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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그리하매...
눅6:6~11
[목회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오늘을 살게 하시고 예배할 수 있게 하심 감사드립니다.
비바람이 거세면 그로 인해 어려움 겪고, 날씨가 덥거나 추워도 지치는 연약한 우리를 붙들어 주옵소서.
여기에 모인 우리들, 부끄러운 것 많지만 … 용서하시고 우리 예배를 받아주옵소서.
이런저런 무거운 짐을 지고 예배하러 왔습니다. 평안을 주옵소서. 새 힘을 주옵소서.
그래서 세상 삶에 승리를 간증하며 살게 도와주옵소서.
객지로, 외국으로 흩어져 있는 성도들 … 병상에 있는 이들, 군대에 있는 젊은이들 …
하나님 주시는 평안의 주인공 되게 하시기를 구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두에게서 평안의 소식을 주고 받게 하여 주옵소서.
같은 시간에 예배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은혜와 평강으로 지켜주옵소서.
말씀을 전하고 듣습니다. 악한 마귀 틈타지 못하도록 성령으로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뵙게 되어 감사하고 반갑습니다.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지난 8월22일 화요일은 음력으로 7월 7일,‘칠석(七夕)’입니다.
전설 속의 견우와 직녀가 1년에 한 번, 까치와 까마귀가 날개를 펴서 놓은 다리
오작교(烏鵲橋)에서 만나는 날이라고 예전부터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신가요?
보고 싶은 사람과 기쁘게 만나려면 건강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우리가 신앙생활 잘하다가 천국에 가서 만나야 되는 분도 있는데
그러려면 예수 믿고 구원받은 확신을 끝까지 잘 지켜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예배의 자리에 있다는 것만봐도 주의 은총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 되었음을 확신하시고,
건강한 신앙과 삶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시길 축원합니다.
신약 성경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 서기관들과 대화하는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명칭은‘분리된 자’라는 의미의 히브리어(페루쉼, פרושים)에서 나온 말로
‘율법을 지킴으로 깨끗하지 않은 것들로부터 구분되려는 바리새인들의 태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려 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 중에는 존경받는 율법 학자나 경건한 지도자들도 많았습니다.
역사가들은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인구를 2만 5천에서 3만 명 정도로 추측하는데
그중 6천명 가량이 바리새인들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 『비전 성경 사전』 (서울 : 두란노, 2011), pp.452~453 참조. >
본문에 보면,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이 논쟁을 했습니다. 말다툼을 했습니다.
그 논쟁은 본문 앞에 기록된 한 사건이 발단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가던 중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먹었습니다.
그것을 보면 추수할 때가 되었던 모양입니다.(눅 6:1)
그런데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는 일은 안식일 율법을 어기는 행동이었습니다.(눅 6:2)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고 예수님께 항의하듯 말했습니다.
그런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이 사무엘상 21장 6절 말씀을 인용하여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6장 3~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눅 6:3~4)
또한 “…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눅 6:5)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입니다. (출 20:8, 신 5:12)
그러므로 안식일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심을,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또 다른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회당은 모여 예배하고 말씀 전하고 듣던 장소를 말합니다.
거기에 “오른손이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눅 6:6)
‘손이 말랐다’는 게 정확히 어떤 질병이었는지는 지금 우리가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손을 제대로 쓸 수 없는 불구 상태였다’정도로 이해하면 적절할 것입니다.
< 빌헬름 부세트, 『퀴리오스 크리스토스 (상)』 (서울 : 수와진, 2021), p.139. 참조. >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 말을 들었던 바리새인들은
회당에 가신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는지 지켜봤습니다.
