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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브로 디도
빌 2:25-30
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26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27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28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29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30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빌 2:25-30 / 나는 에바브로디도도 여러분에게 돌려보내려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나를 도우라고 여러분이 보내 주었던 그와 나는 친형제처럼 같이 일하고 싸워왔습니다. 26) 이제 나는 그를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는 여러분을 몹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자기가 병으로 고생했다는 소식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것을 알고 걱정에 싸여 지냅니다. 27) 사실 그는 병치레를 하느라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돌보아주셔서 이제는 다 나았습니다. 슬픔 위에 또 슬픔이 겹치지 않도록 그에게뿐 아니라 내게도 자비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28) 그래서 나는 더욱 그를 서둘러 여러분에게 보내려는 겁니다. 여러분이 그를 만나 감사에 넘쳐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나는 걱정을 한시름 덜게 될 것입니다. 29) 주님 안에서 그를 기쁨으로 영접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에게 감사를 표해 주십시오. 30)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생명을 내걸고 일하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분을 대신해서 정성을 다해 내 일을 돌봐준 사람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교회에서 로마감옥에 수감된 바울에게 보내는 헌금을 전달하고 또 옥에 갇혀있는 바울을 섬기라고 파송된 인물입니다. 그는 병들어 죽기까지 주님을 섬기듯이 바울을 섬기고 도운 자입니다.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노라(25-27) 위에서 언급한대로 에바브로 디도는 감옥에 수감된 바울에게 헌금을 전달하고 또한 옆에서 섬기도록 빌립보 교회에 의해 파송된 사람입니다. 당시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십시일반 헌금을 하여 바울에게 생활비와 생필품을 보냈습니다. 이것을 에바브로 디도가 전달하였습니다. 빌립보에서 바울이 갇혀 있던 로마까지는 약 1,800km로 당시에는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족히 40일이나 걸리는 아주 먼 거리였습니다. 돈을 비롯한 물품을 가지고 가기에는 강도를 만날 위험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바브로디도는 위험을 감수하고 바울을 돕는 자(Helper)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명자를 빌립보교회를 위해서 다시 돌려보내겠다는 것입니다(25).
죽기까지 돕고 섬긴 에바브로디도(28-30) 바울은 본문 30절에 에바브로디도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까지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였다고 극찬을 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헌신한 것은 성령님의 도우심과 역사(役事)하심의 결과입니다. 성경에는 돕는 자를 보혜사 성령님이라고 하였습니다. 보혜사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로 변호자, 중보자, 위로자, 돕는자 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총 4회 나오는데 주로 성령님을 가리킵니다(요 14:16, 26; 15:26; 16:7). 이름 그대로 성령님은 때마다 일마다 성도들을 격려하시고 도우시는 분입니다. 이런 은총을 받은 성도들은 마땅히 힘없고 고통을 받는 이웃을 섬기며 돕는 헬퍼(Helper)로 살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이웃을 돕고 섬기는 것을 너무 크게 생각해서 주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이웃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자신의 옷으로 싸매고 자신의 나귀를 태워서 여관으로 보내고 적지만 두 데나리온을 주인에게 주면서 돌보아 주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적을지라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섬기는 것은 성도들의 사명이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적용 : 오늘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헬퍼(Helper)로 삽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가장 효과적인 전도임을 기억하며 실천하고 또 실천합시다.
입이착심[入耳着心]은 들은 것을 마음속에 새겨 잊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양약고구리어병[良藥苦口利於病], 충언역이리어행[忠言逆耳利於行]은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병을 낫게 하고, 바른말은 귀에 거슬리지만 행동을 바르게 한다는 뜻입니다. 말과 행동이 반듯하여 다른 사람들로부터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가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 설 교 >
교회, 섬김의 공동체
빌 2:25-50 / 이윤재 목사
여러분은 교회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교회는 하나님을 섬기고 세상을 섬기는 곳입니다. 어느 산골에 조용한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 뒷산에 절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열심 있는 목사님이 그 마을에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분위기는 교회 분위기로 바뀌어 사람마다 “할렐루야”, “아멘”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절에 있는 스님들까지 염불외울 때 “할렐루야”, “아멘”하게 되었는 데 주지 스님은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요즘 교회가 들어와 할렐루야, 아멘이 유행하고 있는 데 부처님을 믿는 우리 불자들까지 물들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누가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겠소?” 그랬더니 한 젊은 스님이 말했습니다. “스님,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그래서 주지 스님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요?” 했더니 젊은 스님이 “예, 마을에 내려가 교회 목사를 만나 다시는 “할렐루야”를 못하도록 담판짓겠습니다“ 그래도 못믿어운 주지 스님이 염려를 하자 젊은 스님이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스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끝까지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교회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또 한편으로는 세상을 섬기는 곳입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여 섬길 때 이것을 “십자가진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받아 목숨걸고 주님을 섬기고, 십자가 지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 세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성경의 사람들은 다 십자가진 사람들이지만 오늘 바울의 제자중에 주님을 잘 섬긴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에바브로디도였습니다. 그는 빌립보 출신으로 바울의 충성스러운 제자요 평생 동역자였습니다. 그는 당시 빌립보교회 담임목사였는 데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있을 때 그를 위로하고 헌금을 전해 주려고 왔다가 그만 병이 들었습니다. 그 병이 얼마나 심했는지 빌2:27에 나옵니다,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에바브로디도는 평생 예수님을 믿고 바울을 위하여 일하다가 선교 여행중 너무 힘들어 병이 들만큼 고생했습니다. 얼마후 몸이 회복되자 바울이 그에게 빌립보서 편지를 써주면서 빌립보로 보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빌2: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여기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몇 가지로 부릅니다. ”나의 형제, 함께 수고한 자, 함께 군사된 자, 나의 쓸 것을 돕는 자“. 오늘 우리는 어떻게 교회를 섬겨야 할까요? 특히 오늘 임직받는 분, 어떻게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시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배우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형제입니다
바울이 에바브로디도에 대하여 말한 첫 번째는 형제라는 것입니다. 다같이 빌2: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그는 나의 형제요”. 바울이 에바브로디도에 대하여 가장 먼저 한 말은 “나의 형제”라능 말입니다. 사실 바울과 에바브로디도와의 관계는 형제가 아닙니다.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입니다. 바울이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두 사람은 영적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관계입니다. 복음안에서 그를 낳고 길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를 제자나 자녀라고 부르지 않고 “나의 형제”라고 부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 아버지를 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들어와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이 지었기 때문에 아버지요 한 아버지에서 나왔기 때문에 형제입니다. 말2:10절입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예수믿어 달라지는 첫 번째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으면 성품이 먼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소속이 먼저 달라집니다. 하나님 아버지에게 소속됩니다.
아버지가 같으면 거기서 태어난 사람들이 형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믿어 달라진 두 번째는 교회안에서 우리는 한 형제요 자매로 산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한 하나님을 믿는 형제요 자매임을 믿습니까? 교회를 타락시키는 가장 큰 적은 개인주의와 무소속주의입니다. “편하게 믿으면 됐지” 하고 공동체에 소속되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는 있는 데 형제는 없는 사람과 같습니다. 교회와 세상이 다른 것이 이 점입니다. 세상은 서열에 따라 사는 신분적 사회입니다. 능력있는 사람이 우대받고 서열이 높은 사람이 지배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신분이 철폐되고 서열과 능력을 뛰어넘는 사회입니다. 교회안에는 많은 직분이 있으나 그 직분은 신분도 아니고 서열도 아니며 능력의 차이도 아닙니다. 교회안에 직분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있을 뿐 명예직도, 계급도, 신분적 차이도 아닙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한 아버지를 섬기는 형제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는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교인들이 자기보다 나이가 많으면 “형님“, 나이가 적으면 ”아우님”이라고 부른답니다. 목사님도 자기보다 나이가 많으면 “형제, 누님”, 적으면 “동생, 아우님” 한답니다. 한번 해 보겠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을 보고 한번 불러 보겠습니다. “형님, 아우님”, 잘 모르겠거든 “형님”하면 됩니다.
그래서 두 종류의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church for the people이 있고 church of the people이 있습니다. church for the people은 “백성을 위한 교회”입니다. 이 경우의 교회는 거기 모인 백성들을 부지런히 섬깁니다. 좋은 양식을 만들어 먹이고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참여하고 심방해주고 상담해 주고, 그래서 교회는 머슴이고 백성은 주인입니다. 교회가 주인이고 교인들은 관람석에서 구경하는 관객입니다. 그러나 평생 교회 다니면서 가만히 앉아서 도움받을 생각만 해서 되겠습니까? 10년, 20년 믿었는 데 ”누가 나 좀 심방 안오나?“ 기다려서야 되겠습니까? 그렇게 오래 예수믿었으면 다른 사람 심방 갈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집사, 권사가 되었어도 여전히 목회자 도움만 기다립니까? 언제까지 뒤에 숨어서 교회가 어떻고, 당회가 어떻고, 목회자가 어떻고 하겠습니까? 그렇게 오래 예수믿으면서 언제까지 ”상처, 상처, 힘들어. 힘들어“ 하며 영적 어린아이처럼 살겠습니까? 그래서 church of the people입니다. “백성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백성의 교회”입니다. 백성이 관람석에 앉아 목회자의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무대위로 올라오고 목회자가 관람석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교회 주연배우로서 나를 만족시켜주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교회 주연배우가 되어 목회자와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인천에 한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교인이 2천명인데 아직 목회자가 없습니다. 목회자는 담임목사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부목사도 전도사님도 없습니다. 어떻게 2천명을 돌볼 수 있습니까? 교인들이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섬김의 수혜자가 아니고 섬김의 주체입니다. church for the people이 아니라 church of the people이 입니다. 누구의 교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교회가 있고, 남의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교회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교회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교회는 우리의 교회요 우리가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는 부름받은 일꾼입니다.
바울이 에바브로디도에 대해 말한 두 번째는 함께 일하는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25절 다시 봅니다. 빌2: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다같이 “함께 수고하고”. 교회는 한 아버지의 자녀들이 모여 있으나 섬기기 위해 모여 있습니다. 교회는 봉사의 공동체입니다. 어떻게 봉사합니까? 25절, “함께 수고하고”, 함께 일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봉사합니까? 한국교회는 신앙과 봉사에 있어서 불균형을 보이고 있습니다. 통계를 보면 한국교회 신자의 70% 이상이 주일성수합니다. 60% 정도가 십일조합니다. 그러나 봉사는 20% 미만입니다. 대부분의 교회에 교인은 많은데 봉사자가 없습니다. 소수의 사람이 많은 일을 중복, 봉사합니다. 약 10% 미만의 교인이 중복적으로 일하고 전도는 3% 미만만 합니다. 믿음은 좋은 데 봉사는 약합니다. 믿음과 봉사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데 한쪽으로 치우쳤습니다.
엡4:11-12을 아십니까?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봉사”가 가운데 나옵니다. 성도로 온전케 되는 것이 예수믿는 것의 목적이라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이 교회 존재의 목적이라면 그것은 가운데 있는 “봉사”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왜 “봉사”가 가운데 있을까요? 봉사는 온전하게 된 성도의 결과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원인입니다. “봉사”는 성도로 온전케 될 때 나타나는 열매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가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도표로 보실까요?
성도를 온전케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움
(믿음의 목적) (교회존재의 목적)
봉사
도표에서 보신대로 봉사가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봉사는 온전한 성도의 결과요 뒤에 나오는 교회를 세우는 일의 시작입니다. 두 가지가 봉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의 자라고 성숙했다면 그 열매가 봉사로 나타나고 또 봉사해야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진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봉사할 때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시고 우리는 하나님께 사용받을 때 존재의 가치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많이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우리는 사용받기 위해서도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사용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사랑받기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받았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용받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사랑받는 것을 믿음이라 한다면 사용받는 것은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받는 것이 우리의 존재라면 사용받는 것은 사명입니다. 우리는 사랑받고 사용받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사용받기 위해 있습니다. 여기 작은 펜이 있습니다. 이 아름답고 예쁜 이 펜은 단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있습니다. 누군가가 사용해 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사용하지 않는다면 이 펜은 아무리 좋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여기에 컵이 있습니다. 그라나 아무리 예뻐도 누가 사용하지 않으면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사용을 위해 있습니다.
