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참 정신좀봐요 아침에 컴을 켜 놓고 그냥 일을 했네요.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한반도의 정세도 생각하시면서.......
'마카오 신사'
1999년 오늘 마카오가 중국에 반환되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지요.
분위기가 너무 조용하고 평온해 그 2년전 홍콩이 반환될 때의 요란하고 삼엄한 것과 대조돼서 입니다.
그것은 홍콩이 반환될 때 한세기 반의 제국주의를 청산했다는 등 좋은 말을 다 해버려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구가 홍콩의 15분의 1인 마카오(43만)가 다른 부문에서도 홍콩에 가려진 점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마카오시대가 조용히 끝나는 모습은 새삼 그 시대가 조용히 시작됐던 일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1513년 교역을 함으로써 시작된 마카오 시대는 아편전쟁이라는 포함외교로 시작된 홍콩시대와는 딴판이었습니다.
명나라 황실은 포르투갈 상인들을 통해 천자에게 필요한 물건을 조달했고 마카오는 그 창구로 자연스레 발전한 것입니다.
영국이 중국에 함포를 쏘아 홍콩을 뺏았다면 마카오는 거꾸로 포르투갈인들이 중국인들에게 서양의 대포를 건네준 곳이었습니다.
병인양요 때 강화도 초지진에서 우리가 사용한 '홍이포'(紅夷砲)가 그것이지요.
당시 중국인들의 눈에는 서양사람들이 '하얀 사람'이 아니라 '붉은 오랑캐'로 비쳤던 모양이나 그들이 잘못 본 것만은 아닙니다.
아무튼 명나라는 이 홍이포로 산해관(山海關)에서 청나라의 누루하치를 부상시켜 죽게 했으니 포르투갈은 마지막까지 명을 도운 셈이었습니다.
명나라는 망했으나 마카오는 계속 서구로 열린 창으로 구실을 했습니다.
김대건이 사제 서품을 받은 마카오는 한 세대 전 한국의 '마카오 신사'를 '서품'하기도 했습죠.
그러나 해양국으로서 형인 포르투갈이 아우인 영국에게 눌리듯 서구로 향한 창구로서의 마카오도 3세기나 어린 동생 홍콩에 눌린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몇자 올리고 갑니다.
인천에서 형렬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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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자유게시판)
마카오 신사
김형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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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2.27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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