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안 되고
사랑의 고백 더욱 안 된다면서
긴 세월 살고 나서
사랑 된다 사랑의 고백 무한정 된다는
이즈음에 이르렀다
사막의 밤의 행군처럼
길게 줄지어 걸어가는 사람들
그 이슬 같은 희망이
내 가슴 에이는구나
사랑 된다
많이 사랑하고 자주 고백하는 일
된다 다 된다
- 김남조, <사랑,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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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여행을 마무리하고 돌아왔습니다. 허락된 3박 4일의 시간은 그야말로 선물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그저 좋은 것 구경하고, 맛있는 것 먹어서가 아닙니다. 건조하게 입으로 숱하게 말하던 사랑을 가슴으로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기회가 아니었으면 영영 남남으로 살았을,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장애인 가족 9가정이 운명처럼 만나 매일 얼굴 마주하고 이야기했던 보물 같은 시간들 때문입니다. 처지는 다 달랐으나 가족의 소중함을 잃지 않고 나름의 방식대로 꿋꿋이 살고 있는 장애인 가족들의 이야기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짓누르는 삶의 무게로 얼굴엔 어쩔 수 없는 그늘이 살짝 엿보이도 했지만, 그들은 삶의 의지와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고, 내내 보름달처럼 환한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서로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 달라 하기 보다는 오히려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눈과 귀를 대문만큼 크게 열어놓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각 가정의 사연을 들어보면 ‘아, 그동안 어떻게 버텨왔을까? 앞으로 또 어떻게 버티며 살아낼까?’ 걱정이 앞선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장애는 가족들을 더욱 단단한 사랑의 끈으로 묶어낸 재료가 되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장애인 가족들은 많이 힘듭니다.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지쳐있습니다. 그 가족들이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외로움을 느낄 때에는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만큼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위에 함께 의지할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경험할 때에는 같은 삶이라도 감당할만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곁이 되어준다는 건 이렇듯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위로와 힘이 되는 겁니다. 특히 같은 고민을 안고 있는 이들이 서로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우리 힘내요’ 하고 건네는 한 마디는 삶의 용기를 북돋아 주는 소중한 힘이 되지요. 이번 여행에서 제가 가장 많이 한 말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인가요? 이야기 들어 주고, 자주 눈맞춤 하고, 있는 그대로 긍정해주고, 자주 웃어주고, 자주 사랑한다 고백하고... 그게 그리 쉬운 일이냐구요? 삶에 너무 찌들어있게 되면 이 단순한 행위들이 바위만큼 무거운 것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하지만 이런 소소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사랑을 완성할 길이 없는걸요. 삶을 살아낼 방도가 없는걸요.
지난 10월 10일 향년 96세를 일기로 작고하신 사랑의 시인 고(故) 김남조 선생님은 평생 그토록 노래했던 사랑에 대해 인생의 말년에 이렇게 정리를 하셨네요.
“사랑 안 되고
사랑의 고백 더욱 안 된다면서
긴 세월 살고 나서
사랑 된다 사랑의 고백 무한정 된다는
즈음에 이르렀다”
인생을 깊게 경험한 인생 선배님은 “많이 사랑하고 자주 고백하는 일 / 된다 다 된다”고 말씀하고 계시네요. 포기하지 마시길요. 사랑하는 일, 살아내는 일 됩니다. 다 됩니다. 지금 함께 했던 한 분 한 분의 얼굴이 떠오르네요. <2023. 1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