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흔적이 살아있는 공간
박 종 숙
짐승도 죽을 때가 되면 고향으로 머리를 돌린다고 했다. 죽는 날까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듯이 누구나 태어나서 자란 고향을 백발이 되어서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그런 때문일까? 이상원 미술관이 춘천에 터를 잡고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35년 춘천 신북읍 유포리에서 태어난 이상원씨는 7남매 중 둘째 아들로 고2 때 6.25를 만나면서 어머니를 여의고 무작정 상경하여 극장 프로그램 인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연히 상업미술을 했던 그는 1974년 순수미술로 전향하고 50년 만에 고향을 찾았다. 그리고 14년 뒤 사북면 화악산 밑 300평 땅에 이상원 미술관을 짓고 운영하게 된다. 그 소문은 화가를 세상에 알리는 특별한 계기가 되었다.
춘천댐에서 화천 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발아래 유유히 흐르는 북한강을 내려다 볼 수 있다. 그곳에서 지암리 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활엽수림이 늘어선 산자락 언덕에 자연휴양림과 미술관으로 가는 갈래 길이 나온다. 계속 직진하면 산 중턱 숲에 현대식 건물이 나타나는데 그날도 입구에서 표를 끊고 미니 차로 경사진 언덕을 올라가니 외관이 아름다운 원형미술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을 찾으면 나는 항상 3층 전시관부터 둘러본다. 벽에 걸린 작품들은 그림이 아니고 입체 사진 같다.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오래전 옛사람들을 그곳에서 만나는 느낌이다. 골 깊게 패인 주름진 얼굴들이 내가 취학 전 첩첩 산골에서 보았던 오음리 사람들과 똑같이 닮아 있었다.
그들은 원시적 삶을 벗어나지 못하고 자연을 벗하며 살아가는 농민들이었다. 흰 적삼과 무명 바지저고리를 입었던 시대이니 우리나라 5, 60년대 쯤 되었을 듯하다. 앞니가 빠진 촌노의 함박웃음, 돋보기를 쓴 노인의 쪽진 머릿결, 그 손에 들린 지팡이는 모두 시간과 바꾼 세월의 흔적이다, 힘줄이 드러난 거칠고 투박한 손, 흰 수염과 하얀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이 기억 어디쯤을 맴돌고 있다. 그런가 하면 남루한 얼굴의 외국인도 보인다. 화가가 인도 바라나시에서 만난 사람들이라고 한다. 또 거친 바다에 운명을 맡긴 어촌 사람들, 벽촌, 농촌 사람들을 보면서 화가는 전쟁의 참화를, 절망과 희망을 안고 급속도로 변하는 근 현대사회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들을 그림으로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이상원씨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할아버지 초상화를 그렸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로부터 적잖은 칭찬을 받고 그 어른들 초상화도 여러 번 그렸다니 타고난 소질은 속일 수가 없나 보다. 그는 상업 미술을 하면서 기지촌 미군 사령관을 비롯하여 육영수 여사, 박정희 대통령, 안중근 의사 영정을 그릴 정도롤 실력을 인정받았는데 노산 선생과 이왈종 화가 권유로 국전에 입선하고 민선에 특선하면서 순수미술로 전향하였다.
그분 그림은 극사실주의다. 우리가 흔히 하찮게 여기는 물건, 즉 바닷가의 그물, 마대자루 더미, 신문지에 싼 사과들, 고목에 핀 꽃처럼 버려진 것들에 대한 경의를 표현했고 닳고 헤어지고 거칠어서 버려질 것들을 즐겨 그렸으니 시간의 흔적을 다뤘다는 생각이다. 어쩌면 남루한 것들로부터 생에 대한 가치를 찾고 고단한 삶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진실과 보이지 않는 것에 깃든 의미를 소중하게 여기던 철학이 뚝심 있게 살아 있다고 할까. 자동차가 눈 덮힌 웅덩이에 빠지자 바퀴 자국을 보고 삶을 향해 뻗어나가는 인간의 의지를 생각했다니 그 추리력과 상상력은 한 차원 높은 예술세계를 구축했던 셈이다.
