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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성 이야기..............
<최 용 성이 죽었대?>
< 용성 이가 죽었대!>
<어디서.......>
<아이 어쩌자고, >
<젊은 나이인데,... 이구 , 참 불쌍하다->
<왜 그랬는데...무슨 이유로 죽는 거야.>
<오토바이 타고 가다 자동차에 치어서 죽었다네,,,,>
아 - 글쎄 숱한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입으로 입으로... 사이로 사이
로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는 최용성 은 죽었구나 라고 이제는 머리에서 최용
성 이라는 글씨를 지워야하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여 저의 죽음
은 이렇게 시작되어져 갔습니다.
죽음이 저를 향하여 진행하여 오고 있었습니다.
1990년 봄이 한창 물들어 가고있는 4월의 어느 날 오토바이를 타
고 아직은 쌀쌀한 공기를 가르며 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친구의 일을 도와주고 나서 어디만큼을 지났을 무렵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하늘을 향하여 커다란 원을 그리며 치솟아 오르게되어 아
무것도 생각지 못하는 그 어느곳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게되어
한참 진행되어져 가고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는체 나의 육신의 고
깃덩어리는 줄 곳 내가 느끼지 못하는 곳으로 어떠한 대책도 어떻
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가고 있었습니다.
얼만 큼---- 얼만 큼 끊어졌는지 모릅니다.
인생의 긴 테잎이---
어느 사람은 많은 것이 생각나더라고 들었지만 그 오랜 시간에 나
는 아무것도 생각지 못하였고 말로만 듣던 교통사고가 나에게도
왔습니다.
아주 기막힌 전야제도 없이 순간적으로 그곳에 빠져 버렸습니다.
따르릉- 따르릉--
<여보세요. 거기 최용성 씨 댁 맞습니까?>< 예 . 그런데요>.
가끔 T.V.에서 보았던 통화 내용이 저의 아내 권 집사에게도 T.V.
처럼 전화가 왔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여기는 예수병원 응급실인데요->
<예-에>
<최용성 씨께서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 응급실에 있습니다. 빨리
와 보시죠!>
<예--- >
흔히들 이쯤 되면 말을 잊지 못하더군요. 역시 권 집사도 말을 잃
어버리고 그대로 아무 차림 못하고 집을 나와서 ,
< 무슨 일이-- 아무 것도 아닐 꺼야- 그냥 누가 장난 해본 것 일 꺼
야!>
이러한 말들을 되 뇌이면서
<왜 이렇게 택시는 오지 않는 거야, >
한참 후에야 기다리던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갈 수 있었습니다. 택시
안에서 '죽으면 어떻게 하지. 아니 죽지 않아도 불구가 되면 어떻
게 하지, 아냐 ,,방정맞은 소리,, 조금만 다쳤을 거야,,며칠 치료하
면 아무런 일없이 될 거야,,,,,,,'
집에서 병원까지 채 3km도 안 되는 거리가 30km를 온 것만큼 시
간이 흘렀는데도 왜이리 도착되지 않는 것일까.
빨리 가보아야 하겠는데 [응급실] 빨간 글씨가 제법 위급하게 느
껴지게 써놓은 글씨가 왜 그렇게 싫었는지,,,, 응급실 문을 들어가
고 있는데도 발이 떨어지지 않아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들어가고
있는데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하얀 안개 같은 것들이 아롱지며
한쪽 구석 침대 위에 마치 고기 잡아 놓은 것처럼 피가 흔건히 적
셔있는 최용성을 보는 순간 서 있을 수 없을 만큼의 다리의 힘이
쭈욱 빠지고 아무런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이.....
콧물만이........ 흐름을 주체 할 수도 없고 부끄러움도 모든 것을
잃었단다.
<기-원-이- 아-빠--->
< 기원이 아빠- 기원이 아빠 대답 좀 해봐,>
<대답 좀 해봐,, 말 할 수 있으면 말해봐 말 좀 해
봐,'>
죽어버린 사람에게 그랬답니다 대답해보라고,,
찢겨지고 피로 범벅되어
피비린내가 가득한 병원의 구석에서 한 여인의 울부짖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쯪-쯪 , 아직 젊구먼- 교통사고래- 차하고 차가 그랬댜?>
<- 아니- 오토바이 타고 가는데 승용차가 뒤에서 받았다나 봐,>,
< 어쩔까-잉, 아직 애들도 어릴텐데, 그 놈의 차들을 모두 없애 버
려야지-웬 '>
주변의 환자들의 보호자들이... 병 문안 온 사람들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소리였습니다. 감히 애절히 부르짖는 젊은 여인에게는 말
을 하지 못하고,,,
그렇지 어떻게 위로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세상의 어떤 말로 위로
할 수가-.
어떤 언어도 지금의 그에게는 들리지 않으리라.
병원의 의사들도 내방 쳐 둔 채 상태로 보아 살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여서 인지, 그래서 최용성의 죽음은 더욱더 깊은 데로 빠져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 - 알려야지 전화자판이 평소에는 잘 보였었는데 어디에 있
는지 찾아 찾아서 제일 먼저 생각나는 박현이네-
무섭다- 무섭다, 사람이 아니다!
생명이 없어, 가까스로 전화 번호를 누른 후에
<'현아 기원이 아빠가 죽었나봐, 말을 안 해'>
< '뭐'다시 말해봐 '>
< 기원이 아빠가 교통사고로 죽었나봐'>
그리고 끊어 버렸다, 끊어진 전화를 붙들고
<' 어디야 어디 병원이냐 구'> 무슨 대답이 있겠습니까?
<' 어찌 해야하나'> 나도 알려야지!>
< 야- 은자네 신랑이 교통사고로 죽었대, >
<누가? 최용성이 죽었대!>
< 최용성이 죽어->
그렇게 전하여간 것이 나 아는 사람에게는 모두 모두 알게 되어
졌습니다.
