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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강 창세기 29:21~35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47.36
26.10.25(일)
77세가 되기까지 어머니 치마 폭에서 마마 보이로 자라던 야곱이 난생 처음으로 집을 떠나서 어머니 리브가 친정집을 향해 갔습니다.
자기가 살던 브엘세바에서부터 800km가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만약에 하루에 30km씩 걸어갔다고 하면 약 한 달에 걸쳐서 이제 겨우 하란 어귀에 도착했습니다.
하란 어귀에 있는 우물가에 갔을 때 마치 그곳에 800km를 걸어온 야곱을 기다리고 있는다는 듯이 목자가 한 사람도 아니고 세 사람씩 앉아 있었습니다. 야곱이 그 목자들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라반이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다 잘 안다는 거예요.
그래서 라반이 평안하십니까? 물었습니다.
야곱에게는 라반이 평안하다는 사실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 리브가가 97년 전에 친정집을 떠났거든요.
97년 동안에 어머니 친정집이 하란에 그대로 있는지 외삼촌 라반이 살아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온 거예요. 만약에 어머니 친정집이 이사 가버렸다.
혹은 집은 있긴 있는데 사람도 바뀌었고 라반이 죽고 없다. 그러면 야곱은 지금 800km를 헛걸어 온 셈이 됩니다.
그런데 그 목자들이 감사하게도 라반이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목자가 그 말을 함과 동시에 어 저기 라반의 딸 라헬이 양을 몰고오네 외쳤습니다.
그러니까? 800km를 걸어와서 야곱이 그 우물가에 도착하는 그때를 맞추어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야곱이 찾아가려고 하는 외삼촌 라반 집의 딸 라헬 자기 사촌 여동생이 되겠죠. 그 라헬이 걸어오고 있단 말이에요.
극적으로 상봉한 라헬을 상봉한 야곱은 자신이 누군지를 밝혔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라헬이 뛰어가서 아버지 라반에게 전했죠.
아버지 라반이 또 뛰어와서 야곱을 영접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삼촌집에서 한 달 동안 편안하게 지냈는데 편안하게 그저 숙식만 한 것이 아니라 한 달 동안 신실하게 그 집을 위해서 일을 했단 말이에요.
77년 동안 장막에서 어머니 옆에서 살았으니까?
얼마나 집안 일을 잘 하겠습니까? 아주 삼촌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삼촌 이야기를 했습니다. 야 우리 아무리 삼촌 조카 사이지만 네가 어떻게 무료로 여기에서 일을 하겠느냐 품삯을 정해라 그러면 내가 싻을 주겠다.
그 이야기는 야곱을 위해서 하는 말 같지만 실상이 뒤에 가서 라반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보면 그저 삼촌 조카 사이로는 자기가 불편하니까 약간의 품삯을 주더라도 아예 고용 계약을 맺어서 자기가 고용주로 야곱을 고용인으로 부리겠다는 속셈이었습니다.
라반에게 두 딸이 있었는데 큰딸 이름은 레이이고 둘째 딸 이름을 라헬이라고 그랬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저 라헬을 위해서 삼촌에게 7년 동안 임금을 받지 않고 내가 일을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당신 딸을 위한 지참금으로 내가 무료로 7년 동안 일을 하겠습니다.
그 대신에 저 라헬을 내게 아내로 주십시오
라반으로서는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었죠.
7년 동안 무 임금으로 일한다고 하면 당시에 결혼하는 결혼하러 오는 남자가 가져오는 지참금보다 월등히 많은 금액이란 말이죠. 그래서 허락을 했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라헬을 위해서 7년 동안 노역을 하면서도 그 7년을 며칠로 여겼을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야곱은 7년을 단 며칠로 생각할 정도로 감격하는 가운데에 그곳의 삶을 살았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는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야곱이 집을 떠날 때는 자기가 그렇게 살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불안과 초조 속에서 집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그는 보금 자리를 얻었을뿐만 아니라 열심히 일한 뒤에 가정도 꾸릴 수 있도록 되었던 것입니다.
