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0년 8월 29일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은 양국뿐 아니라 중국·러시아·영국·미국 등 강대국들의 대결과 협력 속에서 진행됐다. 당시 열강은 어떤 타산과 외교적 구상에서 움직였고, 조선은 과연 이에 적절하게 대응했는가. 우리는 치열하고도 냉정했던 합종연횡(合從連衡)의 역사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강제병합으로 가는 첫 단추가 끼워진 시모노세키 조약부터 영일동맹, 포츠머스 조약,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강제병합 늑약까지 조선의 운명을 좌우한 국제정치의 현장을 찾아 100년 전 한반도를 둘러싼 급박했던 상황을 재구성한다.
1895년 3월 20일 청일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해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한 청국 북양대신(北洋大臣) 리훙장(李鴻章)은 나흘 뒤 숙소인 정토종 사찰 인죠지(引接寺) 부근에서 일본 청년에게 총격을 당했다. 왼쪽 눈 바로 1㎝ 아래에 상처를 입은 그는 황급히 피신해서 긴급 수술을 받았다. 간신히 몸을 추스른 리훙장은 숙소에서 강화회담 장소인 고급음식점 '슌판로(春帆樓)'까지 언덕길을 오가며 회담 타결에 매달렸다.
450년 역사를 지닌 인죠지는 조선통신사도 머물렀던 대사찰이다. 지난 12일 시모노세키 조약의 현장을 찾은 기자는 오카자키 에도(岡崎英道) 인죠지 주지를 만났다. 그는 "리훙장이 탄 가마가 무거워 들어올 때 가마꾼들이 휘청거렸다는 이야기가 당시 이곳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통해 전해 내려온다"고 말했다. 슌판로는 새로 지어진 건물에서 지금도 영업 중이지만, 시모노세키 조약의 자취는 남아 있지 않았다. 인죠지와 슌판로 사이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 어려울 정도로 좁은 언덕길은 느린 걸음으로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고, 지금은 '리코쇼도(李鴻章道)'라고 불린다.
일본이 시모노세키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슌판로를 강화회담장으로 택한 것은 전략적인 것이었다. 이곳을 안내한 기무라 겐지(木村健二) 시모노세키시립대 교수는 "강화회담의 일본측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일본 군함을 바다에 늘어놓고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이곳을 골랐다"고 설명했다.
청국의 실력자 리훙장이 강화회담을 위해 일본에 왔다는 것은 지난 10년 동안 일어난 두 나라의 위상 역전을 잘 말해준다. 1885년 실패로 끝난 갑신정변의 뒤처리를 위해 톈진조약을 맺을 당시 리훙장은 일본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를 중국으로 불렀다. 그러나 이번에는 리훙장이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러 바다를 건너야 했다.
그만큼 청국의 사정은 다급했다. 1894년 7월 20일 충남 아산만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 해군이 청국 함대를 기습하면서 시작된 청일전쟁은 이듬해 3월 중순 일본의 완전한 승리로 마무리됐다. 일본군은 청국 수도 베이징을 위협할 수 있는 보하이 만과 츠리 해협을 장악한 데 이어 랴오둥 반도까지 점령했다.
일본은 4월 17일까지 계속된 강화회담에서 조선의 독립, 랴오둥 반도·타이완·펑후 열도 할양, 배상금 2억냥 등의 요구를 관철시켰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흑선(黑船)'을 이끌고 와서 일본을 강제개국시킨 지 불과 40여년 뒤에 서양 여러 나라와 맞먹는 나라로 탈바꿈한 것이다.
일본이 불과 한 세대 만에 서양식 근대화에 성공하고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한 힘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국정을 개혁하고 서양식 문물제도를 적극 수용한 데서 나왔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정신적 뿌리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이라는 선각자였다. 그는 야마구치현 하기(萩)시에 쇼카손주쿠(松下村塾)라는 학당을 세웠고,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등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이 그곳에서 배웠다.