인간은 어떨까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인간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용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엊그제 수능이 있었습니다. 어렵게 시험보고 대학갑니다. 대학 졸업하면 유학도 갑니다. 수많은 스펙도 쌓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용받기 위해서입니다. 사람과 역사에 사용받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가난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보다 더 불쌍한 누군지 아십니까? 병든 사람입니다,. 그러나 병든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누군지 아십니까?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호새아서에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죄짓고 하나님의 버림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호세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호8:8, “이스라엘은 이미 삼켜졌은즉 이제 여러 나라 가운데 있는 것이 즐겨 쓰지 아니하는 그릇같도다. 여기 ”즐겨쓰지 않은 그릇“이 나옵니다. 그릇이 예쁘면 무엇 합니까? 도자기 전시회 가보니까 도자기는 대개 1300도, 1500도로 구은 답니다. 그러나 그렇게 구웠어도 아무도 쓰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입니까?
교회에서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하나님을 돕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을 받고 살아가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도우려고 우리가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사용받으려고 우리가 봉사합니다. 봉사는 하나님의 사용을 받는 것입니다. 빌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니니”.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일하십니다. 교회 봉사는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까?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제임스 크로닌이 어느 날 자기 자신에게 물었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이렇게 스스로 대답했습니다. “어제 하다가 남겨둔 일을 계속하기 위해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 그렇습니다. 목적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질문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 하늘나라 법정에 설 때 처음 받게 될 질문은 무엇인가?” 무엇이겠습니까? 얼마나 잘 하나님을 믿었느냐?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느냐? 얼마나 구제를 많이 했느냐? 아닙니다. “얼마나 네가 하는 일을 열심히 했느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서서 우리가 그의 일의 도구가 될 때 우리가 기억할 것은 순종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25절 다음을 보십시오. 빌2:25,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군사가 무엇입니까? 무장한 자입니다. 싸우는 자입니다. 명령에 복종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니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딤후 2:3-4,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는 훈련받기를 좋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군사로 일하려면 그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꾸준한 반복으로 자신을 하나님이 쓰기에 알맞도록 구비시켜야 합니다. 제가 아는 외과 의사는 같은 수술만 1300번 했다고 합니다. 훌륭한 의사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남들이 놀 때 외롭게 환자와 씨름했기 때문에 훌륭한 의사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사용받는 일꾼도 마찬가지입니다. 임직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무릎꿇고 기도받으면 직분받습니다. 그러나 임명받는 것과 부름받는 것은 다릅니다. 사람에게 임명받았다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두 가지 신앙이 있다고 말합니다. 정비신앙과 수리신앙입니다. 정비신앙은 글자 그대로 문제가 생기기 전에 준비하는 신앙입니다. 아프기 전에 운동하고 출전하기 전에 훈련하고 고난이 오기 전에 무장하는 신앙입니다. 수리신앙은 문제가 닥쳤을 때 뒤치다꺼리하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항상 소잃고 외양간 고칩니다. 이것이 25절 뒷부분 말씀입니다.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함께“ 가 중요합니다. 군인은 명령과 함께 집단으로 싸웁니다. 혼자 싸우는 군인은 없습니다. 결혼생활과 교회생활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함께 해야 합니다. 팀으로 일해야 효과가 있습니다.
어느 숲에 사자와 풀벌레가 내기를 했습니다. 누가 큰 소리를 내나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처음부터 안되는 게임이었습니다. 어떻게 풀벌레가 사자를 이기겠습니까? 먼저 사자가 자신만만하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소리는 멀리 10킬로 밖에 까지 들렸습니다. 사자는 만족한듯 풀벌레를 바라보았습니다. 다음은 풀벌레 차례였습니다. “삐리 삐리”. 너무 소리가 작았습니다. 겨우 10미터도 가지 못했습니다. 사자는 비웃었습니다. “그 까짓것 가지고 나에게 덤벼?”.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풀벌레가 소리를 나자 마자 다른 풀벌레들이 따라 울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또 다른 풀벌레가 소리를 냈습니다. 마침내 그 소리는 온 산과 골짜기에 울렸습니다. 한 마리의 사자 소리보다 작은 풀벌레 수 백마리가 더 큰 소리를 낸 것입니다. 25절입니다.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다같이 ”함께“.
군사는 전쟁을 준비합니다. 그라나 전쟁날때만 기다리고 노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평소에는 지극히 작고 일상적인 일을 합니다. 사물정리, 구내청소, 전쟁을 잘하려면 작은 일도 잘해야 합니다. 교회안에 크고 작은 일이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일만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바친 슈바이처 박사에게 한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저도 아프리카에서 선생님처럼 훌륭한 일을 하고 싶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의욕에 넘치는 젊은이에게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가 청년에게 지시한 일은 땔감나무를 해오고, 물을 길어 오고, 청소하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싫증이 난 청년은 박사에게 따지듯 물었습니다. “박사님, 저는 박사님처럼 훌륭한 일을 하러 왔지, 이렇게 장작이나 패고 물이나 긷고 청소나 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청년에게 헌신하려는 마음이 없는 것을 알고그를 쫓아냈습니다. 주일마다 교회 주변을 다니면 휴지를 줍는 집사님이 있습니다. 그는 주일날 일찍 교회 나와 누가 보든 안보든 휴지를 줍습니다. 새벽기도때마다 제 자리에 마실 물을 준비하는 권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새벽 4시에 일어나 교회 4시 30분에 와서 부엌에서 물을 끓여 제 자리에 놓습니다. 아무도 안볼 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목자중에 지방에서 근무하는 분이 있습니다. 금요일에 KTx타고 올라와서 금요기도회 참여하고 토요일마다 목장모임을 인도합니다. 주일마다 먹을 것, 마실 것 준비해서 아버지같은 시니어 어른들을 대접하는 집사님이 있습니다. 해외선교때마다 병원 문을 닫고 간호사들까지 여비를 대며 선교에 참여하는 의사가 있습니다. 그렇게 갔다 오면 병원 손님이 뚝 떨어집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또 보내주시겠죠” 하면 웃는 의사가 있습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봉사하는 분들, 그들이 군사입니다.
이번 포항에서 지진이 났지 않습니까? 지진에 무너진 건물을 보면서 제가 또 다른 은혜를 받았습니다. 건물을 지을 때 먼저 기초를 튼튼히 하기 위해 철근을 심고 그 위에 콘크리트를 붓고 시멘트를 바르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건물이 완성되면 그 위에 페인트를 칠하고 벽지를 바릅니다. 그러면 페인트와 벽지만 보입니다. 그런데 이번 지진을 통해 보니까 건물에서 중요한 것은 역시 철근입니다. 철근과 콘크리트는 속에 숨어 무겁게 건물을 받히고 있고 밖에 나타난 것은 페인트와 벽지입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이것입니다. 누가 숨어 교회를 떠받드는 철근이고 콘크리트일까? 다른 사람을 돋보이게 하고 자기는 숨어 일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드러나지 않은채 온몸으로 교회를 떠받들며 자신은 숨어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누구나 다 생색내고 싶어하고 누구나 다 자기를 드러내고 싶겠지만 아무도 보지 않은 데서 충성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이 사람이 25절, 빌2:25,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아멘.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최고 기쁨은 우리를 통해 일하는 것, 우리의 최고 영광은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 모두 하나님의 일꾼이 되고 군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목숨걸고 주님을 섬깁시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에 대해 한 마지막 말이 있습니다. 30절입니다. 빌2:30,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라”. 다같이.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고 충성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일하는 일꾼의 마지막인 목숨을 내놓고 봉사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에 감동적인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세 용사 이야기입니다. 때는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아둘람굴로 피난할 때입니다. 약 400명과 함께 피신해 사는 데 다윗이 갑자기 목이 말랐습니다. 너무 너무 목이 말라 고통스러워 하는 데 세 용사가 자원합니다. “왕이여, 저희가 가겟습니다”. 다윗이 돌아보니 이름도 잘 모르는 병사들이었습니다. 다윗이 물었습니다. “그대들이 정말 다녀오겠소?”. 그런데 이 무명용사들이 천신만고 끝에 베들레헴에서 물을 길어 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왕이시여, 다녀왔습니다. 베들레헴 우물에서 길어온 물입니다”. 다윗이 그 물을 보았을 때 그 물은 피였습니다. 목숨을 담보잡히고 사선을 넘어온 피같은 물, 다윗은 무명용사들의 물을 보면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내가 잘못했소. 나 한 사람위해 이렇게 그대들을 힘들게 하다니. 내가 잘못했소. 그대들이 떠온 것은 물이 아니라 피요. 내 어찌 그대들의 피를 마시겠오? 이것은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하오”. 그리고 그 물을 제사장에게 주어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도록 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특징은 이 용사들은 이름도 없는 무명용사라는 것입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왕을 위해 사건을 넘어온 사람들, 하나님은 지금도 이런 용사들을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를 가도 가장 중요한 곳에 묻힌 사람들이 무명용사들입니다. 미국 워싱톤 알링톤 국립묘지에 있는 무명용사의 무덤입니다(2.사진). 케네디대통령보다 더 좋은 위치에 묻혀 있습니다. 양화진에 가도 무명 선교사들의 무덤이 있습니다(3. 사진). 100여년전에 이 땅에 와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순교한 사람들, 그들의 헌신과 희생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 믿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름받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 희생과 헌신입니다.
제가 아는 학생이 교포2세인데 미국 컬럼비아대 의과대학에 지원했습니다. 공부도 잘해서 SAT 시험에 만점을 받았습니다. 집안 형편도 부유해서 무난히 합격되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불합격 통지서가 날라왔습니다. 불합격 사유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귀하의 성적은 아주 우수합니다. 가정형편이나 여러 조건들도 만족스럽습니다. 그런데 귀하의 서류 어디를 보아도 헌혈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남을 위해서 헌혈한 경험도 없는 귀하가 어떻게 환자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귀하는 의사될 자격이 없습니다”. 실력이 좋은 의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헌신이 좋은 의사를 만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church for the people, 누가 여러분을 섬겨주는 교회가 아니라 church of the people, 여러분이 주인이 되어 스스로 섬기는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한 형제로 부르셨지만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용을 받아 그 분의 일을 이루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최고 기쁨은 우리를 사용하여 일하시는 것이고, 우리의 최고 영광은 그 분의 사용을 받는 것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용도 받고 있나요? 우리가 주님을 위해 일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 뿐 아니라 우리 후손들을 축복하고 복을 주실줄 믿습니까?.
제가 아주 어릴 때,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시골에 아주 큰 홍수가 났습니다. 홍수가 나면 둑이 터져 온 동네에 물바다가 되고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정미소가 물에 가득차곤 했습니다. 한번은 홍수가 났는 데 아주 큰 홍수였습니다, 정미소에 놀러갔다가 저도 모르게 떠밀려 갔는 데 한참 허우적 거리다가 뭔가 제 손에 잡혔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붙잡고 살았는 데 나중에 보니까 교회 종탑이었습니다. 비가 너무 와서 교회 종탑이 무너졌는 데 제가 떠내려가다가 그것을 붙잡은 것입니다. 그때 가장 감격했던 분이 저희 할아버지였습니다. 왜냐히면 그 종탑을 할아버지가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일제때 농촌에 내려와 교회를 짓고 살았던 할아버지는 종탑만은 내 손으로 만들겠고 오랜 시간을 걸려 종탑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먼 훗날 비에 휠씁려 내려가다가 그거을 손자가 붙잡고 살줄은 누가 알았겠습니까? 만일 할아버지가 종탑을 만들지 않았다면 제가 줄을 수도 있다는 것 아닙니까? 오늘 우리가 이렇게 편하게 예수믿는 것은 크게는 133년전에 이 땅에 와서 고생하고 희생한 선교사들, 우리의 신앙선배들 때문이고, 적게는 1998년, 힘들게 이곳에 교회를 세운 고 이중표목사님과 한신교회 성도들의 피와 땀과 눈물 때문입니다. 그 헌신이 내년이면 20년, 20년을 앞둔 우리도 이제 열심히 종탑을 만들어 미래 우리의 후배들이 그것을 붙잡고 생명을 얻고 이 땅에서 이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헌신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 모두의 사명이고 오늘 임직받은 분들의 사명인 줄 믿습니다.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
빌 2:25-30 / 김필곤 목사
어느 한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이 반 아이들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너희는 장차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 이 물음에 아이들은 대답했답니다. “위대한 학자가 되겠습니다.”, “세계적인 갑부가 되겠습니다.”, “훌륭한 정치가가 되겠습니다.” 등 각자의 생각을 대답했답니다. 이때 한 명의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저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놀란 선생님이 그 이유를 묻자 아이는 “아무리 높은 자리에서 큰일을 하고 명성을 떨친다 해도 사람다운 사람이 아니라면 동물과 다를 바 없으므로, 저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답니다. 이 아이는 성장하여 훗날 미국을 통치하는 20대 대통령이 되었답니다. 그의 이름은 ‘제임스 A. 가필드’입니다. 오늘 가족 예배를 드리는데 우리 어린이들, 학생들, 청년들 장차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다른 말로 질문을 던지면 어떤 평판을 받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작곡가 하이든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참 믿음이 좋은 분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작곡한 '천지창조'라고 하는 오라토리오를 비엔나에서 연주할 때였답니다. 공연이 끝나자 청중들이 우뢰와 같은 박수를 쳤답니다. 그때 사회자가 천지창조를 작곡한 발코니에 앉은 하이든을 소개했답니다. 관객들은 하이든을 향하여 기립하여 박수를 쳤답니다. 이때 하이든은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이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라고 외쳤답니다. 76세로 병들어 하반신을 쓰지 못하여 앉아 있었는데 박수가 끝나지 않자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다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답니다. 병원으로 가면서도 "나는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 이 영광을!"이라고 계속 외쳤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나는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 이 영광을!" 하면서 천국에 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살았던 그가 인생에서 제일 성취하기 어려운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답니다. 첫째, 평판을 얻는 것. 둘째, 살아있는 동안 평판을 유지하는 것, 셋째, 죽은 뒤에도 평판을 보유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온 가족 예배를 같이 드리는 우리 어른 성도님들은 지금 어떤 평판을 받고 있고 앞으로 이 세상을 떠난 후 자녀들에게, 아는 지인들에게 어떤 평판을 받겠습니까?