그 소망 속에서 그 새로운 꿈속에서 야곱은 7년을 그저 며칠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야곱이 선하고 의로워서 아니었습니다.
형을 속이고 도망가는 비도덕적인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까?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하며 네가 이 땅으로 다시 되돌아올 때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으로 인함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섭리속에서 야곱은 새롭게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야곱만의 하나님이신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에게는 길이 없어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거미줄처럼 당신의 섭리를 얽으시 면서 치밀하게 역사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시편 16편 6절을 통해서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기에서 줄로 재어 준다라고 하는 말은 줄자를 의미합니다. 구역 기억 이 말은 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매 순간 순간의 상황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어떤 삶의 상황을 주시든지간에 그 삶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나라는 인간을 위해서 자를 가지고 재시듯이 정확하게 가늠하셔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내게 주시는 은혜의 상황이다 다윗은 그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참 많이 있죠. 여러분 다윗이 어떻게 위대한 다윗으로 인류 역사 무대에 성경의 무대에 등장합니까?
어느 날 갑자기 블레셋의 거인 장군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키가 1m 70cm
그 사람이 입고 있는 몸무게 갑옷의 무게만 57.5kg
제 살빠졌을 때 무게하고 똑같습니다.
여러분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지 않았으면
다윗은 없습니다.
그 거인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침공한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로서는 고통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 고통이 없이는 다윗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인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침공해 왔을 때 이스라엘에서 골리앗을 이기는 장군이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도 다윗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옛날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장군끼리 전쟁하는 거잖아요. 군대를 다 뒤에 세워 놓고 대표 선수끼리 나가서 서로 싸운단 말이여요.
그래서 이기는 장군 쪽의 군대는 기세가 올라서 덤벼들고 지난 쪽 장군 군대는 그저 처음부터 기가 죽어서 도망갑니다.
어느 장군이 나서느냐가 중요하거든요.
그 골리앗의 위세에 눌려서 이스라엘 장군 가운데에 누구도 누구도 가서 싸우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서 베들레헴에 있는 이세라고 하는 사람의 8 아들 가운데에 세 아들도 징병을 당해 나갔습니다.
만약에 그 전쟁터에 이세의 아들이 징병당하지 않았으면 다윗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세가 어느 날 세 아들이 지금 징병을 당해서 전쟁터에 가 있는데 얘들이 밥은 제대로 먹는지 걱정이 된단 말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 군대 치고 아버지가 밥보내는 군대가 어디 있습니까? 못 먹어도 다 군에서 먹여주죠. 만약에 그 아버지가 그 생각 안 했으면 다윗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이 양식을 좀 보내야 되겠다.
그런데 그 보낸 양식의 양이 뭐냐 붉은 곡식 한 에바 에바는 12되입니다.
10:01
한 말 두되 떡 열 덩어리 하고 치즈 열 덩어리 우리는 보통 떡 열 덩어리 치즈 열 덩어리 하면 요만한 덩어리 그게 아니라 유대인들은 치즈 덩어리 이만한 덩어리 잘라 먹거든요.
그러니까 열 덩어리라면 이렇게 큰 덩어리 10개 떡 덩어리 10개 그 사람은 큰 빵도 그 소고기 갈비처럼 이렇게 달아 놓고 잘라 먹잖아요. 그죠.
베들레헴부터 전쟁터 엘라 골짜기까지는 25km 여러분 혼자서 그 먼 거리를 곡식 12되에 치즈 떡 각 열 덩어리를 메고 간다이 보통 일 아니죠.
아들이 8명이 있는데 세 아들이 군에 나갔으면 아들 몇 명 남았습니까? 5명 남았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위에 큰아들부터 보내야죠.
