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은 공정해야한다
~ 영조실록(實錄) 편찬을 앞두고 공정한 기록을 위해 대제학을 사임하다(노포 이휘지 선생)
정유년(1777년, 정조1) 6월 29일 병조 판서 겸 대제학 이휘지(李徽之)가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삼가 성지(聖旨)를 받들었더니, 신을 실록청 도청(實錄廳都廳)에 임명하여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실록을 편찬하여 바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대행 대왕께서는 영명하며 의연하고 생각이 깊고 명석하며, 공손하고 검소하며 자애롭고 어질어서 마음에서 우러난 우애는 천지신명을 감동시켰고 왕도 정치를 존중했던 의리는 돌과 쇠조차 뚫을 정도로 굳세었습니다.
52년간 왕위에 계시는 동안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들을 보살펴 아침부터 밤까지 걱정하고 애쓰셨고 지극히 중정(中正)한 정사를 펼쳐 모두 다 포용하셨으며 특별히 부역으로 내는 포를 견감하시어 가난한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게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온 나라의 생령(生靈)들은 편안히 즐기지 못하는 일이 없었으니, 비록 요순(堯舜)이나 삼대(三代)의 정치라도 어찌 이보다 나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선대왕께서 승하하신 뒤에 백성들이 마치 부모의 상을 당한 듯이 통곡하였는데 이제 조정에서 참으로 훌륭한 역사가를 얻어 실록을 편찬해서 만세토록 전하게 한다면 어찌 신하와 백성들의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못난 신이 조정의 반열에 있으면서 선왕의 특별히 알아주시는 은혜를 잘못 입어 분에 넘치게도 문형(文衡)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신은 참으로 감격하여 어디에서 죽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선왕께서 돌아가신 지 벌써 1년이란 세월이 지났습니다. 신이 선왕의 능에 설치된 상석을 쳐다보자니 선왕의 승하에 애통하기 그지없습니다만, 만일 사필(史筆)을 휘둘러 천지 같은 덕을 형용하고 해와 달처럼 빛나는 업적을 그려낼 수 있다면, 조금이나마 신을 돌보아주신 큰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의 보잘것없는 사사로운 의리로 보면 감히 실록의 일을 함부로 감당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신의 종부(從父)인 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은 선왕께서 저사(儲嗣)를 계승하실 때를 맞아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 충문공(忠文公) 이이명(李頤命), 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와 실로 큰 계획을 이끌었고, 함께 연명하여 차자를 올려 대리(代理)하게 할 것을 요청하였다가 결국 죽임을 당하는 지경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갑진년(1724, 영조 즉위년)과 을사년(1725) 이래 비로소 누명이 벗겨졌지만, 정미년(1727)에 또다시 추죄(追罪)되었다가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관작(官爵)이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대각(臺閣)이 상소하여 아뢴 내용과 연석에서 대답하고 아뢴 말이 사대신(四大臣)에 대한 시비였는데 신에게 붓을 잡고 실록 편찬에 임하라고 하시면, 그 일에 대해 장차 사실에 근거하여 갖추어 기록하여야 합니까, 아니면 혐의를 피하기 위해 기록하지 말아야 합니까. 자식이나 조카가 되어 부형(父兄)의 일에 대해 깎아내리는 짓은 본디 말할 것이 없고 기리는 일도 마찬가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실록의 내용을 논정(論定)하여 편찬하면서, 모든 의리와 관련된 시비에 대해 부형에 대한 사안이라는 이유로 그 의논을 삭제하고 싣지 않거나 그 일을 빼고 논하지 않는 것 또한 후세에 전하기에는 부족하니 그래서는 안 됩니다.
대개 신축년(1721, 경종1)에 세자를 세워 대신 다스리게 한 두 선왕의 처분은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은 밝고 밝은 큰 뜻이었고, 선대왕들께서 왕위를 계승한 의리는 지극히 크고 정당하여 만세에 떳떳한 것인데, 실록에서 신의 사사로운 의리상 난처한 문제로 인해 그 만에 하나라도 현양하지 못한다면 신은 나라의 죄인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크게 두려워하는 일입니다.
더욱이 춘추관의 시정기(時政記)와 승정원의 주서일기(注書日記)에 사대신에 대한 시비를 다룬 사실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므로 신은 감히 실을 자료를 추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차마 책장을 넘기며 보지도 못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효성을 돈독하게 하여 온 백성을 바르게 하시고 큰 인륜을 밝혀서 모든 신하들의 모범이 되시니 편안히 쉬시는 사이에 신의 종부에 대한 일과 신의 사사로운 심정을 미루어 생각하신다면 반드시 마음속 깊이 딱한 마음이 들 것입니다.
국조(國朝)의 고사(故事)에 보면 실록청이 사무실을 열어 방(房)을 나누면 반드시 시임 대제학을 도청 당상으로 삼아 역사 편찬을 주관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신은 사사로운 의리로 보아 외람되이 감당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반복하여 생각건대 단지 눈물만 흐를 뿐입니다. 감히 안타까운 심정을 말씀드려 위로 숭엄하신 성상을 번거롭게 합니다.
삼가 바라오니, 성상께서 굽어 긍휼히 살피시어 신이 맡고 있는 문형의 직임을 체차하고 이어 도청(都廳)에서도 해임시켜 감당할 만한 사람에게 다시 맡김으로써 국사(國史)가 제대로 편찬되도록 하고 신의 사사로운 의리도 온전할 수 있도록 해주소서.”하니,
비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경의 상소 내용을 보니 내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공적인 일과 사사로운 의리 둘 다 감안해볼 때 억지로 하라고 하기 어렵다. 대제학의 직임을 일단 체차하겠다.”하였다.
<출처: 영종대왕실록청의궤(英宗大王實錄廳儀軌) 상(上) 산절청등록〔刪節廳謄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