세월의 기억은 시간이 갈수록 희미하게 남는다. 그걸 우리는 추억이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 화천 오음리 외가 산촌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안방 시렁 위에 이불 몇 채가 올려져 있었고 밥주발 몇 개, 김치단지, 수저와 바가지, 아궁이에 걸린 무쇠솥이 세간의 전부였다. 그 시절 촌노 얼굴에는 갈퀴로 그은 듯한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는데 요즘은 시골에 가도 그런 얼굴은 찾아보기 힘들다. 주름도 시대를 반영하는 것일까? 세월의 고통이 누적된 것일까?
백발이 되어서도 나는 그 벽촌의 아궁이에서 나던 연기 냄새, 흙벽에서 묻어나는 진흙 냄새, 소 우리, 돼지 우리에서 나던 쿰쿰하고 시큼한 냄새, 뙤약볕에서 땀 흘려 일하고 논두렁에 앉아 컬컬하게 마시던 막걸리 냄새를 아득한 꿈결처럼 그리워한다.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신 분들이건만 지게를 지고 나뭇짐을 해 오던 외할아버지와 앞치마를 두르고 쇠죽을 끓이던 외할머니가 보고 싶다. 잊혀진 추억을 다시 떠올리는 즐거움 속에 작품 감상을 하다 보면 인간 본연 모습이 자연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그러고 보니 화가의 주인공들은 잃어버린 내 시간을 찾아 준 보물이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날들의 쓸쓸함이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있다. 초상화는 인물 윤곽과 사람의 인품과 성격, 분위기까지 그림에 녹아있어야 한다니 세밀한 통찰력과 정교함을 놓치면 그릴 수 없는 그림이다. 화가는 인물을 통해 그 시대를 그렸던 것이다.
나는 작가의 뛰어난 묘사력과 훈훈한 인간미를 안고 내려와 1층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통창에 비친 화악 능선의 아름다움을 감상했다. 전면을 푸른 빛으로 물들인 창을 마주한 것만도 내 삶의 여백을 찾은 듯 행복했다. 그 싱그런 빛을 눈에 가득 담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언덕을 내려오다 보니 뮤지엄스테이, 아트샵, 유리공방, 레스토랑, 디너 패키지 등 체험관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하나밖에 없는 작품세계를 품고 있는 개인 상설 미술관을 춘천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랑이지만 그 훌륭한 화가가 고향을 지키며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 든든했다.
* 주) 행간을 뗀 것은 인터넷상에서 눈의 피로를 덜기 위함일 뿐입니다.
박종숙
《수필문학》등단(1990)
국제펜 한국본부 이사, 수필문학 추천작가회 명예회장, 춘천문화원 부원장.
수필문학상, 강원도 문화상, 강원도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호수지기》, 《내영혼의 강가에서》 외 다수
《계간수필》 봄호에서 발췌
첫댓글 "백발이 되어서도 나는 그 벽촌 아궁이에서 나던 연기 냄새, 흙벽에서 묻어나는 진흙 냄새, 소 우리, 돼지 우리에서 나던 쿰쿰하고 시큼한 냄새, 뙤약볕에서 땀 흘려 일하고 논두렁에 앉아 컬컬하게 마시던 막걸리 냄새를 아득한 꿈결처럼 그리워한다.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신 분들이건만 지게를 지고 나뭇짐을 해 오던 외할아버지와 앞치마를 두르고 쇠죽을 끓이던 외할머니가 보고 싶다. 잊혀진 추억을 다시 떠올리는 즐거움 속에 작품 감상을 하다 보면 인간 본연 모습이 자연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나는 유년시절에 2대독자이신 부친과 사별해서 이런 수필을 읽으면 반세기 전 유년시절이 매우 그립다. 백부, 숙부라고 불러본 일도 없고... 더구나 간호사이신 큰형수님 젖을 먹고 자라서 내가 혼례식을 할 때는 부모님이 앉아 있어야할 자리에 큰형님 내외가 앉아 있었으니 모르는 하객들은 부모가 참 젊다고 하시더란다.
이번 주말에는 고향 情珠詩에 가야겠다. 어머니처럼 키워주신 큰형수님 만나러. 情珠詩 하늘이 아름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