그런데 아버지 이세가 막내 아들 다윗을 불렀습니다. 만약에 그때 아버지가 막내 아들 이거 안쓰러워서 세 아들은 군에 나갔고 넷째 아들 다섯째 아들 불러서 너네들 이건 메고 가라 다윗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일 약한 막내를 불러다가 너 이거 형들에게 갖다 줘라
만약에 다윗이 아버지 무슨 농담도 형님 시키시죠. 그러면 다윗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메고 가다가 귀찮아서 되돌아 갔더라도 다윗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메고 같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메고 가서 형들에게 그 곡식을 전하던 날 그날 골리앗이 가만히 진영해서 잠잤으면 다윗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날도 골리앗이 이스라엘 진영 앞에 가서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할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욕했습니다. 그러니까 온갖 욕 다 했겠지요
골리앗이 빨리 나오고 나와서 싸우자고 그 이야기를 다윗이 들었습니다. 다윗이 그 말을 듣고 노를 품지 않았더라도 다윗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말을 듣고 다윗이 노를 품 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가서 싸우겠다고 자원을 했습니다.
사울 왕이 그 어떤 장군도 나가서 싸우지 않는다는데 자원자가 있다고 하니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빨리 데려와라 왔는데 애가 왔습니다.
사울 왕이 아무리 급해도 자기도 자식을 키우는 아버지인데 그 어린 소년을 전쟁터에 보낼 수 있겠습니까?
안 된다. 너 가면 안 된다.
너는 어린 소년이지만 저쪽은 산전수전 다 겪은 거인 장군이야 너 집에 가라 그때 다윗이 알겠습니다 하고 갔으면 다윗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뭐라고 그럽니까?
왕이시여 내가 들판에서 우리 아버지 양을 칠 때 사자와 곰이 와서 아버지 양을 움켜쥐려고 하면 제가 맨손으로 때려잡았습니다.
제가 사자와 곰도 잡았는데 하물며 할례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야 두말할 것 있겠습니까? 왕이시여 하나님께서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저를 구해 주셨는데 블레셋 사람에게서 저를 책임져 주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가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사울 왕이 이놈 말 안 듣는구나 빨리 가라니까 그러면 다윗은 존재하지 않지요.
그 어린 소년의 말을 듣고 사울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 네가 가거라 그런데 안쓰러워서 잠깐만 너 그 옷 입고는 골리앗하고 못 싸워 내 투구하고 갑옷을 줄게 이거 입고 가거라
그래서 다윗이 입어봤잖아요. 여러분 어린 소년이 말입니다. 전 세계에 어떤 나라에 소년이든지간에 다 어릴 때 전쟁놀이하고 저 크지 않습니까?
그리고 소년이 어머니 치마 가지고 장군 갑옷 흉내 내거든요. 다윗이 지금 태어나서 임금의 갑옷을 입었습니다. 얼마나 뿌듯하겠습니까?
만약에 다윗이 교만한 마음에 그 갑옷 입고 나갔으면 끝났습니다. 저 안 입으렵니다. 제 몸에 맞는 제 옷 있겠습니다.
그리고 시냇가에서 돌멩이 5개 주워서 제구 주머니에 넣어서 갔습니다. 골리앗하고 일대일로 맞붙지 않습니까?
그 골리앗을 향해서 물매에 5개 돌 중에서 딱 하나 먼저 꺼내어서 그 물맷 끈을 돌려서 던졌는데 정확하게 이미에 꽂혀서 골리앗이 죽었습니다
바로 위대한 다윗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과정에서 하나라도 어긋났다면 위대한 다윗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그가 위대해서 인류 역사 전면에 나타난 것이 아님을 본인이 아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때만 그러셨던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일평생에 걸쳐서 하나님께서는 매 순간마다 어떤 상황 속에서든 그렇게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내게 줄로 재워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구역이 실로 아름답도다.