<' 하나님 어떻게 해요. 하나님 이제 어떻게 해요'>
나를 자동차로 치었던 그 가해자는 지금 10년이란 세월이 지났지
만,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임낙용,,,,,,
전북대 교수라는 이외에 그를 찿아 보려 노력도 하지 않았고 찿으
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보험회사의 직원이 '
<보험 들으셨어요'>
<예 종합 보험 들었지요' 그래요 그럼 염려하실 필요 없어요, 보험
회사에서 다 할텐데 무슨 걱정을....보험으로 한다고 하세요.>
<그리고 와 볼 필요도 없어요 이제 가세요.
보험 접부 해 놓으세요.>
< 예>
그것이 그 가해자의 끝이었습니다 보일 필요가 없다. 피해자를 보
면 서로 격해지니까 보이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발을 동동 구르며 하나님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해요 라고 말 뿐 아
무런 생각없이 시간만 흘러갔습니다.
형제나, 남매나 누구한테든 연락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
다.
누구- 척- 생각나서 전화를 해 도와줄 수 있고 일 처리를 해주면,
아니 옆에만 있었더라도 조금이라도 덜 떨렸을 것입니다.
역시 하나님만이...............
하나님만이 내 옆에 계신다는 것을 인식 할 수밖에 없었고 식구들
이 가까운 곳에 많이 있었으면 좋겠구나, 가족들의 소중함을 느끼
게 되었답니다.
과연 무엇 때문에 이렇게 헤 메이고 있어야만 하는가.
그러던중 시간은 흘러갔습니다.
눈을 감고 의식이 없는 채로 점점 죽음으로 달려가는 남편을 보
며..........
친구들-
아는 사람들..........
<아니 ,어느 병원이야,....>
<어디에 시체가 있는 거야.......>
이 병원 저 병원, 떼거지로 몰려다니며 아니라 하면 다른 병원으
로 전전긍긍하다가.
하나씩.......둘씩........
병원의 응급실로 들어오고
<아니- 어찌 된 일이야....... -야..........용성아->
그렇게 내방쳐 둔 채 시간이 얼만 큼 흐르고 나서야 의사들의 응급
처치가 되어지고....... 또..............얼만큼의 시간이 흐른 후에
야...
<' 아프다.......나-아프단 말야.>
<화장실 갈 거야.....소변이 마렵다......>
내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그 소리를 듣고 주위 사람들이 그랬답니
다' 살았다' 라고 이제 살았다고 의식과 함께 생명의 움직임이 주
어졌다고 그래서 한시름의 마음을 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산것만 걱정이었고 그 다음은 사람의 욕심이 그 다음
을 바라게되어 혹시 병신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사람의 욕심
이 끝 없슴을 그 순간에도 느껴지게 되어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조금 전까지도 아무 일 없었다고 한 이가 이렇게 되었으니,
정말 사람이란 몇 분 후를 견제 할 수 없으며 알 수 없다는 것을 더
욱더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 몸도 가눌 수 없으면서 화장실을 가야한다고 소변기에 받아
내려 하였으나 추접스럽게 어떻게 그러느냐고 .....
나는 할 수 있다고 하여 몸이 퍼져버린 나를 일으켜 화장실을 가다
가 몇 번이고 쓰러지고 나서야 갔다오곤 하였답니다.
80KG이 다되는 거구의 몸집이 공중으로 7-8미터가 떠 올랐다가
아무런 방비 없이 떨어졌으니...........
어떻게 되었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도저히 살아 남을 가능성은 1%
도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일단 한시름 놓게되니 두 고온 아이들이 어떻게되었는지 궁금하게
되었고,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며 무서운 밤이 쉬 지나가기를 기도하
며 그 날밤을 뜬눈으로 지 새우고 다음날의 태양은 떠오르지 않을
줄 알았는데.
어김없이 동쪽 하늘에서 태양이 떠 오르더랍니다.
태양이 깨져 버릴 것 같은 밤이었는데.
그 순간에도 최용성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무의식의 순간들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아무 것도 아닌 고깃덩어리였을 뿐이
었습니다.
아무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누워 있어서 그 당혹 감은 더 해
져만 가고
오늘의 해가 떠오르면 다 없는 것처럼 될 줄 알았는데........
해가 떠올라도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그냥 그 상태였었습니다.
밤이 새도록 화장실에 간다하여 몸을 부축 였더니 어깨가 빠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기만 했었습니다.
낮 무렵쯤 되어 보험회사 직원이 왔는데 가해자가 들었던 보험회
사의 직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처가 쪽 먼발치의 친척이어서
너무 반갑고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친척이 아니
라 회사의 직원일 뿐이고 우리를 더 힘들게만 했던 사람의 하나로
만 기억이 되는 회사의 이익을 조금이라도 많이 남기려 하는 충성
스런 사원일 뿐이었습니다
그가 말했다
' 여기 병원은 바쁘니까 서비스도 엉망이고 그러니까 개인 병원
으로 가서 치료하는 것이 훨씬 좋다 고 하여서 그를 믿고 아내는
개인 병원으로 가기로 하여 저녁쯤 효자정형외과라는 병원의 앰블
런스가 와서 나를 실고 가게되었습니다.
아무런 반항도.
아무런 내 의사도 관여 없이 그가 하자는 대로 우리에게 더욱 좋은
일이라 하여 개인병원 한 평 반되는 좁은 병실에 그의 육체는 침대
에 뉘어졌다.
1인용 철 침대 놓고 그사이에 옆으로 끼다시피 한사람 누울 정도
의 공간인 병실이었고.
마치 주인처럼 기어다니는 바퀴벌레의 환영을 받으면서 길고도 긴
1990년도의 병원 생활이 시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여러 가지 사진을 찍고 ...
드라큐라 처럼 피도 몇 대롱씩 빼고...........등등...........
그리고 침대에 누우면 아- 잊지 못할 12kg의 무게를 목에 띠를 메
어서 달고 있는 것............
