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6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율법의 쓰임새와 역할. 律法の用途と役割。
https://youtu.be/Rd3_mqVbB3I
본문 갈 3:21-29
갈 3:21 ○그렇다면 율법은[하나님의] 약속과는 반대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중개자가 준 율법이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의롭게 됨은 분명히 율법에서 생겼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이 죄 아래에 갇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약속하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려고 한 것입니다. 23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는 율법의 감시를 받으면서, 장차 올 믿음이 나타날 때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24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개인교사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25 그런데 그 믿음이 이미 왔으므로, 우리가 이제는 개인교사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26 ○여러분은 모두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27 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8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29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약속을 따라 정해진 상속자들입니다.
21.それでは、律法は神の約束に反するものなのでしょうか。決してそうではない。万一、人を生かすことができる律法が与えられたとするなら、確かに人は律法によって義とされたでしょう。22.しかし、聖書はすべてのものを罪の支配下に閉じ込めたのです。それは、神の約束が、イエス․キリストへの信仰によって、信じる人々に与えられるようになるためでした。23.信仰が現れる前には、わたしたちは律法の下で監視され、この信仰が啓示されるようになるまで閉じ込められていました。24.こうして律法は、わたしたちをキリストのもとへ導く養育係となったのです。わたしたちが信仰によって義とされるためです。25.しかし、信仰が現れたので、もはや、わたしたちはこのような養育係の下にはいません。26.あなたがたは皆、信仰により、キリスト․イエスに結ばれて神の子なのです。27.洗礼を受けてキリストに結ばれたあなたがたは皆、キリストを着ているからです。28.そこではもはや、ユダヤ人もギリシア人もなく、奴隷も自由な身分の者もなく、男も女もありません。あなたがたは皆、キリスト․イエスにおいて一つだからです。29.あなたがたは、もしキリストのものだとするなら、とりもなおさず、アブラハムの子孫であり、約束による相続人です。
지난 주일에는 우리의 믿음을 지탱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성과나 혹은 율법준수의 행위가 아닌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복음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복음을 믿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신다는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께서 바로 그 약속을 지키셨다는 증거라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며, 모든 상황 속에서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의 시선을 의식함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열매가 풍성하게 채워지는 일상의 삶을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구약의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더욱 견고하고, 분명하게 드러내는 역할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는데요. 인간은 가시적인 율법의 준수가 아닌 비가시적인 약속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다시 말해 착한 일을 많이 하고, 나쁜 짓을 하지 말아야 천당에 간다는 인과응보와 권선징악의 구원은 성경의 약속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속죄하셨다는 것을 믿을 때, 비로소 인생을 살면서도 영생을 살게 된다는 성경의 약속이 복음인 것이지요.
그런데 복음의 약속을 믿는 것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면, 과연 거룩하고 착하게 윤리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율법은 무용한 것이 아닐까? 또한 율법이 구원과 관계없는 일이라면 구약의 율법은 폐기되어야 하지 않는가? 오히려 권선징악과 인과응보의 원리가 사람을 구원하는데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과 로마서를 통해서 율법의 역할과 용도에 대해서 밝히고 있는데요. 오늘 본문을 먼저 보시면 율법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약속이 실현되기 전에 우리의 거룩한 삶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완성되기 전에 율법은 우리에게 개인교사의 역할을 하였다고 말씀하시는데요.
당시 로마제국에는 오늘날과 같은 공교육적인 학교가 보편적이지 않았고 가정이나 마을 공동체의 관계를 통해서 기본적인 교육을 하는 시대였습니다. 특히 어린 자녀들에게 기본적인 인성과 사회적인 규칙 등을 가르치며 기본적인 도덕과 윤리를 가르치는 역할을 하는 노예나 하인을 둔 가정이 있었다고 하지요. 이들을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가 “파이다고고스”인데요. 성경은 초등교사, 혹은 개인교사로 번역을 하고 있지요.
물론 신분에 따라 그런 교사 역할의 하인을 둘 수 있는 가정과 그렇지 않은 가정이 있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개인교사 혹은 초등교사라고 번역된 “파이다고고스”는 어린아이를 뜻하는 “파이스”와 ‘이끌다’, ‘인도하다’란 뜻인 “아고스”의 합성어입니다.