어떤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로 재어 주시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은혜의 상황입니다. 고백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절망 속에 있다 할지라도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하나님을 의지해서 우리는 일어서서 또 걸어가야 될 소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우리를 위해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는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서는 내가 원하시는 것만을 이루어 주셔야 된다고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내게 줄로 제어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다고 하나님께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채워 주시는 상황이라고 고백했다고 해서 일평생 다윗이 원하는 대로만 되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10년 동안 사울 왕의 칼날을 피해서 동가숙 서가식 하고 다녀야 되구요. 때로는 사망의 음침만 골짜기를 다녀야 했고 때로는 말할 수 없는 인생 폭풍을 맞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상황이 줄로 재어 준 아름다운 구역에 있다고 다윗이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를 위해서 역사하신다는 것은 내 뜻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절대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다윗의 생을 통해서 다윗의 뜻이 아니라 다윗을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아름답게 이루어졌고 그 결과로 3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다윗은 이스라엘 국기에 영원한 다윗의 별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야곱과 함께 하셨고 그 은혜로 야곱의 인생을 다시 시작하게 하셨다고 해서 야곱 뜻대로 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뜻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위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야곱의 삶 속에 개입하시고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21절을 보겠습니다.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기한이라는 기한이라고 하니까 몇 년이 찾다는 얘기에요. 7년이 그러면 야곱이 몇 살 되었습니까?
84세 77세때 집을 떠나가서 이제 7년 노역을 하고 이제 결혼할 나이가 되어서 84세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 75세 이미 아내 다 있었지 않습니까? 그죠. 이삭은 40대에 40세에 결혼해서 60세에 자식을 낳지 않습니까?
그런데이 야곱은 84세에 이제 처음 결혼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뭔가 이렇게 좀 더딘 사람입니다. 중요한 사실은요.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20:01
자기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무언과 더딘 사람 뭔가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 같은 사람 그래서 결국 아브라함도 75세 하나님 부르심을 받을 때 자식 없었잖아요. 그렇죠.
이삭도 20년 동안 자식 없지 않았습니까?
야곱도 이렇게 더딘 사람입니다.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그 다음에 잘 표현을 보세요.
아주 방자합니다.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는 이제 7년이 지났으니까? 내가 부부로 같이 동거하겠습니다. 그 말이죠.
그런데 상식적으로 얘기를 하면 뭐라고 야곱이 말해야 되겠습니까? 삼촌 이제 7년이 다 끝났으니까 삼촌 따님 라헬 저 주시죠. 이렇게 얘기해야 되잖아요.
아직은 결혼을 안 했으니까 삼촌 딸이잖아요.
그런데 방재하게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이게 원문에는 명령으로 되어 있습니다. 내 아내 주라 뭐 이런 말이에요.
야곱이 왜 이렇게 이야기하는가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죠. 7년이 지났는데 삼촌이 입 닫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언질을 줬겠지요.
몇 번을 사인을 보내도 삼촌이 있다고 아는 척도 안 해 그냥 마침내 삼촌한테 7년이 지났으면 법적으로 내 아내다.
왜 우리 고용대야 그렇게 맺지 않았냐 그러니까 당신 딸이 아니라 내 아내 주시오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러분 라반하고 야곱하고 내가 라헬을 위해서 7년 동안 무임금으로 내가 노력을 하겠습니다. 하고 고용 계약을 맺었는데 날짜 계산이 누가 정확하겠습니까?
라반은 날짜 계산 안 했을 겁니다.
야곱은 하루 지날 때마다 그러니까 야곱은 정확하게 계산한 겁니다.
그런데 안 주니까 이제 삼촌에게 따진 것입니다. 그랬더니 22절
라반이 그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동네 사람들을 다 모아서 잔치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그 경제력이 있는 집안들은 자기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서 이제 잔치를 크게 벌렸습니다. 또 어떻게 보면 라반이 야곱을 위해서 큰 잔치를 벌린 것 같아요.
그런데 이 뒤에를 보면 라반이라고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나오잖아요. 그죠. 야곱이 좋아하던 라헬을 주는게 아니라 밤에 신방에 레아하고 바꿔치기 해 버리잖아요.
