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후반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선험적 범주(a priori)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여기서 선험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어떤 것에 관해 사고하기 전에 이미 있는 것으로서의 바탕을 말한다. 시의 쓰여진 이전에 어떤 사유성이 시를 탄생하게 한다면, 시적 사유 역시 이 선험적 범주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언어체로서의 시 역시 하나의 미학 장르이기 이전에 사유물이다. 다시 말해 시·공간이라고 하는 선험적 좌표가 이미 시적 사유와 시 텍스트의 근저에 자리 잡고 있다. 더 과감하게 말하자면 시·공간이라는 선험적 범주들이 시 자체를 가능케 하고 생성시킨다고도 말할 수 있다.
감각하고 사고하는 인간으로서의 인식주관- 시인은 시공간의 범주 속에서 사유하고 그것을 시라는 형식으로 제작 표출한다. 시라는 향식을 통해서 자기 사유를 수행하고 시적 사유의 결과로서 시를 제출하 는 것이다. 물론 이때 시적 사유와 시라는 형식적 장치를 완전히 별개로 간주할 수는 없다. 주지하다시피 시적 사유와 시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시적 사유가 먼저 이루어지는 경우가 일반적이라지만 시라는 특정언어체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시적 사유는 더욱 깊이와 완성도를 얻기도 한다. 사유가 시를 만들기도 하지만 시가 사유를 촉성시키기도 하는 것이 다. 물론 근본적으로 이 두 과정은 상호 동시적으로 맞물린다. 이처럼 시 텍스트 안에서 시적 사유는 시·공간의 좌표들을 따라 사유하며 그 과정은 시 텍스트 속에 전경화 되기도 하고, 때론 BGM처럼, 어떤 경우는 흔적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시와 시적 사유 그리고 시 공간에 대한 이런 밑그림을 가지고 다음의 시들을 읽어보도록 하자. 시·공간과 시적 사유 그리고 시작품들은 어떠한 관계들을 가질 수 있고, 또 갖고 있는가.
2. 공간의 시간화
김동헌의 <반송터널에서 길을 잃다>에서 기억이라는 회상행위는 공간적 촉발 속에서 일어나며, 기억이라는 사유는 시간 속으로 과거 존재를 현재로 불러온다. 특정한 공간과 장소에서 어떤 사물을 재발견했을 때, 혹은 후각이나 미각 등을 해 과거를 떠올리게 되는 상황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기억들은 너무도 강렬하고 애절할 때가 많은데, 그것은 단지 파토스의 강도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비의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감각이 기억과 사유 진리 찾기를 촉발시키는 문제를 다룬 것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일 것이며 시 뿐만 아니라 무수한 문학작품이 의지하는 재기억의 모티프에 해당한다. 그러한 상기 존재의 확실성을 뒤흔들어 버릴 만큼 강렬한 것이기도 하다. 과거를 다시 만나는 지각의 혼란 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세계를 발견하게 되고 망자와도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의식하는 주체가 한켠에 오롯이 있는 한 그런 대화는 독백적인 말 건넴이지, 되돌아오는 완성된 대화 형식을 충족하지 못한다. 이 시는 공간으로부터 시작하여 과거로 이행하며 과거 존재를 만나며 그러한 상상을 가능케 하는 특정한 상태(시공간)를 창조하는 것이다.
3. 시간의 공간화
시·공간의 선험적 범주로부터 시적 사유를 감행하는 것은 신채린의 경우도 비슷한데 김동헌이 공간을 시간화한다면, 신채린은 시간을 공간화한다. 김동헌의 시가 구체적인 장소성과 감각으로부터 출발한다면, 신채린의 공간은 훨씬 추상적이다. 신채린의 공간은 슬픔이 자라는 방에서처럼 일단 '방'으로 제시된다.
신채린이 이 시에서 제시하는 것은 결국 과거의 경험은, 즉 시간을 공간화해서 제시하는 것이다. 물론 이때 과거의 경험은 주관적으로 은유화되어 진술된다.
4. 시·공간의 주관화
조성심의 시<폭설>에는 앞의 두 시인들만큼 분명한 시공간성은 나타나 있지 않다. 물론 시적 진술 자체가 지속으로서의 시간 속에서만 가능한 행위이며, 언표 속에는 반드시 어떤 식으로는 사유의 밑그림으로서의 공간성이 지시되기 마련이긴 하지만, 조성심의 경우는 시공간의식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시인의 시작법이 주관화의 방법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며, 시적주제라는 주관의 프리즘을 통과한 사물들만이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앞의 두 시인들도 물론 시 • 공간을 주관하고 있지만 조성심은 주관화의 경험이 더욱 두드러진다.