본문 7절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눅 6:7)
바리새인들은 “고발할 증거”를 찾을 수 있을까 기대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 선언하셨지만 …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틀렸다고 ‘진리’가 아닌, ‘거짓’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8절에 보면 예수님도 그런 바리새인들의 생각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기 전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 (눅 6:9)
여러분 생각에는 어느 것이 옳습니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어떤 것이 옳을까요?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행치 않는 것은 죄’(약 4:7) 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안식일이라고 해도 선이라고 생각되는 일은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생명을 구하는 것과 생명을 죽게 내버려 두는 것 어떤 것을 해야 될까요?
성경이 아무리 읽기 어려운 책이라 해도 … 성경에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많다고 해도 …
예수님의 질문은 답이 명백합니다.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선을 행하는 것이 옳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답이 분명하다면 명백한 답대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도 우리로 치면 주일에 예배드려야 하는 날에
선을 행하는 게 옳다는 것을 안다면 선을 행해야 합니다.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면 생명을 구해야 합니다.
간혹 문자적으로, 율법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가운데
주일에 어떤 일도 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비행기 기장,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 간호사, 소방관, 경찰관 … 등
주일에 당직인 사람들이 직장에 나가 일하면 믿음이 없다고 얘기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지나치게 자기 위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누가복음 6장 11절에 보면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눅 6:11) 했습니다.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태복음 12장에는 바리새인들이 무엇을 의논했는지 자세히 적혀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마 12:14)
죽인다는 것이 목숨을 끊는다는 것도 있지만
다른 사람의 인격을 죽이고 남의 신앙을 죽이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큰 잘못을 하셨나요? 바리새인들에게 엄청난 해를 입히셨나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셨습니다. 옳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노기(怒氣)’/ 노한 얼굴을 하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죽여야겠다 마음먹고, 그 “어떻게”를 의논했습니다.
쉽게 번역된 성경에는 “예수를 파멸시킬 방도를 흥분하며 이야기했다”고 번역했습니다. (메시지 성경)
사실 옳고 그른 것 보다 이미 그들 속에 담긴 마음 ‘예수를 죽여야 겠다, 어떻게 해야 파멸시킬까’하는
생각으로 증거를 찾으려는 그 마음이 이미 나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배우고 듣고 … 삶에서 실천하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각자의 생각과 다를 때가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차이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럴 때, 진정한 크리스챤이라면,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자신의 생각을 / 자신의 경험을 / 자신의 판단을 / 자신의 고집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 믿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자세’이며 ‘사고방식’이고 하나님 자녀의 삶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 하는 분들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세상 살기가 힘들다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보다 자기 생각, 경험, 배운 것, 자기 판단을 앞세우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도 알고 그분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도 알지만
세상에는 세상 삶의 방식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는 ‘성경적인 삶’을 답답하게 여깁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 앞에서 오히려 예수님께 화를 냈습니다.
-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게 옳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살하다 못해,\
예수님을 파멸시키려고 죽이려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전문가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 구별된 삶을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문제는 율법을 잘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그렇게 바라던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자신들은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남편을 ‘존경’하라고 가르칩니다. (엡 5:33)
아내를 ‘사랑’하고 괴롭히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골 3:19)
추상적인 말로만이 아니라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고 (고전 13:4)
무례히 행하지 않으며, 성내지 않는 것이라고 … (고전 13:5)
어떻게 행동하는 게 사랑인지 성경은 자세하게 알려줍니다.
그뿐 아닙니다.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 했고 (출 20:12),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 했습니다. (신 6:7)
그런데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얼마나 따르며 사는지요?
-‘남편, 존경해야죠. 아내, 사랑해야죠.
맞는 말씀입니다만 내 남편, 내 아내한테는 도저히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세상에 속 터지게 만드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정말로 오래 참고, 성내지 않으면 어떻게 삽니까?’라고 하지 않나요?
- 자녀에게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했지만
영어, 수학 가르쳐야죠. 성경이야기 할 틈이 어딨습니까?