나중에 뒤에 가서 확인하겠지만 왜 그렇게 합니까?
지금 7년 동안 무임금으로 지금 라반은 덕을 많이 받거든요.
그런데 바꿔치기 하면 분명히 이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니까 또 7년 무임금으로 일할 거 아니여요. 그 지금 라바는 그 계산으로 사람들을 다 불러 모은 것입니다.
왜 내일 아침이면 아내가 바뀌었다는 것 야곱이 알 것 아닙니까? 그래서 야곱이이 결혼 무효야 하면 안 되잖아요.
수많은 증인들을 불러 모아놓고 내일 아침에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더라도 체면상으로도 그 결혼을 무르지 못하게끔 지금 거창하게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23절
저녁에 그의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그리고는 신방에다가 레아를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레아라고 하는 사실을 모르고 첫날 밤을 지냈습니다. 혹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야곱이 바보가 아닌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요즘 같으면 이런 일은 어렵죠.
그 옛날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때에 밤에 조명 기구라는게 뭡니까? 횃불이나 램프잖아요. 이런 전기불하고는 상대가 안 되거든요.
또 그때 결혼식 첫날에 잔치 자리에 신부가 안 남아 있어도 상관없어요. 또 밤에 그 장막 안에 들어가서 램프를 끈 다음에 신부가 베일을 벗는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당연히 라헬이라고 생각하고 그날 밤을 지내는 일이 그 당시로서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죠.
24절
라반이 또 그의 여종 실바를 그의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
이제 레아를 보내면서 여종중에 실바라고 하는 여종을 몸종으로 딸려 보냈습니다.
당시에 경제력이 있는 집안이 딸을 시집 보낼 때 유모나 몸종을 딸려 보내는 것은 관습이지 조금 더 이상할게 없거든요.
그런데 그 몸종의 이름 실바까지 밝혀둔 것은 나중에 이 실바가 야고보의 첩이 되어서 아들을 두 명 낳기 때문에 그 이름을 밝혀 준 것이죠.
25절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아이고 이거 얼마나 한심하겠어요. 한심이 아니라 그 배신감 어떻게 해요. 자고 났는데 자기가 사기극에 걸렸다는 걸 비로소 안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 있으면 어찌 됨이니까?
어찌하여 행하셨나이까? 어찌 됨이니까?
히브리 말로 마라고 하는 단어가 두 번이 반복되어 있습니다.
마라고 하는 것은 왜 무슨 이유로 이런 말이에요.
삼촌 왜 왜 무슨 이유로 나를 이렇게 속였냐 그 말이어요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랬더니 삼촌이 이렇게 말합니다.
26절
나반이 이르되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다.
그건 우리 관습이 아니라 이 사실일 수 있죠.
그래도 이러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처음부터 말을 해야죠.
그런데 말 안 하고 딱 입 다물고 있다가 지금 순진한 야곱을 속였단 말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를 위하여 7일을 채워라 여기서 7일을 채워라 이게 무슨 말인가
당시에 사람들을 다 불러서 잔치를 벌리면 그 잔치가 7일 동안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레아를네 아내로 맞은이 잔치를 7일 동안 다 완수해라 그 말이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을 다 모아서 첫날 지나고 나면 그 잔치를 참 무르기가 체면상 어렵지만 그 잔치가 7일 동안 계속되는 잔치를 다 끝내고 나면 그 다음에는 어떤 길로도 무를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큰딸 레아하고이 결혼 7일 기간 동안의 모든 이 과정을 다 끝내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주어가 뭡니까?
우리가 그런 네가 7일로 채워서 레아가 확실하게 네 처가 되는 것이다 공표되고 나면 우리가 라헬도 너한테 줄게
그러니까 자기가 아니라 꼭 그 지방 사람들이 다 합의해서 그렇게 한 것처럼 우리가 라헬도 줄게 그 다음 말이 또 기가 막혀요.