시란 본디 즉각적 소통을 방해하고 지연시키며 우회하는 장르라는것에 대해 많은 이들이 보편적으로 합의하고 있다. 이 추상적 주관화의 경향을 밀어붙이면 어떻게 될까. 이런 주관성은 시의 경우 명상이나 통찰의 회로를 따르기 십상이다. 그것은 내면세계로의 침잠이다. 그것의 다른 이름은 사유이다. 시는 주관적 진실을 통찰하려는 속으로 나아간다. '세계의 자아화'라는 시장르의 전형적 패턴을 심도있게 진행한다.
그 속에서 시간과 공간은 뒤엉켜 독특한 시공간의 배치들을 만들어낸다. 달리의 그림 속에서 우리가 허물이 내리는 시계들과 기괴한 사물들이 놓인 독특한 공간을 발견하듯이 말이다. 이렇게 창조된 시·공간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것은 비록 주관적이지만 시인을 비롯한 예술가들에게 우리는 그러한 독특한 자신만의 시 · 공간을 창조해 즐 것을 기대한다. 조성심의 시는 시.공간이라는 범주를 주관화시켜 그것을 추상화의 형태로 우리 앞에 제시한다.
5. 세 겹의 시간과 시공불연속체로서의 시
이처럼 주관화된 시간의식이야말로 예술장르가 포착하고 표현할 수 있는 유의미한 영역에는 분명하다. 이러한 시적 사유체 속에서 행해진 시간과 공간이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시·공간이 아님 또한 자명하다. 그것은 자연과학적 시간으로 포착할 수 없는 특수하고도 매우 신비한 작용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칸트 선생을 회부해야 한다. "칸트의 시간"은 자연과학적 시간을 의미한다. 그는 시간을 '수량'으로 보았고, 산술이나 수학의 기초가 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시간이 연속적 양이 될 때 그것은 얼마든지 분할 가능하게 된다. 그는 '시간의 동질성'을 통해 모든 시간은 동일한 것이라고 말한다. 칸트는 과거란 미래에 앞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칸트의 시간은 시에서 표현되는 주관화된 시간, 내면화된 시간을 포착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전혀 다른 시간관을 요청해야 한다.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존재하는 것은 오직 '현재' 뿐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과거는 이미 지나가고 없는 것이므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존재하는 것은 연장 없는 현재뿐이다. 이러한 시간은 외부적인 측정을 통해서는 포착할 수 없다. 주관적 견지에서 이미 지나간 과거와 또한 오지 않은 미래도 오직 우리들의 마음의 현재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리므로 과거, 현재, 미래의 세 가지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 '세 겹의 현재가 있을 뿐이다. 그것은 기억(meroria), 직관 (conttuitas), 기대(expectatis)라는 사유활동으로 불리운다. 사실상 이러한 시간의식은 우리들 마음속에서 이미 항상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시 속에서 이러한 시간들로 여행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 될 수 있다.
공간 역시 마찬가지다. 1) 경험주의자들은 공간이 우리의 지각과 상관없이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는 기하학적 공간을 주장하고 2) 지성주의자들은 공간을 우리의 지성적 사유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전자는 '공간화된 공간'이고 후자는 '공간화하는 공간'이다. 3) 하지만 메를로 퐁티는 공간이란 우리의 지각과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지성의 산물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우리 몸이 세상과 관계 맺고 있는 하나의 양태라고 제3의 공간론(현상학적 공간)을 도출한다.
시 안에서, 시를 통해서 공간들을 지각하고 사유하며 그런 공간들과 관계를 맺고 의미화하려는 노력들을 가능케 해주는 사유체로서의 시, 그 안에서 시인은 자신을 둘러싼 새로운 공간들과 관계를 맺는다.
언어 속에서 창조되는 시공 불연속체. 나는 그것을 이 자리에서 시라고 부른다. 시공불연속체로서의 시 안에서 불가능은 없다. 그 속에서 우리는 무한의 시간을 가지며 불가능을 모르는 마법의 세계에 머물 수 있다. 물론 시라는 담론체 안에서 뿐이지만 그것은 어쩌면 다른 시·공간의 실제적 가능성들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주관적 시·공간'이라고 부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