어떻게 무겁고 아프던지 정신이 혼미해져서 이쪽과 저쪽을 왔다
갔다 하는 일이 있어지고 몰핀 같은 진통제를 주사하고........
물리치료...
몇 개씩 링거를 맞고......
이렇게 치료가 시작되어 졌습니다.
별의별 사람...
별의별 환자가 다 있는 병원...........
부러진 사람, 두들겨 맞은 사람 , 나처럼 교통사고 난사람, 아니 사
람이 아니라 환자이지.
목에 로봇처럼 깊스한 환자, 왕관처럼 생긴 것을 얹고 다니는 환
자. 링거 들고 다니는 환자. 등등........
수도 없었다. 그런 무리에 나도 속하게되었습니다.
흔히 나이롱 환자가 다 모여 있는 곳............
그러나 난 나이롱 환자가 못되었던 것이었지요.
왜냐면 항상 무거운 것을 달아 메고 누워 있어야만 되고 아팠기 때
문입니다.
어떤 이 들은 술 마시고, 밤에는 화투치고, 장난치고 병원에서만
볼 수 있는 풍속도들이 보였습니다.
그중 내 아내....
사람이 상상 할 수 없을 만큼의 적은 공간에서 밥해먹고 눕고 기민
이는 침대 밑으로 기어 들어가서 자고...................
큰애(기원)는 부안 할아버지 댁에 데려다 놓고 말로 할 수 없는 생
활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살아 있었으니깐.
그래서인지 큰애가 어느 정도 성장 할 때까지는 무섬을 타고 떨어
져 있을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래도 세월은 덧 없이 흘러 90년의 봄에서 그 잊을 수 없는 더웁
고 더웠던 여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해도 아프다.!
아무리 치료해도 아프다.!
원인이 없다.
병원에서도 최용성 포기........
M,R,I라는 고정밀의 사진을 찍어봅시다.
지금은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는 M,R,I이지만 그때에는 서울2대,
부산1대, 광주에1대 뿐이어서.
그럼 가까운 곳이 광주이니 거기로 가서 찍어 보자 하여 아픈 몸을
이끌고 아내와 ,아내 친구, 나 셋이서 버스를 타고 광주로 가서
택시를 타고 M,R,I가 있는 병원으로 이쪽 병원에서 써준 소견서를
가지고 도착하여.
4시간이 넘는 촬영이 마치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죽었는가봐.
조금 움직여서 다시 찍고 그러하니 시간이 오랠 수밖에.......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야.>
걱정 걱정 후 에야 몇 시간을 지나서야 나오게되고 판독하여 결과
를 본 결과 별로 나타난 것이 없다.
그렇게 심하게 아팠는데 별로 라고 판명이 났으니.............
그러나 나는 아팠다.
목이 아프고 손이 저리고...................
병원으로 돌아온 후에도
밤이고 낮이고 주사에 목을 견인하고 물리치료는 계속 이어졌으
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교회 집사님들도 주위의 사람들도 오고갔습니다 환자가 아닌 사람
이 말입니다.
나를 웃기려고 했고 기쁨을 주기 위해 많은 노력들을 했었습니다.
병원에서의 잊지 못할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고 나에게 모두가
소중한 분들이 많아지면서
4월..........5월...........6월.................7월..........................
정처없이 거침없이 시간은 잘도 잘도 지나갔습니다.
나이에' 흔'자가 들어간 때는 세월이 더 빨리 간다고 하든가........
.하여튼 내 나이도 설흔이고
'흔' 자 가들어서인지 아파도 세월은 빨리 흘러갔습니다.
바퀴벌레들의 기세는 더욱 더 당당해져 우리를 마치 그 방에서도
내어쫓을 듯 하였으나
최용성은 여전히 아프기만 하고
병원에서는 어떠한 병명을 가지고 치료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신경외과에 가 있어야 할 것이 정형외과에 있는 것이 아닐
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90년의 지독한 여름은 다가오고 있었습니
다.
29' ....30'... 32'........34'...........35'..........37'...........
온도계의 바늘은 끝이 없이 오르기만 할 때에 한 평 반의 병실에는
에어컨도 없이 찌기만 하였고 선풍기도 놓을 장소가 없어서 더욱
더하였습니다
방안 온도는 거의45'에 육박하는 날이 많은데 침대에 누워 12KG
의 무게로 목을 잡아 빼고 있으면 등 에 욕창이 생길 정도로 땀이
흐르며 끈적거려
정말 더운 날 이었고 그런 것이 바로 폭염 그것이었습니다.
아스팔트가 신발에 쩍쩍 달라 붙었었으니까.
시간이 아까웠다 .내가 누워있는 것이 너무도 시간이 아까워서 책
을 보지도 못하니까.
천장에다가 유안진의 글을 써서 부쳐놓고 읽기도 하며 외우기도
하고 성경 테이프를 듣고 해서 소중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소중히
쓰려고 노력을 하였고
간혹 원장과 사무장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낫지도 않은데 무엇 하려 병원에 있어 퇴원하지'>
그러나 나는 아픈데
병원에서 제일 오래 있는 사람으로서 부러운 것 딱 한가지 환자들
이 다 낳아서 퇴원하는 그들의 뒷모습이다.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
으면 무척 부럽고 나는 언제 저렇게 나가지.............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옆 병실에 퇴원하고 새 환자가 입원하게 되었습니
다.
초등학교 5학년 수민이....
다리가 골절되어 깊스를 하고 5주인가를 있어야 한다는 진단을 받
고 204호로 입원하고
나는 203호
서로 옆집 이웃 사촌이 된 것입니다
엄마는 전성교회 집사님, 기도 많이 하고, 구역 장이고........
대충 그러했고 가끔 한번씩 이야기하고
수민이에게 그림 이야기도 해주고 그러는 사이에 수민이네와 무척
가깝게 되어
수민이 엄마와 신앙 이야기도 하고 가정 이야기도 하고....