사람들은 살려고만 생각하지 죽는다는 것을 잊고 삽니다. 그러나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때가 되면 죽습니다. 2018년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 수명은 83세라고 합니다. 남자는 80세이고 여자는 85세라고 합니다. 평균 수명으로 따지면 남자 70세면 앞으로 살날이 10년 남은 것입니다. 죽은 후 자식들에게 지인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고 싶습니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어떤 자매가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나요?”라는 질문을 받았답니다.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답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했는데 십년 전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더라는 것입니다. 장례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와주었답니다. 친구들, 직장동료, 일하면서 알게 된 지인들, 생각보다 많은 인원에 추가 음식을 주문하며 적잖이 놀랐답니다. 다들 한결같이 어린 딸인 자신에게 와서 아버님은 좋은 사람이었는데 안타깝다고 말했답니다. 그리고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아버님한테 받은 빚 갚게 해달라”고 말하는 분도 있었답니다. 그 때 아빠 딸인 게 처음으로 자랑스럽게 느껴졌었답니다. 그동안 아빠를 잘 몰랐던 딸이라 죄송했었답니다. 그리고 답을 정했답니다. “나도 우리 아버지처럼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자신의 삶의 끝자락에서 자신을 아는 모든 이가, 남은 가족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해주면 좋겠다고 썼습니다.
오늘 8월 마지막 주일 온 가족이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우리 아들딸들, 우리 성도님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어떤 평판을 받고 싶습니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원하십니까?”
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신앙인으로 성숙한 인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평판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좋은 평판 하나가 열 가지 스펙을 이긴다고 합니다. 탈무드는 “평판은 최고의 소개장이다.”이라고 말합니다. 엘리자베스 아덴은 “평판이 명성을 만들고 그 명성은 고객을 만든다.”라고 말합니다. 사업에서도 그만큼 평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소비자에게 평판이 나쁘면 사업은 망하지만 평판이 좋으면 사업은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처럼 인생은 짧지만 좋은 평판은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기억이 됩니다. 요즈음을 직원을 채용할 때도 평판 조회를 하는 직장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스펙이나 외모, 학벌 등과 같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SNS같은 것을 통해 평소 개인적 성향이나 성격 등을 본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서미림 지음)>라는 책을 보면 우리나라도 평판조회를 진행한 기업이 51.4%에 이르고, 이 결과로 탈락한 지원자도 70%가 넘는다고 합니다. 경력직원을 채용할 때는 대기업 57%가 평판조회를 하고 94%가 평판 조회 결과로 채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취업할 때 면접하러 가기 전에 이미 평판이 도착해 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인터넷에 아무 글이나 사진을 올리는 젊은이들이 있는데 인터넷에 아무것이나 올리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을 것들을 올렸다가 어느 순간 주홍글씨를 달고 파멸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좋은 평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평판의 힘(주희진 지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100명이 넘는 사람들과 다양한 인터뷰를 하면서 평판관리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갖고 있는 행동습관을 찾아내 3대 원칙으로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이 3대 원칙을 중심으로 좋은 평판을 만드는 21가지 성공원칙과 평판을 망치는 4가지 금기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평판관리 원칙 3가지 중 첫째가 좋은 인간성입니다. 지난 주 신문에 나온 것처럼 사람을 죽여놓고 죽어야 할 사람 죽였다고 얼굴에 철판깔고 말하는 사람처럼 인격파탄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평판을 좌우하는 첫 번째 영역은 인간성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성 좋은 사람은 주변에 사람들이 저절로 모여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분에 따라 행동이 변하지 않으며, 주변 사람들을 자주 감동시키고, 조직에서 윤활유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 됨됨이로 개인의 역사, 양심, 가치관, 기질, 성격, 성향과도 관련된 것입니다. “약속을 잘 지키는가, 다정한가, 남을 배려할 줄 아는가, 모든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우하는가, 유머 감각이 있는가, 냉소적인가, 권위적인가, 이기적인가” 등의 질문에 답을 해보면 자신의 인간성 점수를 체크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인간성이 나쁘면 아무리 많은 업적을 쌓고, 실력이 있다해도 좋은 평가는 받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을 보면 참으로 좋은 평판을 받은 에바브로디도라는 사람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분의 인간성은 어떤 것 같습니까?
2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를 "형제"라고 말합니다. 한 아버지를 모신 형제로 영적 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형제란 그리스도인과 같이 쓰이는 말입니다. 그는 바울이 형제라고 서슴없이 부를 수 있도록 확실히 거듭난, 분명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동료라는 것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성숙한 성도로 인간성을 말할 때 먼저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신앙이 좋아야 합니다. 믿음 좋은 사람이 평판이 좋고, 믿음 있는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다음에 개인적인 도덕성입니다. 에바브로디도의 도덕성은 어느 정도인 것같습니까? 그는 빌립보교인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았습니까? “너희 사자로” 보냈다고 말씀합니다. 빌립보교인들이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을 돕기 위해 헌금을 하였는데 그 헌금을 믿고 보낼 수 있는 자로 여겼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대표해서 파송을 할 정도로 돈을 맡길 만큼 정직한 도덕성에 하자가 없는 자라는 말입니다. 돈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은 도덕성이 좋은 사람입니다. 요즈음도 장관 청문회로 시끄러운데 대부분 돈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직무능력, 직무에 대한 성실성, 청렴성, 애국심 등과 같은 것인데 도덕성 검증에 온통 매달립니다.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까지 발가벗겨 의혹을 제기하고 죄를 고백하라고 강요합니다. 주로 다루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 병역, 이성 문제입니다. 그중에 중요한 것이 돈과 관련된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존 웨슬리(John Wesley)는 아주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지갑이 회개하지 않은 사람의 회개는 신뢰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성숙한 인격자로 좋은 평판을 듣는 데는 돈을 어떻게 벌고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어느 침례교회에서 침례식이 거행되고 있는데, 한 성도가 들어오지 않고 머뭇거렸다고 합니다. 왜 안 들어오느냐고 하니까 지금 지갑이 여기 있어서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님, 당신의 지갑도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어느 날 청문회 때 도덕성에 걸리면 평생 쌓아놓은 평판이 하루아침에 무너집니다. 상처는 고칠 수 있지만 나쁜 평판을 고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 번 낙인이 찍히면 쉽게 벗어날 수 없습니다. 돈으로 예수님을 인신매매한 유다의 나쁜 평판은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 잘 아는 사람들에게 에바브로디도처럼 도덕성에 인정받을 만큼 예수님을 닮은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신앙인으로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하여 사명을 완수하는 능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품과 재능이 없는 사람을 사람들은 폐품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재능은 없고 인품만 있는 사람은 반제품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인품은 없고 재능만 있는 사람은 위험물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훌륭한 인품과 재능을 동시에 겸비한 사람을 최상품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평판의 힘(주희진 지음)>에서 평판관리 원칙 첫 번째가 좋은 인간성이고 두 번째가 뛰어난 업무능력이라고 말합니다. 평판을 구성하는 두 번째 영역은 업무능력, 즉 성과 창출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회사에서 좋은 평판을 받으려면 핵심역량에 집중하여 결과를 만들어 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업무능력을 높이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커뮤니케이션 능력, 중간보고를 잘하는 습관, 무능한 상사라도 잘 모시는 태도 등을 들고 있습니다. “성과를 만들어 내는 사람인가, 추진력 있게 일 처리를 하는가, 자원 동원력이 있는가, 문제 해결 능력이 있는가, 목표 달성을 위해 협력할 줄 아는가, 일에 에너지를 집중시킬 수 있는가, 실패를 통해 성장해 가는가, 꾸준히 발전하고 있는가, 개인의 성과와 조직의 성과를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가” 등의 질문에 답해 보면 자신의 업무능력을 평가할 수 있다고 합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다시 빌립보교회에 보낸다고 하면서 그들에게 어떤 부탁을 합니까? 2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두 가지를 부탁합니다. 첫째는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충심으로 기뻐하며 그를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존경받고 존대 받을 사람으로 가치 있게 여기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30절을 원문에는 ‘왜냐하면’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3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로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일 때문에 생명을 건 수고를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네로 황제가 기독교도들을 엄청나게 박해할 때 일반인들은 기독교도들을 식인종 혹은 불륜(不倫)을 일삼는 이들이라고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 집단의 괴수인 바울을 디도처럼 심방하고 면회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을 대신하여 그들 모두가 와서 바울을 섬길 수 없으니까 자신이 그들이 하지 못한 것까지 사도바울을 섬기기 위해 생명을 건 수고를 당담했다는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가 파송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졌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빌립보 교인들을 대신한 사역이었습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죽도록 충성을 했다는 말입니다(계2:10).
그러면 에바브로디도가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2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게 되었다는 말은 거의 죽음에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다랐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떻게 했습니까? 저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기적적인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근심도 면하게 해 주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병으로 죽었다면 얼마나 빌립보교인들이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그것을 염려한 바울의 근심도 에바브로디도를 하나님께서 살려주심으로 바울의 근심도 덜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데 어떤 평가를 받기를 원하십니까? 공부하는 사명, 사업하는 사명, 가정을 일으키는 사명, 전도의 사명, 교회 부흥의 사명 등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어떻게 감당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까?
8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역을 얼마나 성과 있게 감당하고 있습니까? 목회자로, 장로로, 집사로, 권사로, 교사로, 성가대로, 사장으로, 직원으로, 아버지로, 어머니로, 아들딸로 얼마나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3.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신앙인으로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평판의 힘(주희진 지음)>에 의하면 평판관리 원칙 첫 번째가 좋은 인간성이고 두 번째가 뛰어난 업무능력이라고 말하고 세 번째는 긍정적 조직 마인드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인간성이 좋고 일을 잘해도 함께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함께 어울리기 힘든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함께 어울렸을 때 더욱 시너지를 내는 조직 마인드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조직 생활은 결국 단체생활인데 함께 있을 때 더욱 빛이 나는 사람이 오래 남는다고 합니다. 세 번째 영역인 긍정적인 조직 마인드는 조직 적응력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합니다. 조직원으로서 소속된 조직의 문화와 제도, 관습과 규범, 가치관 등에 부합하는가가 기준이라고 말합니다. 긍정적인 조직마인드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인가,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인가, 조직에 도움이 되는가, 개인과 조직의 발전에 기여하는가, 팀워크를 형성하고 촉진하는가,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때로는 조직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우선순위에 둘 수 있는가, 성과를 독식하지 않고 공정하게 배분할 수 있는가” 등을 점검해 보라는 것입니다. 조직을 세우는데 방관자나 파괴자가 아니라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회사에서 좋은 평판을 받으려면 긍정적인 조직 마인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독불장군으로 혼자 잘난 체하며 조직을 파괴하는 자가 되면 좋은 평판을 받지 못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는 신앙생활 잘 하는 것같습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덕을 끼치지 못하고 자기 자랑하려다 교회를 욕하고 지도자들을 비난함으로 전도의 문을 막고 지도자들에 대한 평가를 부정적으로 만들어 교인들의 열심을 떨어뜨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로 개인적으로 받습니다. 삶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함께 더불어 사는데는 커다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목표가 있습니다. 바울에게 헌금하여 선교비를 보내는 빌립보교회의 교인들이나, 선교하다 로마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이나, 바울과 함께 사역하는 동역자 디모데나, 죽기에 이르도록 헌신한 에바브로디도나 다 그렇게 사역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30절에 나와 있는 것 처럼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서입니다. 디모데도 마찬가지입니다. 2장 22절을 보십시오.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습니다. 왜 빌립보 교회가 어려운 중에서 선교 헌금을 해서 바울에게 보내었겠습니까? 4장 15절을 보세요. 내 일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내 일이란 무엇이겠습니까? 1장 18절을 보십시오.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했습니다. 복음 전하는 일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로 이일에 목숨을 걸고 참여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에바브로디도를 평가할 때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함께 수고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함께 일한 동역자라라는 말입니다.