네가 또 누구를 나를 나를 7년 동안 섬길지니라 아까들은 주어가 뭡니까? 우리가 그도 네게 주겠다. 그랬죠. 우리가 라헬도 너한테 줄게 그러면은 네가 우리를 7년 섬겨라 그렇게 말해야 되잖아요.
근데 섬기는 건 나만 섬기면 돼요.
그러니까 우리라고 하는 것은 말장난인 것이죠.
이 라반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렇게 음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으로 하여금 자기 큰딸하고 먼저 결혼하게 해서 그 큰딸은 그 눈 동자가 희미해서 총기가 없어 보인다고 했잖아요.
그 딸 먼저 해결하고 그 다음에 야곱이 둘째 딸 좋아하니까 또 7년 동안 무임금 노동하게 하고 꽁 먹고 알 먹겠다. 지금 그 말이거든요.
28절
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7일을 채우매
이 표정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 결혼식을 7일 동안 채울 때 떫은 감 먹은 듯이 그 예식장에 앉아 있는 겁니다.
7일이 다 지났습니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그 7일이 지나서 이제 레아가 야곱하고 결혼했음을 절대로 무를 수 없게 되었을 때 자 이제 됐다 라헬도 데리고 가라
그리고 라반이 또 그 빌하를 종 빌하를 그의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했다.빌하를 그의 몸종으로 주었다고 이름이 나와 있는 것은 이 빌하 역시도 야곱의 첩이 되어서 아들 둘을 낳았기 때문에 이름이 있습니다.
30:03
자 보십시오 만약에 라반이 진자로 야곱과 자기 딸 러아 그들을 위해서 선한 마음으로 일주일 동안 결혼식을 치러졌다면 이번에도 또 치러 줘야 되죠.
라헬을 위해서도 또 일주일 해 줘야 되잖아요.
안 했습니다. 하루도 안 했습니다.
왜 레아와의 결혼식은 일주일 안 하면 야곱이 무를까봐 겁이 나서 그렇게 했는데 라헬은 가만히 놔둬도 야곱이 죽고 못 사는 거 아니거든요.
돈 1원도 드릴 필요가 없는 겁니다.
라반은 이렇게 계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그 야곱이 왔다는 이야기를 라헬이 가서 아빠한테 전했을 때 아빠 라반이 뛰어나가서 야곱을 끌어안고 계속 뽀뽀하면서 하는 것을 유대 랍비들은 라반이 음흉해서 그랬다고 해석한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근데 유대교를 랍비들은 이 유대교 경전을 우리보다 훨씬 더 오래 본 사람들이니까 그 사람들은 사람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의 캐릭터를 더 정확하게 할 거 아니에요.
라반이 이렇게 음흉하고 돈을 밝히는 사람이니까 옛날에 아브라함이 보낸 엘리에셀이 보석까지 온 것을 기억하고 야곱 주머니에도 보석이 있을까 하고 뽀뽀하면서 계속 뒤졌다. 저는 그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30절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 다시 7년 동안 라반을 섬겼더라 차이가 있다면 레아는 7년을 노역을 한 다음에 아내로 얻었는데 라헬은 먼저 아내로 얻고 7년 동안 지금 무임금으로 노동을 다시 합니다.
그 7년 동안 울며 겨자 먹기로 야곱은 뜻하지 않게 또 무임금 노동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누가 그와 함께 하시는데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는데
어떤 하나님이신데 야곱을 위해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야곱은 이렇게 사기극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원치 않는 가운데에 또 다시 7년을 무임금 노동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셔요. 우리가 그 하나님을 깊은 속뜻을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그러나 두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바로 하나님께서는 뿌린 대로 거두게 하신다는 거예요.
야곱이 자기 형을 그렇게 속여 먹었거든요.