친근해져갔습니다.
병원에 오래있다 보니 기민이는 병원의 귀염둥이가 되고
그때 나이가 네 살이었든가.....
하여튼 병원의 생활은 웃기기도 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하는 나날
이 계속되었다.
남편에게 구타당하여 병원에 쉴 겸 도망 온 사람, 바람 피워서 부
인이 둘인 사람, 논에 가다 다친 사람, 장난하다 다친 사람, 밖에서
보지도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 병원이었습니
다.
정말 삶아버릴 정도의 더위에도 그 나름대로의 병을 고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대로 낳아서 나가고 나가고 그러는데 나는 나을 생각은커녕
병원에서도 포기를 해버린 상태가 되었으니 참으로 한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천 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되고 눈물을 흘리며 악을 써가며 대
답하지 않았던 일이 있어지게 되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수민이 어머님께서 나를 위해서
자기 기도 동지회 들이 모여 사흘을 철야하여 하나님께 기도 한
후에 최후의 통첩을 하려고 나에게 온 것이다.
그날도 여전히 12KG의 추를 목에 달고 누워 있는데 머리맡에 오셔
서 기도 한 후에
< 집사님 감히 여자가 말한다고 오해하지 마시고 들어주세요>
<다름이 아니오라 >
< 우리기도 동지회가 사흘을 철야 기도 한 후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들으시고 꼭 대답하여 주십시오.>
< 무슨 말씀이십니까?>
< 저의 말을 꼭 들으셔야합니다 그리고 대답하여 주셔야만 됩니
다!>
<하나님께서 집사님을 무척 사랑하십니다 .어느 사람보다도 더 사
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90년에 모두 정리하시고 91년도부터는 하나님 일 하
시랍니다.
그러니깐 대답하여 주세요>
나는 절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하지 않았습니다.
울면서 울면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대답하라하고 못한다고 하고 아마 태어나서 그렇게 울어보기는 처
음 인 듯 싶었습니다.
목에는 커다란 추를 달고 보통 때에는 독해서 눈물도 없는 최용성
이라 했는데 많이 울었습니다.
<지금 정리해서 신학을 하라구요!
머리도 공부 할 때가 있구요.
저는 안돼요 너무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안돼요, 절대 안돼요,>
대답해라, 못한다 실랑이를 몇 번이고 쳤으나 끝내 대답하지 못했
습니다.
집사님은 가시고 나는 정신이 혼미해져 안정을 취하여야만 되었습
니다.
-생각했습니다 -
지금까지의 일들을...........
무엇이든지 하려하면 제대로 되어진 일이 없었습니다
학원을 하여도...........
교사로 가는 일도.....
자꾸만 저의 앞길을 막는 것을 느꼈었는데........
내 지금까지 살아 온 길 가족들만 고생시키고 똑 떨어지게 답이 없
으니....
하나님께서 쓰시고저 하면 앞의 모든 것을 컷트 하여서 자기 일을
하시게 만든 다라는 것도 알고있고 항상 마음에 두고 살았었습니
다.
어릴 적 중학교 때 누님이 용성이는 목사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었는데
저는 미대에 가고 작품생활을 했었었는데.
항상 마음 구석에 담고 다녔었는데............
이제는 알지도 못하시는 분을 통해서 알게 하시는구나.
그러나 지금 ........
내가 어떻게 해. 말도 안돼.
그러한 날들이 고민 속에 지나가고 무의미한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에 가서 한번만 자고 오자.
집에도 몇 개월 동안 한번도 못 가봤으니까.
무척 가보고 싶었다.
아내와 합의한 후 목에는 가죽으로 된 깊스를 하고 저녁 때 쯤 나
와서 집으로 가니깐 참으로 좋았다.
아주 아주 시원했다.
안타까웠다 금붕어도 길러서 손바닥보다 더 컸었는데 모두 죽어
서 둥둥 떠있었다. 학원의 아이들도 모두다 없어졌다. 집안에 도
는 것은 곰팡이 냄새밖에 별로 살아있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
날밤 자고 나서 병원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꾀가 나서 가끔 집
에 와서 자고 가곤 했다. 그런데 집에 와서 몇 번 자고 나니 병원
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그냥 퇴원을 해버려? 아니야. 병원에 있
어도 낳지 않았는데..뭐...
아니야 교통 사고 나는 것은 말끔히 나아서 나와야지 그렇지 않으
면 평생 고생일 것이야.
다 나아서 퇴원해도 나중에 후유증이 있는 것인데... 모두다 완전
히 낳아서 나와야 한다.
주의사람 권집사 본인인 나.. 역시도 이런 생각이 들곤 하였다.
권집사 참으로 애썼다. 정말로 애썼다. 더 이상 있으면 그도 병이
날 것 같았다.
가을이 중간쯤 되어 있는 10월의 어느 날...
<'우리 그냥 퇴원하자'..><그러자..>병원에서도 대찬성...!!
원장에게 말했더니 잘했다는 것 이였다...그렇지만 몸이 아픈데...
다 낳지 않고...우리는 퇴원을 하기로 하고...햇살이 긴 통로를 비
추인 그날에...이불 봇다리 식기 봇다리들을 가지고 퇴원을 하였
다...
그때부터 나는 인간 로봇트가 되었다. 길을 건널 때나 누가 부를
때 돌아서거나 옆을 볼 때 온 몸이 다 같이 목과 함께 움직여야 하
였다.
근접해서 차가 와도 목을 움직이지 못하니깐 동작이 늦어질 수밖
에 없었다.
지금도 가끔씩 그런 모습을 하고 가는 사람을 볼 때에 그 생각이
나서 픽~~ 웃을때가 있다...
지금은 목에 대는 가죽 깁스에 구멍이 뚫려서 통풍이 되고, 공기도
들어가겠지만, 그때에는 사람들이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는지..없
었다.