함께 군사된 자라고 말합니다. 자신과 함께 복음을 위하여 대적자들에 대항해서 목숨을 걸고 싸운 자라는 말입니다. ‘함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함께'를 빼버린 행복이란 자기 만족이 될 수 있고, 함께하지 않는 대화는 독백에 불과하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슬퍼하고, 함께 희망을 가지면 힘겨운 삶은 가벼워지고, 무기력한 삶을 활기를 띠게 됩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만들 때 돕는 배필로 만들었습니다. 감시하는 배필, 괴롭히는 배필, 비판하는 배필, 이용하는 배필, 대적하는 배필, 자랑하는 배필, 잘난 체하는 배필로 만들지 않고 돕는 배필로 만들었습니다. 함께 성공하는 사람, 함께 사귀는 사람, 함께 시간을 보낼 줄 아는 사람, 함께 짐을 지워주는 사람, 함께 사막을 걸을 수 있는 사람, 함께 끝까지 동행하는 사람, 함께 땀을 흘리는 사람, 함께 소중한 것을 공유하는 사람으로 우리는 평가받아야 합니다. 좋은 가정을 만들려면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들이 함께 수고하고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긍정적인 조직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함께 교사로, 성가대로, 주방 봉사로, 화장실 청소로, 차량 안내로, 차량 운전으로, 헌금으로, 선교로, 예배 참여로, 기도로 열심히 동역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어제 아이들이 대형 찬양 집회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물론 그런 집회에 가서 찬양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금요 기도회에 나와 찬양하고 기도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가 찬양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대형집회에 가면 나는 찬양 인도할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구경꾼이나 참여자로 설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 생활은 소자 하나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하는 것도 천 번 텔레비전 광고를 보는 것보다 내가 한 번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자꾸 자신을 종교 소비자로, 구경꾼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됩니다. 참여 수의 많고 적음이나 분위기의 좋고 나쁨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내가 섬기는 교회라는 큰 목표, 이 교회에서 내게 주신 사명을 놓고 참여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나무라도 홀로 서 있으면 숲은 될 수 없습니다. V자로 대형으로 날아가는 철새는 한 마리씩 따로 이동할 때보다도 71% 정도 빨리 날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두께 2인치, 폭 4인치의 각목 하나가 지탱할 수 있는 최대 하중은 167kg이고 두 개가 따로 사용되면 334kg을 지탱할 수 있답니다. 그런데 똑같은 각목 두 개를 접착제로 붙여 사용하면 최대 하중이 2,212kg이나 된다고 합니다. 무려 1,878kg이나 차이가 납니다. 협동하면 시너지(Synergy) 효과가 나타납니다. 아무리 멋진 춤이라고 홀로 춤을 추면 피곤한 것입니다. 오늘날같이 복잡한 세상에서는 무엇보다 팀플레이가 중요합니다. 자동차는 약 2만여 개의 부속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2만여 개의 부속품이 하나처럼 맞물려 돌아갈 때 비로소 자동차는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합한 두 사람은 흩어진 열 사람보다 낫다"라는 말이 있듯이 누가 잘하느냐보다 함께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도서 4:12).
같이 하다 보면 함께 못할 일이 얼마나 많이 있었겠습니까?
바울이라고 완벽한 사람이겠습니까?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을 설교 잘하지 못한 자라고 했습니다. 외모가 변변치 않다고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온다로 약속해 놓고 오지 않았다고 이중인격자라고 했습니다. 돈만 좋아한다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에게 단점이 있어도 그래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가 되어 수고했다는 것입니다. 단점 없는 사람이 어디 있고 흠 없는 조직이 어디 있겠습니까? 심지어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인신공격적인 말들과 모욕적인 표현 등으로 비방과 비난을 쉬지 않고 받았습니다. "목수의 아들", "배우지 못한 자", "창기와 세리 등 죄인들과 어울리는 자", "안식일과 같은 율법을 어기는 자", "귀신 씌운 자" 등 수 없는 꼬리표를 붙여 비난받았습니다. 조직에 대한 긍정 마인드를 가져야 합니다. 내가 부정적인 생각으로 조직을 비난하면 내가 몸담은 조직의 평판이 나빠지고 결국, 내 얼굴에 침을 뺏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인품을 가지고 뛰어난 재능으로 많은 성과를 내었다고 해도 공동체에 피해를 주로 공동체를 무너뜨리면 그 사람은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인 노벨상을 만든 알프레트 노벨에 관한 유명한 평판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다이나마이트로 큰 명성과 돈을 벌었습니다. 1888년 그의 동생 루드비그 노벨이 사망했는데, 한 신문사가 잘못 알고 “죽음의 상인, 사망하다!”라는 기사를 내었답니다. 기사 내용은 많은 사람을 더 많이, 더 빨리 죽이는 방법을 개발해 부자가 된 죽음의 상인 노벨이 죽게 됐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노벨은 기사에서 자신을 ‘죽음의 상인’이라고 칭한 것을 보고 큰 충격에 빠졌답니다. 평생, 동안 독신으로 살면서 명성과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만든 무기가 사람을 대량 살상하는 것이 되어 공동체에게는 피해를 끼치는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런 무기를 만들면 평화로워질 줄 알았는데 전쟁터의 살상 무기가 되어 아버지를 죽이고, 아들을 죽이는 무기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는 깊은 고민 끝에 7년 후 1895년 자신의 전 재산으로 의미 있는 상을 만들겠다고 발표했답니다. 그 상이 바로 ‘노벨상’입니다.
평판이 좋은 사람은 자기 잘 먹고, 잘 살자고 남에게 피해는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 잘난 체하자고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만 살자고 공동체에 피해를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파괴자가 아니라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요즈음 일본과 경제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사람들의 태도를 보십시오. 국가 전체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자기 정파와 자기 정당의 유리한 측면으로 해석을 하고 대처함으로 오히려 일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우리 민족에게는 더 피해를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정당, 이런 사람들은 결국, 시간 지나면 평판이 좋지 않습니다. 빈대 잡으려고 하다가 초가삼간 다 태우면 아무리 불 지르는 기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 사람은 결국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으로 남을 수 없습니다.
에바브로디도를 보십시오. 사람과 어떤 관계를 가졌는지 잘 살펴보세요.
2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의 대인관계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교회에 돌려보내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는 빌립보 교인들을 간절히 사모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만나기를 간절히 열망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을 때는 보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보고 싶고 사모한다는 것은 사랑하고 있다는 좋은 증거입니다. 상대를 원수나 이용의 대상, 미움의 대상,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으로 보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아주 강조하였습니다. 율법사가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물어봅니다. 그때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라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했는지는 그다음 구절에서 바로 나타납니다.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또 다른 이유는 자기가 병든 것을 빌립보 교인들이 들은 줄 알고 그것을 근심하였다고 말합니다. 부모가 자기가 병들면 자식들이 어려움 당할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자신의 질병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빌립보 교인들이 자신의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더 염려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히 근심하다는 단어는 신약에서 3번밖에 쓰이지 않았는데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통을 당하실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마26:37; 막14:33). 자신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그들이 마음 아파할 것을 생각할 정도로 에바브로디도 <평판의 힘>을 쓴 주희진의 말을 빌리자면 긍정적인 조직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만큼 자기중심이 아니라 같은 공동체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도 가정은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헌신하는 부모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내가 순교하더라도 복음은 전파되어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해야 한다고 순교하는 순교자와 같은 마음입니다. 내가 손해더라도 교회는 부흥되어야 한다고 헌신하는 성도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내 잘남을 들어내기 위해 가는 곳마다 분쟁을 야기시키고 가는 곳마다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과 다른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도와주고, 위로해 주고, 기쁨을 줌으로 공동체를 더욱 발전시키고 빛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에바브로디도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좋은 평판을 얻게 됩니다.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빌 2:25-30 / 박상훈 목사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오늘 본문 28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의 “너희”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또한 여기서의 “그”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로마에 있는 바울에게로 보낸 에바브로디도를 가리킵니다.
행18:3 말씀과 같이, 바울의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에서 그의 셋집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생업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바울을 위해서 많은 물질을 마련했습니다.
그들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에바브로디도를 로마로 보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준비한 많은 물질을 에바브로디도 편으로 바울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에바브로디도에게 로마에 머물며 바울의 옥바라지를 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가 로마에 온 후, 그만 병들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전하여졌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자기가 병든 것을 그들이 들은 줄을 알고서 심히 근심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이 에바브로디도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의 병을 낫게 하셨습니다. 이에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돌려보냈습니다. 이 때 바울은 편지를 써서 에바브로디도 편으로 그들에게 보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빌립보서였습니다.
빌립보서에 기록된 대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기 바랐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절로 하나 될 수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바울은 예수님을 본받은 세 사람을 차례대로 예로 들었습니다. 바울 자신과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사도였습니다. 디모데는 안수 받은 목회자였습니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는 사도도 아니었고, 안수 받은 목회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평범한 성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을 본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본받는 것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에바브로디도처럼 평범한 사람도 예수님을 본받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에바브로디도가 보여준 믿음의 모습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에바브로디도는 그가 맡은 일에 충성했습니다.
빌2: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아직은 바울이 하는 일에 디모데가 꼭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형편이 허락하는 대로, 디모데를 곧 그들에게 보내기를 바랐습니다.
그 대신 오늘 본문 말씀대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그들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가 마련한 물질을 바울에게 전하며 한동안 바울의 옥바라지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돌려보낸다고 말씀하지 않고 그를 보낸다고 말씀했습니다. 이는 에바브로디도가 꽤 오랜 동안 바울과 함께 있었던 것을 뜻합니다. 아무튼 빌립보 교회는 에바브로디도가 끝까지 바울 곁에 머물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로 돌아왔습니다. 뜻밖에 돌아온 그를 보면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의아스럽게 여겼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가 맡은 일에 충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이 못마땅해서 그를 돌려보냈을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그와 같이 잘못된 생각을 가지지 않도록,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적극 옹호하며 칭찬했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에게 다섯 가지 호칭을 부여하면서, 그가 맡은 일에 충성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앞의 호칭 세 가지는 “나의”라는 대명사와 연결되고, 뒤의 호칭 두 가지는 “너희”라는 대명사와 연결됩니다. 다시 말해서 “형제,”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는 바울과 관련된 호칭이며, “사자,”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는 빌립보 교회와 관련된 호칭입니다.
첫째, “나의 형제요”입니다.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반면에 에바브로디도는 무명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자신의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낮추고 에바브로디도를 높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보면, 성도는 모두 형제입니다. 그렇지만 특별히 “나의 형제”라는 호칭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에게 많은 애정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둘째, “함께 수고하고”입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한 단어입니다. 그리고 명사형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한 단어로 줄이면 동역자가 될 것입니다. 또한 앞에 나오는 대명사 “나의”가 이 단어와도 연결됩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그의 동역자로 여겼습니다.
바울과 에바브로디도 그들 두 사람이 받은 은사와 맡은 직분과 하는 사역은 다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수고하기는 똑같습니다. 바울은 그의 사역이나 에바브로디도의 사역이 동일하게 소중하고 요긴함을 밝혔습니다.
셋째, “함께 군사 된 자요”입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이것 역시 한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와도 앞에 나오는 대명사 “나의”가 연결됩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나의 전우”라고 호칭하면서, 그를 매우 높였습니다.