야곱이 자기 아버지 그렇게 속였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삼촌 라반으로부터 이렇게 사기를 당하는 어려움을 겪게 하심으로 나중에 창세기 32장 얍복강에서 야곱이 기도하면서 이스라엘로 바뀌잖아요.
그때 지나간 과거를 다 회상하면서 자기의 잘못된 삶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죠.
뿌린 대로 거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바로 라반의 이와 같이 음흉한 마음 불순한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도구로 삼으셔서 야곱으로 하여금 열두 지파를 이루시게 하시려는 당신의 섭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바로 라반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섭리가 성취되는 것이죠. 여러분 이 세상은 불의합니다.
불의한 세상 속이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 않는 것 아닙니다.
불의한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신비스러운 섭리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이루어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31절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여러분 야곱에게 아내가 지금 동시에 둘이 생겼습니다. 좋아하는 여자는 라헬이어요
그런데 여기에 보면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우리 번역은 굉장히 순화시켜서 했습니다.
히브리 말로 사내라고 하는 것은 사랑받지 못했다는 말이 아니라 미움을 받았다 혹은 가증히 여김을 받았다는 거예요.
여러분 야곱이 볼 때 그 여자가 얼마나 가증스럽겠습니까? 자기 아버지가 너 라헬 대신에 들어가라 그런다고 태연하게 옷 입고 와서 들어왔잖아요. 생각할수록 가증스러울 것 아닙니까?
그래서 같이 부부가 되어서 살아가는데도 레아를 남편이 가증스럽게 여기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사 태를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라헬에게는 태를 열어 주시는 은총을 베풀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죠.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뭐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으시기 보다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지 못하는 사람에게 더 큰 관심을 베푸신다는 거예요.
여러분 사랑스러울 만한 사람 사랑하는 것 그건 사랑 아니죠. 그건 누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사랑하지 않고 관심을 쏟지 않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관심을 쏟는 것이거든요.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길이 뭔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사람을 내가 내 마음을 쏟을 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와 같은 자를 더 기뻐하신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생명은 철저하게 하나님 소관이라는 거예요.
레아의 태를 여신분도 하나님이시요 라헬로 하여금 자녀를 낳지 못하게 하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섭리하심 속에 생명을 얻고 태어났습니다.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살생자에 명령할 명이라 그랬죠.
생명 살라고 명령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날 나에게 그 생명을 명하시지 않으셨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이토록 귀합니다.
그러므로 이 생명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가꾸어 갈 때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삶을 통해 아름답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죠.
32절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일자가 있죠. 주 보니까? 뜻이 뭡니까? 보라 아들이다
이 레아의 심정이 이해하시겠죠.
남편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남편이 가증스럽게 여기는데 동생이 아이가 없어요
그래서 남편과 하루 저녁을 지났는데 잉태가 되더니 나았는데 아들입니다. 얼마나 기쁜지 동네 사람들아 보시오 아들이요. 지금 이런 심정입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대게 결혼해서 부부지간히 소원하다가도 아이가 생기면 가까워지잖아요.
아 이제 이 아이가 태어났습니까 남편이 나를 사랑해 주겠지
그래서 또 33절 보니까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다.
시므온은 들으심 하나님께서 들으시는데 뭘 들으셨는가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다. 아이는 낳았는데 여전히 사랑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둘째 아이 이름은 시므온이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 또 34절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했다.
연합한다. 그러니까 아들 이제 세 명씩 낳았으니까 남편이 나하고 진심으로 연합해 줄 것이다. 레아는 오매불망 남편밖에 없습니다.
정말 그야말로 조강지처인 거죠.
35절을 보십시다.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 다음에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이제는 공표하십시다.
이제는 이제는 어떻게 해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지금까지는 3년 동안 세 아들을 낳으면서 하나님을 찬송할 생각을 안 했습니다. .
야 내 아들 낳았어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들어주셔서 남편이 나하고 연합할 것이요. 전부 자기 중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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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4년째 가서 넷째 아들을 낳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 생각이났습니다.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양해야 되겠구나 그래서 그 넷째 아들 이름을 유다라고 지었습니다.
