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오시면 바로 내기 위해 화려한 외양·우아한 맛, 당근정과와 약과·식혜 일년 내내 준비
“전남 담양에 300년 넘은 종가를 지키는 손맛 좋은 종부가 있다네요.
장으로 식품명인까지 됐다고 하니 그 음식이 정말 궁금해요.”
장맛과 손맛 좋기로 유명한 종부를 알아냈다며 빨리 그 종가로 가보자고 강레오 셰프가 재촉한다.
담양군 창평면에 있는 장흥 고씨 종가다. 음식맛 좋기로 유명한 전라도에서 300년 넘게 대를 이어온 종가이니, 종부의 손맛이야 의심의 여지가 없을 터. 생각만으로도 혀 밑에 침이 고이니, 담양으로 향하는 발길이 급하다.
한걸음에 달려간 종가에서 만난 이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장흥 고씨 10대 종부 기순도 명인(69)이다. 종부는 집안 내림음식인 간장으로 2008년 대한민국 식품명인에 지정되면서 종부보다 명인으로 더 자주 불린다.
“우리 집 음식이 궁금해서 오셨다고요. 장 말고 어떤 음식 이야기를 해드릴까요?”
집 안으로 들어선 강 셰프 앞에 소담하게 담은 정과와 식혜를 내놓으며 종부가 묻는다.
“이건 당근인가요? 당근으로도 정과를 만드신 거예요?”
손님상에 올리는 당근정과
종부가 낸 다과상에서 못 보던 음식이 눈에 띄자 강 셰프가 질문을 쏟아냈다. 익숙한 반응이라는 듯 종부가 조근조근 설명을 시작했다.
“네, 당근정과예요. 손님이 오시면 대접하기 위해 만들어두는 음식이죠. 다른 종가도 다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집에는 일년 열두달 손님이 끊이지 않거든요. 그래서 정과며 약과·식혜 같은 음식을 일년 내내 준비해두죠.”
정과는 주로 도라지나 당근·박 같은 채소로 만든다. 엿기름을 고아 조청을 만들 때 먹기 좋게 자른 생당근이나 말린 도라지 등 원하는 재료를 함께 넣고 고면 된다고, 종부는 ‘간단하게’ 말한다. 차종손(次宗孫)인 고훈국씨(45)도 “어머니께서 정과를 새벽에 혼자 뚝딱 만드신다”고 말할 정도. 하지만 방법이 단순하다고 만드는 과정도 단순한 것은 아니다. 조청은 불에 쉬이 타는 만큼 정과를 만드는 동안 쉬지 않고 저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도 종부는 해 뜨는 시각에 일어나 두시간 넘게 조청을 저어가며 정과를 만들었다.
조청 옷을 입어 주황빛으로 반짝이는 당근정과는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을 만큼 화려했다. 맛도 색만큼 화려할까. 호기심을 안고 한입 깨어 물자 부드럽게 씹히는 식감과 달콤한 조청의 향이 어우러지는 게, 화려하기보다는 모난 데 없이 우아한 맛이다. 무엇보다 당근 특유의 향이 진하지 않아 먹기에 부담이 없다. “당근 싫어하는 아이들도 당근정과는 좋아한다”는 종부의 설명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젓갈 없이 담근 간장김치
장으로 식품명인이 된 만큼 종부는 음식 대부분을 장으로 간한다. 소금은 간만 맞춰주지만 장은 그 특유의 향으로 음식에 깊은 맛까지 더해주기 때문이다. 간장이 좋으면 심지어 육수를 따로 내지 않고도 맛있는 국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종부의 설명이다.
“물론 간장만 맛있다고 음식이 다 맛있는 것은 아니에요. 좋은 재료가 필요하죠. 재료가 신선하고 간장이 좋으면 다른 부재료 없이도 충분히 맛있답니다.”
그래서 종부의 음식은 대부분 그 조리법이 단순하다. 신선하고 좋은 재료를 충분히 사용하고, 간은 간장으로, 부재료는 가능한 한 적게 사용하는 것이다. 조기를 구울 때도 양념장을 따로 하지 않고 간장과 참기름만 발라서 굽고, 찌개를 끓일 때도 육수를 따로 내지 않고 간장으로 간하고, 살짝 구운 절편도 간장에 찍어 먹는다. 심지어 김장김치도 젓갈 없이 간장으로 간해서 담근다.
“김장뿐 아니라 저희 집 김치는 모두 젓갈 없이 간장으로만 간해서 담가요. 집안 식구들이 젓갈을 좋아하지 않기도 하지만 간장만으로 간을 해도 충분히 깊고 풍부한 맛이 나는 김치가 되거든요.”
간장김치 담그는 법은 간단하다. 일반 김치 담그는 법과 다를 바가 거의 없다. 배추를 소금에 절여 물기를 뺀 뒤 고춧가루와 다진마늘을 섞어 만든 양념에 무치면 완성이다. 다만 일반 김치는 양념의 간을 젓갈로 하는 데 비해 종부의 김치에는 젓갈 대신 간장을 사용한다는 점만 다르다. 젓갈 없이 담근 김치가 깊은 맛이 날까? 의심스러운 것도 잠시, 지난가을 종부가 담근 김장김치 한쪽을 입에 넣는 순간 아삭하면서 새콤하고, 시원하면서 깊은 감칠맛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아, 이것이 바로 좋은 간장의 힘이구나.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담양=이상희, 사진=김덕영 기자
기순도 종부의 손맛
상큼한 국물맛 ‘상추물김치’
여름이면 종부가 흔하게 해먹는 음식 중 하나가 상추물김치다. 다 자라 꽃대가 올라온 상추를 꽃대째 꺾어서 적당한 크기로 자른 뒤 방망이로 두드려 부드럽게 만든다. 상추 꽃대를 소금에 절인 뒤 적당량의 물을 붓고 찹쌀이나 밀가루로 쑨 풀을 섞어준다. 간장으로 간을 하면 완성이다. 적상추로 물김치를 담그면 국물이 보랏빛을 띤다.
하루 이틀 숙성시켜 먹으면 시원하고 상큼한 국물맛이 더위를 잊게 해준다.
도전! 강레오 셰프의 종가음식
깔끔하고 시원한 ‘우엉찌개’
강 셰프는 종부의 음식 중 우엉찌개에 도전하기로 했다. 우엉을 삶아서 부드럽게 만든 뒤 먹기 좋은 크기로 얇게 썬다. 호박·두부·바지락·새우살 등을 냄비에 담고 우엉을 넣은 후 물을 붓고 끓이다가, 마늘과 들깻가루를 넣고 마지막에 간장으로 간한다. 간장은 기순도 종부가 담근 장을 사용했다.
자극적이지 않고 깔끔한 데다 시원한 국물맛이 일품이다.
장흥 고씨 양진재 종가는
조선 선조 때 문인 고경명의 후손
전남 담양군 창평면 일대에 모여 사는 장흥 고씨는 조선시대 선조 때 문인 고경명의 후손들이다. 기순도 종부는 고경명의 4대 후손 양진재(養眞齋) 고세태의 10대손이다. 후손들은 360년 된 고택 근처에 한옥을 짓고 장류사업을 하며 종가를 지키고 있다.
첫댓글 ㅋㅋ 저 장흥 고씨 입니당. 장은 전혀 담그지 못하는^^;;;
종부로 태어났다면 분명 잘했을 겁니다.ㅋ 근데 종부가 되면 정말 힘들 것 같아요. 종부는 하늘이 내리는 숙명 같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