신앙에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그의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복음을 위한 사역에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그의 동역자라고 불렀습니다. 영적 전투에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그의 전우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점점 더 높였습니다.
넷째, “너희 사자로”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바울에게 보낸 그들의 사자였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를 떠나 로마에 와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바울을 위해 마련한 많은 물질을 안전하게 바울에게 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에게 그들의 사랑과, 또한 그들이 계속해서 바울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약속도 전해주었을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에서 보냄을 받은 사자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므로, 분명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다섯째,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입니다.
더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나의 필요들을 돕는 자라”입니다. 바울에게는 먹을 것과 입을 것 등 그가 쓸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바울에게는 그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을 안내하는 일도 역시 필요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에게 온 것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사랑만을 전해주려 함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바울에게 온 것은 바울 곁에 머물며 바울의 여러 가지 필요를 지속적으로 도와주려 함이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이 일 역시 충실하게 감당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그의 형제, 그의 동역자, 그의 전우라고 부르면서 그를 높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교회의 사자로 바울 곁에서 바울의 여러 가지 필요들을 잘 도왔음을 인정하며 칭찬했습니다.
에브로디도는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안수 받은 목회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평범한 무명의 인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바브로디도는 자기가 맡은 일에 충성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많은 칭찬을 받았으며 아울러 높임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달란트는 다섯이 아닐 수도 둘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저 한 달란트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각자가 맡은 일에 충성하기 바랍니다. 우리의 달음질과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날에 주께로부터 칭찬과 높임을 받습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우리 모두 맡은 일에 충성하여, 주께로부터 이런 칭찬과 높임을 받기 바랍니다.
둘째로, 에바브로디도는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았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그가 맡은 일에 충성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자기 일을 충성스럽게 돌볼뿐더러 또한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았습니다. 그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이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빌2:26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앞 절에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칭찬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그가 맡은 일에 충성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를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그 까닭을 여기서 밝힙니다.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사모하고.” 현재분사입니다. 계속해서 끊임이 없이 사모하는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계속해서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를 그들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에바브로디도가 향수병에 걸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일 에바브로디도가 향수병으로 말미암아 그가 맡은 일을 중단하려고 했다면, 바울은 그를 칭찬하며 높이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26절 후반부 말씀입니다.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었습니다. 어떻게 하다가 또한 어떤 병이 들었는지는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절에 있는 말씀처럼,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죽을병에 걸린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에바브로디도가 병든 것을, 그가 병들어 죽게 된 것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로마로 여행을 갔다 온 사람을 통해서 들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 일로 인해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모두 근심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에바브로디도는 자기가 병든 것을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들은 줄 알았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자기 때문에 그들이 근심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에 에바브로디도는 심히 근심했습니다. 역시 현재분사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몹시도 근심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근심한 것은 자기가 병들어 죽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 때문에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근심하고 있음을 알고서 심히 근심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그들을 간절히 사모했던 것은 그들의 근심을 덜어주려 함이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병든 것을 듣고,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걱정했습니다. 그들이 걱정하는 것을 알고, 에바브로디도가 심히 근심했습니다. 이는 바울의 마음에 아픔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그들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그들에게 가면, 그들의 걱정은 없어질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도 그의 근심을 면할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마음에 있는 아픔도 사라질 것입니다. 따라서 모두가 좋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그들에게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들의 관계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바울도 에바브로디도도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도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았습니다. 우리도 따뜻한 마음, 다정한 마음,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기 바랍니다.
빌2:27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심한 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러니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그를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물론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므로, 바울이 그를 돌려보내려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하나님이 에바브로디도를 긍휼히 여기셔서, 그를 죽을병에서 고쳐주셨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에바브로디도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다면, 그는 죽었을 것입니다.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어야 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이 연장되는 것과 오늘도 살아 숨 쉬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것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27절 후반부 말씀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에바브로디도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살아났습니다. 이에 바울은 하나님이 에바브로디도뿐만 아니라 자기도 역시 긍휼히 여기셨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그 까닭을 이와 같이 설명합니다.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앞의 근심은 에바브로디도가 병든 것에 대한 바울의 근심입니다. 뒤의 근심은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어 죽을 경우 그를 잃는 데서 오게 될 바울의 근심입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었을 때,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도 근심했고 에바브로디도도 근심했고 바울도 근심했습니다. 만일 에바브로디도가 죽으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근심은 더하여질 것입니다. 또한 그로 인해 바울의 근심도 더하여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에바브로디도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를 살려주셨습니다. 이에 그들 모두의 근심이 깨끗하게 전부 다 사라졌습니다. 따라서 바울 편에서 보면, 이는 하나님이 바울을 긍휼히 여기사 그의 근심 위에 더하여질 근심을 면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빌2:28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에바브로디도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급히 그를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냈습니다. 물론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이 자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면 왜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더욱 급히 그들에게 보냈습니까?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그들은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어 죽게 된 것을 듣고서 근심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그들은 살아 돌아온 에바브로디도를 다시 보고 기뻐할 것입니다.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었을 때,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근심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에바브로디도도 근심했습니다. 또한 바울도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과 에바브로디도를 생각하며 근심했습니다. 모두가 근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에바브로디도는 하나님의 긍휼로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따라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에바브로디도를 다시 보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바울의 근심도 덜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더욱 급히 그를 그들에게 보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빌2:3∼4 말씀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바울도 에바브로디도도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도 자기 일만 돌보지 않았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에바브로디도의 일을 돌보았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그들의 일을 돌보았습니다. 바울은 그들 양자의 일을 돌보았습니다. 아무도 자기만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한 마음, 곧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다른 사람들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일에 온전한 본을 보이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서로 따뜻하게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기 바랍니다.
셋째로, 빌립보 교회는 에바브로디도를 존귀히 여겨야 했습니다.
빌2:29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급히 빌립보로 보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빌립보 교회나 에바브로디도나 바울 자신에게나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므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들이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습니다. 먼저 “주 안에서”입니다. 그들은 주를 대하는 심정으로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해야 했습니다. 또한 “모든 기쁨으로”입니다. 조금이라도 에바브로디도를 탓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그들에게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말씀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에바브로디도를 존귀히 여겨야 했습니다.
그들의 보냄을 받아, 에바브로디도는 자기 집을 떠났습니다. 그리고는 멀리 로마로 갔습니다. 그 곳에서 에바브로디도는 그가 맡은 일에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그러므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에바브로디도를 존귀히 여기며, 그를 높여주어야 마땅했습니다.
빌2:30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앞 절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해야 하고, 또한 더 나아가서 그들이 에바브로디도를 존귀히 여겨야 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 30절에서 바울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요약해서 밝힙니다.
먼저 에바브로디도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일을 하다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그리스도의 일을 빙자하여 그의 유익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온전히 자기를 희생했습니다.
아울러 에바브로디도는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고 바울을 섬기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했습니다. 빌립보와 로마 사이에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대신하여,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을 섬기는 일에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이처럼 에바브로디도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또한 그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대신하여 바울을 섬기는 일에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며, 또한 그를 존귀히 여겨야만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로, 에바브로디도는 그가 맡은 일에 충성했습니다. 둘째로, 에바브로디도는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았습니다. 셋째로, 빌립보 교회는 에바브로디도를 존귀히 여겨야 했습니다.
우리도 크든 작든 우리가 맡은 일에 충성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만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일도 관심 있게 돌보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도 존귀히 여겨지며, 특별히 그리스도의 날에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17)
빌 2:25-30, 4:10,18 / 김명혁 목사
오늘은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17번 째 설교를 합니다. 지난 주일, 큰 별을 만든 작은 별들이 있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큰 별 한경직 목사님을 만든 작은 별들이 있었고, 큰 별 사도 바울을 만든 작은 별들이 있었다고 말씀했습니다. 큰 별 한경직 목사를 만든 작은 별들 중에 김기범 장로가 있었고, 큰 별 사도 바울을 만든 작은 별들 중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있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물론 바울에게는 방해자도 있었고 방관자도 있었지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같은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도 방해자와 배신자도 있었지만 동역자와 협력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방해자와 배신자는 아예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뻔 했다고 말씀한 일이 있습니다. 남을 비난하고 남을 실족케 하는 사람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낫다고 경고하신 일도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큰 별 바울을 만든 작은 별 하나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 작은 별은 바울의 형제 에바브로디도였습니다.
1.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로마 감옥에 갇혀 있던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고 부탁한 일이 있습니다. 딤후4:9 이하의 편지를 읽으면 그 때 사도 바울이 디모데의 도움을 얼마나 간절히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됩니다. 에베소에 있던 디모데에게 겨울 전에 속히 오라고 두 번씩이나 부탁을 했습니다. 자기를 돕는 동역자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해서 자기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다른 동역자들은 다른 일이 있어서 다른 데로 보냈다고 했습니다. 누가만 로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알렉산더는 자기에게 해를 많이 보였고 자기 말을 심히 대적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드로아 가보의 집에 있는 겉옷 외투를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또 몇 권의 책도 두고 왔는데 그 책도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춥고 외로웠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순교를 각오하고 있는데 순교하기 전에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보고 싶었고 마지막 부탁할 말을 전해 주고 싶었습니다. 이제 딤후4:9-16,21을 읽습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우리는 디모데가 바울의 편지를 받고 겨울 전에 로마로 달려 왔는지 그래서 바울을 돕다가 바울이 순교할 때 곁에 있으면서 최후의 봉사를 했는지 모릅니다. 혹 여러가지 얽매이는 일들 때문에, 하루 이틀 지체하다가 겨울 전에 떠나는 마지막 배를 놓치고 부득이 다음해 봄에 로마에 왔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미 사도 바울이 순교 당한 것을 발견했다면 그것이야말로 디모데에게 있어서는 천추의 한이 되었을 것입니다.
2.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편지를 쓰기 수년 전에 같은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서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에는 누구를 오라고 하는 말도 없었고 무엇을 가지고 오라는 말도 없었습니다. 그 편지에는 사도 바울이 그저 기뻐한다고 했고 그저 감사한다고 했을 뿐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에바브로디도가 자기에게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사랑의 편지들과 사랑의 선물을 한 보따리 싸 가지고 로마 감옥으로 달려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빌4:10).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4:18). 물론 그때는 디모데도 바울과 함께 로마 옥에 잠시 머물고 있었습니다. 디모데와도 함께 있었고 에바브로디도와도 함께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저 기뻐했고 그저 감사했습니다. 기쁨과 행복은 어느 곳에 있느냐 보다는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사랑의 편지들과 사랑의 선물을 한 보따리 싸 가지고 사도 바울에게 달려왔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보다 찬란하게 빛나는 큰 별이 되었습니다. 사랑과 감사와 기쁨의 빛이 찬란하게 발하는 큰 별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의 편지들 중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편지입니다. 빌립보서에는 주옥과 같이 빛나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1:3,4). "내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1:8).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1:12).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1:20).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2:5).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2:17).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3:8).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4).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 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4:11,12).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는 말이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사랑의 편지들과 사랑의 선물을 한 보따리 싸 가지고 사도바울에게 달려왔기 때문에 바울은 보다 찬란하게 빛나는 큰 별이 되었고 빌립보서는 바울의 편지들 중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편지가 되었습니다. 이제 에바브로디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3.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1.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의 형제였습니다. "그는 나의 형제요" 라고 했습니다. 형제란 말은 기독교에서 생긴 말입니다. 십자가의 피로 형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성이 같기 때문에 가문이 같기 때문에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 때문에 형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형제냐고 질문하시면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12:50)고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사울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아나니아는 사울을 가리켜 "형제 사울아"(행9:17)라고 불렀습니다. 기독교에서 형제는 가장 친밀하고 가장 가까운 사이입니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사이입니다. 기도를 함께 나누고 교제를 함께 나누고 봉사를 함께 나누고 물건을 함께 나누고 생명을 함께 나누는 사입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는 평신도였지만, 아마 빌립보교회의 집사들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사도 바울에게 형제가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형제가 되어준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누군가가 나와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형제가 되어준다면 나는 얼마나 기쁜 사람인지 모릅니다. 모두가 나에게 등을 돌리고 모두가 나를 외면하고 또는 비난까지 하는 세상인데, 누군가가 나에게 가까이 와서 나와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형제가 되어 준다면 나는 가장 행복하고 가장 기쁜 사람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사도 바울에게 형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서로 형제가 되어주는 것 자체가 예수님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이 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13:35). 에바브로디도는 사도 바울에게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함께 수고했습니다. 여기 함께 수고했다는 말은 동역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의 동역자가 되어서 바울과 함께 수고했습니다. 사람은 함께 수고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실 기도도 수고이고 전도도 수고이고 봉사도 수고인데 사람들은 함께 수고하기를 싫어합니다. 사도 바울은 평생 누구보다도 수고를 많이 했는데 에바브로디도는 바울과 함께 수고를 많이 한 바울의 형제였고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함께 군사가 되어서 영적인 전쟁을 함께 수행했습니다. 즉 바울과 함께 영적 전쟁인 전도를 했다는 말입니다.