이렇게 성경대로 살지 못할 이유를 찾으면 끝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파멸시키려고 했던,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자신들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은
- 거짓을 버리고 (엡 4:25)
- 분을 내어도 죄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26)
-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며 (엡 4:28)
-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선한 말로 듣는 이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했습니다.(엡 4:29)
지난 한 주간 여러분이 살면서 했던 말이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끼쳤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쥐어뜯는 말을 하지는 않았나요?
- 노함과 분냄과 비방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엡 4:31)
분노하고 남을 비방하고, 악평하고, 판단하지 않았나요?
거짓을 말하려 하다가도,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하려다가
‘아, 성경에 이러면 안 된다고 했지.’하는 마음이 들었나요?
예수 믿는 우리가 무엇이 옳은지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
무엇이 정답인지 알고도 그대로 살지 않는다면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요?
사실,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게 사람의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의심이 없어야 합니다.
믿음과 의심은 동시에, 같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믿는다는 말은 의심하지 않는다는 말이며 의심이 든다는 건 믿음이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믿는다 믿는다’하면서도 의심 투성이입니다.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일단 무슨 일에 휘말리면 어디 빠져나갈 데가 없다’는 하소연입니다.
앞에 서면 ‘주동자’로 찍힙니다. 뒤에 서면 ‘배후 세력’으로 의심받습니다.
가운데 있으면 ‘핵심 세력’이라 비난받습니다.
오른쪽에 있으면 ‘우익’, 왼쪽에 있으면 ‘좌익’,
하늘 위로 올라가려 하면 ‘높으신 양반’
땅속으로 들어가 숨으면 ‘지하세력’
아무데도 낄 데가 없어서 혼자 대열에서 이탈하면 ‘점조직’이라고 합니다.
피할 데가 없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왜 그렇게 남을 헐뜯고 비방하고 자빠뜨리려 할까요?
사람을 … 상황을 … 어떤 마음으로 / 어떤 눈으로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진성교회에 적을 두고 신앙생활 하십니까?
오늘 우리가 이 시간에 ‘하나님이 내게 무슨 말씀을 주실까?’하는 사모하는 마음으로 들으십니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지 않았습니다.
노기를 품었고, 예수님을 고발할 증거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을 파멸시키려 했고, 죽이려고 의논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그때 바리새인 뿐일까요?
의심하고, 분을 품고, 증거를 찾고, 죽이려 하는 사람 그때 바리새인 뿐이겠습니까?
요즘에도 그런 사람 많습니다.
그런데 같은 자리에 있었던 다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손 마른 병자는 달랐습니다.
“…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눅 6:10)
예수님이 “손을 내밀라”고 하셨을 때
‘왜요? 왜 손을 내밀어야 하죠?’라고 손 마른 사람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말씀의 능력은 믿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손 마른 사람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리하매” 손이 회복된 것처럼
우리도 들은 말씀, 읽은 말씀대로 ‘그리하면’ 우리에게도 믿음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믿어야 믿고 순종해야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하나님의 축복이 자신의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를 향한 진리의 말씀으로 받고, 순종할 때,
진짜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설교 듣다 보면, 성경말씀을 읽다보면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됩니다.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내 머리로 이해되지 않더라도
주님의 뜻안에 내가 있음을 믿고 믿음대로 살아야 합니다.
찬송가 620장 2절
‘주님이 뜻하신 일 헤아리기 어렵더라도 언제나 주 뜻 안에 내가 있음을 아노라’했습니다.
믿음의 능력을 나타내는 삶의 주인공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내 것 삼는 복된 삶의 주인공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거룩한 주일 예배의 자리에 있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세상에서 땀 흘려 일하여 얻은 소득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려고 합니다.
십일조, 감사헌금, 건축헌금, 선교헌금, 일천번제 예물 여러 가지 제목으로 정성껏 예물을 드립니다.
성도들의 가정과 일터를 축복하여 주옵소서.
물질 때문에 죄와 타협하지 않게 하시고 양식 때문에 눈물 흘리지 않도록 지켜 주시옵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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