하기는 시모노세키에서 지방선 기차를 두 번 갈아타고 네 시간을 넘게 달려가야 하는 외진 곳에 있었다. 13일 도착한 하기 도심 곳곳에는 '유신의 고향' '일본 근대화가 시작된 땅' 등의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요시다 쇼인을 모신 쇼인신사는 폭우에도 단체 관람객을 비롯한 많은 일본인이 참배하고 있었다. 인구 5만명의 작은 시골도시인 하기와 인근 지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부터 간 나오토(菅直人) 현 총리까지 9명의 총리가 배출됐다. 지난해 요시다 쇼인 150주기를 기념해 새로 지은 지성관(至誠館)의 곤도 다카히코(近藤隆彦) 관장은 "하기가 일본의 근대화를 주도한 것은 쇼인 선생이 신분과 관계없이 제자들을 받아들이고 교육의 폭과 수준을 높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선 정부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반겼다. 조약 제1조가 '조선이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한다'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은 1885년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조선에 파견해 내정과 외교에 간섭하고, 종래 명목적이던 종속관계를 실질적인 속국관계로 전환하려 한 청국의 전횡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조선 정부는 청국 사신을 맞이하던 서울 서대문 밖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청국에 대한 복종을 상징하는 삼전도비(三田渡碑)를 쓰러뜨렸다. 병자호란 때 자결한 김상용의 후손인 김가진은 "이제야 여러 왕대에 걸쳐 당한 굴욕을 씻고 사사로운 원수도 갚게 됐으니, 개화의 이익이 어떠한가"라고 했다.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확인한 것은 일본 입장에서는 조선을 청국의 세력권에서 떼어내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첫 번째 수순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 정부는 이런 위험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총리대신 김홍집과 군무대신 조희연은 "일본이 청국과 전쟁을 시작한 것은 우리의 고유한 독립권을 인정하여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라며 "일본 군사가 바다와 육지에서 크게 이기는 공로를 이룩했으니 특별히 칙사를 파견하자"고 건의했다.
조선 정부가 이렇게 오판한 원인은 슌판로 앞에 1937년 만들어진 일청강화기념관(日淸講和紀念館)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건물 옆에 이토 히로부미와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의 흉상을 세워 놓은 기념관에 들어서자 강화회담 당시 양국 대표가 앉았던 탁자와 의자를 이름표와 함께 재현해 놓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조선 땅에서 벌어진 전쟁의 마무리를 위한 것이었고, 조선의 운명을 좌우하는 회담이었지만 조선 대표나 관계자의 이름은 없었다. 이렇듯 격변하는 국제 정세와 일본의 의도를 읽지 못한 조선은 결국 이후 열강들이 벌이는 파워 게임 속에서 이리저리 휩쓸리고 말았다.
조선일보·동북아역사재단 공동기획
1902년 새해 첫날, 네 차례나 일본 총리를 지낸 노정객 이토 히로부미가 하야시 다다스(林董) 주영일본공사와 함께 헨리 랜스다운 영국 외무장관 사저(私邸)인 보우드 하우스를 찾았다. 이토는 당시 러시아와 동맹을 논의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한 직후였다. 다음 날 오전 10시, 이토는 랜스다운 외무장관에게 말했다. "이중 플레이를 할 생각은 없다. 우리는 러시아와 동맹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런던 패딩턴역에서 기차로 1시간15분 거리인 영국 서남부 윌트셔(Wiltshire) 카운티의 작은 마을 칸(Calne). 나지막한 언덕과 숲에 둘러싸인 보우드 호텔 1층 대기실엔 진홍빛 가운을 걸친 헨리 랜스다운(Lansdowne·1845~1927) 외무장관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의 증손자인 찰스 랜스다운(69) 경은 "1959년 인도 대통령이 보내줬다"고 했다. 헨리 랜스다운은 외무장관이 되기 전 캐나다와 인도 총독을 거쳤다. 호텔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 보우드 하우스로 자리를 옮겼다. "이토 히로부미가 남긴 서명이 보입니까. 그 밑에는 하야시 다다스 이름도 있네요." 랜스다운 경은 100년 전 낡은 방명록을 펼쳐보였다. "연초 휴가 시즌에 기자들이 없는 곳에서, 단 둘이 얼굴을 맞대고 개인적 신뢰를 쌓아가는 게 진짜 외교 아닌가요." 그는 영·일동맹의 조인자인 랜스다운 장관과 하야시 공사의 사진을 나란히 싣고, "영·일동맹은 영국 정부의 가장 커다란 업적"이라고 보도한 당시 영국 신문 스크랩을 건네줬다.