다시 말해 아직 사회적인 규범과 규칙, 혹은 인간성의 기본기를 배워야 할 어린이들에게 기본적인 상식과 윤리, 도덕을 전달하는 전달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파이다고고스’ 즉, 개인교사(초등교사)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교사나 선생이라고 하면 뭔가 지혜로운 행동과 말을 통해 본보기가 되는 이를 떠올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선생은 “디다스칼로스”라는 별도의 단어가 있는데요. 바울은 율법의 역할이 본보기가 되는 스승의 역할이 아닌, 최소한의 인간됨을 위한 지식을 전달하는 전달자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디다스칼로스”가 아닌 “파이다고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여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구약의 율법은 우리에게 영생의 삶을 위해 가장 기본적인 지식을 전달함(안내자역할)으로 거룩함과 의로움(혹은 의인의 생활)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21절에서 분명히 다시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이 죄인지를 가르쳐 줌으로써 우리가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아야 할 죄인임을 드러내 주고 있다고 하십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롬 7:7)
우리는 율법을 통해 죄를 죄로 인식할 수 있고, 또한 배울 수 있습니다.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기에, 율법이 세워짐으로 죄가 늘어났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롬 5:13, 20a)
이처럼 율법은 우리에게 회개와 죄사함의 필요성에 대해서 뚜렷하고도 또렷하게 증언하는 역할을 합니다. 죄와 의에 대한 정확한 기준을 세워주는 역할이 곧 율법의 용도인 것이지요. 마치 다이어트를 위해 체중계를 이용하여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고 다이어트의 필요성을 인식하기 위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매일 체중계에서 숫자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다이어트를 성공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율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율법을 알수록 우리는 복음의 은혜가 얼마나 값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그 약속이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 기적인지를 더욱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요.
공자가 집필한 논어라는 책에 여러분도 들으면 잘 아시는 이런 글이 있다고 하는데요.
삼인행, 필유아사언(三人行, 必有我師焉)’
그 뜻은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스승으로 받들 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앞서 말씀드린 디다스칼로스, 즉 모범이 되는 스승이 있을 수 있구요. 또 어떤 이는 말은 맞는데 본보기는 되지 못하는 파이다고고스의 역할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디다스칼로스는 복음의 약속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한계와 구원의 필요를 역설적으로 가르쳐 주는 율법은 파이다고고스, 즉 정보전달자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복음의 약속에 대한 갈망은 기본적인 율법에 대한 지식으로 증폭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이고, 내가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고 거듭나서 영생을 얻어야 할 존재임을 강력하고도 명확한 가르침으로 외치고 있는 것이 구약의 율법이며, 예언자들의 경고를 받는 이스라엘의 범죄인 것입니다.
학창시절에 공부를 매우 잘 하는 친구들이 갖고 있던 비법 노트가 있었습니다. 바로 오답노트였습니다. 자신이 틀린 문제를 다시 적어 놓고 복습하면서 다시는 틀리지 않도록 도움을 주는 비책이었던 것이지요.
우리에게 구약의 율법과 이스라엘 민족의 오류와 범죄는 오답노트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진면교사는 되지 못해도 반면교사의 역할을 하고 있지요. 그들의 실패와 범죄, 그리고 오류를 보면서 좌절하거나 혹은 부정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값어치와 그 축복을 헤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롬 6:4)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그와 함께 부활하는 소망의 약속 가운데 사는 일에 연합하였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자는 모두 복음을 통해 축복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가 죄를 회개하게 하도록 초청하는 정보전달자의 역할과 거듭난 자의 거룩한 삶을 위한 안내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지만, 구원의 길을 가는데 매우 유용한 쓸모가 있는 도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저와 여러분이 율법에 얽매이지는 않되, 그 유용함과 유익함을 취하여 복음을 믿고 거듭나서 영생을 얻은 자의 풍성하고 풍요로운 일상을 참된 스승이 되시는 주님과 동행하며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윤택하고 풍성하게 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계획 중에 가장 핵심적인 약속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믿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얻어, 거듭남으로 영생의 삶을 인생에서 체감할 때 우리가 비로소 자기다워집니다. 그가 곧 사람답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사랑하며 사는 참된 축복의 기초 위에 서게 되는 것이지요. 율법은 그런 복음의 약속을 믿는 일이 종교에 매이는 우상숭배나 혹은 기복신앙으로 비껴가지 않도록 기초 정보를 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이나, 혹은 교리나 생활규범 등의 기초적인 지식의 도움을 받아 복음의 약속에 가장 합당한 지혜를 배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와 동행하시며 눈동자처럼 지켜주고 계신 예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늘 주님을 바라보며 기쁨과 평안을 실감나게 체감하는 기막힌 부요함 안에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