2.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교회의 사자였습니다.
그는 "너희 사자"라고 했습니다. 영어로는 메센저라고 했습니다. 심부름꾼이라는 말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신임과 신뢰를 받아 그들의 사자가 되었고 그들의 심부름꾼이 되었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자기들의 사랑의 편지들과 사랑의 선물 보따리를 그에게 다 맡겨버렸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사신으로서 저들의 사랑의 편지들과 사랑의 선물들을 가지고 와서 바울에게 그대로 다 전달했습니다. 자기의 일을 다 제쳐놓고 교회의 일을 했습니다. 자기의 일을 다 제쳐놓고 배를 타고 먼 길을 항해해서 로마까지 왔습니다. 교회의 사자가 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자기의 직업을 제쳐놓고 러시아나 중국이나 방글라데시나 그리스나 헝가리에 있는 선교사에게 사랑의 선물을 가지고 며칠 동안 여행을 하고 그리고 거기 몇 달을 머무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교회의 충성스러운 사자였습니다. 바울은 너무 기뻤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빌4:18). 편지와 선물을 받은 바울은 너무 기뻤습니다. 인생은 편지요 나눔이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바울의 쓸 것을 도왔습니다. 의식주의 필요한 것들을 도와드렸습니다. 마치 고린도와 에베소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부부가 사도 바울의 의식주를 도와드렸던 것처럼 에바브로디도는 로마 감옥에서 사도 바울의 의식주를 도와드렸습니다. 바울은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기쁨을 누렸습니다. 인생은 봉사이기 때문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충실한 교회의 사자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나라에는 주인 노릇 하려는 사람보다는 메센저와 심부름꾼 노릇 하려는 사람들이 더 필요합니다. 사실 바울 자신도 예수님의 사자였고 예수님의 심부름꾼이었는데 에바브로디도도 빌립보교회의 사자였고 빌립보교회의 심부르꾼이었습니다.
3. 에바브로디도는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희생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30).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그리고 바울을 섬기기 위하여 에바브로디도는 자기의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죽을 병에 걸렸다고 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바울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을 내어놓았는데 에바브로디도도 바울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았습니다. 목숨을 내어 놓는 일 그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생명보다 귀하다는 것을 실제로 증거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증인이라는 말의 뜻은 죽음 또는 순교라는 말입니다. 죽음이 가장 확실한 예수 증거입니다. 폴리캅도 주기철 목사도 죽음으로 예수를 가장 분명하게 증거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자기 목숨을 내어 놓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바울이라는 큰 별이 더욱 더 찬란하게 빛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생의 애착과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를 격려할 때 그 별들의 빛은 보다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 천국의 빛을 그대로 받아서 비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 별이 죽음의 강을 건널 때 더욱 더 찬란하게 빛났던 것처럼, 로마 감옥에서 이미 죽음의 강을 넘은 에바브로디도의 작은 별과 사도 바울의 큰 별이 서로 빛을 발했을 때 천국의 빛을 받아 더욱 더 찬란하게 비추므로 로마 감옥 안을 환하게 했을 것입니다. 사람은 생에 대한 애착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캄캄하게 어두워지고 그것에서 벗어날 때 밝고 환하게 빛나게 됩니다. 우리는 무질서하고 부도덕하고 불신앙적인 삶의 결과로 말미암은 병에는 걸리지 말아야 하지만 주님의 일을 하다가 병에 걸리는 것은 오히려 영광입니다. 데이빗 브레이너드는 주님의 복음을 인디언들에게 전하는 일에 너무 수고를 많이 하다가 온 몸에 갖가지 병을 다 지니게 되어 결국 29살이라는 꽃 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보다 더 값진 삶을 산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주님의 일을 위하여 바울을 섬기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은 희생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에바브로디도가 죽을 병에 걸린 지 수 개월 후 하나님께서 에바브로디도와 바울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에바브로디도가 죽을 병에서 고침을 받았고 그래서 바울의 편지를 가지고 빌립보교회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큰 별 사도 바울을 만든 작은 별들 중의 한 별이었습니다. 큰 별 바울이 만들어지는 데는 작은 별들이 필요했습니다. 동역자들이 필요했고 형제들이 필요했고 함께 수고하는 사람들이 필요했고 심부름꾼들이 필요했고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하늘에서 빛나는 에바브로디도 별은 아마 "바울의 형제" "바울의 동역자" 별이라는 이름을 얻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큰 별을 만드는 작은 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서로 형제가 되고 서로서로 동역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번에 농어촌 목회자들 여섯 가정을 초청하여 서로 교제하고 서로 사랑을 나누면서 형제들이 되었고 동역자들이 되었습니다. 성경하 목사는 "마치 소풍 나온 어린이처럼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헌신적으로 섬겨주신 장로님들과 집사님들 덕분에 잠시 애환을 잊을 수가 있었습니다." 라고 고마움을 표현했고 김봉욱 목사는 "참으로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농어촌 목회자들을 초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쉬게 하고, 더 구경하게 하고, 더 먹여 주려고 애써 주신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라고 고마움을 표현했고 유익순 목사는 "지난 몇일은 강변교회의 사랑을 많이 누린 날이었습니다. 한 없는 사랑과 반가움으로 맞이 해 주신 김 목사님, 사모님...장로님들...먼 발치에서 달려와 주신 한권사님...그리고 그동안 자주 대하지 못했던 여러 교우들...청년들에 이르기까지... 마치 친정집에 들른 새댁 같이 마냥 들뜬 시간들이었습니다." 라고 고마움과 즐거움을 표현했습니다. 우리 모두 서로 형제들이 되고 서로 동역자들이 되므로 하늘에 빛나는 작은 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서로 형제들이 되고 서로 동역자들이 되므로 하늘에 빛나는 작은 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와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빌립보서 2:25-30 / 정필도 목사
교회 안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입니다. 신자들만 모이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들도 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가 어떤 곳인지 구경 삼아 오기도 하고, 총각들은 착실한 아가씨를 만나기 위해 오기도 하며 심지어 장사하려고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믿는 접촉점이 되기도 합니다.
또 교회 안에는 성령으로 거듭난 참신자도 있고,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진실한 신자가 있는가 하면 교회 오면 신자같으나 세상에 나가면 세상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 이중적인 생활을 하는 형식적인 신자도 있습니다. 더구나 세례교인으로써 제직으로써 맡은 바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모범적인 신자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할 수 없어서 못하는 사람과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사람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 할 수 있는데도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다 귀한 사람들입니다. 귀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존귀히 여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사명감을 가지고 주님의 몸된 교회에 충성하는 일군신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목숨까지 바쳐 교회를 지키고 충성하는 일군신자야말로 존귀히 여겨야 할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이런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어떤 교회는 이런 신자가 한 명도 없다 보니 되는 일이 없습니다. 저는 교역자 세미나를 할 때마다, 교회 안에 일군신자 다섯 가정만 있으면 못할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 수영로 교회가 단시일 안에 이렇게 빨리 부흥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신실한 일군 신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975년 12월, 조그마한 방 한 칸을 얻어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오라고 알리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왔는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날로부터 철야기도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단 하루도 교회를 비운 적이 없습니다. 이처럼 무엇이든 아낌없이 드리려고 마음먹은 충성된 일군들을 주님이 보내주셨습니다. 이분들 때문에 교회가 부흥되고 복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는 축복 받은 교회입니다.
이런 일군신자 한 명이 일군신자가 되지 못한 천명보다 훌륭합니다. 부산에도 많은 교회가 있지만, 수백 수천이 모여도 힘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장로 집사 권사는 세웠지만 일군신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일군 신자 한 사람이 그렇게 귀한 것입니다.
일군신자 한 사람을 세우면 그 사람이 모델이 되어 본 받는 사람이 생깁니다. 한 알의 씨앗이 많은 열매를 맺듯이 일군신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일군신자가 점점 많아지게 됩니다. 복음은 이런 사람들을 통해 전파되고 교회가 부흥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신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모든 사람이 존귀히 여기는 일군신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도행전 6장을 보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교회가 부흥되어 신자의 숫자가 몇 만 명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여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일곱 집사를 세워 교회의 크고 작은 일을 감당하게 하여 교회가 크게 부흥되었습니다. 사도행전 6:7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일군신자의 모델이 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에바브로디도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를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함이니 이러므로 너희가 주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어떤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1. 나의 형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형제자매란 같은 부모의 혈통을 이어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형제자매입니다. 영원히 천국에서 함께 살 사람들입니다. 국가와 민족과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형제요 자매입니다.
2. 수고하는 자
이 말은 동역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함께 수고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일 대예배를 드릴 때, 저는 설교하고, 부목사님은 사회보고, 어떤 분은 반주하고, 또 어떤 분은 성가대 지휘를 하고, 성가대 대원으로 성가를 부르고, 안내위원으로 헌금위원으로 외부에서 차량안내로... 이 예배를 위해 다양한 팀이 각자 맡은 일을 수행해 주므로써 예배가 순조롭게 드려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사람들이 동역자들입니다.
특별히 교역자들이 볼 때 소중한 동역자는 조장, 구역장, 권찰들입니다. 이들은 교역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심방하고 출결석을 체크하고 불편한데는 없는지 살핍니다. 이분들도 교역자와 같은 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시기 바랍니다.
스펄젼 목사님이 런던의 메트로폴리탄 교회를 시무할 때, 많은 성도들이 모였습니다. 그 중에 나이 많은 할머니가 하시는 일이 있었습니다. 새신자 명단을 적어오고, 누가 몸이 불편한지 혹은 몸이 아파서 입원했는지 알아보고 집에 있을 때 그분들의 쾌유를 위해 늘 기도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께서 소천하셨습니다. 장례를 치르던 날 스펄젼 목사님께서 이 할머니야말로 나의 가장 훌륭한 동역자였다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종들을 도우며 기도를 해주시든 심방을 해주시든 어떤 일을 맡아서 하더라도 언제나 하나님의 종과 동역자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똑같이 상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그 나라에 가서 선교사가 되지 않았어도 선교사를 위해 기도하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준다면 선교사의 상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비록 몸은 이곳에 있지만 동역자로서 얼마든지 선교사와 똑같은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3. 함께 군사된 자
군인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생명을 바쳐 일하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은 누구나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군병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대장으로 삼고 함께 수고하는 군사입니다. 우리의 대장 되신 주님을 앞세우고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 주님 하시던 일을 그대로 행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4. 나의 쓸 것을 돕는 자
사도 바울은 가는 곳곳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사도 바울을 생각하며 기도해주고 물질로 도와준 교회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는 달랐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아주 특별한 교회로 루디아라는 여성의 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비록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시무하고 있지 않았지만, 사도 바울의 어려운 형편을 알고 늘 돕고자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성도들은 사도 바울을 위해 특별헌금을 하고 에바브로디도는 헌금을 모아 사도 바울이 있는 감옥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과 함께 있으면서 사도 바울에게 필요한 것을 다 마련해주며 섬겼습니다. 이와같이 에바브로디도는 만사를 제쳐놓고 감옥에 갇혀있는 주의 종을 돌보아주는 참으로 보배로운 일군이었습니다. 아마 천국에서 큰 면류관을 받았을 줄 믿습니다.
우리 교회도 26년 동안 놀라운 간증거리가 많습니다. 세계 교회 앞에 자랑거리가 되는 그런 성도들이 이 자리에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 앞에 높이고 자랑하지 않으려 해서 그렇지, 대단히 훌륭한 분들이 많습니다. 제가 책을 쓰게 되면 그분들을 다 쓸 것입니다. 교회를 개척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개척 초기다 보니 헌금이 들쑥날쑥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써야 할 곳이 생겨 간혹 경상비가 모자랄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모자라는 돈만큼 이름을 밝히지 않고 무명으로 강대상에 올라오는 헌금이 있었습니다. 모자랄듯하면 또 채워지는 그런 역사가 우리 교회는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보통 축복이 아닙니다.