이중 플레이를 한 적이 없다는 이토의 말은 거짓이었다. 러시아에서 니콜라이 2세와 람스도르프 외무장관을 먼저 만나 협상을 벌인 이토의 행적을 알고 있던 랜스다운 외상도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친러파'였던 이토도 이 무렵에는 영국과 동맹을 맺는 쪽으로 돌아서 있었다. 가쓰라 다로 총리와 고무라 주타로 외상, 하야시 다다스 주영일본공사가 추진한 영·일동맹에 메이지 일왕이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었다.
런던 도심 그린 파크 근처 랜스다운 하우스. 랜스다운 외무장관의 런던 거처가 있던 이곳은 1935년부터 프라이빗 멤버십 클럽으로 사용되고 있다. 클럽 안 '라운드 룸'의 벽에는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제퍼슨 등 미국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보낸 편지와 초상화가 보였다. 직원 앨리슨 굴레이(Gourlay)씨는 "1782년 당시 영국 총리였던 1대 랜스다운 경이 이 방에서 벤저민 프랭클린과 함께 미국과의 강화조약을 기초했다"고 말했다. 1902년 1월 30일 랜스다운 하우스에선 세계를 놀라게 할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다. 대영제국의 랜스다운 외무장관과 아시아의 작은 나라 일본의 하야시 주영공사가 동맹을 체결하는 조약에 서명한 것이다.
일본은 당시 세계 1등 국가인 영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단번에 서구 열강과 같은 지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그 희생양은 조선이었다. 영·일동맹은 서구 열강이 한반도에서 일본의 우월한 지위를 인정한 첫 번째 조약이었다.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경우 영국이 군사적 지원을 제공할 길도 열어놓았다.
영·일동맹은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확보한 전리품인 요동반도를 러시아가 주도하고 독일과 프랑스가 가세한 삼국간섭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일본이 절치부심 끝에 따낸 외교적 승리였다. 1만4000명 가까운 사망자를 내면서 요동반도를 품 안에 넣었다가 빼앗긴 일본은 서구 열강과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나 그 방법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렸다. 이토가 만주는 러시아, 한반도는 일본이 나눠 먹는 '만한(滿韓) 교환론'을 내세운 데 반해, 가쓰라와 고무라는 조선은 물론 만주도 일본에 필요하다며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영국과 손을 잡자고 주장했다. 1901년 여름부터 일본 정부의 지시를 받은 하야시 주영공사는 랜스다운 하우스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일본이 러시아와 제휴할 것이라는 암시를 주면, 영국은 자극을 받아서 일본과 협정 체결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하야시는 비밀회고록에서 일본이 이중 플레이를 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영·일동맹이 조선의 운명에 미칠 영향을 주시했다. 장지연·박은식이 이끌던 황성신문 1902년 2월 21일자 논설은 '조선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약속한다'는 영·일동맹 전문(前文)의 진의에 의문을 제기했다. "일본이 조선에 대해 독립주권과 강토보전의 평화질서를 유지한다 함은, 외적으로 보면 이웃나라의 호의에서 나온 것도 같고, 무시무시한 정략(政略)을 포함한 것도 같은지라."
