력개입을 승인했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결정된 사항의 대부분은 극동에 대한 해결책의 모색을 포함하여 주로 루스벨트와 스탈린에 관계되는 것이었고, 처칠은 이에 간섭하지 않았다.
폴란드를 독립시키기 위해 계속 노력했으나 그는 소련의 약속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그 약속은 곧 파기되고 말았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미국에게 연합군을 가능한 한 깊숙이 또한 신속하게 동유럽으로 진격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그의 충고는 무시되었으며, 후에 그가 ' 철의 장막'이라고 부른 것이 유럽을 가로질러 소련군 점령지역 전역에 형성되기 시작했다.
포츠담에서 열린 연합국의 마지막 주요회담에서 처칠은 최종적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자리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1945년 7월의 총선거에서 보수당이 패배했기 때문이었다.
영국 국민은 전쟁 지도자로서 처칠에게는 환호를 보냈지만, 처칠의 보수적인 국내 정책보다는 노동당의 개혁정책을 선택했다.
1946년 3월 5일 야당이 된 보수당 지도자 처칠은 미국 미주리 주 풀턴에서 소련 정책의 위협에 대항하여 미국과 영국은 평화의 수호자로서 단결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또한 9월 19일에는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유럽의 통일을 위해 '유럽 위원회'의 결성을 촉구했다.
그는 노동당 정부가 인도와 미얀마에 독립을 부여한 사실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대역사서인〈제2차 세계대전 The Second World War〉(6권, 1948~53)을 집필했다.
1950년 2월의 총선거에서도 보수당은 패배했으나, 1951년 10월에는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이 정권을 되찾았다.
다시 총리가 된 후 그의 주된 관심은 외교문제에 있었다.
1945년 이래의 '형제와 같은 결속'이 약해지고 있다고 생각한 그는 이를 위해 워싱턴을 방문했다.
처칠의 워싱턴 방문으로 영국이 한국전쟁에서 철수하지 않을까 하는 미국측의 염려는 사라졌으며, 양국은 독일 재무장 문제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조화시켜나갔다.
은퇴 후의 생활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1953년의 대관식에 즈음하여 처칠에게 기사작위를 부여하고 가터 훈장을 수여했으며, 같은 해 그는 노벨 문학상도 수상했다.
1953년 5월 스탈린 사후 처칠은 서방측과 소련 지도자의 정상회담을 희망하여 이를 논의하기 위해 버뮤다 회담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회담은 취소되었다.
그러나 건강이 회복되어 1954년 6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회담하기 위해 워싱턴을 방문했다.
11월 30일 그의 80회 생일에는 이례적이라 할 만큼 초당파적인 축하의식이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거행되었다.
그가 말년에 내린 중요한 정책결정으로는 냉전시대의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정상회담의 개최에 노력을 기울인 것과, 영국이 '힘'을 바탕으로 교섭을 진행할 수 있도록 수소폭탄의 제조를 승인한 것을 들 수 있다.
1955년 4월 5일 노령과 건강의 쇠약 때문에 사임했는데 후임자 이든이 4개국 제네바 회담 계획을 발표한 것은 그로부터 불과 2, 3주 후의 일이었다.
총리직을 사임한 후에도 처칠은 계속해서 하원에 의석을 가지고 있었으며, '의회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되었고, 1955년 선거에서도 84세의 고령으로 당선되었다.
1956~58년에 또 하나의 주요저작인〈영어 사용 민족들의 역사 A History of the English-speaking Peoples〉(4권)를 출판했다.
많은 명예가 주어졌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현존하는 최대의 영국인'으로 생각했다.
1963년 4월에는 미국 의회의 결의에 따라 명예 미국 시민이 되었다.
1965년 1월 24일 런던에서 죽었을 때 그의 장례식은 왕족 이외에는 금세기 최초로 국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조사를 보냈다.
그는 블렌엄 궁 가까이 있는 블래든의 교회 묘지에 양친과 나란히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