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의 사체 기증
이원우(예비역 일반 하사/ 63.3. 21 입대-67.9.9 제대/ 26사단 부관참모부 모필병 근무/ 제대 후 경남과 부산에서 교사 교감 교장으로 근무/ 11. 5. 5 용인으로 이주, 이후 26사단 홍보대사 및 안보 강사/ 06년 9월 27일 장기 및 사체 기증 서약/ 등록 번호 253303호)
군, 26사단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다. 여든이 가까운 나이에 거짓말할 배짱도 없으니, 이 고백은 영락없는 진실이다. 하루에 몇 번씩이나 26사단 쪽을 바라본다. 실로 만감이 교차한다. 그리고 흠뻑 행복감에 젖을밖에. 다른 잡다한 정서가 파고들 틈을 26사단이 허락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제대 후 반세기를 살아 있다는 게 기적이다. 그만큼 나는 건강이 안 좋았었다는 전제를 깔고 이야기하자. 그런데 이겨낸 것이다. 이제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걸 떳떳이 밝힌들 누가 내게 손가락질하랴. 오죽하면 다시 한 번 다짐을 받으려 한마음한몸운동본부에 올라가려고 이렇게 결심하고 있을까?
내가 딱 십 년 전에 사체나 장기 기증을 한다고 약속한 곳이다. 명동성당 지하에 가면 된다니, 상대가 신부든 의사든, 딱 버티고 마주앉아 묻고 호소하리라. 내가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운을 떼고, 그동안 때로 오매불망 오히려 죽기를 기다려왔노라고. 하니 죽거든 사체는 반드시 가톨릭의대에 해부용으로 특별히 보내 달라는 부탁을 한다. 십 년 전 서약서를 작성할 때부터 두려움은 없었음도 덧붙인다. 나 딴은 제법 그럴싸한 일을 했다는 자긍심에 취해 했었는데, 아직도 문자 하나 안 보내 주는 한마음한몸운동본부에 질책도 퍼부어야지.
그들로부터, 마침내 불구덩이에 드러누워 누워 뜨거움이 아니라 따뜻함을 느끼게 도와주겠다는 확약을 받아야 한다. 당연히 나 같은 위인의 장례를 어떻게 치르는지 자세히 알아볼 결심임은 두말하나마나. 여러 군데 알아봤으나, 두루뭉술한 해석이라 답답했었다. 이참에 확실한 정답을 얻을 테니, 바야흐로 내가 신이 나는 게 뭐 이상하나? 사람 그렇게 얕잡아(?) 보지 말라고 항변하련다.
하사 모자를 쓰고 가련다. 3월 25일에 말이다. 반세기 전 내가 입대하던 날이다. 중언부언하지만, 저간의 사정을 잘 설명하고, 왜 내가 기어이 사체를 기증해야 하는지 당위성을 강력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면담이 끝나면 그길로 나는 26사단 사령부로 올라간다. 서울 역까지 나와서 양주행 지하철을 타면 된다. 군악대장(허수진 대위) 실에서 <성경> 두서너 쪽을 필사하고('시편') 병사들과 환담한다. 주임원사가 시간을 내주면 만나야 하고. 돌아 나오면서 불무리 성당에 들러야 하고말고. 그리고선 새로 사귄 김진* 백석 우체국장을 만나야 한다. 그의 조상이 3백 년 동안 터를 잡고 거기에 살았단다. 10대에 걸쳐. 나보다 몇 살 아래지만, 오랜 군 생활 한 예비역 영관 장교다. 근래 두어 달 차이로 전역한 행정부사단장 및 작전 부사단장에 대한 일화도 듣는다. 워낙 많이 드나들었던 터라 이미 깊이 사귄, 토박이 출신 택시 기사 둘과도 만나고말고. 그들과는 반세기 전에 사단 정훈참모로 근무했었던 박** 대위에 관한 미확인(?) 후일담도 들어야 하고말고.
이미 백석읍 방성리는 내 고향과 다름없다. 아니 고향보다 더 좋을 때가 있는 데가 그곳이다. 지난해 9월 4일 서울에서 콘서트를 열었을 때 30여 명 장병 앞에서 그렇게 고백한 바 있다. 오죽하면 내가 죽거들랑 유해 한 줌을 사단 근처 양지 바른 쪽에 뿌려 달라는 부탁을 다중(多衆)에게 했을까? 그러니 은근슬쩍 그 장소를 점찍어 놓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행여나 유쾌하지 못한 일을 왜 벌이려느냐고 항변할지 모르지만, 그런 것까지 걱정한다면 세상일과 부딪히기 어렵다. 다만 유해 한 줌인 것이다. 반세기 전에 가끔씩 나가 농사를 거들고 점심을 그렇게 맛있게 얻어먹던 그 그리운 논밭들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거기 한 뼘 만한 두렁에서 주도 새도 모르게 해치우면 된다. 참, 콘서트 당일 어느 제자가 말했지. 모부대 근처 유해 한 줌에 가슴이 찡했다고.
어쨌든 이상으로 나 자신의 장례 절차가 끝나고 나서 일어날 일들을 예견해 보았다. 내 자식(딸 내이)은 그걸 엄중한 유언으로 받아 들여 그대로 실천해 주리라 믿는다. 여기서 잠깐! 유해의 나머지(대부분)은 안성 유토피아 추모관으로 가게 된다. 아내와 함께 들어갈 자리도 보아 두었고(혈육 곁이다) 내 장모님도 거기 누워 계신다. 내 친구 박상규도, 세계적인 가수 신해철 교우도, 왕년의 액션 스타 장동휘도 거기 있다. 거기서 우린 어깨동무를 하리라.
다시 20일 뒤인 3월 25일 오후 시정에 대한 설명이다. 늦게 부대 앞에서 버스를 탄다. 그래 봤자 다섯 시쯤이리라. 그리고 역순으로 환승해 가면서 귀가한다. 그 옛날 101보충대 자리를 찾아봐야 한다. 내가 3월 25일 입대하며 9월 9일 제대할 때까지, 눈 어두우신 엄마는 줄곧 나와 함께 계셨다. 창원에서 훈련을 마치고 영천 부관학교를 거쳐 101보충대에 머물렀다가, 26사단에 전입했으니, 엄마와의 추억은 아직도 내게 군데군데 아름답게 남아 있다.
당신의 못난 막내가 아직은 철이 덜 들었지만, 늦게나마 가톨릭 신자가 되어 죽어 남길 것은 없고 주검(사체)나마 주님께 바친다니 행여 장하다 하실지 아나?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일본은 의과 대학생 2-3명 당 사체 한 구가 배당된다는데, 우리는 10명 안팎이라니 부끄럽다. 다른 건 모르지만, 일본을 제치는 문화의 한 단면에 내가 감히 앞장서 본다. 기분이 좋다. 노병이 사라지면서 할 일이 있으니까. 지금 군모를 쓰고 있다.
14장
첫댓글 노병의 사체 기증 !!
참 훌륭한 글 잘보고 감니다
좋은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