그러나 당시 조선의 집권층은 영·일동맹을 빚어낸 국제질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조선의 주권수호 외교를 도왔던 헐버트 박사는 '대한제국멸망사'에서 영·일동맹을 촉진한 요인 중 하나로 대한제국의 외교정책을 지목했다. 1900년 3월 체결된 한·러 거제도 비밀협약 등 조선이 급격하게 러시아로 기운 것이 영국 등 서구 열강의 경계심을 촉발시켰다는 것이다. 국제정치학자 이삼성 한림대 교수도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의 친(親)러시아 노선이 치명적이었다고 말한다. "삼국간섭 이후 만주를 중심으로 북중국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러시아는 일본뿐 아니라 영국과 미국의 경계심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러시아를 끌어들인 조선의 결정은 영국과 미국 등 대서양 세계가 주도하는 국제사회가 한반도에서 러시아 견제를 위해 일본 지배권의 확장을 지원하고 승인하도록 재촉했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힘겨루기하던 당시 국제 정세를 읽지 못하고, 제때 힘도 기르지 못했던 조선은 세계 최강국 영국과 손을 잡고 조선을 압박하는 일본의 행보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영·일동맹 조약 〈요지〉
제1조: 양국은 청나라와 한국의 독립을 서로 승인했다. 영국은 청나라에서, 일본은 청나라와 한국에서 정치·상업상 각별한 이익을 가지고 있고, 그 이익을 침해당하면 필요불가결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제2조: 어느 한 쪽이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제3국과 전쟁을 개시하는 때에 다른 한쪽은 엄정중립을 지키고, 다른 나라가 동맹국에 대한 교전에 가담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제3조: 상기 경우에 다른 나라가 동맹국에 대해 교전에 가담하는 때에 다른 한쪽은 동맹국을 원조하고 교전에 가담해야 한다.
제6조: 본 협약은 5년간 효력을 가진다.
조선일보·동북아역사재단 공동기획
"실크해트를 쓰고 턱시도를 입은 일본과 러시아 대표단이 각각 부두에서 내려 200m쯤 이 길로 걸어와서 평화빌딩으로 들어왔습니다."
지난달 21일 오전 미국 뉴햄프셔주의 휴양지 겸 군사도시인 포츠머스 해군조선소(Naval Shipyard) 안 평화빌딩 앞. 공보관 게리 힐데스(Hildeth·53)씨가 바다 쪽을 가리켰다. 3층짜리 붉은 벽돌색 평화빌딩 정면에 박힌 동판은 그날의 역사를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이 건물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초청에 따라 러시아와 일본 대표단의 평화협상이 열렸고, 1905년 9월 5일 오후 3시 47분, 두 나라의 전쟁을 끝내는 포츠머스조약이 조인됐다.'
1905년 8월 8일, 행정구역으로는 메인주 키터리(Kittery)에 속하는 해군조선소에 양국 대표단이 몰려들었다. 일본의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과 다카히라 고고로 주미일본대사, 그리고 재무장관을 지낸 러시아의 세르게이 비테와 로젠 주미러시아대사가 수행원들과 함께 왔다. 한 달간의 '회의실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왜 포츠머스였을까. 힐데스씨는 "포츠머스가 군(軍)시설이기 때문에 안전이 확보되면서 언론을 피할 수 있고, 비교적 쾌적한 날씨 속에서 강화를 논의할 수 있어서"라고 말했다. 해군 차관보를 지낸 루스벨트 대통령이 직접 포츠머스 해군조선소를 골랐다는 것이다.
평화빌딩 1층 입구 벽에는 그날의 풍경을 전하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빌딩 앞에 늘어선 대표단의 마차 행렬과 포츠머스 시가를 가로지르는 러·일 대표단의 행렬을 환영하는 시민들…. 2층엔 일본측 수행원들이 쓰던 방 두 칸을 터서 포츠머스 회담 전시실을 만들었다. 루스벨트, 고무라, 비테의 사진과 함께 대표단 도착을 알리는 '포츠머스 타임스' 신문 1면 기사와 회담 모습을 담은 사진, 평화빌딩을 담은 기념부채와 엽서도 눈에 띄었다.
'평화! 이 말 한마디가 포츠머스를 감전시키고,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러시아와 일본은 강화조건에 동의했고, 전쟁은 끝날 것이다.' 누렇게 빛바랜 105년 전 포츠머스 헤럴드 신문 1면에는 '평화(Peace)'라는 제목이 주먹만한 활자로 찍혔다.