더운 날에는 땀과 때가 밀리 정도로 답답했다. 나중에는 구멍도
내어 보았지만 별로 신통치 않았다. 그리고 집에 와서 생활을
게 되었다.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어쩌라는
말입니까?? 저는 배운 것이 그림밖에 없고 이제 신학을 하여 교역
자의 길을 걷는다는 것도 자신이 없습니다. 하나님 그런데 제가
어떻게 하나님 일을 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 알려주세요. 제가
무엇으로 하나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온같 죄악으로만 쌓여이
는 이것이 어찌 하나님 일을 할 수가 있습니까?> 낮에도 밤에도
끊임없이 작은 교회에서 울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무엇
을 해야 하냐구요?'> 기도하기를 시작 한 후 어느 쯤 에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네가 배운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되지 않느냐고.'>< 예......... 저는
그림밖에 배운 것이 없어요..그런데 그림가지고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요?>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림으로 그림으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것인가?
<아하!! 그래 성화을 그리자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서 사람들에게
보급하므로 그것을 보는 이로 예수에 사랑을 느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주님께 더 가까이 간다면 그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일이 어디
있겠나..>
<아하!! 이것이구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전까지는 전혀 생각하
지도 못했던 것이며, 꿈에도 생각을 해보지 않았던 일인데, 하나님
께서는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난 후 그렇게 후련할 수가
없었습니다. 답답했던 가슴이 후련했습니다. 목에 가죽 깁스을
한채 기도하여 땀이 온몸에 범벅이 되었는데도 그저 기쁘기만 했
다.
가벼운 발 걸음로 돌아왔다.
<'그래 이거야'> 하얀 캠퍼스 위에 붓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기 시
작하였다.
경제적인 형편에 캠퍼스를 사지 못하고, 나무를 사서 내가 만든 형
편이 없는 캠퍼스 각도 제도로 맞지 않는 캠퍼스 위에 열심히 그림
을 그려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림일 뿐 그려지지 않았다.
주님이 하신 일이나 행했던 일들을 그려보았습니다. 그것은 선배
들이 그렸던 것을 답습 할 뿐 이였고, 제대로 나의 그림이 되지 않
았다. 너무 쉽게 생각했다.
그리고 전혀 성화가 아니고 그냥 그림일 뿐이지 그것이 정말 영혼
을 울릴 수 있는 성화는 그리지 못했다. 고민하며 날을 세워도,
그러나 해답은 없었다. 다시 교회 바닥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성화 그리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안 되는 것은
무슨 이유 인지요?> 사회의 그림은 자신 있습니다. 그것도 자신
이 없다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때가 있지만 그것은 그래도 표현 할
수 있을 때 표현이 가능하였었는데. 하나님께서 허락 하신 것 이라
면 잘 될것인데 왜 되지 않는 것 입까?' 그렇게 기도하길 수 시간
이 지나고 '네 맘대로 그릴려고 하느냐? 성화라는 것은 내가 그리
고 싶다 해서 그려지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셨죠.
'그럼 어떻게 합니까?' '내가 영감을 줄 때 스쳐 지나가면 스케치
를 하여라 그때 스케치를 하여 두지 않으면 그 내용은 전혀 그리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영감이 영화처럼 스쳐지나갈 때 스케치를 하
여 주지 않으면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아무리 생각을 하여서 표
현하려 애를 써도 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면서 말씀 보면서 목사
님 설교 말씀중에 어느때라도 영감이 흐르면 가지고 다니며 스케
치북에 스케치를 즉흥적으로 하여 나갔습니다. 그렇게 확답을 얻
은 후 집에 와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정말 그렸습니다. 잘 되었습
니다. 그렸습니다. 그리라는 데로 밤에 그리기 시작하여 새벽 4
시까지 날을 새워서 그리고 새벽기도 후에 잠시 잠을 청하고 또 학
원의 아이들도 없으니 작품생활만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따르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저는 가정을 이루는 가장임을 잊을 수
가 없었습니다. 가장이 되어서 가정을 책임지지 못하고 매일 그림
만 그린다고 있으니 누가 먹어 주며 누가 가정을 이끌어 갈것인
가? 사람들마다 신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집은 어떻게 먹고
사나? 다들 의문을 가졌을 것이고 주의 사람들도 걱정을 하였습니
다. 그러한 고통을 받으면서도 계속 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래야만 제가 사는 이유를 알기 때문 이였습니다. 그림은 그려야
한다는 압박감이 항상 머리 속에 그리워져서 살아가게 되었습니
다.
한 쪽으로는 감사합니다 그림을 그리게 해 주셔서 만약 제가 그림
을 그리지 못한다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정말 감사합니다.
항상 고민 뒤에는 그래도 감사합니다. 주님의 모습을 그리게 해
주셔서 감사하는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영감이 흐를
때 스케치가 끝난 후 캠퍼스 위에 올려지기 위해서는 몇 번의 포즈
가 스케치되어야 해야하므로 모델은 당연히 권 집사 제 아내가 서
야 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포즈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스케치하면서 고
통스럽고 힘들어서 울며 하지 않는다고 하였던 일들이 아주 많았
습니다. 그러면서도 정말 이렇게 스케치하기 위한 짧은 시간인데
도 고통스러운데 예수님은 얼마나 힘드셨으까라고 말하곤 하였고
엎디어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스케치 할 때에는 정말 엉엉 울면서
포즈를 설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마치 고통스러운 겟세마네의 기도를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
을 알아서 눈물 흘러 기도하는 마음으로 스케치에 임해 주었습니
다. 그렇게 시작한 성화 그리기가 점점 박차를 가하여서 그림이
몇 점씩 많아질 무렵... 전시회를 가져서 사람들에게 보여야 하겠
다. 그래서 좀더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하자.
