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글은 풍기초등 62회
박춘산씨가 지난 2004년 10월경부터 풍기초등 62회 홈페이지에
30회에 걸처"70년대 풍기거리"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우리들의 학창시절 고향이야기 입니다
누구나 이글을 읽으면 아련히 생가나는 고향의 그때 그시절 모습이며
아 !그랬었지맞어!! 거기야 거기하고 공감하실 줄 압니다
박춘산씨의 허락을 득하고 재편집하여 연재합니다
함께 추억속으로 들어가 그 시절 동심속에서 가슴뭉클한 순간 찾아
행복한 시간 되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때 그시절 1
먼지가 푸석푸석
흩날리는 풍기역 소화물 쪽에는 늘 통나무들이 많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객화차가 정차하여 물건 및 자재들을 상하차 하는 곳이 있다.
여러명에 사람들이 열심히 리어카에 연탄(석탄)을 만들재료를 실고 나르고 있었다.
그중에 나도 일원이 되어 아버님 리어카를 밀어주는 역활을 했다.
소화물입구를 나서면 가파른 언덕길이 시작되므로 온힘을 다해서
뒤로 당겨 주어야 가속도를 막을 수가 있었다.
그 언덕을 내려올 즈음에 방앗간(정미소)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거위 한쌍이 그것도 아주크고 무서운 거위가 살았었다
조금더 내려올즘에 나타나는 골목길은 ㄴ자로 인조를 짜는 공장들이
두어개 있었는데 철커덕 철커덕 거리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온다
이 소리는 풍기를 풍요롭게 하는 황금벨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으며 울퉁불퉁 골목길을 벗어나면
이북이 고향이신 차씨아저씨 네 담배가게가 있다
그곳을 30여미터 지나 오른쪽에 연탄공장으로
아버지와 나는 있는힘을 다하여 리어카를 움직여 야적장에 적탄을 하였다.
바람이 평소에도 좀 강하게 부는 날이면 온통 석탄가루가
얼굴이며 온몸에 까맣게 뭍었다.
몇번이고 반복해서 하치장 에서 연탄공장을 오가며 다른
리어카를 만나면 힘든 서로를 위해 위로에 인사를 잊지
않는 정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었었다.
풍기역 앞은 어수선하고 양쪽엔 판자로 지은 집들이 여러채 있었는데
막걸리며 국수를 파는 집.여인숙.구멍가게.그렇게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다.
비포장 으로 된 큰길엔 어느 사이 석탄으로 검게되었다
이제 곧 역앞에는 청과시장이 크게들어 설 것이라며
사람들은 술렁이며 사람들은 기대반 의심반 으로 얘기들을
나누며 일부 노점을 하는 아주머니는 막걸리 잔을 든채 걱정을 하시기도 하셨다.
어린 나는 무슨 일 인지 몰라도 어른들 말씀중에 역앞
언덕이 낮아지고 도로도 정비가 된다는 소리만 들려왔다.
아!
이제 멀지않아 연탄을 나르기가 수월해져 아버지가 편해
지시겠구나 하고 내심 기뻐했다.
학교를 가는 길은 늘 볼꺼리가 많았다.
즐비하게 늘어놓은 멍석위에 쌀.콩.조.찹쌀.수수쌀.등
온통 곡식을파는 쌀전을 지나서 모퉁이를 돌면 옷을파는
점포들 조금 걸으면 찐빵을 파는점포 여기서 찐빵집 얘기를 빠트릴수가 없다.
나에겐 2살위에 형이 있었다.
그형은 늘 찐빵을 실컷 먹어보았씀 하는게 그땐 소원이었다.
찐빵집 아들과 한반이었는데 운동회가 되면 늘찐빵집은 잔치다.
왜냐하면 그집 아이두명은 거의 한번도 걸르지 않고 학년대표 릴래이선수였었다.
형 과나는 달리기 를 잘못하는게 밀가루로된 팥이든 찐빵을 못 먹었기 때문이였다.
학생사 (문구점)엔 나와 같은 또래에 여자아이 종숙이네 집이었고
조금지나치면 그릇을파는집 철물을 파는집
그리고 돌아가는 삼각지가 있는 사거리가 있다.
그곳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거리다.
늘 아버지께서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곳을 나는 늘 달음밖질쳐서 우리문구사 골모길로 접어 들곤했다.
골목길엔 섹시(기생)집이 하나있는데 나는 그곳이 궁금하여 항상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걸어갔다.
조금 더가면 면사무소가 나온다.
면사무소는 1.2.3.4학년 까지는 곧잘 들리는 중간 기착지이다.
그곳에는 500년 된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둘레는 5메타정도
이고 돌로된 말이 있기때문에 쉬어가기는 정말 좋은 곳이었다.
가을이면 빼곡히 은행이 아주 많이 여는 보물이었다.
또한 노오란 아주 예쁜 잎은 책갈피에 꽂아 말리곤 했다.
학교를 눈앞에 두고 재잘재잘 떠들다보면 담넘어 하교에서
땡.땡.땡. 시작종이 울려야만 담을넘어 운동장을뛰어서 교실로 갔다.
첫교시종
나는 공부는 중간정도 장난은 일등이 었다.
항상 쾌활.명랑.하며 모든일에 열성이었다.
신장발육도 상당히 양호해서 항상 뒤에서고 교실책상 제일뒤에 앉았었다.
교실옆 복도는 굉장히 미끄러워서 미끄럼을 타기가 아주 좋았다.
양초를 칠하고 헝겁으로 광내기를 했기때문에 좋은 놀이터 였다.
한시간이 지나면 어느학교든 마찬가지로 휴식시간이 있다.
그시간이 되면 운동장 선착순 하듯이 학생들이 달려나와
고무줄놀이.술래잡기.말타기.소타기.싸우는아이들.난장판이었다.
교정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어야 겠다.
학교가 끝나고 학교앞을 기웃 거리기 일쑤였다.학원사(문구점)
하고소방서 오종탑근처에 가방을 내팽개치고
(오종이란:12시와24시에울려주는싸이렌소리.
그때는시계가 귀하던시절이었기때문에
시간을 알려주던 유일한겄이었씀.)
이것저것 구경만 하는데도 오래 걸렸다.
실증이날 때즘 가방을 챙겨서 제재소 큰길을 따라 영생당약국을 지나
우체국에 들르고 풍기 삼화택시사무실을 지나 영남사 에서 무엇인지도 모르는
물건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래도 풍기에선 십자거리
이곳이 가장 발달된 곳이었다.
그곳에는 중국사람(화교)이 운영하는 31번집도 있고
꽤 고급옷가게도 있고 특히 색시집도 많았다.
그리고 외곽으로 통하는 교통에 중심지여서 풍기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서울에 비 하면 명동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도로도 비포장 이었어도 반지르르했다.
울퉁불퉁한곳이 거의없이 제일 좋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