유다 뜻이 뭐죠. 찬송했다.
여러분 이 레아의 이 태도가 우리하고 똑같죠. 그죠. 하나님 하나님 하다가 일이 이루어지고 나면 항상 그냥 내 중심으로 기뻐하죠.
내가 하나님께 기도해도 그 중심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결국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상황이 다 종료된 뒤에야 우리가 중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데 지금 레아가 그 모양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낫습니다.
4년 만에 이렇게 되돌아 갔으니까 중요한 사실은 넷째 아이를 낳고 나서 레아가 비로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아 하나님께서 이렇게 모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 일방적인 하나님의 사랑이구나 알고 하나님을 찬양하리라고 유다라고 지었는데
레아가 낳은 자식들 가운데에 그리고 남편이 낳은 아들 12명 가운데에 메시아가 바로 그 유다의 족보를 통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에게 큰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아들이 있는데 내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이라고 믿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 자식을 통해서 메시아를 이 땅에 오게 하시는 당신의 역사를 이루시더라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 속에서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를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신다 그말이어요
내가 어떤 상황을 당하든 내가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무슨 의미가 됩니까?
괴로운 상황이든 슬픈 상황이든 어려운 상황이든 기쁜 상황이든 내가 오직 여호와만을 찬양한다고 하는 것은 내 눈 앞에 주어진 이 모든 상황이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는 상황임을 믿는 사람이라는 뜻이거든요.
바꾸어 말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이 아비멜렉을 찾아가서 자기 목숨을 의탁하려고 했다가 오히려 거기에서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침을 질질 흘리면서 미친 짓거리하고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나오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와서 지은 시가 시편 34편인데 우리가 잘 아는 시지 않습니까?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 구절만 떼놓고 보면 다윗이 왕궁에 비단옷 입고 주지 육림에 빠져서 하는 고백 같습니다.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런데 지금 방금 침 질질 흐리고 미친 짓거리하고 나와서 좋은 것이라고는 현실적으로 세속적으로 좋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라고 고백할 수 있었는가 하나님께서는 그 상황 속에서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기 자신을 새롭게 빚어 가시면서 당신과의 뜻을 이루심을 알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 속에서든 내게 줄로 제어 준 구역은 실로 아름답다고 하나님께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살아간다고 할 때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모든 것이 내 뜻대로만 이루어진다고 하면 우리는 머지않아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교만한 사람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만 사망의 음침만 골짜기를 갈 수 있습니다. 인생의 폭풍기를 거칠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이 시리고 아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이 한치의 오차도 없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주시는 상황임을 알고 내가 찬양하는 사람이 될 때 여호와를 찬양하는 그 유다를 통해서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시듯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기를 작정하신 뜻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아름답게 결실이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윗이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줄로 채워 주신 구역은 참 아름다운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기업이 실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그렇게 고백한 다윗의 인생이 세속적으로 볼 때 늘 따뜻한 봄볕 봄볕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괴로운 순간도 있었고 시련기도 있었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상황이 한치의 오차도 없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주시는 은혜의 상황임을 그는 믿고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통해 이루시려던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졌고 그는 지금까지도 우리 믿음의 표상이 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선하거나 도덕적인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섭리하심으로 하란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계획과는 달리 삼촌에게 사기극을 당하고 또 다시 7년 동안 무임금 노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야곱을 우리가 아는 야곱으로 바로 세워 주시려는 하나님의 은총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주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갈 때 우리가 원치 않는 상황을 맞이할 때가 내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할지라도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숙한 믿음을 갖게 도와주옵소서
그 상황 역시 나를 위하여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상황임을 알고 걸어가야 될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게 하심으로 우리를 통해 이루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 민족의 역사 속에 아름답게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의 삶으로 확인하고 주님을 더욱 찬양하는 이 시대의 유다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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