인구 2만1000명의 소도시 포츠머스는 시내 전체가 포츠머스 회담 유적지다. 포츠머스 회담 대표단에게 숙소를 무료로 제공한 웬트워스 바이 더 시 호텔, 지금은 콘도와 레스토랑으로 바뀐 기자단 숙소 록킹햄 호텔,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해군조선소 평화빌딩 대신 일반 관람객을 위한 '포츠머스조약 특별전'을 여는 존 폴 존스 하우스, 평화조약 성사를 위한 예배를 드렸던 노스 처치…. 105년 전 회담 당시의 건물들은 대부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미국 독립전쟁 유적을 소개하는 보스턴의 프리덤 트레일(Freedom Trail)을 본떠, 포츠머스조약 트레일까지 만들었다.
포츠머스의 학교와 교회는 매년 9월 5일 오후 3시 47분이면, 해군조선소의 경적 소리에 맞춰 10분간 종을 울려 포츠머스조약을 기념한다. 포츠머스회담 이래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이다. 뉴햄프셔주는 올해부터 9월 5일을 '포츠머스조약의 날'로 선포하고 주(州) 차원의 기념행사를 가질 만큼, '포츠머스조약'에 공을 들이고 있다.
일본과 러시아는 회담 초반부터 충돌했다. 고무라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보호권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비테는 그럴 경우 러시아의 이익이 손상될 수 있다며 반대했지만 일본의 완강한 태도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포츠머스조약 2조에서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군사·경제상 특별한 지위를 갖는 것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 일본이 한국을 지도·보호할 수 있는 권리까지 허용했다. 회담 막바지까지 갈등을 벌인 것은 배상금과 사할린 할양 문제였다. 고무라는 비테에게 "배상금을 포기하면 사할린 남부 할양을 받아들이겠는가"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러시아는 마지못해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뉴욕 JFK 국제공항에서 동북쪽으로 60㎞ 거리에 있는 롱아일랜드 오이스터 베이의 국립공원 사가모어 힐에는 포츠머스조약의 산파였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재임 1902~1909년)의 사저(私邸)와 박물관이 있다. 루스벨트는 여름철은 이곳에서 정무를 처리했기 때문에 '여름 백악관'(Summer White House)으로 불린 곳이다. 루스벨트 사저에서 20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루스벨트 박물관에는 메이지 일왕이 선물한 일본도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준 은제 포도주병이 나란히 전시돼 있다.
루스벨트는 포츠머스조약을 막후에서 조율한 지휘자였다. 포츠머스로 향하는 러·일 대표단을 오이스터 베이에서 먼저 만나 중재에 나섰고, 회담이 난항에 부딪혔을 때는 하버드대 동기생인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郞) 일본특사와 로젠 주미러시아대사를 만나 막후조정에 나섰다. 루스벨트는 포츠머스조약을 성사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1906년 미국인으로는 처음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루스벨트의 사가모어 힐 사저 1층 노스 룸(North Room)에 걸린 지름 30㎝가량의 태극무늬 금속제 접시 한 점은 독립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치던 구한말(舊韓末) 외교의 현장을 증언하고 있다. 자원봉사자 밀튼 엘리스(Elis)씨는 "1905년 사가모어 힐을 방문한 이승만이 전달한 고종의 선물"이라고 했다. 고종의 측근 민영환·한규설의 요청에 따라 미국에 온 이승만은 1905년 8월 4일 루스벨트를 만나 "조미통상수호조약에 따라 포츠머스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하와이 교민들의 청원서를 전달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7월 27일 일본을 방문한 태프트 국무장관 대리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종주권을 인정하기로 가쓰라 총리와 맺은 밀약을 승인한 뒤였다.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 보름쯤 뒤인 그해 8월 12일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도·보호권을 승인받았다. 1902년 1월 제1차 영일동맹 당시, 형식적으로나마 남겨둔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보장한다'는 구절은 제2차 영일동맹에선 사라졌다. 포츠머스회담은 일본이 당시 세계를 주도하던 영국과 미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뒤, 러시아를 상대로 벌인 마무리 외교였던 셈이다.
|