'전라북도 예술회관'
전에는 그룹전을 할 때 몇 번 해보았지만 개인전으로는 처음으로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전시
회를 한번 열려면 경제 적 인것과 얼만큼의 노력과 힘이 들어야하
는데 과연 그것들이 갖춰 질 수 있는 것일까? 그래도 대관할 수
있는 것이 어떻게 되는지 아무런 절차도 수속도 몰랐기 때문에 예
술 회관에 전화를 하였습니다. 아마도 90년 12월 몇 일쯤 되었을
겁니다.
여보세요. 전시회를 할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하나요? 예. 12
월 23일에 대관을 하니까. 오전 9시까지 예술 회관으로 와보세
요. 예 알았습니다. 23일 8시 30쯤 이때라도 늦지 않았을꺼야?
한국 사람들은 30분이 항상 늦게 모이니까. 여유 있게 버스를 타
기 위해 나갔는데 온통 하얗게 눈이 아주 많이 내려져 있었습니
다. 길거리는 온통 빙판으로 엉덩방아를 찌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는 풍경 있었습니다. 나를 실은 버스는 엉금엉금 기어서 내가
내리고자 하는 곳에 내리게 해주었고 다리에 힘을 주어서 조심스
레 예술 회관에 도착했습니다. 계단을 올라보니 진풍경 이었습니
다. 줄을 섰는데 이리 구불 저리 구불 족히 100m터쯤 되어 보이는
데 어떤 사람은 이불을 감고 앉아 있고, 어떤 사람은 서있고 서로
이야기 하고, 담배 피우고 뒤죽박죽의 줄이 너져분하게 서있었습
니다.
그 줄로 다가가보니 아는 얼굴들이 보여서 왜 이렇게 서있느냐고
물었더니 대관하기 위해서 줄을 서있는 사람들이란다. 그때만 해
도 오는 순서대로 대관을 했기 때문에 몇 년 전부터 이상한 풍습이
생겨 전 전년도에는 하루 전날부터 줄을 서서 날을 세웠고, 전년도
에는 이틀전부터 줄을 섰었고, 이번 해에는 사흘 전부터 날을 세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단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이불이 오게되고 먹
을 것이 오게되고 심지어 자리를 지키기 위해 소변 보러간 사이에
줄을 잇기 위해 두 사람이와 교대하면서 지키고 있으므로 파생하
는 것들로 인해 서로 싸우게 되고 참으로 볼만하단다. 참 유치원
에 아이를 넣기 위해서 이불 가져와서 철야한다더니...쯪쯪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현실로 와있었기 때문
이지요. 안되겠구나. 그러한 판단 함께 포기감이 들었습니다. 선
배님은 왜 왔어요? 응 전시회를 해 볼려고 그 말과 함께 저를 보
는 눈들이 비웃는 듯 보였고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그 후배 말
이 <'힘들어요'>. 하면서 해준 이야기 인 것이다. 여기 저기 선배
도 후배도 눈에 띄게 되었고 인사하게 되고 어찌 살았느냐? 작품
은 잘하고 있느냐? 등등...
선배들이 <'용성아 차 한잔하자.'> 오래간 만인데'> 옆에 있는 커
피숍에 들어가 선배들과 이야기 하던 중 어느 선배가 야 내가 63번
과 78번이 있는데 하나는 포기해야겠다. 이 번호를 누구를 준다
냐?
그 말과 동시에 눈들이 번쩍거렸습니다. 나주지- 그런말을 감히
꺼내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들만 보고 있었습니다. 기다리다가 지
치고 화장실을 갔다와도 싸우고 그러니깐! 자기들끼리 법을 정해
서 번호표를 나누어줘서 그 순 번대로 신청을 하기로 되었다는 것
이다. 그런 사이에 선배들이 용성이 주라는 소리가 동시에 나왔고
정말 감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선배는 우리 대학의 선배가 아니
라 모 대학의 출신이었기 때문에 자기 대학 나온 후배에게 주려고
했던 모양이었으나 동료들의 권위로 <'에∼라!! 그럼 용성이 너
해라.'> 하나님 감사합니다. 포기하고 돌아 갈려고 했었었는데.
오∼하나님 당신께서 하시고저 하면 예비 하시는군요. 드디어 오
전 9시가 넘었는데도 공무원의 특성상 9시 40분이 넘어서야 1번,
2 번, 3번,.... 불려지게 되고, 전시하기 좋은 때는 자꾸 없어져가고
있었습니다. 이러다가 내 번호까지 올 수 있을까? 51번,52
번,....60번...61번..63번이 갔다 온 후 시간이 거의 없어서 찾고 찾
아서 자기가 원하는 시간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시간을 결정하고 나
와야 했고, 어떤 사람은 포기하고 나오고... ' 야!! 이거 78번이 올
수 있을까?' 사람마다 번호가 높아질수록 고개를 흔들며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불만의 소리는 더욱 커지고 거의 12시가 넘어서
야 '78번 오세요!' 가서 보았더니 3월,4월....10월 11월 예약판에는
검정글씨로 다 채워지고 12월에 한곳 3월에 한곳 두 곳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선택하게 하게 해주심을 감사드려
야 했습니다. 3월은 안되겠고, 자동으로 12월에 하기로 하고, '그
래 그 동안에 열심히 작업을 하면 되겠구나!!' 3월에는 작품이 없
어서 안될 것이고......
정말로 여호와 이레였습니다. 예비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술
회관으로 미술인들이 몰리는 이유는 다름 아닌 전시회 대관료가
싸 다는 것 이였다. 일반 화랑은 하루에 10∼20만원이 드는데 평
수에 따라서 평당 400원씩 전시를 할 수 있기 때문에 1주일를 해
도 1∼20만원이면 족했다.
1991년 12월 ○∼○까지 2층 2실 47평을 예약한 뒤에 3/1의 대관
료 6만 5천원을 내고, 영수증을 사무실에 갔다 주라는것. 6만 5천
원 이렇게 큰돈이...수중에는 버스비밖에 없는데...어떻게 하랴?