더구나 추석 명절이 다가오지만 개척교회가 무슨 여유가 있어서 어려운 성도들을 다 도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때에도 살짝 저를 찾아와 이번 추석 명절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써달라고 가져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교회의 이름으로 하는 이 일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게 교회를 섬기는지 가만히 보면 그 분의 어머니가 훌륭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권사님은 자녀들을 볼 때마다 주의 종들 잘 섬겨라 그래야 복 받는다고 귀가 아프도록 얘기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자녀들이 모두 교회의 일군으로 충성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이런 보배로운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사도 바울을 위해서 그의 곁에 머무르며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며 섬겨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그가 자신의 몸이 병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할 정도로 사도 바울을 위해 충성하며 섬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빌립보 교회는 에바브로디도를 위해 온 교인이 그에 병을 낫게 해달라고 합심으로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 또한 자신을 위해 살아왔던 그가 병이 든 것을 알고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겠으며,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그런데 에바브로디도는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도리어 걱정합니다.
여기에서 저와 여러분은 사랑이 많은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 수영로 교회도 이와같은 교회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진정으로 내 몸이 아픈 것이 걱정이 아니라 나 때문에 걱정하는 교회가 걱정이 되는 에바브로디도의 아름다운 마음을 보십시오!
온 교회가 기도한 대로 기도가 응답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이에 사도 바울을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로 속히 보내 건강하게 회복된 그의 몸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며 이런 부탁을 합니다. 환영하라 그리고 존귀히 여기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대대적으로 환영하라는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이런 부탁을 하지 않았어도 빌립보 교인들은 충분히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도 병들 때가 있습니다. 병이라는 것이 꼭 죄가 있어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가 죽을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눈물을 보시고 기도를 들으시고 15년이나 수명을 연장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오라 하시면 건강한 사람도 죽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도 엘리야 선지자보다 갑절의 영감을 받고 얼마나 능력이 많이 나타났습니까? 그러나 몸이 병들어 죽었습니다. 엘리사가 죽었을 때, 엘리사의 뼈에 다른 사람의 뼈가 닿으니까 그 사람이 살아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죽었습니다. 이는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도 삼층천에 올라가고, 죽은지 14년 된 사람을 만났으며, 큰 기적이 나타나고 말로다 할 수 없는 은혜를 많이 받았지만 육체의 가시가 있어 세 번이나 병 낫기를 간절히 기도했으나 낫지 않았습니다.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자고 할까봐 일부러 하나님께서 고쳐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 건강하다고 교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병든 사람을 정죄하지 마십시오. 믿음의 사람도 주의 종도 얼마든지 병들 수 있습니다. 사단의 공격 중의 하나가 사람을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병이 들면 주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몸이 아픈 것도 보통 위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럴 때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음껏 주의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각양각색의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언제나 문제가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일군신자들은 이 문제를 잘 해결하고 교회가 계속적으로 부흥되게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제직 여러분은 물론이고 성령으로 거듭난 모든 성도들도 일군 신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제직들이 헌신을 다짐하는 이 시간 영광을 받으실 줄 믿습니다. 한 분 한 분 모두가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일군신자 되게 하여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교회가 부산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이 민족을 구원하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능력있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를 위해 살고자 하는 자마다 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건강도 주시기 원합니다. 물질의 복도 주시기 원합니다. 마음껏 주를 위해 바치며 일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꾼(2. 에바브로디도)
빌 2:25-30 / 지태일 목사
오늘은 장로 2인 선출을 위한 공동의회를 앞에 두고, 교회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일군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일꾼인데 어떤 일꾼들이 되어야 합니까? 이제 어떤 사람을 뽑아 준비 훈련시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일하게 해야 합니까?
지난 시간에는 같은 마음, 뜻을 가진 일꾼, 아버지와 같은 사랑을 지닌 일꾼, 그 누구보다 더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 여러 가지 고난도 잘 이겨내며 연단받는 일꾼, 디모데를 통하여 은혜를 받았습니다. 교회에서 이런 일꾼이 되기를 말씀통해 나누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사도 바울이 생각할 때에 빌립보 교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고 일꾼으로 추천을 했던 에바브로디도에 대해 말씀 나누며 은혜받기 바람니다.
여기서 “필요한 사람”이라는 말은 있으나마나 한 사람이 아니라, “꼭 필요한 사람.`, `효용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꼭 필요한 사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위하여 유용한 사람으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했습니다. 왜 그랬냐 하면,
에바브로디도는 사도 바울을 열심히 부지런히 돕다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병을 고침받았습니다. 고침받은 것은 하나님이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며(27절) 그를 기쁘게 맞으라는 말씀이 26-29절까지 있습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에바브로디도를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라”고 했습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존귀히 여기라 말씀합니다. “존귀히 여기라”는 말은 “하나님처럼 임금님처럼 높이라”는 뜻입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섬기며 사랑을 베푸는 그런 에바브로디도를, 로마 감옥에 갇혀있는 노종 바울의 쓸 것을 돕는 사람, 이런 사람을 기쁨으로 영접하고 이런 사람들을 존귀하게 하나님처럼, 임금님처럼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주님 나라에 기왕이면 꼭 필요한 사람 되시기 바람니다. 기쁨으로 영접할 수 있는 일꾼, 존귀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일꾼들이 되시기 바람니다.
25절에 보면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한 자요, 함께 군사된 자요, 필요를 돕는 자라라 그랬습니다. 디모데와 함께 바울이 그렇게 소개하고 추천하고 보내고 싶어했던 귀한 일군 에바브로디도는 적어도 네 가지 기준을 가진 일꾼이었습니다.
1. 나의 형제된 일꾼입니다.
25절 말씀을 보면,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여기서 먼저 형제라는 말은 피를 나눈, 혈육이라는 말입니다. 한 부모로부터 태어난 피를 나눈 형제를 의미합니다. 두 번째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몸이룬 형제자매를 가리킴니다. 찬송가 ♬ 사랑하는 주님 예수 같은 주로 섬기나니 한 피받아 한 몸이룬 형제여 친구들이여...“
여기서 바울이 에바브로디로를 형제라 말하는 것은 주 안에서 거듭나고 세례받은 사람들끼리 형제요, 자매라 부르는 것으로 이것을 보면 에바브로디도는 진실로 거듭난 일꾼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교회내 부서 부서와 구석구석애서 봉사하는 사람들은 거듭난 사람들, 즉 세례받은 성도들이 봉사하도록 하고, 세례교인들 이상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하여 일하는 이유도 모든 봉사자들이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일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에바브로디도가 주 안에서 거듭난 주안에서 형제된 일꾼이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일하는 일꾼들은 형제의식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 바로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군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형제 자매 사이는 어떤 사이입니까? 그것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오래 전(97.9.11 중앙일보 신문) “퇴임 박만호대법관, 형의 눈물의 뒷바라지” 공개란에 실렸던 이야기입니다. 대법관 출신인 박만호변호사가 대법관 퇴임할 때 여태까지의 관례나 전례에 없이 자기 형님 내외분을 그 자리에 앉혀놓고 그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여태껏 관례가 없던 일을 어떻게 했냐 하면, 대법원장에게 이유를 이야기하니까, 쾌히 승낙했다는 것입니다.
박대법관은 당시 윤관 대법원장에게 형님 퇴임문집에 자신이 기고한 글을 보여주며 "95년 경북 의성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임하신 큰 형님이 아버지나 다름없다"고 특별히 요청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약간 긴장된 목소리로 나직하게 퇴임사를 읊는데, `제가 법조인으로 성장하고 대법관의 자리까지 무사히 마치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형님 덕분입니다.` 형 선호씨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집안의 가장 역할을 대신했는데, 교직생활을 하면서 농사일까지 겸한 형이 자신에게는 아버지와 다름없다며 형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을 표시했습니다. 단상 아래에 앉아 있던 형은 그만 눈시울을 붉혔고, 그들은 잠시 추억에 잠겼습니다.
그가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고교 진학을 포기하려 할 때, 형은 "만호야, 더욱 열심히 공부해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하며 동생의 손을 꼭 잡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육사를 지망했다가 신체검사에서 떨어지고 서울대법대에 낙방한 박대법관은 대구사범과 청주대야간부에 동시 합격했으나 학비가 없어 재도전 끝에 서울대법대에 합격합니다.
그러나 대학 3학년때 지병인 폐결핵이 재발, 절망에 빠집니다. "보리밥도 먹기 힘든 시절이었는데 형은 나에게 매일 쌀밥과 계란을 구해다 줬습니다. 그러나 병이 악화돼 3학년1학기를 마치고 마산의 국립결핵요양소로 가게 됐습니다. 나는 절망에 빠져 '동생 하나 없는 셈치고 편히 사십시오'라고 형님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동시에 함께 결핵을 앓던 둘째 형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냥 죽기가 억울하다는 생각에 견딜 수 없다는 생각에 박대법관은 1년간의 투병 끝에 결핵을 이겨냈고 꾸준히 책을 놓지 않고 노력해 그해 고시 13회에 합격한 뒤 승승장구, 91년 대법관이 됐습니다.
퇴임식을 앞두고 그는 대법원장에게 그런 사연과 함께 형이 꼭 퇴임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해 주면 고맙겠다는 글을 올리자 대법관들은 형님 가족을 초청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퇴임사를 마치고 단상을 내려 온 박 대법관이 형을 끌어안고 뜨거운 포옹을 하자 이를 지켜보던 관계자들은 따뜻한 박수를 보냈습니다. 형제의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알다시피 저도 형님이 위로 둘이고 동생이 아래로 둘이 있지만, 이렇게 하는 것도 어렵고 또는 결혼하여 가정들을 꾸미고 살다보니 이런 문제 때문에 부부지간에 아내를 섭섭하게 있었던 일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돕고 싶은 것이 도움이 되어 잘 되게 하고자 하는 것이 형제자매지간 아님니까? 형제 사랑이란 것이 그런게 아닙니까? 동생 생각만 하면 좋은 것을 해 주고 싶은 것이 형 마음입니다. 동생도 어디 가서 좋은 것이 있으면 형 생각하고 갖고 오는 것이 이것이 형제 사이가 이런 사이입니다.
사도바울이 생각할 때에 에바브로디도는 `자기를 사랑했는데, 어떻게 사랑했느냐?`, 형제처럼 자기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거기엔 이유도 없고, 조건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디모데서에도 있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감옥에 갇힌 이유가 무엇이냐며 떠나가지 않습니까? 욥이 사랑하는 많은 친구들이 욥을 정죄하고 사랑하는 아내까지 그를 떠나가는데, 이 에바브로디도는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법으로 심판하지 않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 가족처럼 찾아와서 오히려 그를 위로해 주고 그를 도와주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군은 형제의 마음을 갖고 교인들을 대하고 그런 사랑의 관계를 갖고 일하는 일군이 진정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군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초대교회는 어떠했습니까? 은혜받고 나니, 가진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위로해 주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 세상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형제의식을 가지고 교인들을 대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안디옥교회가 바로 최초로 바울과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교회가 교인을 서로 맞이하고 관계를 가질 때에 형제의 마음을 갖고 법이나 비판이나 정죄가 아닌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그리스도 안에서 `내 형제 자매`라는 마음을 가질 때 그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고 그 교회는 정말 하나님이 필요한 일군들로 가득 차지 않겠습니까?
잘못 보시겠지만 제가 종종 일산 장모님댁에 가 아침에 나오기전 수요일 아침에 잠깐 보게되는데 잃어버린 부모형제 찾고 나면 부등켜 안고 웁니다. 하염없이 웁니다. 왜 그렇게 웁니까? 혈육의 사랑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형제 사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군은 바로 교인간에 형제의식을 갖고 도울 수 있는 사람이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군이요, 천국시민답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2. 함께 수고하는 일꾼이었습니다.
다음으로는 함께 수고한 자라라, 수고한다는 말은 일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함께 동역하는 동역자로서의 일꾼이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사도 바울이 자신에 대하여 동역자 의식을 가지고 함께 일하고 있는 자라는 그러한 일꾼이었습니다.