6만 5천을 내고 영수증을 바로 갔다 줘야 하는데, 그러나 어떻게
하나? 정말 어렵게 예약 한 것인데..내 뒤 사람들은 나를 마지막으
로 하고 모두 돌아갔기 때문에 더욱더 간절했던 것이다.
6만 5천원 포기!! 안돼!! 한편으로는 기쁨! 또 한편으로는 슬픔! <
기원엄마? 현아한테 7만원만 빌려 달라고 해!!><어떻게?><그래
도 너무 아깝잖아. 어떻게 포기를 해!!><그래..해 볼께...>친구한
테 전화를 해서 7만원 있니? 기원아빠가 여차해서....돈이 필요하
다는데 혹시 있니? 그래..그럼 가지러 와라..!! 너무 기쁜 마음에
미끄러운 바닥도 가볍게 밟고 친구 집으로 향하였다. 6만 5천원
제일은행에 내고 영수증을 사무실에 갔다 줘서 계약이 이루어졌
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더욱 열심히 작업을 하겠습니
다. 다른 사람들은 3일을 철야하고도 전시장을 대관 못해서 그냥
돌아갔는데 나는 그날 와서 그것도 아무런 준비 없이 계약을 쉽게
성사시켰다. 91년도 1월 2월...시간이 흐르게되고, 작품의 수도
점점 늘어갔다. 7월쯤 되니 걱정이 앞섰다. 과연 전시회를 한다
하였는데 캠퍼스만 그냥 걸 것인가? 아니다!! 그래서는 아니 된
다. 50점쯤 되는 작품을 액자를 맞겨야 한다. 한 개의 가격은 10
만원이 넘는 가격인데 도저히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래 그럼 만
들어 보자. 나무를 사서 만들어야겠다. 손재주는 많이 있다고 자
부를 했었고, 다른 사람들도 역시 손재주가 많다고 칭찬이 자자 한
만큼 액자를 손수 만들기로 했다.
기성품 중에 가장 가격이 싼 육송을 사기로 하여 군산에서 사게되
면 저렴하다 해서 그 곳에서 구입을 하여 아버님이 계시는 부안으
로 가서 나무를 내려놓고 말리기 시작하였다. 그 때에도 나의 목
에 깁스를 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잠을 잘 땐 목이 아파서 뒤
로 잠을 자지 못하고 엎드려서 자곤 했다. 그래도 그림은 그려야
했었고, 그것에만 전념을 다 하였다. 부안으로 가서 손수 대패질
도 톱질도 하였다. 이루 말 할 수 없이 힘든 작업 이였다. 우리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액자는 보기에 우습기가 짝이 없었다. 전문가
들도 하루에 한 개 두 개 만드는데 하루에 몇 개씩 만들어 댔으니,
각이 맞지 않고, 삐뚤삐뚤 말도 아니였다. 그러나 한 마음으로는
못 만들었지만 뿌듯하였다. 지금도 그 액자를 볼수 있다. 안디옥
교회 2층 목사님실 사랑방 옆에 떡 버티고 걸려져 있다. 요즘에
볼 때도 마음이 새롭다. 그렇게 며칠인가 낮이고 밤이고 계속되는
작업이었다. 참으로 애쓴 사람 나의 아내 권 집사였다. 햇빛에 나
가보지도 않은 사람이 8월의 뜨거운 볕에 나가 시중을 다 해주었
으니 얼굴은 시커멓게 타고, 기미까지 끼게 되었다. 부모님은
<'야! 니가 만들어서 어디에 쓰겠냐?'> 애만 쓰는 거 아니냐고 말
씀하신다. 그러나 어쩌랴? 돈은 없고 액자는 만들어야하겠고, 그
때에도 캠퍼스를 못사서 내 손으로 만들고 지금도 역시 내 손으로
만들어서 쓰지만 각이 맞든 안 맞든 그림을 그 위에 그릴 수 있다
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한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가 만들 캠
퍼스를 가지고 액자를 맡기면 그 액자 아저씨는 너무 곤욕스럽다
고 한다. 왜냐하면 다른 그림은 정확한 치수에 맞춰서 끼워 버리
면 되는데 내 그림은 각이 맞지 않고 크고 적고 해서 다시 띄어 뼈
대를 맞춰해야 하고 뒷부분은 특수하게 맞추어야 한다고 하신다.
그래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한다. 그래도 좋았다. 그림을 그
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주님께 영광 돌리 수
있으니깐 정말 좋았다. 액자를 태우고 니스칠을 다한 후에 전주
로 가져와서 그림을 끼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참 어려운 일 이
였다. 액자집 아저씨 고충을 십분 이해하게 되었다.
캠퍼스도 내가 만든 것이고, 액자도 내가 만든 것 이였으니 어느
한가지 맞는 것이 없었다. 다시 빼서 억지로 끼우고 때려 맞추고
정말 실력이 없었다. 집사람은 말한다. <'액자가 못쓰니깐 그림
도 죽어 보인다고'> 그렇다. 정말 그림도 죽어 보였다. 그래도 열
심히 만들었는데 밀어붙이자. 다음에는 좋게 만들어야지 그랬더
니 아내가 <'또 만들어요? 아서요. 버려요 버려..!!'> 사색을 하며
놀란다. 그러나 사실 그 말이 맡다. 수고와 땀 재료비 하면 그게
훨씬 저렴하며, 값어치 있게 보이는 것이였다. 그래서 전문가가
있나보다. 액자 하는 사람은 그 만의 특유한 기술을 가졌고, 그 사
람이 그림을 그릴 수 없듯이 그게 맞는 말이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전시회 준비 계획에 맞추어서 해 나가기 시작하
였다. 하나님의 같이 하심은 놀랍고 무섭다고 느낄정도로 예비해
주신 것이다. 팜플렛 문제도 몇십만원이 족히 들어야 할 것인데..