이러한 동역자, 함께 일하는 일꾼이란, 교회로 말한다면 교회의 모든 봉사자들을 다 지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일을 해야 합니다. 자리에 앉았다 가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고, 주의 일을 위하여 열심히 동역하는 일군이어야 합니다. 수고를 다합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성격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바나바가 사도바울을 교회에 인정해 주었습니다. 1차 전도여행을 같이 떠나고, 2차 전도여행도 같이 떠났습니다. 바나바는 자기 조카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하자, 사도 바울이 결사 반대하는 것입니다. 마가가 1차 전도 여행때 힘들다고 돌아갔는데, 나는 이런 배신자를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해서, 바나바와 사도 바울이 막역한 사이였음에도 따로 헤어져서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에바브로디도에게 사도 바울이 못마땅할 때가 왜 없었겠습니까? 사도바울의 성격이 대단한데, 그래도 함께 이해하며 존경하며 일했습니다. 성격이나 스타일이 문제 아니고 믿음안에서 함께 일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한국사회나 교회는 너무나 치열한 싸움터 한복판에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살길이 무엇입니까? `누가 옳으냐` 보다 얼마만큼 사랑하느냐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노조나 경영자 노사를 보았을 때 어느 편을 듭니까? 어느 편을 드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정말로 형제 의식을 가진 노동자와 경영자, 서로 일을 하며 함께 수고 할 때에 필요한 일군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나라의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 여당이나 야당이나 모두 함께 일하라고, 나라위해 국민위해 일하라고 뽑은 것입니다. 일은 안하고 정쟁만을 일삼는다면 어떻게 나라가 되겠습니까?
일하는 사람이 어디든 필요합니다. 교회는 일하는 일꾼을 필요로 합니다. 특별히 일만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닌 그리스도안에서 서로 이해하며 마음을 나누며 일하는 그런 일꾼되시기 바람니다.
셋째는 "함께 군사된 일꾼"이었습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꾼은 함께 군사된 일꾼입니다. 군사는 말 그대로 싸움을 위하여 준비된 사람이 군사입니다. 군사는 전쟁에 나가서 싸우는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군사되었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교인들끼리 주의 종들과 싸우라는 것이 아니고, 그 대상은 언제나 세상이고, 하늘과 땅 사이에 공중에 권세 잡은 자 마귀입니다. 나가서 세상과 마귀와 싸우라는 것입니다. ♬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벗은 형제여 담대하게 싸울지라 저기 악한 적병과 심판날과 멸망의 날 그대 섯는 눈앞에 곧 다가 오리라... 누구하고? 마귀들과 싸울지라입니다 .
세상과 마귀들과 나가서 싸우지 않고, 교회 안에서만 싸운다면 안됩니다. 우리는 동역자요, 형제요, 성도요, 같은 기업을 유업으로 받은 하늘나라 시민들입니다. 싸움은 나가서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네가 옳으냐, 내가 옳으냐 싸우는 것은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복음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할 때입니다. 마귀는 마지막 때에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습니다. 그럴 때 누가 필요한가 하면 군사된 영적 일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무장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함께 군사된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주로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을 하고 싸워야 합니다. 그것은 말씀과 기도와 찬양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마귀와 싸워야 할 그러한 시점에서 사도 바울을 혼자 나가 싸우게 하지 않고 담임목사 혼자 나가 싸우게 하지 않고 함께 나가 말씀보고 기도하고 찬양할 수 있는 그러한 일꾼! 그렇게 나가 싸울 줄 아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에바브로디도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꾼들 다 되시기 바람니다. 찬송가 387장, ♬ 다른 사람 어찌든지 나 주님의 군사되어 나는 주의 군사되어 충성을 맹세하여 내가 승리하기까지 주은혜로 싸우리 주의 용사된 나에게 주의 일 맡기소서....
넷째는 그는 "쓸 것을 돕는 일꾼"이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바울이 사역하다 지치면 그들 위해 기도하고 격려하며 쉬게 해주는 일꾼도 필요했고, 육체를 위하여 쓸 것을 물질로 돕는 그런 일꾼이 필요했는데 그렇게 구체적으로 사도 바울을 물질로 도왔던 일꾼이 누구였는가 하면 에바브로디도였다는 것입니다.
본문 30절을 보면,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노종 바울이 쓸 것을 돕는 자라는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목숨까지 바쳐가며 다른 사람들의 부족함을 채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꾼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이나 교인들이나 주의 종들이 부족하다고 비판하고 정죄한 것이 아니고 부족함을 오히려 채워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교회에 필요한 사람이고 이런 일꾼을 존귀히 여기고 이런 사람을 기쁨으로 환영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가 사회가,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합니까? 구석구석 하나하나가 성한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정치나 경제나 교육이나 기업이나 제대로 안된다는 것은 꼭 필요한 것을 돕는 사람이 없거나 적기 때문입니다. 비판자들만 난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군은 어떤 사람입니까?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군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런 사람은 도와주는 사람인데, 부족함을 채우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에바브로디도를 평가할 때에 `너희 교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다.` 어떻게 도왔는가 할 때에 부족함을 도왔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꾼들은 말로만 때우지만 에바브로디도는 말로 때우지 않았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25절의 결론 말씀처럼 네 가지로 도왔잖습니까? 형제로, 함께 수고하는 일꾼으로, 함께 군사된 자로, 쓸 것을 돕는 자로 도왔다 말씀합니다. 적어도 교회의 일군은 이 네 가지 기준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자세로 교회와 복음의 종들을 도울 때에 교회에 꼭 필요한 일꾼입니다. 이런 사람이 교회 일꾼이 되어야 하고 이런 사람들을 세워 일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복이요 자신도 영광이요 잘되고 잘되는 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기둥같은 일꾼을 선출하면서 모두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일꾼들 다 되시기 바람니다. 그리고 이런 일꾼들을 세워 좋은 일꾼들 다 되되 서로 형제의 마음을 가지고 함께 이해하고,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되어서 세상과 마귀사탄과 싸워 이기고 하나님의 사명자로 능력있는 교회의 좋은 일군들이 다 되어서 하나님앞에 참으로 인정받는 여러분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바브로디도의 신앙모범
빌 2:25-30 / 피종진 목사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가 보내는 헌금을 로마에 있는 바울에게 전달하고 또한 바울을 돕도록 하기 위해 파송된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는 불행히도 로마에서 병이 듦으로서 그 자신은 물론 빌립보 교회와 바울에게까지 큰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의 은혜로 에바브로디도가 치유되자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로 돌려보내어, 그가 에바브로디도의 치유로 받은 위로를 빌립보 교인들도 받게 하고자, 에바브로디도의 귀환을 알리면서 빌립보 교인들이 그를 기쁨으로 영접해주기를 당부했습니다. 그러면 이 에바브로디도는 어떠한 신앙의 모범을 보였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일에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25절) 우리는 사람에게도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만, 하나님께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져야 합니다. 이 에바브로디도는 하나님의 일에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보면 있어서 안될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히틀러 같은 사람은 600만명의 이스라엘인을 학살한 대살인범이었습니다. 또 세계무역센타를 강타한 이런 테러단들과 같은 극악무도한 이런 사람들은 이 땅에 절대 있어서는 안됩니다. 히틀러, 무솔린, 스탈린 등 많은 이 땅에 악명 높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니체 같은 사람은 하나님은 죽었다고 하면서 대항하다가 미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세계 인류에 많은 유익을 준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죤 웨슬레, 죤 칼빈 같은 분, 스펄젼 같은 분, 딩컨 제임스 같은 분들, 그리고 인간의 삶을 유익하게 해준 발명가 에디슨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들, 또 슈바이처 같은 이런 인물들, 이름만 들어도 고개가 숙여지고 존경스럽고 은혜가 되는 이런 인물들도 많이 있습니다. 21C의 주역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잘했다 칭찬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4:10에 보면 사도 바울이 선교사요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가장 가슴 아픈 말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바울과 함께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고락을 같이 하며 함께 사역했던 데마가 세상의 미혹을 받아 하나님의 일에 싫증을 느끼고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함께 사역하던 네 사람이 있었는데 이제 '누가' 한 사람만 남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1)고 했습니다. 이러한 말을 들을 수 있었던 마가는 얼마나 훌륭한 사람입니까? 이 세상에서 필요로 해서 많은 곳에 초청을 받고 쓰임을 받는 것도 귀하지만 하나님의 일에 필요한 사람이 되어 쓰임 받는 것은 더 귀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람 바울의 쓸 것을 공급해준 자였습니다.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25절)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에 빌립보 교회를 대표해서 옥중에 찾아가서 그의 모든 일들을 뒷바라지 해주었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바울은 구걸하고 도움 받기를 좋아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 당시에 최고의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였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어디에 가도 큰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미국의 청교도들이 세운 하바드대학, 예일대학이 이제는 세계에서 유명한 종합대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도 바울은 이보다 더 높은 학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세계사람들이 존경하는 그러한 인테리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에바브로디도가 그의 사역에 쓸 것을 공급해준 일에 대해서 너무 감사하여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고 그를 칭찬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주님을 위해서 몸을 바쳐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기를 기뻐해야 됩니다. 또 스스로가 주의 일 하는 사람 돕기를 기뻐해야 됩니다. 이것은 둘 다 같이 축복을 받을 일입니다. 이 세상의 일 중에 가장 귀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든지 필요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상은 남을 죽이고 내가 살려고 하는 세상이지만 우리는 남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희생을 하고, 남을 높여주기 위해서 내가 낮아지고, 남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수치를 당하고,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삶을 산다면 절대로 패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높여주시고 크게 쓰시며,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줄로 믿습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을 다한 자였습니다.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30절) 에바브로디도는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죽기까지 그리스도를 위한 일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시간을 내놓는 것도 귀하고, 또 자기 재물을 내놓는 것도 귀하고, 자기 명예를 내놓는 것도 귀합니다. 그런데 더 귀한 것은 목숨을 내놓는 것같이 귀한 일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위해서 생명을 내놓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 사역에 큰 능력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충성을 하되 죽도록 충성하라(계 2:10)고 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비겁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생명을 바칠 수 있다면 어떠한 핍박과 환난이 있더라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를 움직인 사람들은 다 하나님 앞에 자기 목숨을 바치고 산 사람들입니다.
저는 하와이의 몰로카 섬을 보면 많은 감동을 받습니다. 제가 학생 때에 따미엔의 글을 읽는 중에 이 분의 글을 읽다가 굉장히 감동을 받았습니다. 몰로카 섬은 나환자들만 그 당시에 800명이 거주한 곳인데 지금같이 무슨 왕래를 할 수 있는 곳도 아니고, 한 번 들어가면 평생 그곳에 머물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곳이기 때문에 누가 선뜻 선교를 나설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따미엔이 나섰습니다. 그는 800명의 영혼을 위하여 이 땅에 태어난 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깨닫고 그들 속에 나환자들과 같이 하며 같이 먹고 같이 위로해주고 같이 정을 나누고 그들의 삶을 돌봐주면서 거기에서 희생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기록에 보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800명 모두 다 구원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그리고 마지막 인생은 한 번 왔다가 가기 때문에 그도 주님 부르실 날이 다가왔을 때 그 나환자들이 둘러앉아서 통곡하면서 울고 그 사랑의 정과 또 희생정신과 그 복음을 심어준 은혜에 감사해서 울 때에 이 따미엔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나를 부르셔서 내가 숨이 지거든 당신들을 위하여 내가 기도하던 저 해변가 빠빠야 나무 밑에 나를 조용히 묻어주시오. 그리고 천국에서 만납시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왔다가 가는데 그 당시에 향락 쾌락을 누리고 먹고 마시며 사치하고 살던 사람도 갔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 헌신하고 충성한 분도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는데 반짝 지나는 세상, 그 분들은 무엇하다가 하나님 앞에 섰느냐에 따라서 하늘의 상과 심판이 좌우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남은 삶을 주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다가 가기를 원합니다. 인생은 잠시 왔다가 가는 나그네에 불과합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는 이러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넷째, 하나님의 교회를 염려하면서 산 자였습니다.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26,27절) 에바브로디도는 자신의 몸보다 교회를 먼저 걱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병든 것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질까봐, 하나님의 교회에 덕을 끼치지 못할까봐 매우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보다도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더욱 사랑한 자였습니다.
우리의 삶 자체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예수 안 믿는 사람이 그것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면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의 삶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의 참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 중심으로 사는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보다 하나님의 교회를 먼저 생각하며 사는 자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에바브로디도에게 주신 축복은 ①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살려주셨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자기 몸이 약한 것 때문에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할까봐 염려한 것을 볼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 병까지도 고쳐주셨다고 했습니다. ②존귀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29절)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를 존귀하게 대접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처럼 이 귀한 신앙을 가지고 신앙에 모범된 자가 되어서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사람에게는 덕을 끼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