찾아간 인쇄소 사장님께서 아주 저렴하게 해 주시였다. 날짜가 가
까워 지자 주의에 여러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개인전을 처음
하는 것이여서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모르는데 하나님께서 모든 일
을 인도해주셨다. 하루는 방송국에서 언제 전시회 하느냐고 인터
뷰와 함께 각시 신문사에서도 전화가 오고 어떤 마음으로 성화를
그리게 되었느냐고..등등...연락하직도 않고 매스컴을 타려고 노력
하지도 않았는데 여러 곳에서 그렇게 하니깐 집사람이 설거지를
하다가 <'기원아빠! 이러다가 나중에 돈 내라고 하는거 아니야?'>
정말 이였다. 내가 하는일이 이렇게 잘 되어 본적이 없었기 때문
이였다. 이렇게 되어 본일이 없었는데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아
∼!! 나는 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하실수 있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드디어 그날 모든 것을 준비하고 이제 가서 하는 일이 남
아있을 뿐 아무 것도 없었다. 아∼미우나 고우나 만든 액자의 그
림을 끼워 맞추고 예총으로 나가야하는데 차가 필요했다. 그러나
용달을 부르기에는 돈이 없고, 어떻게 해야하나 10시에 여기서 떠
나야 하는데 조금있으니 10시 5분전이 되었습니다. 그때 [선생
님 ]하면서 내가 교회에서 가르쳤던 아이가 트럭을 몰고 와서 짐을
실을 것 없느냐고 물었다. <있지..!!>
정말 그랬다 하나님께서 내가 10시에 차가 필요하다고 하면 그 시
간까지 맞추어 주셨다.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이 아닌가... 나같
이 아무것도 아닌 자를 아버지께서 이렇게 사랑하시다니....
전시회장에 가서 그림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둘이 시간
이 흐르면서 3명 4명 사람 수는 불어났고, 그 사람들은 중·고등부
때 나에게 교육을 받아 온 이들이였다. 그 들은 직장을 조퇴하고
와서 도와주기 시작하였다. 그림 셑팅 하는데 부터 끝나기까지 모
두 도와주었다. 그렇게 도움속 에서 살아왔는데 현재의 나는 남을
돕고 있는가? 반성을 하여 본다. 그렇게 힘들고 힘든 개인전의 작
품을 모두 걸고 보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제일 큰 행사가 작품전을 하는 것인데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
는 주님의 모습으로 작품전을 하게 되다니..더없는 영광이요. 감사
할뿐이다. 작품수는 50점 큰 작품을 주로 하였는데도 전시회장이
빽빽하게 걸려있었다. 1년동안 신기할정도로 많은 작품을 남기게
되었다. 모두 놀랬다. 비록 액자는 내가 만든 액자였으나 그 나름
대로 특색이 있었다. 오픈하는날 대성황을 이루었다. 정말로 많
은 사람도 성도들도 몰려 오기 시작하였다. 보통 볼수 없는 그림
이여서인지 다른 전시장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곤 했다.
방명록에는 정말 은혜를 많이 받았다. 이런 것을 어떻게 했는
냐? 정말 너무 좋은 반응이였다. 이렇게 좋을수가 없었다. 꼭 앞
으로도 주님의 모습을 그리겠노라고 다짐을 하였다. 옆에 전시장
에서는 한국화 전시를 하였는데 상술이 얼마나 좋은지 모두 잘 팔
렸다. 그러나 팔리지 않지만 목적이 뚜렸해서 나의 그림을 더욱더
사랑하게 되었다. 저의 아내 권집사는 오픈을 준비하고 아는 집사
님들이 돕고, 모두들 도와서 훌륭히 잘하게 되었다. 여러명의 사
람들이 오가고 깨달음도 많았다. 다른 전시장에는 일찍 문을 닫았
지만 4층에서 계속적인 발표회가 있어 밤인데도 사람이 많이 와보
게 된 것이였다. 작품전이 끝나는 시간까지 은혜로운 시간이 되었
고, 그림을 구입해가시는 분도 있고, 성화이기 때문에 저렴한 가격
에 드릴려고 노력했다. 친구 후배 선배들고 격려해주었다. 어떻
게 성화를 그리냐는 것이다. 너무 어려운 일이고 너무 힘든일이며
생각지도 못해본 일이라 한다. 사명감이 없으면 절대 할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두 작품전을 하는 날이 지나고 끝이 나게 되고,
중간에 여러 신문사에서 인터뷰도 했었다. 그렇게 해서 성화 개인
전을 첫 번째로 마무리를 지였다.
많은 성화를 보급하지 못했지만, 아주 성황리에 끝이 났다. 그림
을 그린 사람이 '그림 사세요?'를 절대 못하기 때문에 누가 그 일
을 해줘야 하는데 하는 이가 없었다. 지금 열세번째주님 모습전을
하였는데도 금전적인 문제는 지금도 그때와 같이 힘이 든다. 그
뒤로도 작품전 할 때 CBS방송국에도 생방송으로 인터뷰를 하게
되고, 그러한 일들이 아주 많았다. 정말 드라마 같은 이야기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간단하게 말하려 하였지만 살을 붙여서 써보았
다. 한 점의 거짓이 없이 진실로 간증해보기 위함이고 모든 영광
하나님께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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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보셨죠? 우리 아버지랍니다........
이런 아버지이기때문에 아버지를 사랑할수밖에 없습니다....
카페가 있어요~ 음... 우리 아버지 몇 안되는 회원있는.. 그러나 은혜가 넘치고..
아버지께서 하시려고 노력하시는 카페가 있어요..
예전에 봤던 글이긴 한데.. 다시 한번 한글자 한글자 보니까 눈물이 나네요..
카페에 오셔서 가입하시구 한번쯤 응원하는 말씀하나씩 해주셨음 좋겠어요..
첫댓글 그랬구나.... 가입했음.^^
우와,,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